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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그 모습에서 무엇을 느꼈는지 주변에 있던 노예들의 수레에서 일제히 함성이 사라져 침묵이 번져갔다. 그런 변화에도 별 감흥이 없는 얼굴로 뒤를 돌아본 진은 한쪽 옆구리를 애써 손으로 틀어막은 채 자신을 향하고 있는 검은 망토의 사내를 보았다.
“죽을 것 같나?”
“……그 정도는 아니오.”
“그대로 있으면 죽을 텐데.”
아무렇지 않게 말하자 그는 나머지 한 손에 쥐고 있던 단검을 품에 넣고 그 손으로 후드를 뒤로 젖혀 얼굴을 드러냈다.
“…….”
역시나 사내였다.
그리 특이한 점 없는 갈색 머리의 평범한 인상이었지만 그 두 눈에서 느껴지는 깊은 살기에 진은 그가 자신을 해할 생각을 품고 있는 게 아니라, 너무나 많은 살행으로 인해 몸에 살기가 배어버린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약은 있나?”
사내는 대략 스물 중반 정도의 나이로 보였다.
진의 물음에 사내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후일은 생각하지 않았소.”
“후일을 안 생각하면 뭘 바란 건데?”
그렇게 묻던 진은 쥐고 있던 검으로 옆에 있던 수레의 휘장을 휙 걷어냈다.
“음?”
“…….”
그 안에 있는 것은 값비싼 호사품도, 눈이 튀어나올 미녀도 아니었다.
“누구냐, 넌.”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이 혼자 웅크리고 앉아 있는 열 살가량의 소년이 있었다.
“의뢰비 1천 골드짜리 목표물이지.”
뒤에서 말하는 검은 망토 사내를 돌아본 진은 그가 갖고 있던 기억들을 조합하여 1천 골드의 가치를 따져보려 했지만 기억들이 정확하지 않고 오래 되어 쉽지 않았다.
“흠.”
그래도 적은 돈이 아니라는 느낌은 있었다.
이런 꼬마가 그런 가치를 지니고 있다니 놀라웠다.
“죽였을 때?”
진의 물음에 뒤에 있던 자가 비슬비슬 걸어오며 고개를 저었다.
“선불금으로 반을 받았소. 나머지 반은 완료한 후에 받기로 했지.”
“무얼 믿고 선불금을 그렇게 주나?”
“내 목숨을 손에 쥐고 있기 때문이지.”
“저 아이가?”
“……아니, 의뢰인이.”
“아.”
창백해진 얼굴로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사내를 마주본 진은 머쓱해하며 입을 열었다.
“근데, 이름이 뭐지?”
“…….”
가벼운 질문이었다.
하지만 사내는 왠지 대답해 주면 안 될 것 같은 불길한 느낌에 움찔 한 걸음 물러났다.
“왜 다들 내가 이름만 물어보면 겁을 집어먹지?”
투덜대듯 말하던 진은 망설이다 입을 여는 사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블러디 핸드. 다들 나를 그렇게 부르오.”
“그렇군. 근데 그건 이름이 아니잖아.”
게다가 블러디 핸드라니. 살인을 업으로 삼은 자라서일까? 진은 문득 사내의 손을 보았다. 왠지 두 손에 붕대가 칭칭 감겨 있었는데, 피 얼룩 같은 것이 보이는 것 같았다.
“다쳤나?”
“비슷하오.”
그렇게 말하던 블러디 핸드는 창백해지다 못해 파랗게 죽어가는 얼굴로 진을 향했다.
“내가 정신을 잃으면 목을 쳐주시오.”
“왜?”
“다키안으로 변이할 테니까.”
그의 대답에 진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다키안이라고?”
“…….”
되묻는 진을 마주보던 사내는 옆구리를 틀어막고 있던 두 손에서 오른손을 떼어 내밀었다.
콰드득.
“큭!”
순간, 붕대가 감겨 있던 그의 손, 정확히는 손등 한가운데서 길고 날카로운 무언가가 휙 하고 튀어나왔다.
뚝. 뚝.
그것은 신체의 일부, 마치 뼈의 일부와도 같은 느낌이었는데 그것이 튀어나온 손에선 붉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래서 붕대가 필요한 거군.”
