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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빨리 벗으라니까!”
짝!
뇌동고가 시녀의 뺨을 후려쳤다.
“아악!”
시녀는 비명을 토했다. 아직 열일곱 밖에 되지 않은 그였지만 힘은 장사다. 시녀는 입에서 피를 흘리면서 석실의 한쪽 벽으로 처박혔다.
“커, 커헉. 흐, 흐윽, 안…… 돼요…….”
앳된 얼굴의 소녀가 입가에는 피를 쏟으며 눈물을 흘렸다. 뇌동고는 차갑게 웃으며 소녀에게 서서히 다가갔다.
“앙탈은.”
그가 걸음걸음 다가올 때마다 소녀의 어깨가 흠칫흠칫 떨렸다.
“난 장차 교주가 될 몸이야. 교단의 모든 것은 내 것이라고.”
“저는…… 정혼자가…….”
“크큭, 어차피 정혼자라고 해 봤자 마교의 무사겠지. 그런 녀석은 버려. 말만 잘 들으면 내 첩으로 삼아 줄게.”
뇌동고의 두 눈은 사악한 탐욕으로 가득했다. 상대는 뇌동고의 시중을 들기 위해 교단에서 차출된 시녀였다.
그녀는 바들바들 떨면서 뒤로 기듯이 물러섰다. 그러나 금세 벽에 부딪쳤다.
‘아아…… 결국 이 망나니한테 정절을 잃는구나.’
시녀의 눈에 공포와 체념이 동시에 떠올랐다. 뇌동고는 소문난 망나니였다. 어렸을 때부터 후계자라고 사람들이 떠받들어 주니 안하무인의 망나니로 자랐다.
겨우 열일곱 살이다. 그런 주제에 벌써 성지의 여인들 중에 정절을 잃고 흐느껴 우는 사람이 부지기수요, 시비를 걸어서 병신을 만들어 버린 무사가 수십 명이었다.
대대로 성지를 지키는 교단의 장로들조차 뇌동고를 말리지 못했다. 어차피 교주가 될 몸이라 어지간한 잘못은 모두 눈감아 주다 보니, 이제는 손쓸 수 없는 지경까지 온 것이다.
‘나도 노리개가 되는 걸까…….’
한 번 뇌동고의 눈에 띄면 한동안은 벗어날 수가 없다. 다른 목표를 찾기 전까지 장난감이 되는 것이다. 정혼자를 무슨 낯으로 본단 말인가.
첩으로 삼아 준다는 말을 믿을 정도로 어리석은 여인은 없다.
“키킥, 계속 반항해 봐. 그래야 재미있어.”
뇌동고가 잔인하게 웃으며 손을 뻗었다. 시녀의 옷고름을 단번에 뜯어내고 옷을 풀어헤쳤다.
“아악!”
“그래, 그렇게 말이야.”
반사적으로 비명을 지르던 시녀가 입을 손으로 가리고 덜덜 떨었다. 뇌동고가 악마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웃었다. 그의 손이 시녀의 다리 사이를 더듬고 들어가 속곳에 닿는 순간이었다.
“그만두시오, 소교주.”
깊은 내력이 담긴 목소리가 동굴을 울렸다. 뇌동고는 우뚝 멈췄다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대답했다.
“갑자기 웬 참견이십니까, 한설(寒雪) 장로님.”
뇌동고의 거처에 나타난 사람은 백발의 수염을 신선처럼 기른 노인이었다.
“장차 교주가 될 사람이 어찌 이리도 천박한 짓을 한단 말이오. 소교주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짓이란 걸 왜 모르오. 당장 그만두시오.”
한설이 엄히 꾸짖었다. 그러나 뇌동고는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답했다.
“상관 마세요. 기약 없는 동굴 생활, 여자라도 있어야 그나마 버티죠.”
“기약이 없다니! 영광스러운 마교의 교주가 되기 위한 기다림이 아니오! 심신을 정히 하고 신공(神功)을 수련해도 모자랄 판에 어찌……!”
뇌동고가 인상을 찡그리며 한설을 돌아보았다.
“그걸 벌써 십칠 년이나 했잖습니까. 귀찮게 굴지 좀 마세요. 장로님이 할 일은 저를 보호하는 것이지, 제 사생활에 간섭하는 게 아닙니다.”
