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25화
백인대와 예비 전투부대를 제외한 200여 명의 비전투 인원들 중 일부는 호수에서 통발 낚시를, 일부는 숲에서 나무를 하거나 진이 꺼내준 통나무를 가공하여 병사들이 사용할 훈련용 무기나 허수아비, 혹은 일생활에 쓰이는 탁자나 가구를 만드는 목수가 되었다.
나머지 인원들도 최대한 일거리를 주고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망루 경비조에 편성하기도 했지만 전투부대에 편성되지 않은 어린아이들의 경우는 딱히 시킬 것이 없었다. 훈련을 시키기엔 몸이나 마음이 약하고, 일을 주기엔 일손이 너무 넘쳤다.
알아서 정리하겠다는 레이나와 세민의 말에 그들에게 일임했더니 여기저기 다니며 마을 청소를 하거나 전투부대의 훈련을 견학, 혹은 빈 헛간을 학교 삼아 글을 가르치는 모양이었다.
시끄러운 아이들이 눈에서 멀어지니 왠지 후련해진 진에겐 일주일에 한 번 갖는 목욕 시간이 가장 기분 좋은 때였다.
“변화는 좀 있나?”
발코니에 서서 호수의 풍경을 감상하던 진이 문득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로 말하자 어느새 그의 곁에 다가온 블레어가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예전에 비해 좀 나아진 것 같긴 합니다. 어디엔가 작은 구멍이 뚫린 것처럼 조금씩 새어나가는 것 같기도 하고요.”
“그거, 커질 거야.”
“네?”
갸웃하며 되묻는 블레어를 보며 진은 다시금 같은 말을 건넸다.
“뼈에 박은 그것. 커질 거라고.”
“……설마 다크스톤입니까?”
“음?”
다크스톤이 뭐냐는 얼굴로 쳐다보니 오히려 아연한 얼굴로 마주보며 말해주는 블레어였다.
“마나스톤과 마찬가지로 마기의 흐름이 짙은 곳에 극소량 생성되는 물질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군.”
“다만 그것은 마계에서만 얻을 수 있는 아주 희귀한 물질이라 중간계에서는 구할 수 없을 거라고 들었습니다.”
“그런가?”
문득 진은 자신의 검을 떠올렸다. 마검이라고 부르기로 했었던 그것은 일반적인 금속이 아니었다.
“카락슈탈…….”
“네?”
“아니, 혼잣말이야.”
진은 그제야 그 검이 누구의 것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도 마룡이 사용하던 검인 모양이다. 마계에서 다크스톤을 구해 만든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하던 진은 문득 조용히 묻는 블레어의 말에 그를 향했다.
“그 아이.”
“음?”
“어째서 직접 죽이셨습니까?”
그동안 한 번도 묻지 않았던 질문이었다.
“데이카르트 황가의 피를 가졌다면서.”
“그건 그렇습니다만.”
“그게 이유야.”
진의 대답에 블레어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지만 더 묻지는 않았다.
“너에게 의뢰한 자 역시 황가의 피를 갖고 있겠지?”
“그렇습니다. 소년과 비슷한 아주 적은 피가 섞였을 뿐이지만 스스로 황가의 자손임을 과장되게 내세우고 있지요.”
“그자 역시 죽여야 해.”
“…….”
문득 고개를 갸웃한 블레어가 진의 얼굴을 다시 살폈다.
“혹시 주인께서도……?”
“아니.”
“그런데 어째서?”
의아한 얼굴의 그를 보지 않은 채, 진은 그저 무심한 눈으로 호수를 향했다.
“누구한테 약속한 게 좀 있어.”
“그렇군요.”
무슨 약속이기에 황가의 피를 이은자라서 죽인다는 것일까?
이미 사라져 버린 지 오래된 제국인데 말이다.
블레어는 병상에서 일어난 이후, 대화를 나누다 문득 제국이 멸망한 지 백 년이 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경악하던 진의 얼굴을 떠올렸다.
‘분명 무슨 사연이 있는 것 같다.’
죽기 싫어서였든 어쨌든 그는 진에게 자신을 의탁하고 충성을 맹세했고 그것을 지킬 생각이었다. 주인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 옛 황실의 흔적을 모조리 지우겠다면 자신이 앞장서서 피를 볼 각오였다.
“…….”
진 역시 조금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호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또한 얼마 전 블레어와 대화하다 듣게 된 제국의 멸망 이야기를 떠올리고 있었다.