“마수의 신체 일부를 이식 당했지. 결과는 실패였소. 정기적으로 마기 억제제를 먹지 못하면 결국 자아를 잃고 폭주하게 되지.”
“마기라.”
다시금 그를 바라보던 진은 문득 무엇을 떠올렸는지 땅에 검을 쑤셔 박고 나서 두 손을 허공에 뻗어 무언가를 꺼냈다.
“아, 아공간인가.”
“부럽나?”
무뚝뚝하게 묻던 진의 한 손에는 붉고 진한 색의 포션이, 다른 손에는 눈곱 크기의 작고 거무티티한 조각이 들려 있었다.
“마기를 억제할 수 있게 해주면 나한테 뭘 줄 수 있나?”
진의 손에 든 포션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던 블러디 핸드는 뒤이은 그의 말에 불신 어린 얼굴을 했다.
“그게 불가능하다는 것은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알고 있소. 이식수술이 성공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니…….”
힘없이 말 뒤를 흐리던 그는 포션을 들고 있지 않은 손에서 시커먼 마기를 피워내는 진을 보며 눈을 부릅떴다.
“세상을 살다 보면 놓치면 안 되는 유일한 기회가 하나쯤 있다고 생각해.”
“다, 다키안? 정말인가?”
피를 너무 많이 흘렸는지 비틀거리면서도 눈은 더욱 빛내던 그는 무심한 얼굴로 그를 보는 진의 말에 피가 섞인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내 사람이 되면 자네를 거둬주겠다.”
“…….”
“적어도 마기 폭주로 죽게 하진 않겠어. 어떤가?”
털썩.
힘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때문인지 그 자리에 무릎을 꿇은 블러디 핸드는 힘겹게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나 블러디 핸드……, 블레어 노만은 당신을 주인으로 섬기겠습니다.”
“난 진이다. 이제 일어나라.”
“…….”
“음?”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사색이 되어 말하는 블레어를 내려다본 진은 그제야 그 주변에 고여 있는 블레어의 피를 보고 다급히 부축하여 옆에 눕혔다.
“손을 떼.”
“예. 으으윽!”
뒤이어 그의 벌어진 옆구리 속으로 손을 집어넣은 진은 그 안, 정확히 블레어의 갈비뼈 하나에 작은 파편을 마나로 찍어 눌러 박았다.
그것은 마검에서 떼어낸 작은 파편이었다. 어떤 식으로 작용할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마기를 빨아들이는 힘은 지니고 있으니 폭주 정도는 막아줄 거라 생각한 진은 그대로 손을 꺼내고 포션 뚜껑을 열어 벌어진 블레어의 옆구리에 줄줄 부었다.
“끄으아아악―!”
“아. 아픈가?”
치치칙, 하는 소리와 함께 허연 김이 솟아올랐다.
진은 서둘러 블레어의 벌어진 살을 오므리고 다시금 남은 포션을 부어준 후, 아공간에서 꺼낸 가죽을 길게 잘라 붕대 대신 그의 허리에 감아주었다.
“조금 남은 건 마셔.”
“그리하겠습니다.”
여전히 일어날 힘은 없던 블레어는 문득 자신을 내려다보는 수레 안의 소년과 눈이 마주쳤다.
“저 소년은 어찌하실 겁니까?”
그의 물음에 진은 그저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왜 죽여야 하는데?”
“집안싸움입니다.”
“그러니까. 왜 싸우는데?”
조금 언짢은 얼굴로 되묻자 블레어가 살짝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제국의 계승권 다툼이지요. 저 소년 역시 황가의 피가 조금은 섞여 있으니 제거하려는 겁니다.”
“제국?”
예상하지 못했던 이야기에 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제10화 제국은 없다
누구나 약속하기는 쉽다.
그러나 그 약속을 이행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에머슨―
커다란 황금 욕조.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물에 목 아래를 푹 담그고 있던 진은 뒤이어 들어온 젊은 여성들의 손에 몸을 맡기고 푹 쉬었다.
“…….”
처음엔 남의 손으로 몸을 씻는 것이 어색하고 불편했지만, 한번 맛을 들이니 이게 또 그렇게 기분이 좋았다.