귀찮은 기색이 완연한 것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꼴이었다.
‘허어, 버르장머리가 없다 했더니 인성까지 개가 되어 가는구나. 모두 내가 부덕한 탓이다. 어렸을 때부터 엄히 가르칠 것을…….’
한설은 혀를 차면서 일단 뇌동고를 말릴 요량으로 그에게 다가가려 했다. 그러나 뇌동고는 한설에게서 시선을 거두더니 시녀의 젖가슴을 더듬는 게 아닌가.
“아, 안 돼요!”
“크흐흐, 부드럽기도 하다. 네 이년, 안 되는 게 어디 있느냐. 내가 된다면 다 되는 거야.”
한설이 이를 뿌득 갈았다.
“소교주! 그만두라는 말 못 들었소? 마교의 식구들은 그대의 장난감이 아니란 말이오!”
뇌동고는 시녀의 젖가슴에 얼굴을 파묻더니 나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라니요? 내가 교주가 되면 목숨을 바칠 존재들 아닌가요? 그러니 모두 제 것입니다. 조금 일찍 받는다고 죄가 될까요? 큭큭큭.”
치마 속으로 들어간 뇌동고의 손이 꿈틀거림에 따라 시녀의 비명성이 더욱 높아졌다. 사색이 되어 뇌동고의 손을 뿌리치려 해 봐도 뇌동고의 힘을 이길 도리가 없었다.
“이, 이…… 소교주!”
“아직도 안 가셨습니까? 아하, 운우지락을 나누는 모습을 구경하고 싶다면야 얼마든지…….”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시오!”
한설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시녀는 울음을 터뜨리며 비명을 질렀다. 뇌동고는 아랑곳하지 않고 시녀의 옷을 찢어서 벗겼다.
“꺄아악! 살려 주세요!”
시녀가 발버둥 쳤다. 빠져나가려고 미친 듯이 발버둥 치는데 얼핏 손톱이 뇌동고의 얼굴을 할퀴었다. 뺨에 세 줄기의 손톱자국이 남았다.
뇌동고가 뺨을 손등으로 훔쳤다. 붉은 핏방울이 묻어 나왔다.
“너…… 감히……!”
시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손을 싹싹 빌면서 용서를 구했다.
“소, 소교주님. 죽을죄를 지었어요. 사, 살려 주세요.”
“감히 내 얼굴에 상처를 남겨?! 천한 계집 주제에!”
퍼억!
뇌동고가 시녀의 얼굴을 후려쳤다. 내력을 실었는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쓰러졌다.
“아, 아아…….”
그녀는 바닥에 널브러져서 입과 코로 피를 토했다. 뇌동고는 거침없이 시녀의 배를 걷어찼다. 푸확! 시녀가 다시 피를 한 움큼 토했다.
“죽어! 죽어, 이년아! 조금 예뻐했더니 주인을 물어? 너 같은 건 당장 죽어도 싸!”
퍼억! 퍼억!
지켜보던 한설 장로의 얼굴이 푸들푸들 떨렸다.
“그, 그만 하시게, 소교주.”
“한 장로는 상관 말아요! 지금 이년이 내 얼굴을 찢는 걸 못 봤어요? 당장 죽어도 싼 년! 내 너를 때려잡아 개 먹이로 주마!”
빠득. 한설 장로는 절로 이가 갈렸다. 뻔히 모든 걸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런 말이 나온단 말인가.
“시녀의 실수였으니 그만 하시오. 이래서야 소교주 체면이 뭐가 되겠소. 넓은 도량을 보이시오.”
한설 장로는 좋은 말로 달래면서 뇌동고의 팔을 잡았다. 순간, 뇌동고가 팔을 거칠게 뿌리쳤다.
“참견 말랬지! 장로면 장로지, 어디서 훈계질이야! 썩 꺼지지 못해?”
시뻘게진 얼굴로 뇌동고가 버럭버럭 소리를 질렀다. 붙이는 둥 마는 둥 했던 경어도 온데간데없다.
“꺼지라……?”
“꺼지쇼! 나이 좀 많다고 대우해 줬으면 알아서 길 것이지, 어디서 윗사람 행세야?”