오랜 세월 세상을 지배하며 이종족을 핍박하던 제국이었다.
하지만 샤룬드 아인의 영향이 닿지 않는 극동부 오지로 피신한 뒤, 오랜 세월 힘을 모은 드래곤들의 반격으로 일어난 일그러짐이 대륙을 덮쳤다.
조각조각 찢겨 나간 대륙의 여파로 북부를 제외한 중부와 남부의 샤룬드 아인의 발동이 중단되고, 곳곳에 마계와의 틈이 열려 마기에 오염되기 시작했다.
마수들과 몬스터들의 범람에 인간은 너무나 무력했다.
게다가 과거 인간이 저질렀던 잘못이 너무나 컸기에 타종족들도 모두 등을 돌려 버렸고, 순식간에 휘몰아친 혼란은 찬란하던 제국을 역사 속의 나라로 전락시켰다.
황실은 몰락하고, 찢겨진 대륙처럼 수십 개의 나라로 분리된 제국은 그 이후로 끊임없는 내전과 몬스터들의 습격으로 더 이상 예전의 영광을 되찾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렇게 제국이 멸망한 지도 벌써 백 년이 훌쩍 지났다.
수십 곳으로 나뉘어 내전을 벌이던 나라들도 하나둘 멸망하거나 흡수되어 이젠 열 곳 남짓한 크고 작은 나라로 굳어지고 있었지만 내전은 아직 끝나지 않고 있었다.
최근에는 서로 자신들이 옛 제국 황실의 후손임을 주장하는 몇몇 국가의 왕들이 정통성을 내세우며 다른 황가의 후손들을 제거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진의 검에 죽은 소년 역시 변방 소국의 왕자로, 부친은 병환으로 죽고 혼자 남은 아이였지만 도저히 지켜낼 방도가 없어 유배를 위장한 호위 병력과 함께 이쪽 성벽을 넘어온 것이었다.
하지만 소년을 보호하고 있던 호위 병력은 상인들의 재물과 여성공세에 쉽게 허물어져 그들의 용병이 되었고 혼자 남은 소년은 그리 오래지 않아 정체를 들켜 무척 비싼 값에 팔릴 예정이었다.
소년을 사기로 했던 자 역시 어딘가의 황실 후손이라 짐작되었다. 멸망한 제국이라 해도 아직 그 핏줄이 끊어지진 않은 것이다.
“하나는 했고, 다른 게 문제군.”
나지막이 중얼거리던 진은 맑디맑은 호수를 바라보며 검은 머리칼을 벅벅 긁었다.
제국을 무너뜨리고 황가의 씨를 말리라는 것이 칼의 요구였고, 진은 능력 닿는 만큼만 해주겠다고 했다.
그런데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제국이 알아서 멸망해 주었다. 그거야 고마워해야 할 일이지만 덕분에 뿔뿔이 흩어진 황가의 자손들을 찾기 어렵게 되었다. 그것이 문제였다.
“일단은 이곳을 제대로 안정시킨 이후에 차근차근 진행하면 되겠지.”
그렇게 말한 진은 아공간에서 꺼낸 또 다른 마검의 파편들, 아주 작은 다크스톤 조각들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들여다보다 문득 고개를 들어 한곳을 향했다.
“음?”
“……!”
숲 쪽에서 사람들의 비명이 들려오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더 자세히 보려던 진은 문득 가운을 입은 그대로 발코니 난간을 박차 뛰어내렸다. 그 뒤에서 같은 곳을 보던 블레어는 숲 한곳의 나무들이 들썩이며 좌우로 갈라지는 광경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진을 따라 발코니에서 뛰어내린 블레어는 다급히 품에서 뽑아 든 단검, 진이 선물해 준 보석이 박힌 황금빛의 단검을 굳게 쥐었다.
“…….”
화려해서 쓰는 것이 아니었다. 이 단검의 검신은 모리디움이라는 특수 금속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강철의 백 배 이상 강하다고 알려진 모리디움은 동일 부피 황금의 열 배를 주어도 구하기 어려운 희귀 금속이었다.
자신이 지금까지 받았던 모든 의뢰비를 다 합쳐도 지금 손에 들고 있는 단검 한 자루의 가격에는 못 미칠 거라는 생각을 하며 다시금 손에서 놓칠세라 강하게 고쳐 쥔 블레어는 멀리 시커먼 잔상을 남기며 멀어지고 있는 그의 주인과 그 너머에서 숲을 헤치며 모습을 드러낸 거대한 무언가를 보며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그와 달리 진은 무척 신이 난 얼굴이었다.
