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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다른 장로들한테도 더덕주를 돌린 걸 알았나? 에이, 그건 아니겠지.’
창건은 침을 꿀꺽 삼켰다. 장로들 사이에서도 은근히 알력이 있어서, 한쪽에 붙으면 자연 다른 쪽과는 멀어지기 마련이다. 창건은 그 가운데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다행히 그런 의미는 아니었는지 매 장로는 금세 다른 얘기를 꺼냈다.
“그래, 휴가는 어디로 갈 생각인가요?”
“휴가……라뇨?”
창건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금까지 명절 이외에 휴가라고는 전혀 없었다. 그나마 명절에 쉬는 날도 며칠 주지 않아서 어딜 다녀오기에는 빠듯했다.
지난 팔 년간, 멀리 다녀 본 기억이 없는 창건이었다.
“입단 특전을 몰랐군요? 풍운청룡단에 입단하게 되면 이십 일의 휴가를 받게 되지요. 보통 고향에 다녀오고요.”
“장로님, 저는…… 고향이 없습니다.”
창건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목소리에 씁쓸함이 묻어 나왔다.
“아아, 그랬었지요. 미안해요. 내가 무신경했군요.”
매 장로가 창건의 신상 내력을 떠올리고는 당황해서 사과했다. 창건은 외려 사과를 받기가 부담스러워서 손을 저으며 매 장로를 만류했다.
“괘, 괜찮습니다. 어차피 다 지난 일인걸요.”
창건이 사과를 받아들이자 매 장로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래요. 환경에 연연하지 않고 당당히 살아가는 창건의 모습은 정말 보기 좋아요. 그럼 무림맹에서 쉬게 될 텐데요? 어디 연고지도 없나요?”
모처럼의 휴가가 아깝지 않느냐며 매 장로가 재차 물었다. 창건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 보니 연고지라면 떠오르는 곳이 있었다.
“호남(湖南)에 주유현(舟留縣)이라는 마을이 있습니다. 이왕 휴가를 받게 된다면 그곳에 다녀오고 싶습니다.”
자주 받을 수 있는 휴가도 아니다. 그런 만큼 한 번쯤은 인사를 드리고 싶었던 사람들에게 가는 게 옳으리라.
“떠돌이 거지였던 저를 도와주신 분들이 계십니다. 우연히 흘러 들어간 저를 먹여 주고 입혀 주셨으니…… 거의 몇 년을 키워 주셨죠. 제게는 부모 같은 분들이 계십니다.”
매로검 장로가 흐뭇하게 웃었다.
“좋아요. 좋은 인연이 있었나 보군요. 부디 멋지게 장성한 모습을 보여 드리길 바래요. 그분들도 기뻐할 거예요.”
창건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그동안 완전히 주유현에 대해서 잊고 살았다. 물론 정말 부모라고 생각한 건 아니다. 하지만 난생 처음 따뜻하게 대해 준 사람들이라 고마움은 잊지 않았다.
“아, 그리고…… 호남이라면 마교와의 경계 지역이라 위험할지도 모르니 몸조심해요. 물론 요즘 마교가 예전만큼 활발하게 움직이지는 않지만, 본성이 어디 가는 법은 없어요. 위험은 스스로 피해야죠.”
“예, 조심하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모로 신경 써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창건이 진심 어린 표정으로 답했다. 매로검 장로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럼 몸 건강히 다시 만나기를 빌지요. 떠오르는 신성(新星)의 앞날에 복이 있기를…….”
‘정말 신경 많이 써 주네. 돌아올 때 지역 특산주라도 사 와야겠는걸.’
창건은 공손히 절을 올렸다.
마교의 위협 따위는 사실 신경도 쓰지 않았다. 십 년째, 마교는 잠든 것처럼 고요하다.
‘광서성도 아니고 호남성인걸. 알아서 시비만 잘 피하면 무슨 문제랴.’
꿈에도 몰랐다.
