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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제2장 비틀린 운명
사람이 있다.
‘별일이네. 사람 만나기 힘든 곳인데.’
창건은 오솔길을 벗어나 나뭇가지 사이로 슬쩍 상대를 확인했다.
화려한 흑의장포를 걸친 청년이었다. 옷에는 붉은색의 실로 화려한 무늬가 그려져 있었다.
“아아악! 빌어먹을!”
퍼억!
숲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소리친 흑의장포의 청년은 아름드리나무를 발로 걷어찼다.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얼씨구. 행색은 부잣집 도련님인데 성질은 엄청 더럽구나.’
창건은 혀를 내둘렀다. 저런 사람이랑 엮여 봐야 좋을 것 하나 없다. 마주치지 않는 편이 좋다.
‘에이…… 여기서 길 잃으면 자칫하면 못 나가고 죽는데.’
무시할 수가 없었다. 이상한 사람 같았지만 눈 질끈 감고 길만 안내해 주면 될 일이다. 그냥 두고 갔다가 길을 잃고 헤매서 죽어 버리기라도 하면 뒤끝이 좋지 않으리라.
‘그냥 도와주자.’
창건은 친절을 베풀기로 했다.
“거기, 이봐요.”
“허억, 허억! 도대체 빌어먹을 길이…… 거기 누구 있나?”
흑의장포의 청년은 나무에 기대서 거칠게 숨을 쉬고 있다가 목소리를 듣고는 눈을 번뜩이며 상대를 찾았다.
창건이 수풀을 양옆으로 밀치면서 모습을 드러냈다.
“길을 잃었죠? 내가 도와줄 테니…….”
“이런 빌어먹을! 거기 있었으면 당장 왔어야 할 것 아냐! 뭘 우물쭈물한 거야!”
의기양양하게 도움을 베풀려던 창건의 말이 단칼에 잘렸다. 창건은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에?”
“어서 와서 길을 안내하란 말이다! 멍청한 놈, 내가 얼마나 헤맸는지 아나!”
오만한 인상의 청년은 인상을 잔뜩 찡그리며 당연하다는 듯이 명령했다.
“예?”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다. 창건이 다시 반문하자 그는 버럭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런 멍청한 자식! 나는 뇌동고란 말이다! 당장 길을 안내하지 못할까! 목이 달아나야 정신을 차리겠냐!”
“예? 아, 예. 알겠습니다. 이쪽으로…….”
기백에 눌렸다.
창건은 얼이 빠져서는 자신을 뇌동고라 밝힌 청년을 오솔길로 안내했다. 자신이 왜 명령에 따라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뇌, 뇌동고가 누군데? 뭐 하는 자식이기에 저렇게 오만해? 혹시 미친놈 아니야?’
창건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뇌동고는 턱을 하늘로 쳐들고 뒷짐을 지고는 오만하게 터벅터벅 그를 따랐다. 그런데 몇 걸음 걷지도 않아서 뒤통수에 불이 번쩍했다.
뻐억!
“아악!”
창건은 뒤통수를 감싸 쥐고 펄쩍 뛰었다. 뒤에서 따라오던 뇌동고가 주먹으로 후려갈긴 것이다.
“왜 때리는 겁니까!”
창건이 울상을 지으며 그를 돌아보았다. 뇌동고가 미간을 찡그리고 소리쳤다.
“얼간이 자식아! 길을 정리하지 않고 뭐 하느냐!”
이건 또 무슨 소리란 말인가. 창건이 황당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기, 길을 정리하다니요?”
“바닥의 돌을 고르고 가지를 치워! 내가 이런 것까지 일일이 말해 줘야 하나! 정말 죽고 싶나!”
살기가 대단했다. 정말 당장 길을 치우지 않으면 때려죽일 것처럼 노려보고 있었다. 게다가 오만한 명령이 어찌나 자연스러운지, 정말 황족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비, 빌어먹을. 도대체 뭐 하는 놈이야!’
또 기백에 눌렸다.
창건은 상대의 신분이 엄청나게 궁금했다.
