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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신지문 장로 역시 믿을 수 없다는 투로 답했다.
“지난 백 일간 폐관수련에 드셨던 게 잘못되어서…… 주화입마를 겪으셨다고 합니다.”
“지금 주화입마라고 했소?”
한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교주님께서 주화입마라니? 지금 나랑 장난하는 것이오?”
하고 많은 사인 중에서 주화입마라니, 가당치도 않은 소리였다. 보통의 무인이라면 주화입마의 공포에서 멀어지기 힘들다. 그러나 파천마제는 천하제일인을 바라보는 완성된 무인이었다.
초절정의 경지를 이룬 무인이 주화입마에 들 가능성은 너무나도 낮았다.
“저희도 믿기 힘들었습니다. 그렇지만 마교에서 전서응이 왔어요. 사실이란 말입니다.”
신지문 장로가 단호하게 말했다. 거짓말을 할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한설은 재차 확인했다.
“정말……이오?”
신지문 장로는 입술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추호의 거짓이 없는 사실입니다.”
“허, 허허. 그럴 리가…… 그렇게 쉽게 가실 분이 아닌데…….”
한설이 허탈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눈빛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리 허무하게 가셨단 말인가.”
속이 텅 비어 버리는 기분이었다.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빠져나간 것처럼 허전했다. 그것은 비단 한설 장로만이 느끼는 슬픔이 아니었다. 이 자리에 있는 장로들 모두 뇌일혁 교주를 사십 년 이상 모신 원로공신들이었기에, 교주에게 보내는 정이 작지 않았다.
백양 장로가 앞으로 나서며 목소리를 높였다.
“상황이 그러하니 여쭐 것이 있습니다! 소교주님은…….”
“잠시만, 잠시만 기다리시게.”
뭐라고 말을 이으려는 백양을 손으로 제지하고, 한설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한설 장로……?”
백양을 비롯한 장로들은 한설의 태도가 너무나 진지하여 감히 잡지 못하고 그가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한설은 벗어 두었던 겉옷을 걸치고 의관을 단정히 했다. 그리고는 마교가 있는 남쪽을 향해 큰절을 올렸다.
‘교주님…….’
단 한 번도 말로는 꺼내지 못했다. 마음속으로는 형님처럼 섬기고 있다는 사실을. 절을 올리는 한설의 태도는 너무나 정중하고 엄숙했기에, 나머지 네 장로는 숨죽이고 그를 지켜보았다.
“부디 마음 편히 쉬십시오. 천하를 호령하던 교주님의 이름은 길이길이 남을 것입니다. 소교주가 이미 장성하였고 그의 자질이 남다르니, 마교의 앞날 또한 밝을 것입니다. 모쪼록 아무 염려 마시고 편안한 휴식을 취하기를 비오이다.”
절을 마치고 일어선 한설의 눈은 붉게 충혈 되어 있었다.
“그래…… 소교주가 어떻단 말이오? 교주께서 돌아가셨으면 마교로 떠날 준비를 해야 할 텐데요?”
비로소 한설이 뇌동고에 대해 말을 꺼내자 백양이 궁금해 죽겠다는 투로 물었다.
“제 말이 그 말입니다. 마교로 떠날 준비를 해야 하는데 거처에 없단 말입니다!”
“없다니요?”
한설이 어처구니없다는 투로 되물었다. 분명 근신할 것을 명령했다. 그런데 거처에 없단 말인가.
“사라지셨단 말입니다! 거처에도 없고, 성지 어디를 뒤져 봐도 보이질 않습니다!”
“사, 사라지다니요?”
한설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갑자기 그를 두들겨 팼다는 사실이 머릿속에 선명히 떠올랐다. 백양은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가슴을 두들겼다.
“말 그대로 사라졌습니다! 도무지 찾을 수가 없어서 사람을 풀었는데도 못 찾았습니다! 거처에는 이런 서찰만 남아 있었고요!”
그렇게 말하며 백양이 품속을 뒤져 서찰을 건네주었다.
“이건 또 웬 겁니…… 허억!”
한설은 서찰을 보고는 눈을 부릅떴다. 길게 읽을 필요조차 없는 간단한 한 줄이었다.
한설(寒雪) 필살(必殺)
한설, 기필코 죽이겠다.
“허어! 이, 이게 대체 뭡니까!”
“우리가 묻고 싶은 말입니다. 한 장로님,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왜 소교주가 그런 글을 남긴 겁니까?”
그제야 한설은 일이 심각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 그것이…….”
별수 없이 한설은 어젯밤에 있었던 일을 간략히 설명해 주었다. 그의 설명을 듣던 장로들의 얼굴은 무참히 구겨지더니, 마침내 절망으로 변했다.
백양이 탄식하며 한설을 추궁했다.
“어쩌자고 매를 들었습니까! 소교주가 얼마나 성질이 더러운지 모른단 말입니까.”
한설이 인상을 썼다.
“도저히 눈뜨고 볼 꼴이 아니었단 말이오! 오죽하면 내가 손을 댔겠소!”