빠드득.
한설이 웃으면서 이를 갈았다.
“후후, 꺼지라……?”
“늙더니 귀가 먹었어? 귀찮게 참견하지 말고 꺼지란 말이야!”
뇌동고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구석에 처박힌 시녀는 울컥울컥 피를 토하면서 달달 떨고 있었다. 당장 옮겨서 치료하지 않으면 목숨까지 위태로울 판이다.
“그렇구려. 늙은이가 과한 참견을 했구려, 이 빌어먹을 놈아.”
“뭐, 뭐라고!”
한설이 정중히 욕하자 뇌동고가 뒤늦게 알아듣고 성을 냈다. 그러나 한설의 지팡이가 먼저였다.
부우웅!
“꺼지라 했느냐!”
한설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쥐고 있던 지팡이로 뇌동고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뻐어억! 묵직한 타격음이 터졌다. 뇌동고는 동굴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크으, 으윽! 이게 무슨 짓이냐, 한설 장로!”
“무슨 짓이냐? 내가 네 친구냐! 네놈이 벌써 교주라도 된 줄 알았더냐!”
뻐억! 뻐억!
한설의 지팡이가 춤을 추었다. 소교주의 호위와 교육을 담당하는 한설 장로다. 소교주의 사부 격이라는 말이다. 마교에서의 지위는 원로급이니 교주에게도 공대를 받을 정도다. 소교주에게 천대 받을 정도로 낮은 지위가 아니었다.
“아녀자를 겁탈하고! 무사들에게 시비를 걸어 팔다리를 부러뜨리고, 심지어 목숨을 빼앗기까지! 아무리 네놈이 장차 교주가 될 몸이라 한들 정도라는 게 있다! 그런 짓거리를 하고도 무사할 성싶었냐!”
퍼버벅!
지팡이가 빛살처럼 허공에 선을 남길 때마다 경쾌한 타격음이 터졌다.
“악! 왜 때려! 왜! 아아악! 미쳤느냐, 한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느냐! 내가 비록 한낱 장로에 지나지 않는대도, 명색이 소교주의 교육을 책임지고 있다! 네놈이 교주가 되었다가는 마교를 말아먹기 딱 좋으니 그 썩어 빠진 인성을 뜯어고치고 말겠다!”
십칠 년이다.
무려 십칠 년을 참고 살았다.
어렸을 적에는 마교의 소교주라고, 장차 마교를 이끌 후계자라고 금이야 옥이야 예뻐하면서 가르쳤다. 말썽을 부려도, 문제를 일으켜도 항상 그를 떠받들어 주었다. 성지에 모여 있는 마교인들 모두가 그를 교주처럼 받들었다.
어느 사이엔가 뇌동고가 도를 넘어선 사고를 칠 때조차도, 후계자 비전의 내공심법을 익히느라 마인(魔人)답게 변한다고 애써 자위했다. 덕분에 열네 살이 넘어서는 손댈 수 없는 망나니가 되었다.
그간 참고 참았던 한설 장로의 참을성이 결국 폭발한 것이다. 그는 과거 무림에서의 별호가 폭풍귀(暴風鬼)라고 불릴 정도로, 한 번 열 받으면 폭풍이라도 닥친 것처럼 사방을 초토화 시키는 성질의 소유자였다.
“크아악! 감히…… 크윽, 감히 나를 때려! 아버지도 안 때렸는데!”
“교주님께서 널 보신 것은 고작 두 번이다. 만약 네놈이 이런 꼴이었다는 걸 아셨다면…… 어이구! 죽어라, 이놈아!”
얼마나 두들겨 팼을까. 뇌동고의 하얀 비단옷이 붉게 물들고서야 한설은 손을 멈췄다. 퉁퉁 붓고 찢어진 얼굴로 뇌동고가 중얼거렸다.
“아버지가…… 아시면…… 넌 죽었어…….”
“오냐, 한번 교주님께 알려 봐라. 내 나이도 벌써 아흔이니 살 만큼 살았다!”
씩씩거리면서 외치는 한설을 보고 뇌동고는 결심했다.
‘기필코…… 죽여 버리고 말 거야. 감히 날 때려? 장로밖에 안 되는 자식이…… 교주가 될 사람을 때려? 오마분시 형에 처해 줄 거야. 두고 봐.’