‘물어보면 그것도 모르냐고 또 때리는 거 아냐? 우씨, 미치겠네. 그냥 버리고 갈걸.’
그러면서도 상대의 신분을 짐작할 수 없어 명령을 따랐다. 발로 돌을 차 내고 검으로 나뭇가지를 베면서 뇌동고의 시중을 드는 창건이었다.
‘대단한 가문의 아들인가? 세도가의 자식?’
영문 모를 일이었다.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면 시종도 하나 없이 숲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맬 이유가 없다.
‘그런데 입은 옷은 또 비싸 보인단 말이지. 가출한 돈 많은 집 자식 아냐?’
창건은 그에게 들리지 않도록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불현듯 떠오르는 게 있어 질문했다.
“어디까지…… 가십니까?”
제발 반대 방향이었으면 좋겠다고 빌었다.
이런 사람이랑 같이 다녀 봐야 득 될 게 없다. 아무리 신분이 높은 사람이라도 주는 것 없이 받을 줄만 알면 피곤하다.
뇌동고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광서성 남녕(南寧)으로 간다.”
“아이고, 아쉽게도 저랑 반대 방향이시군요. 저는 하남으로 가는 길이거든요.”
창건은 쾌재를 불렀다. 아예 갈 길이 다르다.
“하지만 걱정 마십시오. 반나절이면 관도에 도착하니까요. 제가 남녕으로 향하는 길을 자세히 일러 드리겠습니다.”
창건은 친절하게 말했지만 뇌동고의 얼굴은 점차 일그러졌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감히 나를 길에 던져두고 네 갈 길을 가겠다는 거냐?”
뇌동고가 불쾌한 목소리로 외쳤다.
“예? 아, 아니…… 저도 공자를 남녕까지 모시고 싶지만…… 제가 휴가 나온 몸이라서 말입니다. 하루라도 빨리 돌아가지 않으면 징계를 받게 된단 말입니다. 지금도 이미 일정이 빠듯하거든요.”
거짓말이다. 나흘 정도의 여유가 있다. 하지만 그것까지 말할 의리는 없었다. 무엇보다도 광서성, 그것도 남녕은 마교의 세력권 중심이다.
‘무림세가 쪽은 아니고…… 세도가의 자식인가 보구먼.’
무림인이라면 광서성 남녕으로 간다는 소리를 절대 할 리가 없다. 창건은 뇌동고의 정체를 대충 짐작했다.
‘돈 많은 집 아들이거나 벼슬아치 자식이겠지. 무림의 생리를 모르는 놈이야. 그래도 이 정도면 말이 통했겠지. 내 사정이 있다는데…….’
높은 사람들 중에는 상대의 사정 따위는 생각하지 않고 안하무인으로 구는 작자가 많았다. 불쌍한 표정을 짓는 창건에게 뇌동고가 딱 잘라 말했다.
“시끄럽다.”
아쉽게도 뇌동고도 그런 작자였다.
“감히 누가 징계를 내린단 말이냐. 내 길안내를 했다고 하면 상을 내렸으면 내렸지 벌을 내리진 않을 테니, 그런 걱정 말고 안내해라.”
창건은 소리 죽여 한숨을 쉬었다. 도대체 자기 신분이 뭐라고 이름만 대면 상을 내린단 말인가.
“하지만 공자님, 저는 맹에 돌아가지 않으면 징계를 받는단 말입니다.”
일부러 맹이라는 글자에 힘주어서 말했다. 하남에 있는 맹이라고는, 그것도 무림인이 징계 운운할 곳은 단 하나 밖에 없었다.
정도영웅무림맹.
‘제발 좀 알아들어라! 아무리 무림인이 아니라도 그 정도는 알아야지!’
그러나 상대는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였다.
“그러니까 뇌, 동, 고, 내 이름 석 자만 말하란 말이다! 말귀를 못 알아먹는 녀석! 정말 피를 봐야 정신을 차리겠느냐!”
창건은 답답해 죽을 지경이었다.
