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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신검존 1권
1화
작가서문


‘평양 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자기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할 수 없다는 뜻이죠.
‘마신검존’은 바로 그런 이야기입니다. 세상 사람이라면 누구나 원할 법한 힘을 손에 넣고도, 고뇌하고 갈등하며 괴로워하는 청년의 이야기입니다.
항거할 수 없는 운명에 휩쓸린 사람이 과연 자신의 길을 찾아갈 수 있을지, 부디 지켜봐 주십시오.
책을 읽어 주시는 모든 분들께 잠시나마 즐거움이 깃들었으면 좋겠습니다.

금건영 배상



서장


무림맹의 하급무사 수련장에선 여느 때와 같이 힘찬 기합성이 터져 나왔다. 그 사이에서 흑의무복을 입은 사내가 가늘게 한숨을 쉬며 검을 늘어뜨리고 바람을 만끽하고 있었다.
‘시원하군.’
한바탕 땀을 흘리고 나면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다. 바람이 솔솔 불어와 몸을 서늘하게 식혔다. 창건(蒼乾)은 낡은 청강장검을 칼집에 되돌리고 숨을 골랐다.
‘평소보다 몸이 가뿐해. 예감이 아주 좋아.’
수련을 마친 창건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평소보다 열성적으로 검을 휘두르는 동기들이 보였다. 그러나 열의만 가득할 뿐, 움직임은 평소 수련할 때보다 못하다. 창건은 동기들의 잘못을 한눈에 꿰뚫어 보았다.
‘검에 잡념이 깃들었어. 바보들, 보이기 위한 수련을 해 봤자 아무 소용없는데.’
사실 그들이 긴장하고 있는 이유를 창건도 충분히 공감하고 있었다.
무림맹에서는 일 년에 두 번, 하급무사 중에서 상급무사의 재목을 골라 승급시킨다. 오늘이 바로 승급 발표일이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 윗사람들의 눈에 들겠다는 계산인 것이다.
‘승급자는 진작 결정됐어. 이제 와서 열심히 해 봐야 누가 알아준다고. 차라리 평상심을 유지하는 모습을 보이는 게 나중을 위한 득이 될 터.’
창건 또한 가슴이 뛰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동기들처럼 호들갑을 떨었다가는 격이 떨어지게 된다. 그렇다고 혼자 고고한 학처럼 굴었다가는 또한 따돌림을 받게 된다.
‘중도를 지키는 게 중요해.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그릇.’
못난 돌은 버림받고, 모난 돌은 정을 맞는 법이다. 창건은 조용한 가운데 은근히 자신을 드러내는 데 집중했다.
근 반년 동안 창건은 몸가짐을 각별히 조심했다. 무공 수련 또한 누구보다도 열심히 했다. 게다가 수재 소리를 들을 정도의 자질을 가졌다.
덕분에 현재 동기들 중에서 그의 검을 당해 낼 자는 다섯 손가락으로 겨우 꼽을 정도다.
‘틀림없어. 이번 승급에는 내가 올라간다.’
보통 상급무사로 승급되는 숫자는 일 년에 다섯 명, 그 사이에 낄 가능성은 충분하다.
“모두 그만!”
수련교관을 맡고 있는 상급무사가 우렁차게 소리쳤다. 순간 하급무사들은 모두 같은 생각을 했다, ‘올 것이 왔구나’. 하급무사들이 움직임을 멈추고 그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다들 알고 있겠지! 오늘은 승급자 발표일이다! 특별히 화산의 매로검(梅路劍) 장로께서 나오셨으니 어서 자리에 모이도록!”
창건의 눈이 빛났다.
‘매로검 장로라면 안면이 있지. 잘됐어.’
사사삭.
수련교관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하급무사들이 모여들었다. 머리에 하얗게 서리가 내려앉은 화산의 장로 매로검이 수련장 입구로 모습을 드러냈다.
“우와! 이번에는 기대주를 뽑았나 봐. 평소에는 상급교관이 발표하더니…….”
“그러게, 이게 웬일이래.”
누군가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창건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눌렀다. 상급무사가 되면 무림에 나가서도 제법 행세를 할 수 있다.
“매로검 장로님께 인사 올립니다!”
수련교관이 포권을 하자, 무릎 꿇고 있던 하급무사들이 한 몸처럼 동시에 포권지례를 취했다.
척!
하급무사에 불과해도 무림맹의 무사들이다. 절도 있는 동작이다.
“매로검 장로님께 인사 올립니다!”
“정도의 후기지수 여러분을 만나게 되어 무척 반가워요. 편히 앉아요.”
소매에 매화 무늬가 새겨진 옷을 입은 그는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아랫사람에게도 경어를 쓰고 예의를 차리는 사람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그의 말대로 편히 앉는 무식한 하급무사는 없었다. 모두가 잘 단련된 고수처럼 부리부리한 눈빛으로 매로검을 노려보았다.
“눈들이 아주 맑군요. 정파의 촉망 받는 후기지수들을 대하니 나까지 젊어지는 것 같아요.”