이 일을 하지 않으면 어차피 주방이나 다른 잡일에 배정되는 여성들이었기에 그녀들 또한 상대적으로 힘이 덜 드는 이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기도 했다.
기존의 오아시스 파벌은 완전히 사라졌다.
병사들의 시체에서 무구를 벗겨내 창고에 적재한 진은 이번 전투에서 전투 소대원 세 명이 죽었다는 보고를 받고 호숫가의 광장에서 그들을 위한 간략한 제를 지냈다.
그저 불을 피우고 화장하며 묵념을 하는 정도의 제였지만 많은 이들이 함께 슬퍼해 주었다. 특히 하루밖에 되지 않았지만 함께 싸웠던 소대원들의 슬픔이 가장 컸다.
그가 머물고 있는 곳은 호숫가에서 가장 큰 저택으로, 지상 3층에 방이 열 곳이 넘는 곳이었지만 화장실이 없었다. 다른 곳들도 비슷한 상황이라는 것을 알게 된 진은 실내 화장실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는 모양이라 조금 찝찝했지만 어차피 그는 용변을 보지 않는 체질이기에 별 상관은 없다 여겼다.
다만 다른 이들의 배설 문제는 중요했다. 함부로 아무데나 싸지르면 위생 및 질병 문제가 발생할 수 있기에 집집마다 요강과 용변 통을 비치하고 그것이 다 차면 수레에 실어 숲 한쪽에 마련한 구덩이에 버리도록 했다.
호수는 아주 넓었다. 지름 1킬로미터 가량의 일그러진 원형을 이루고 있는데, 작은 부두와 나룻배가 있었지만 사용한 지가 좀 오래된 듯 썩어 있었던 터라 아공간에서 꺼낸 배를 타고 호수를 한 바퀴 돌아보았다.
호수는 위아래로 작은 물줄기가 연결되어 있었지만 해당 물줄기들은 마기에 오염되어 마을 바깥에서는 마실 수 없는 물이었다.
전에 예상했던 대로 호수의 순수한 마나가 일정 범위까지의 마기를 막아주고 정화해 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물속에는 물고기들도 살고 있었다. 그 수가 적지 않은데 왜 잡지 않을까 생각하던 진은 마땅한 낚시 도구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호수는 가운데로 들어갈수록 무척이나 깊어지는데, 몸을 사리는 상인들이 그 위험을 무릅쓰고 작살질을 할 수도 없는 일이니 그냥 풍경이나 감상하는 정도로 그치던 모양이었다.
붙잡혀 있던 사람들은 호송되고 있던 이들 외에도 마을 곳곳에 그만큼의 숫자가 더 갇혀 있었다. 열다섯에서 스물다섯 나이의 사람들이 총 300명이 넘게 노예가 될 뻔했던 것이다.
그들을 관리하고 있던 몇 명의 상인들을 생포해 저택 한곳의 지하 창고에 집어넣고 며칠 동안 굶겼더니 묻지 않아도 주절주절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성벽과의 거래 방법부터 암구호, 노예들의 등급 당 가격 등등을 줄줄 읊던 그자들은 더 이상 말하는 게 없을 때 한꺼번에 우리에 가두고 수레에 실어 마을 밖 멀리에 버려두고 왔다.
자신들은 운이 좋아 돈을 벌게 되었고, 운이 좋아 그런 위치에 있던 것이지 죄가 없다고 주장했기에 그들의 운을 믿어보라고 배려해 준 것이다.
운이 따른다면 어떻게든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진의 말에 당장 죽여야 한다고 성을 내던 이들 중 아무도 불만을 표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사흘 후에 정찰병을 보내 알아보니 우리는 부서지고 찢어진 옷자락이나 핏자국, 약간의 뼈와 누군가의 머리 가죽 일부만 남아 있었다고 했다. 그것이 그들의 운이었다.
욕조를 나온 진은 마른 천으로 물기를 닦아주는 손길이 끝나자 조금 아쉬운 얼굴로 다른 여성이 내민 가운을 걸쳤다. 이 모든 것들이 그동안 이곳에서 지내던 이름 모를 상인이 누리던 것들이었다. 단지 사람이 바뀌었을 뿐이지만 전체적인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다.