‘뇌동고가 누군데! 내가 기억하기로 뇌(雷)가에서 무림에 이름을 떨친 사람이 없다. 명문세도가에도 뇌씨가 잘나간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단 말이다! 어디 졸부 아들 아냐?’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창건은 주저하다가 입을 열었다.
“저어, 공자님…….”
“아직도 할 말이 남았느냐! 또 쓸모없는 소리를 하면 내 필히 네 목을 치겠다!”
창건은 침을 꿀꺽 삼켰다. 협박이 살벌하였으나 그렇다고 이렇게 끌려 다닐 수는 없었다.
‘맹의 이름을 들었는데도 저러는 건…… 정말 무림맹과 연관이 있는 세도가의 자제일지도 몰라. 아니면 아예 바보이거나. 전자라면 징벌을 피할 수 있도록 미리 증명을 받는 게 좋겠어.’
잠시 머리를 굴린 창건은 한 가지 방법을 떠올렸다. 그는 사람 좋게 웃으면서 말했다.
“정 그러시다면 제가 남녕으로 모시겠습니다. 다만, 제가 징계를 피할 수 있도록 무림맹 앞으로 서찰을 한 통 써 주시겠습니까?”
물론 그 서찰은 자신이 먼저 읽어 볼 작정이었다. 사정을 설명하는 글이라면 최소한 자신의 신분을 밝히리라.
‘만약 징벌을 피할 수 없을 정도로 영향력이 적은 가문의 자제라면…… 적당히 핑계를 대고 도망가야지.’
“…….”
뇌동고가 우뚝 멈추었다.
“지금 뭐라고 했느냐?”
그의 목소리가 싸늘했다.
앞서 걷던 창건은 뇌동고의 발소리가 들리지 않자,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마, 마음이 상하셨습니까?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제가 벌을 받는단 말씀입니다. 자라나는 정도의 새싹에게 어렵다 생각지 마시고 서찰 한 통만 부탁드립니다.”
혀에 기름칠을 한 것처럼 말이 술술 나왔다. 창건은 상대의 비위를 맞추는 데 뛰어난 재주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재주가 먹히지 않는 듯했다.
“네놈…….”
오만하게 치켜 올라간 눈썹이 바들바들 떨렸다. 뇌동고는 시종일관 비웃음을 머금었던 입술을 꾹 깨물고 있었다.
“무림맹 소속이었단 말이냐?”
들끓는 감정을 꾹 억누른 목소리였다. 그 기색은 읽지 못한 채 내용만 들은 창건은 속으로 혀를 찼다.
‘역시 몰랐군. 어쩐지 세상 물정 모르는 도련님 같더라니.’
이왕 이렇게 된 것, 창건은 가슴을 펴고 대답했다.
“예! 이번 휴가가 끝나면 풍운청룡단에 들어가게 되었지요!”
수재들만 들어갈 수 있다는 풍운청룡단의 일원임을 밝히는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다. 정도 무인이라면 누구나 찬사를 보내리라.
‘후후, 놀랐겠지.’
“무림맹이라…….”
이내 뇌동고의 떨림이 가라앉았다. 대신 그의 얼굴에는 싸늘한 미소가 떠올랐다.
‘뭐야? 왜 기분 나쁘게 웃어?’
뇌동고는 활짝 웃더니 나지막이 말했다.
“크큭, 아주 잘됐구나.”
“예?”
뭐가 잘됐단 말인가. 창건이 눈을 크게 뜨고 되물었다. 뇌동고는 가볍게 손을 풀더니 싸늘하게 말했다.
“아버지께 드릴 선물이 없었는데 네 목을 드리면 되겠군.”
“뭐, 뭐라고요?”
창건이 자기도 모르게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뇌동고에게서는 지독한 살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죽여 주마, 무림맹의 개.”
뇌동고가 쌍수를 들어 올렸다. 창건은 그의 손에 막대한 진기가 몰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무, 무림인이다. 그것도 고수!’
쉬이익!
바위라도 부술 기세로 뇌동고의 좌장(左掌)이 휘둘러졌다. 창건은 황급히 발을 놀려 간신히 피했다. 뇌동고의 좌장은 엉뚱한 나무를 후려쳤다.