매로검이 가벼운 농담을 던져 분위기를 풀었다. 칭찬 듣고 기분 나쁠 사람 없다고, 인사치레인 줄 알면서도 다들 즐거워했다.
매 장로는 웃음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가 말을 꺼냈다.
“사정이 있어서 올해의 상급무사 승급자는 모두 세 명으로 결정됐어요. 다들 자질이 뛰어나서 고르기 정말 힘들었어요. 여러 장로 분들과 또 수련교관들의 의견을 종합한 끝에 겨우 결론을 내렸지요.”
세 명, 평소보다 적다.
“상급무사에 가까운 자질을 가진 사람도 안타깝게 떨어졌어요. 하지만 기회는 또 있으니 낙담하지 말고 모두 정진해 주기를 바래요.”
작은 파문이 일었다. 승급자의 숫자가 다섯에서 셋으로 줄었다는 건 그만큼 확률이 낮아졌다는 소리다.
‘괜찮아, 세 명이든 다섯 명이든. 난 그래도 승급될 수 있을 거야.’
순간 마음이 불안해졌다. 창건은 표정으로는 내색하지 않고 다만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러나 꽉 쥔 주먹에는 식은땀이 흥건히 배었다.
마침내 매 장로가 상급무사가 될 사람들의 명단을 발표했다.
“먼저 조세명.”
창건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
‘조세명 따위가 승급한다면 나도 문제없겠지.’
이어서 두 번째 이름이 호명됐다.
“장춘곤.”
창건은 표정이 구겨지려는 것을 필사적으로 참았다.
‘약해 빠진 장춘곤이…… 빌어먹을 집안의 연줄인가! 아니야, 아직 마지막이 남았어. 마지막은 나다.’
초조함을 이기지 못하고 마른침을 삼키는 창건이었다. 매 장로는 온화하게 웃으며 마지막 이름을 발표했다.
“허일근. 이상 세 명 앞으로 나오세요.”
“우와아!”
호명 받은 하급무사들이 뛸 듯이 기뻐했다. 은근히 거들먹거리면서 단상 앞으로 나가는 녀석, 기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입이 귀밑까지 찢어진 녀석,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녀석까지.
창건은 그들을 보면서 속이 쓰려 복장이 터질 지경이었다.
‘이, 이럴 수가! 모두 나보다 약한 녀석들인데! 또냐! 또 실력 이외의 것들 때문에 평가절하 당한 거야? 세상 더럽기 짝이 없구나!’
창건은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현기증이 날 지경이다. 무공이면 무공, 생활 태도면 태도, 어느 것 하나 자신보다 나을 게 없는 녀석들이었다.
‘이건 말도 안 돼! 조세명이 부잣집 아들이라서? 장춘곤이 세도가의 자식이라서? 허일근이 화산 속가제자의 아들이라서?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하잖아!’
현실을 모르는 건 아니다.
돈 많은 사람이, 연줄이 있는 사람이 더 좋은 결과를 갖는다는 건 이미 열 살 때부터 느끼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걸 뛰어넘는 자질을 보여 줬잖아. 솔직히 하급무사 중에서 나 따라오는 녀석이 어디 있다고. 자질만 있어? 나만큼 노력하는 녀석도 없잖아. 진짜 아무리 더러운 입김이 많아도 나 정도 인재는 승급시켜 줘도 되잖아!’
게다가 보여 준 건 무공만이 아니다.
‘출세하기 더럽게 힘드네! 뭘 더하란 말이야!’
말이야 바른 말이지, 무림맹 뒷산에서 캔 더덕으로 담근 더덕주를 수련교관과 장로들에게 뇌물로 건넨 것만 해도 수백 단지는 될 것이다.
쥐꼬리만 한 봉급을 쪼개서 늙은 장로들에게 씹을 거리를 제공한 것도 꽤나 많았다.
그것도 모두, 너무나 존경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선물로 보일 수 있도록 연기했다. 때로는 친할아버지에게 대하는 것처럼 살갑게, 때로는 목숨을 내줄 수 있는 수족처럼 절실하게.
극진하되 비굴하지 않고, 살갑되 정도를 넘어서지 않는 경계를 유지했다. 부모 없고 연줄 없는 몸이라 오히려 그게 당연하다고 여겼다.
‘이…… 배신자! 매로검 당신도 나한테 더덕주 얻어먹었잖아! 그것도 세 동이나!’
아예 모르는 사이라면 모를까, 꽤나 안면을 트고 사는 사람이 배신했다고 생각하니 오장육부가 뒤집어졌다.
무림맹 안에서는 금주(禁酒)라 산속에 묻어 두고 필요할 때마다 꺼내 오는 게 얼마나 힘든데! 창건은 극심한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세상 사는 법을 안다고 생각한 자신을 이렇게 내칠 수 있단 말인가.
‘그만하면 잘했잖아! 간이라도 빼줄 것처럼 굴었잖아! 그걸로도 부족해? 수족으로 부릴 수 있는 무사는 널리고 널렸다 이거야?’
창건이 결국 평상심을 잃고 씩씩거리는 그때였다.
매로검이 세 명의 승급자를 치하하더니 사람 좋은 얼굴로 다시 하급무사들에게 말했다.
“아직 끝이 아니에요. 축하할 일이 하나 더 있다는 걸 얘기 안 했군요. 맹에서 정말 오랜만에 풍운청룡단(風雲靑龍團)의 자리가 비었답니다. 그래서 규율에 따라 하급무사 중에서도 한 명이 풍운청룡단에 갈 수 있어요.”
순간, 창건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씩씩거리던 게 거짓말처럼 하얗게 변했다.
‘풍운청룡단의 기회가…… 있다고?’
아까의 웅성거림이 거짓말처럼 장내가 조용해졌다.