“이제야 좀 긴장이 되네.”
가느다란 웃음을 입가에 머금은 진은 허공에서 뽑아낸 자신의 마검에 모처럼 끈적할 만큼이나 짙은 마기를 듬뿍 집어넣으며 직선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우우웅……!
그의 마음을 아는 것인지 마검 역시 낮게 울며 동조했다.
우지직.
커다란 나무들을 그대로 쓰러뜨리며 모습을 드러낸 그것.
크워어어―!
이 세계에서 처음으로 진을 제대로 긴장시킨 것은 키가 10미터를 훌쩍 넘기며 그 몸집 또한 무시무시한 초록색 거인이었다.
따로 떼어놔도 그의 키를 넘길 것 같은 머리통엔 네 개의 커다란 눈이 달려 있었고, 대머리 꼭대기엔 하늘을 향해 안테나처럼 솟은 굵은 뿔 하나가 있었다.
그 손에 들린 아주 거대한 통나무 몽둥이를 본 진은 녀석이 이곳으로 온 목적이 그리 바람직하진 않은 것 같다고 느끼며 마검을 고쳐 쥐고 보폭을 넓혔다.
순식간에 좁아진 거리.
크오오!
문득 네 개의 눈이 일제히 그를 향해 고정되더니 바람을 가르는 묵직한 소리와 함께 녀석의 통나무 몽둥이가 그에게 내리꽂혔다.
콰지직!
“주, 주인님!”
뒤에서 달려오던 블레어가 다급히 외쳤지만 진은 그곳에 없었다. 다시 들려진 통나무에도 별다른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았다.
“너는 내가 친히 이신검법으로 상대해 주마.”
어디선가 진의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이어 파팟, 하는 파공음이 이어졌다. 그제야 잠깐 진의 모습이 보이는 듯하더니 다시금 잔상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크어어어!
문득 거인이 한쪽 다리를 들며 울부짖기 시작했다.
파팟. 파파팟.
고통에 겨운 거인의 울음은 바로 그 다리 때문이었는데, 들어 올린 다리의 한쪽 면이 잘게 다진 고기처럼 흐물흐물해진 채로 진액과 같은 걸쭉한 갈색 피를 줄줄 흘리고 있었다.
하지만 들어 올린 다리가 끝이 아니었다. 뒤이어 같은 소리가 이어지더니 땅을 딛고 있던 나머지 한쪽 다리 역시 무언가에 의해 난도질을 당하기 시작했다.
“쓰러져! 쓰러지라고!”
크워어어―!
우드득.
무언가가 부러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천천히 뒤로 넘어가는 거인이었다. 거인의 두 다리는 온전히 일어날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무슨 일이야?”
“루우께서 거인을 무찌르고 계셔!”
“정말?”
곳곳에서 맡은 일을 하던 수많은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곳곳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거대하다는 말로 부족할 만큼 큰 거인이 대체 어디서 나타난 것인지 두려워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진이 얼마나 강한지 알고 있기에 별 걱정을 하지 않고 순수하게 구경을 즐기고 있었다.
“혹시, 다키안이 아닐까?”
문득 누군가의 말에 다른 이들이 고개를 갸웃했다.
“저렇게까지 변할 수는 없을 것 같은데.”
“그래도 지금까지 저런 몬스터는 없었잖아.”
“그건 그렇지만.”
사람들이 뭐라 떠들든 신경 쓰지 않은 채 쓰러진 거인의 두 다리를 절대 일어날 수 없을 만큼 못 쓰게 만들어 버린 진은 뒤이어 사방으로 휘둘러대는 거인의 통나무 몽둥이를 피해 머리 쪽으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크아악! 크악!
이젠 발악에 가까운 소리를 지르며 날뛰던 거인은 문득 동작을 멈추더니 자신의 머리 옆에서 목을 향해 검을 내리치려던 진을 발견하고 알 수 없는 외침을 발했다.
“음?”
진은 눈앞에서 갑자기 빛을 발하는 거인의 몸을 보면서도 검을 휘두르는 것을 멈추지 않았지만 뒤이어 눈부신 빛이 사그라진 후, 무언가를 벤 줄 알았던 검을 보니 그저 땅에 반쯤 박혀 있는 상태라 허탈한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흑흑.”