콰드득!
“무, 무슨 짓입니까!”
아름드리나무의 허리께가 깊숙하게 파여 나갔다. 마치 쥐어뜯은 것처럼 파인 자국을 보고 창건은 공포를 느꼈다.
‘엄청난 파괴력이다!’
“흥! 쥐새끼처럼 잘도 피하는군.”
살기가 번진 눈으로 창건을 노려보며 뇌동고가 비웃었다. 그의 손은 새카맣게 물들어 있었다.
아른거리는 흑색의 기운, 독특하게 구부려진 손 모양. 언뜻 보면 조법 같지만 실은 장법인 무공이다. 창건의 머릿속에는 무림에 위명이 자자한 절기 하나가 떠올랐다.
“흑수(黑手)에 응조(鷹爪)를 취한 장법(掌法)! 설마 절혼장(絶魂掌)이냐!”
“호오, 이것을 아느냐? 하긴 유명한 것이라 했으니 무림맹의 개도 알아볼 수 있겠지. 큭큭큭, 맞다. 마교의 절혼장이다.”
뇌동고가 킬킬 웃었다. 쥐를 앞에 둔 고양이의 모습이다. 창건은 눈앞이 깜깜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런 바보 같은 경우를 봤나. 내 주제에 무슨 길 잃은 사람을 돕는다고……. 그냥 무시했으면 험한 꼴은 피했을 것을.’
후회가 너무 늦었다.
어설프게 입을 놀린 것도 실수다. 호남이라면 매로검의 말대로 경계 지역인데 굳이 무림맹 소속이라고 밝힐 것도 없었다. 창건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한탄했다.
“빌어먹을…….”
창건은 공포에 질려서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절혼장은 마교에서 자랑하는 무공 중 하나로, 천하 십대장공 중 하나로 꼽힐 정도였다. 사람의 팔다리를 뜯어 버리는 것은 예사요, 심하면 갈비뼈를 뚫고 심장을 뽑아 버릴 수도 있는 잔악한 무공이었다.
‘어떻게 하지? 도망갈까? 무작정 도망칠까?’
절혼장을 쓰는 고수를 상대하기엔 역부족이다. 자칫하면 일 초 만에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 맞서 싸웠다가는 개죽음 당하기 십상이다.
“크크큭,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길에 무림맹의 쥐새끼를 잡다니 정말로 운이 좋구나. 성지에서 뛰쳐나와 면목이 없었는데 네 목으로 체면을 차릴 수 있겠다.”
창건은 결정했다.
도망치기로.
“웃기지 마랏! 순순히 죽어 줄 것 같아!”
창건의 고함에 뇌동고는 조소했다.
“떨리는 몸이나 주체하거라, 애송이 녀석…….”
뇌동고는 말을 맺지 못했다.
‘지금이다!’
창건이 갑자기 지면을 걷어찼다. 파악! 한 줌의 흙이 튀어 올라 뇌동고의 얼굴을 덮쳤다. 그와 동시에 몸을 돌려 경공을 펼쳤다.
파앗!
창건의 몸이 수풀 사이로 사라졌다.
“감히 잔재주를!”
뇌동고가 버럭 소리를 지르고 창건을 쫓았다.
창건은 가슴이 터지도록 뛰었다. 숲에서 경공을 펼치는 건 처음이라, 발 디딤이 불편해서 속도가 나질 않았다. 그러나 뇌동고는 더욱 불편할 터였다.
‘승산은 있어! 숲길은 익숙한 사람이 빨라!’
그러나 오산이었다. 불과 백 장도 뛰지 못했는데 뇌동고가 맹렬히 간격을 좁혀 왔다.
“서라! 정도의 개자식아!”
사사사삿! 수풀 흔들리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창건은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뛰었다. 그러나 소리는 점점 가까워져서 바로 등 뒤까지 따라붙었다.
‘안 돼! 뭐가 이렇게 빨라!’
창건은 지척에서 인기척을 느꼈다. 곧이어 뇌동고의 음산한 목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