소교주의 악행은 백양도 익히 아는 터였다. 그러나 상황이 너무 좋지 않았다.
“허어, 그래도 참아야 했소이다. 이제 이 일을 어쩐단 말입니까. 내 한 장로께 죄를 추궁하려는 게 아니오. 일이 너무 커졌단 말입니다.”
“허…… 거참, 그 정도 일로 이렇게까지…….”
상황을 보아하니 벌써 성지를 뛰쳐나간 모양이다. 욱하는 성격에 일을 저질렀으니 어디로 도망갔을지 몰랐다. 한설은 난감한 표정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당장 교단에는 뭐라고 한단 말입니까. 암천마령기를 전해야 하니 한시라도 빨리 보내라고 전서응이 왔어요. 곧 유령대가 모시러 올 것입니다.”
백양이 가슴을 쳤다. 가만히 듣고만 있던 오장로 육제덕(陸堤德)이 조심스레 의견을 꺼냈다.
“일단 추적대를 구성해서 성지 근처를 찾아보는 게 어떻습니까? 게다가 욱해서 나간 것이니…… 어쩌면 제풀에 지쳐서 돌아올 수도 있습니다.”
한설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는 비록 욱하는 성격이어도 어리석은 사람은 아니었다.
‘쉽게 볼 일이 아니야. 소교주가 성지에서 나왔다는 얘기가 돌았다가는 봉변을 당할 수도 있어. 한시라도 빨리 처리해야 한다.’
한설은 이내 생각을 마치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그랬다가 무슨 사고라도 나면 늦소. 전서응을 통해 사실대로 적어서 보내시오”
“그, 그래도 되겠습니까? 자칫하면 교단에서 한 장로님을 추궁할 수도 있습니다.”
육제덕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한설은 한숨을 토했다.
“괜찮소이다. 모든 책임은 내가 지겠소. 교단에 지원을 요청하시오. 유령대의 추적술이라면 금방 소교주를 찾을 것이오.”
아쉽게도 성지의 무사들은 추적술에 재주가 없다. 그러나 이틀거리에 있는 마교 본산에는 추적술의 귀재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그중 마교팔대 중 하나인 유령대는 은신과 추적이 장기였다.
한설은 입술을 깨물고 눈을 감았다. 아직 철부지인 뇌동고가 교주의 자리에 오르면 제일 먼저 자신의 목을 벨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그대로 전서응을 보내겠습니다.”
장로들이 전서응을 보내기 위해 자리를 비웠다. 홀로 남은 한설은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큰일이구나. 큰일이야.”
그는 탄식을 흘리며 손에 쥐고 있던 구겨진 서찰을 다시 한 번 펴 보았다.
한설 필살
“허허, 허허허허.”
한설은 허탈하게 웃었다.
“반드시 죽이겠다 하였으니…… 소교주가 교주가 되면 제일 먼저 죽임을 당하겠구나.”
한설은 착잡한 심정을 누를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허무하게 목이 날아가게 생겼다.
‘이를 어쩐다. 이대로 은퇴하고 심산유곡에서 노후를 보낼까? 아니면 폐관수련을 빙자하고 도망칠까?’
거기까지 생각하던 한설은 이내 실소를 터뜨리며 고개를 저었다.
‘소교주가 어리니 치기 어린 마음이 들었을 게다. 곧 정신을…… 차리겠지. 그래, 그럴 거야.’
그렇게 안심하려고 했다. 그런데 자꾸만 서찰 속의 글자들이 눈에 거슬렸다. 강력한 의지를 담고 꿈틀대는 것만 같았다.
‘……역시 대책을 마련해 둘까?’
무슨 준비를 하든 가만히 앉아서 목이 날아가는 것보다는 낫다. 한설은 살아날 수 있는 대책을 강구하는 한편, 조용히 빌었다.
‘어찌 됐든 무사히 돌아오시오. 소교주, 이제 당신의 어깨에 마교의 운명이 달렸으니…….’
창건은 숲길을 따라 걸었다. 사람이 아니라 동물이 다니는 좁은 오솔길이다. 울창한 나무에 가려 햇빛도 제대로 들지 않는 숲이건만, 창건은 제집 마당을 걷는 것처럼 거침이 없었다.
‘흐흐, 이제 맹에 돌아가기만 하면 풍운청룡단에 들어갈 수 있어.’
정도영웅무림맹(正道英雄武林盟)에 몸을 담은 지도 벌써 팔 년이다. 팔 년간 뼈를 깎는 노력으로 수련에 임했고 한시도 편히 쉬어 본 적이 없었다.
연줄도 없는 고아의 몸이었기 때문에 남들보다 더 노력했다. 수련제자로 오 년, 하급무사로 삼 년을 보내고 이제야 진가를 인정받은 것이다.
“으하, 으하하하!”
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주위에 보는 사람도 없으니 체면을 차릴 필요도 없었다.
“아싸! 아싸! 나도 이제 무림맹의 주목받는 고수라 이거야!”
지금 창건은 칠 일간의 휴가를 보내고 맹으로 귀환하는 길이었다.