훗날, 이날의 결정을 두고두고 후회하게 될 거라고는.



제1장 잘못된 만남


광서성(廣西省) 명화산(冥火山)에는 백도무림의 영원한 적, 마교가 있다.
핏빛 옥좌에 앉아 있는 노인은 떨고 있었다. 검붉은 비단옷을 겹겹이 껴입었으면서도 추위를 느끼는지 이를 딱딱 맞부딪치며 신음을 흘렸다.
노인의 옥좌 앞으로는 여덟 명의 남녀가 부복하고 있었다. 그들은 노인과 같은 검붉은 장포를 걸치고 있었다. 말라붙은 피처럼 진득한 붉은색, 바로 마교의 상징이다.
“팔혼(八魂)…….”
“예, 교주님!”
팔혼이라 불린 그들이 깊게 고개를 숙였다. 공기가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처럼 긴장감이 감돌았다.
“나는…… 틀린…… 것 같다…….”
생명력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메마른 음성이다. 팔혼은 대경하여 노인을 만류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아직 때가 아닙니다! 교주님! 아직도 정정하십니다!”
그들은 당황하고 있었다. 불과 백 일 전까지만 해도 천하제일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닌 무공을 지녔던 교주다. 백 살을 넘긴 나이에도 청년으로 보일 만큼 내공의 수위가 깊었다. 천하에 반로환동(返老還童)의 경지에 오른 사람이 셋을 넘지 않았는데 그 중 한 명이 바로 마교의 교주였다.
“크흐…… 허튼소리 말라……. 내 몸은 내가 잘 안다……. 크큭, 너무 높은 곳을 바라보았는가.”
나흘 전, 교주는 백 일 간의 폐관수련을 마치고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나타난 것도 잠시, 자신의 거처에 틀어박혀서 누구에게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교주는 나흘째가 되는 날, 바로 오늘. 자신의 수족이라 할 수 있는 암혈팔혼(暗血八魂)을 불렀다. 그들은 달라진 교주의 모습을 보고 놀라고 말았다. 패도적인 기세의 청년은 온데간데없고 늙은 노인 하나가 옥좌에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노인이 된 교주를 보고 암혈팔혼은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육신의 나이를 주체하지 못한다는 건 반로환동이 깨졌다는 걸 의미하기 때문이다.
파천마제(破天魔帝) 뇌일혁(雷溢赫), 그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크흐…… 내 모습을…… 보라……. 더 이상 마령기(魔靈氣)를 견딜…… 수가 없다……. 폐관……수련으로…… 주화입마를 겪었다…….”
파천마제는 숨을 헐떡이기 시작했다.
“어째서…… 주화입마가 왔는지…… 왜 암천마령기(暗天魔靈氣)가 깨졌는지…… 나도 알 수가…… 없다……. 분명…… 더 높은 경지를…… 보았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내공이 무너지더구나…….”
믿을 수 없는 얘기다. 주화입마를 겪는 무인은 두 종류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설픈 무인이거나, 너무 높은 경지를 무리하게 바라는 아둔한 자.
그러나 파천마제는 어느 쪽도 아니었다. 천하에서 가장 강한 고수 셋을 꼽으라면 꼭 이름이 들어갈 정도의 무인이 혼자 연공을 하다가 주화입마에 빠지다니, 지나가는 개가 웃을 노릇이다.
“누굽니까?”
바닥을 주먹으로 짓누르고 있던 흑염군(黑炎群)이 물었다.
“누구의 소행입니까?”
그는 단정하고 있었다. 누군가 술수를 부린 게 틀림없다고. 파천마제가 헐떡이면서도 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핫…… 내 목을 노리는 자가 한둘이더냐. 피하지…… 못한 아둔한 내…… 죄다.”
“교주님!”
흑염군은 파천마제의 속내를 읽었다. 어차피 마교 내에서 이루어진 일이니 내부인의 소행이리라. 교단에 피바람이 불 것을 저어하여 말을 아끼는 것이다.