이곳에서 구해준 300여 명의 남녀들을 곧바로 풀어주진 않았다. 역시나 하나하나 진이 직접 확인하고, 또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토대로 일부 마찰의 소지가 있는 자들을 추려내 추방시키니 그 인원이 50여 명에 달했다.
당장 사람 숫자가 많다고 해서 좋은 것이 아니었다. 물론 많으면 그만큼 일손이 늘어나겠지만 일손이 많다고 해서 일을 더 많이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있어 봐야 방해되는 이들이 있다. 몸이 불편하거나 하는 이유가 아니라, 말 그대로 이곳에 있으면 다른 이들에게 폐가 되는 이들이다. 이기적이거나 욕심이 많고 남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이들이 바로 그 추방 인원에 포함되었다.
나머지 인원과 기존의 인원, 뒤이어 진이 직접 이끌고 온 세민과 한스 등 비전투 인원을 합하니 400명 정도에 이르는 대인원이 되었다. 수십 명을 추방시켰는데도 그 정도였다.
그들 가운데서 다시금 전투 인원과 비전투 인원을 나눠보니 당장 싸울 수 있을 정도의 전투 인원이 100명이 넘었고, 기존의 예비 소대처럼 조금만 훈련하면 제 몫을 해줄 수 있을 정도의 인원이 50명가량 되었다.
비로소 온전한 백인대 하나를 만들 수 있게 된 진은 기존의 전투 소대장이었던 해멀슨을 제1백인대장으로, 그 아래로 두 명의 오십인대장을 두어 그중 한자리에 케이델을 임명하고, 기존의 1십인대장이었던 우하달을 다른 오십인대장에 임명했다.
백 명이 넘는 백인대였던 터라 십인대가 12개 만들어졌다. 임시적으로 오십인대장들이 6개의 십인대를 총괄하도록 지시하고, 차후 150명에 이르게 되면 오십인대장을 한 명 추가하기로 했다.
백 명이 넘는 병력이 생겨나자 당장 무기와 장비가 많이 필요하게 되었지만 그 대부분은 용병들의 시체에서 벗겨내 적재해 두었던 것들로 충당이 가능했다. 당장 대규모 전투가 벌어질 것도 아니기에 그 정도면 되었다.
다만 새로 구성된 80여 명의 예비전투 인원의 경우 기존에 지급했던 조잡한 창들을 하나씩 고루 재분배하도록 하더라도 많이 부족했기에 별수 없이 통나무 하나를 여러 토막으로 잘라 그것을 다시금 수십 조각으로 쪼개어 깎아 만든 목검이나 목봉을 훈련 무기 용도로 지급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비전투 인원이었다.
전투 인원이야 먹고 자는 시간 외엔 이것저것 훈련만 시키면 되는데, 비전투 인원은 마땅히 시킬 일이 별로 없었다.
농사를 지을 공간을 마련해 보긴 했지만 그리 넓은 토지도 아니었고, 심을 것도 딱히 없어 상인들의 창고를 뒤져 찾아낸 약간의 곡식을 심긴 했지만 잘 자랄지도 알 수 없었다.
그것보단 숲 한쪽 공터에 심은 아팔 씨앗에 더욱 기대가 큰 진이었다. 누군가의 기억대로라면 아팔은 비교적 일찍 자라는 과실수였고, 늦어도 반년 정도면 첫 과실을 얻을 수 있기에 일단 심어두기만 하면 그 숫자를 금방 불려 나갈 수 있을 거라 기대되었다.
호수에는 남쪽 물줄기로 향하는 길목에 나무줄기로 엮은 통발을 여러 종류 배치해 약간의 고기를 잡을 수 있게 되었다. 어부 출신이 여럿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식량의 경우 육식 위주의 식사가 이어지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것이 육식 말고는 진이 지닌 빵이나 과일이 전부인데 진은 당장 그것을 우르르 풀어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저 전투 인원과 함께, 혹은 혼자 주변을 돌며 포착한 크고 작은 몬스터나 마수를 사냥했는데, 그 양이 제법 많아 400명이 넘는 사람들이지만 배를 곯지 않을 정도는 먹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