집도 절도 없는 그였지만, 떠돌이 고아로 지낼 때 보살펴 주었던 주유현의 어른들에게 인사를 올리러 왔던 것이다.
이미 마을을 떠난 지 십 년 가까이 시간이 흘렀기에 기억하던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를 축하해 주었다.
“풍운청룡단이라…… 하하하!”
창건의 나이 열일곱, 무재(武材)의 가치가 갈리는 나이에 성공의 길을 거머쥔 것이다.
‘돈 많은 집 자제들에게 얼마나 밀렸던가. 연줄 있는 집 자식에게 얼마나 억울함을 당했던가. 하지만 나도 이제 출셋길에 올랐다 이거야.’
주체할 수 없는 환한 미소가 얼굴 가득히 떠오른 것도 당연했다.
“이제 너도 안녕이다, 서 푼짜리 싸구려 검아. 푸하하핫!”
풍운청룡단에 입단하면 검신에 청룡(靑龍)이라 새겨진 청룡검을 하사 받는다. 손때가 가득 묻은 낡은 청강장검 따위는 비할 바가 못 된다.
귀찮아서 나흘에 한 번만 빨았던 땀내 나는 낡은 흑의무복도 안녕이다. 풍운청룡단의 화려한 단복을 받게 된다. 꿈에 그리던 화려한 무복을 입고 눈부신 명검을 휘두르는 성공한 무인이 되는 것이다.
‘열일곱에 풍운청룡단! 충분히 빠른 출세라 할 수 있어. 이대로 스물다섯 살에는 풍운청룡단의 부단주가 되고, 서른 살에는 풍운청룡단의 단주가 되는 거야. 그때쯤에는 친분이 두터워진 원로고수 중의 한 명에게 절기를 전수받고.’
가늘고 길게, 끈덕지고 안정적이게. 창건의 좌우명이다.
‘이름을 떨치는 건 마흔 이후에도 충분해. 충분히 무공을 쌓고 마인을 하나 때려잡는 거야. 사파의 고수 내지는 마교의 고수를 하나 딱 잡아 버리면, 내 이름이 하늘을 찌르겠지. 그때 무림맹 맹주님의 손녀를 부인으로 받는 거야. 우히히. 그리고 마침내 맹주님의 후계자가 되어 정도무림의 정상에 서는 거지.’
거기까지 생각하면서 실실 웃던 창건은 갑자기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괜히 협행 다니다가 급살 맞아 죽으면 어떻게 해. 아무리 무공을 착실히 쌓았어도 모르는 일이야. 마흔 살이 되면 차라리 비무행을 다닐까? 무패의 검객, 창건! 결국 그 명성으로 맹주님의 손녀를 아내로 맞고 후계자가 되는 거지.’
창건은 짐짓 자신의 검을 뽑아 멋진 자세를 잡아 보았다.
결과는 언제나 같았다.
정도무림의 최정상에 서는 것. 그게 자신이 꿈꿀 수 있는 최고의 위치라고 생각했다.
‘아니야, 이것도 아니야. 나한테는 어울리지 않아. 비무라고 해서 항상 안전한 것은 아니니 자칫하면 죽을 수도 있다고. 그저 인생은 안정적인 게 제일이야. 얇고 길게, 노후를 생각해서라도 모험 없이 안전하게 사는 거다. 물론…… 무림맹주 직이나 맹주님 손녀와는 멀어질지 몰라도 그게 인생인걸. 기반 없는 모험을 꾀하기보다는 토대가 단단한 안정을 추구할래.’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시는 창건이었다. 머릿속에서 무림맹주와 맹주의 손녀를 들었다 놨다 하기를 수차례. 위험할 것 같으니 혼자 벌써 포기한 것이다.
출셋길은 그저 안정적인 게 최고라면서.
“어디 보자…… 돌아가는 데 팔 일이면 충분하려나.”
몇 년 만에 처음으로 이십 일의 휴가를 받았다. 오는 데 칠 일이 걸렸으니, 돌아가는 데 넉넉잡고 팔 일이면 될 것이다.
창건은 걸음을 재게 놀렸다.
주유현에서 길을 따라 관도로 가려면 멀리 돌아야 한다. 그러나 창건은 숲을 가로지르는 지름길을 알았다. 숲이 워낙 울창하여 처음 오는 사람은 길을 잃기 십상인 곳이다.
그러나 창건에게는 어렸을 때 제집처럼 드나들며 뛰어놀던 곳이라 손바닥 보듯 훤했다.
‘여기도 팔 년 만인가. 변한 게 하나도 없네.’
감회에 젖었던 것도 잠시, 창건은 오솔길을 빠르게 가로질렀다. 어서 숲을 빠져나가야 한다. 해가 떨어지면 정말로 길을 잃게 될지도 몰랐다.
그때였다.
바스락.
‘어? 이게 무슨 소리야?’
바스락.
빠르게 걷던 창건의 귀에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산짐승이라도 있는지 멀리서 수풀이 들썩였다. 창건이 귀를 기울이는 순간 우렁찬 고함 소리가 터졌다.
“이런 제기랄! 길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