풍운청룡단! 무림맹의 젊은 고수들이 모인 그곳!
들어가기만 하면 출셋길이 보장된다는 정예 고수들의 집합소!
‘설마…… 설마……!’
창건은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상하급의 무사들은 단지 무림맹에 적을 두었을 뿐, 무림에 나가서 고수로 행세할 수 없다. 그러나 풍운청룡단은 다르다.
무림맹의 진정한 고수가 되는 관문과도 같은 곳이다.
풍운청룡단은 대개 구파일방에서 보낸 후기지수로 채워진다. 그러나 가끔 결원이 생기는 경우, 자질이 뛰어난 어린 하급무사 중에서 뽑히기도 한다.
그야말로 실낱같은 가능성이다.
‘나야? 나야? 젠장, 또 다른 놈이야? 제발 내 인생도 좀 피게 해 달라고! 가늘지만 탄탄하게, 길지만 화려하게! 나도 출세하고 싶단 말이야! 뭐든지 할 수 있다고!’
꽉 쥔 주먹이 땀으로 미끈거렸다. 목구멍으로 심장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기절할 것만 같았다. 창건은 입을 꾹 다물고 매로검을 노려보았다.
‘다른…… 놈인 겁니까? 내 더덕주 값을 하란 말이오!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어!’
매로검의 시선이 하급무사를 느긋하게 훑었다. 쥐 죽은 듯한 고요함, 다들 긴장이 극에 달해서 침도 삼키지 못하는 상황이다.
‘제발…… 제발…… 제발…… 제발!’
이윽고 매로검의 입이 열렸다.
“창건, 축하해요.”
덜컹, 심장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한순간 세상이 아득하게 멀어졌다. 눈앞이 핑핑 도는 현기증이 엄습했다.
‘자, 잘못 들었나?’
간절함이 극에 달해서 환청을 들은 게 아닐까 싶었다. 창건은 얼떨떨한 모습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모든 하급무사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놀라움, 경탄, 질투, 시기를 담은 시선이다. 고요와 적막이 흐르고 있었다. 창건은 천천히 매로검에게 시선을 옮겼다.
“축하해요. 풍운청룡단에 들어가게 됐어요.”
“아…….”
반쯤 벌린 창건의 입에서 신음 같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하급무사들이 질시와 부러움이 섞인 탄성을 질렀다. 창건은 숨을 골랐다. 벌떡 일어나서 매로검에게 뛰어가고 싶었다.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었다. 체통을 지키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자신을 억눌러야 했다.
‘참아! 심호흡을 하자. 후우, 하, 후우, 하. 지금 경망스럽게 굴면 안 돼. 의젓한 모습을 보여서 점수를 따 놔야지. 다리야, 떨지 좀 마!’
반쯤 넋이 나갔던 창건의 얼굴에 곧 생기가 돌았다. 두 눈에는 정광이 가득했다. 창건은 힘차게 일어나서 어깨를 펴고 의젓한 걸음으로 매로검에게 다가갔다.
“사실 그동안 창건을 쭉 지켜보고 있었어요. 다른 사람들도 모두 알고 있을 거예요. 가장 노력하는 사람이 누구였는지, 가장 열정이 넘치는 사람이 누구였는지. 열심히 노력한 결실을 보게 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해요. 앞으로도 정도무림에 도움이 되는 무인으로 성장하길 바래요.”
부담스러운 금칠이다. 창건은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꾹 억누르면서 화답했다.
“분에 넘치는 영광입니다. 모두 매 장로님과 무림맹의 어른들께서 이끌어 주신 덕분에 모자란 제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비록 한없이 모자란 저일지라도 무림맹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온몸을 바쳐 노력하겠습니다.”
창건은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낭랑한 그의 목소리가 수련장 가득히 퍼졌다.
열일곱의 창건, 출셋길을 잡았다.
‘으하하! 해냈다! 해냈다고!’

승급자 발표가 끝나고 매로검은 창건을 따로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매로검 장로님.”
“아, 거기 앉아요. 창건, 풍운청룡단에 들어가게 된 소감은 어떤가요?”
“염원하던 곳에 들어갈 수 있게 되어 정말 기쁩니다. 모두 매로검 장로님 덕분입니다. 정말로 어찌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매 장로가 온화하게 웃었다. 천상 도인이라 그의 웃음에는 현기가 담겨 있었다.
“내게 감사할 것 없어요. 창건이 노력하던 것을 모르는 장로가 없을 정도였으니까요.”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창건은 허리 숙여 인사했다. 뛸 듯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한편으로는 긴장을 전혀 풀지 않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