“크큭, 쓸데없는…… 생각 말아라. 정말…… 모른다……. 다만 산공독(散功毒)에 당했다고…… 짐작할 뿐이다…….”
“그럴 수가! 교주님을 상하게 할 독이 있습니까!”
흑염군이 눈을 부릅떴다. 파천마제의 공력은 하늘에 닿았다. 제아무리 산공독이라 해도 만독불침의 경지를 이룬 파천마제 앞에는 무력할 터였다.
“말하지 않았……느냐……. 모른다고……. 이미 오래 전에…… 준비한 듯……싶으니…….”
잡을 수 없다. 그 정도의 독을 치밀하게 준비한 자가 증거를 남길 리가 없다.
파천마제는 그렇게 단정하고 있었다.
“그런 얘기를 하자고…… 너희를 부른 게…… 아니다. 이미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교주님! 약한 소리 마십시오!”
“크흐, 나를 보라…….”
팔혼은 파천마제의 말에 실린 깊은 울림 때문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교, 교주님! 몸이……!”
암혈팔혼의 우두머리, 일혼(一魂) 흑염군이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그 순간 파천마제의 몸이 크게 출렁였다.
“크윽!”
파천마제의 몸은 급속도로 노화되고 있었다.
새하얀 머리카락이 가닥가닥 떨어졌다. 양분을 모두 잃어버리는 듯 거죽이 점점 가라앉아 뼈의 윤곽이 앙상하게 드러났다.
누군가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로 탄식했다.
“이럴 수가…….”
파천마제의 몸을 수십 년의 시간이 한순간에 짓눌렀다. 팔혼의 표정을 보고 그는 희미하게 웃었다.
“크흘, 슬퍼……해서 무엇 하리……. 이것이 마교 교주의 운명인 것을…….”
역대 교주의 죽음은 모두 시체조차 온전치 못했다. 죽음을 앞두고 암천마령기공이 교주의 생명력을 모조리 갈취했기 때문이다. 괜히 마공(魔功)이 아닌 것이다.
“크으으, 이제 한계……다……. 너무나 이르구나……. 팔혼, 마지막 명령을…… 내리겠다…….”
쿠웅!
부복한 팔혼의 주먹이 땅을 때렸다.
“하명하십시오!”
앙상하게 말라 버린 파천마제가 띄엄띄엄 말을 이었다.
“내가 죽으면…… 성지에 있는…….”
점점 목소리는 잦아들었고, 발음이 불분명했다. 투두둑, 말을 하는 도중에 그의 입에서 뭔가 쏟아졌다. 그나마 남아 있던 이빨이 모조리 빠진 것이다.
“동고(憧顧)를…… 동고를…… 보필하라……. 아직…… 이십 년을…… 채우지 못한…… 것이…… 걱정되는구나…….”
“걱정 마십시오! 충분히 암천마령기공을 받아들이실 수 있을 겁니다!”
흑염군이 흔들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파천마제가 생기가 빠진 노인의 얼굴로 희미하게 웃었다.
“그래……. 너희만…… 믿겠다……. 부디 동고를 보필하여…… 천하를…….”
우물거리는 목소리조차 잦아들었다. 침묵이 찾아왔다. 파천마제는 고개를 푹 떨구고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교주님…… 교주님!”
숨이 끊어졌다.
한 가닥 남아 있던 생명력마저 자취를 감추었다.
“교주님! 이대로 가시면 안 됩니다!”
“어서 일어나셔서 천하를 손에 넣으셔야지요!”
팔혼은 주인의 죽음에 슬퍼했다. 눈물을 훔치는 자도 있었고, 묵묵히 슬픔을 씹어 삼키는 자도 있었다.
흑염군이 묵묵히 주군의 시신에 예를 취했다.
‘소교주님은 제가 보필하겠습니다. 기필코 흉수를 찾아 교주님의 무덤 앞에 그 시체를 바치겠습니다. 부디 편히 쉬시기를…….’