멀찌감치 왼쪽 땅에서 누군가가 울고 있었다. 다가가 보니 열 살도 안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였는데, 특이한 것은 나뭇잎으로 만든 것 같은 옷을 입고 피부색 역시 초록색, 게다가 머리카락 대신 가느다란 이파리들이 머리를 뒤덮고 있다는 것이었다.
소녀는 갈색 피가 줄줄 흐르는 두 다리를 부여잡고 울고 있었다. 그 옆에 다가간 블레어가 의문 가득한 눈으로 소녀를 살피는 동안 뚜벅뚜벅 다가간 진이 마검을 들어 소녀의 목을 겨누었다.
“히익!”
시커먼 마기가 풀풀 풍기는 커다란 검을 본 소녀가 겁에 질린 얼굴로 물러났지만 진이 손목을 살짝 트는 정도로도 검끝은 여전히 그녀의 목을 겨누었다.
“뭐냐, 넌.”
진의 물음에 여전히 히끅거리며 울고 있던 소녀는 뒤이어 말없이 검을 휘두르려는 그의 모습에 퍼뜩 놀라 소리쳤다.
“숲의 정령입니다!”
“누가.”
“네?”
“네가?”
“네.”
진은 그다지 믿지 않는 눈으로 다시금 소녀의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기분이 나빴지만 두려움이 더 컸던 소녀는 검을 거두지 않고 그저 옆 땅에 푹 꽂아 넣은 진의 시선이 자신의 두 다리를 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아프냐?”
“아프니까 울지요!”
“그러게 왜 덤벼, 덤비기를.”
“…….”
“너, 내가 누군지 알아?”
“다키안.”
뾰로통한 얼굴로 답한 그녀를 보며 픽 웃은 진이었다.
“오염되었으니까 죽이려고 했어?”
“네. 지금까지 그렇게 해왔거든요.”
“내가 다키안이라고?”
다시금 웃어버리는 진을 올려다본 그녀의 표정이 조금 이상해졌다.
“…….”
“이제 좀 다른 걸 느끼나?”
“다, 당신은…….”
“그 이상 말하면 그게 현실이 될 거야.”
“카, 카락…… 히끅!”
그렇게 하려던 말을 주워 삼킨 숲의 정령을 옆에서 지켜보던 블레어가 고개를 갸웃했다. 카락 어쩌구 하는 말을 들었기 때문인데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그나저나 다리가 이래서 이거 어따 쓰나.”
남 이야기하듯 말하던 진은 문득 아공간에서 포션 한 병을 꺼내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정령은 눈에 안 보이는 것 아니었나?”
“숨을 수 있어요.”
“포션은 먹히나?”
“종류에 따라 달라요. 마나의 회복능력을 농축시킨 퓨어포션은 듣지만 트롤 피를 정제해서 만든 블러드포션은 효과 없어요.”
“이게 어떤 종류인지 모르겠네.”
일단 마개를 열고 그녀의 다리에 부어보는 진이었다.
“끼야아아아―!”
“오. 듣네.”
반 정도나 움푹 파여 있던 그녀의 종아리에 새 살이 조금씩 돋아나기 시작했다.
소녀의 비명 역시 계속해서 이어졌지만 전혀 아랑곳하지 않은 진은 그녀의 두 다리가 다 아물 때까지 포션을 붓는 것을 그치지 않았다. 비명을 지르면서도 다리를 피하지 않은 소녀 또한 독종은 독종이었다.
“숲의 정령이라고?”
“그렇다니까요.”
다리가 다 나은 소녀는 짜증을 내며 답했지만 떠나려 하진 않았다. 그녀는 왠지 두려움 가득한 얼굴이었음에도 그만큼의 호기심이 어린 시선을 진에게 향하고 있었다.
“식물을 가꿀 수 있다고?”
“그렇다고요.”
“흐.”
문득 웃음을 흘리는 진을 올려다본 소녀가 한 걸음 주춤 물러났다.
진의 시선에서부터 알 수 없는 불길함이 느껴졌다.
“정령아가씨, 이름이 뭐야?”
“…….”
얼어붙은 듯 대꾸하지 않는 소녀를 보던 진은 이내 되었다며 한 손을 내젓고 말했다.
“아가씨랑 나랑 아―주 식물적인 대화를 좀 해야 할 것 같아.”
그제야 숲의 정령은 그녀가 오늘 무척이나 큰 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마룡왕』 제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