열일곱 평생에 감히 매를 휘두르는 자가 없었다. 아니, 애초에 말을 험하게 하는 사람조차 없었다. 한설이 무슨 약을 먹고 미쳐서 이렇게 구는지는 몰라도 죽고 싶어서 환장한 게 틀림없다.
“내일까지 식사는 없다! 방에서 반성하고 있어!”
한설이 지팡이를 던져 버리면서 버럭 소리쳤다. 그러고는 혼절한 시녀에게 다가가 겉옷을 벗어 몸을 가려 주고는 방에서 데리고 나갔다.
“한설! 죽여 버릴 거야!”
홀로 남은 뇌동고가 발작적으로 소리쳤다.
한설이 뇌동고를 두들겨 팬 지 꼬박 하루가 지났다. 처음으로 뇌동고에게 매를 들었던 그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내가 너무 심했나.’
엄중하게 꾸짖을 수도 있었다. 시녀를 먼저 내보내고 뇌동고만 엄히 혼낼 수 있었다.
‘끙, 얼마나 마음의 상처를 입었을꼬. 아랫것 앞에서 창피를 당했으니.’
화가 가라앉자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비록 뇌동고가 인면수심의 짓거리를 했다고는 하나 엄연히 마교의 작은 주인이었다. 함부로 망신을 주었으니 자존심이 갈가리 찢겼을 것이다.
‘아니다. 아니야……. 늙으니 쓸데없이 마음만 약해지는구나. 무릇 주인이 되려면 주인의 그릇을 가져야 하는 법이다. 엄히 가르치지 않으면 망나니 교주가 되리라.’
늙으면 마음까지 무뎌지는 것일까. 젊었을 때는 대쪽같이 자신의 감정에 충실했던 한설이다. 그러나 말년에 함께한 뇌동고만 보면 마음이 자꾸 약해졌다.
‘아니야. 그래도 아버지 얼굴도 못 보고 지하에 처박혀서 수련에 몰두하는 것을……. 성격이 나빠질 수밖에 없지. 이해할 만하다.’
여러 가지 상념에 몰두하던 한설은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냥 지금까지처럼 대하면 될 것이다. 비록 나이는 어릴지라도 소교주 또한 사나이 대장부이니 옹졸하게 마음 쓰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 뉘우치고 있을 거야. 적당히 기회를 봐서 기분을 풀어 주자.’
결론을 내린 한설은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이미 새벽녘을 지나 아침이 되어 가고 있었지만 조금이라도 자 둘 생각이었다. 막 잠이 들려는 찰나였다.
“한 장로님! 한 장로님!”
누군가 문을 쾅쾅 두드리며 소리쳤다. 한설은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백 장로? 무슨 일인가?”
“아이고오, 큰일 났습니다!”
목소리가 절박했다.
‘무슨 사단이 났구나!’
한설은 황급히 침상에서 뛰쳐나와 문을 열어 주었다.
“이른 시간에 이게 무슨…….”
백 장로뿐만이 아니었다. 사색이 된 네 명의 장로가 문 앞에 있었다.
“소교주, 소교주가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그야 자기 거처에 있겠지. 그런데 도대체 무슨 일이오?”
뇌동고와 관련된 일인가 싶어 한설은 내심 움츠러들었다. 그런데 백양(白羊) 장로의 입에서 나온 말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교주께서 돌아가셨습니다!”
한설은 벼락을 맞은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지금…… 뭐라고 했소?”
“뇌일혁 교주님께서 숨을 거두셨다는 말입니다!”
“교주께서…… 돌아가셨다고?”
한설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떨리는 목소리로 반문했다. 신지문(迅指紊) 장로가 한숨을 쉬며 탄식하듯 대답했다.
“어젯밤에 갑작스레 돌아가셨다 합니다.”
“가,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요? 교주님이 왜!”
한설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거짓말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파천마제 뇌일혁은 백십 년을 살았다. 언제 죽어도 이상할 나이가 아니다.
‘하지만 교주님은 반로환동으로 젊음을 되찾으셨어. 노환으로 돌아가실 리가 없는데!’
찰나의 시간 동안 무수한 추측이 한설의 머릿속에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