예를 취한 흑염군은 벌떡 일어났다. 붉어진 눈으로 흐느끼는 팔혼에게 버럭 소리쳤다.
“지금 이럴 때가 아니다! 슬픔은 뒤로 미룬다! 어서 성지에 연락하라! 소교주님을 한시라도 빨리 모셔야 한다! 소교주께서 도착하기 전까지 외궁(外宮)에는 절대 교주님의 부고를 알려서는 안 된다!”
그때였다. 거인처럼 덩치가 큰 사내가 눈을 부라리며 외쳤다.
“대사형! 흉수를 짐작하고 계십니까? 외궁에 있는 겁니까!”
“나도 모른다. 그러나 만약 교단 내에 흉수가 있다면…… 교주님께서 돌아가실 때를 노릴 수도 있다.”
이어서 그는 음산한 기운을 흩뿌리는 회색 복면인을 가리켰다. 검붉은 장포에 회색 복면은 어울리지 않았으나, 그가 입고 있으니 분위기와 어우러져 유령과도 같이 보였다.
“사림(死林), 너는 성지로 가서 소교주님을 모시고 와라. 만일을 위해서 유령대(幽靈隊)를 이끌고 가도록.”
“명을 받듭니다, 대사형.”
사림이 포권을 하고 답했다. 곧이어 픽 하고 사림의 신형이 꺼지듯 사라졌다.
“나머지 사람들은 말이 새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한다. 소교주께서 당도하시기 전에 얘기가 퍼지지 않도록. 자칫하면 교가 흔들릴 수도 있다.”
흑염군이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머지 팔혼은 어느새 슬픔을 거두고 냉정을 찾고 있었다.
“명을 받듭니다, 대사형!”
쿠웅!
팔혼의 주먹이 바닥을 쳤다.
사실 마교로서는 엄청나게 큰일이 벌어진 것이다.
마교 이십일대 교주 뇌일혁.
당금 무림의 천하제일 고수가 숨을 거둔 것이다.
파천마제 뇌일혁의 죽음은, 지금까지 유지된 정사양도의 균형을 무너뜨리기에 충분했다.
더불어 단 한 사람의 절대자로 유지되는 마교가 자칫하면 갈가리 찢겨 나갈 위험까지 생긴 것이다.

호남성 남쪽의 석명산(石鳴山)은 인적이 드문 산이다. 풍광이 수려한 것도 아니요, 산짐승이 풍부한 것도 아니고, 관도와 멀리 떨어져 있어 길로 쓰일 만한 곳도 아니다. 산세가 험하고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져 있어 찾아오는 사람 하나 없으니, 사람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는 곳이라 할 수 있다.
다만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면, 바람이 세차게 부는 날에는 종이 울리는 소리가 들린다는 것이다.
그 소리가 마치 석종(石鐘)이 울리는 것처럼 아름답다 하여 석명산이라는 이름이 붙은 게 특징의 전부였다.
파천마제의 후계자, 뇌동고(雷憧顧)는 바로 석명산 지하의 천연 동굴에서 살고 있었다. 천연 동굴은 여러 줄기로 갈라져 있어서, 마치 개미굴처럼 복잡하고 사람이 살 수 있을 정도로 거대했다.
뇌동고는 자신의 거처인 석굴 안에서 시녀를 희롱하는 참이었다.
“이, 이러시면 안 됩니다.”
“크흐흐, 안 되는 게 어디 있어. 나 몰라? 나 뇌동고라고. 네 주인이란 말이야.”
뇌동고는 시녀의 가슴 섶을 잡았다.
“소교주님…… 제발…… 제발요…….”
시녀가 흐느끼며 애원했다. 양손으로 자신의 옷고름을 부여잡았다.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버텼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제발요……. 흐윽. 저는 정혼자가…….”
뇌동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잔인한 미소가 떠오르더니 그가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