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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고루가 목소리를 낮추고 다시 물었다.
“고루야, 경비무사가 뇌옥의 출입이 자유로울 리 없지 않느냐. 게다가 약과를 들고 오다니, 병장기 이외에는 휴대가 금지되어 있다는 걸 생각하면 더욱 의심스럽다.”
“그, 그렇습니까?”
“사흘 만에 오귀당의 기록을 찾아서 온 것까지 생각하면…… 절대로 평범한 경비무사가 아니다. 틀림없이 뒤에 누군가 있을 게다.”
얘기를 듣고 고루비도의 노안이 일그러졌다.
“혹시 약과도 위험한 거 아닙니까? 이거 토해야 하는 거 아냐?”
“독은 없었다. 시간이 지나도 멀쩡한 걸 보니, 다른 약도 없는 듯하다. 게다가 우리가 무력하다 생각할 테니 독을 쓸 이유도 물론 없지.”
“하긴 그것도 그렇군요.”
고루비도가 납득하고는 대답할 때였다. 멀리서부터 걸어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육악마는 일제히 입을 닫았고, 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황맹 선배를 만나고 왔습니다.”
창건이 다시 나타났다. 그의 눈빛은 심히 흔들리고 있었다.
“그래, 원하는 얘기는 들었느냐?”
진효가 묻자 창건이 고개를 저었다.
“황맹 선배께서는 제 말을 듣지 못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계속 엉뚱한 얘기를 하시다가…… 저렇게 소리를 지르고 계십니다.”
“그러게 내가 자극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 너야 나가 버리면 그만이지만, 남은 우리는 시끄러워서 잠도 못 잔다.”
진효가 짐짓 불만스럽게 말하자, 창건은 당황해서 허리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더 주의를 기울였어야 하는 건데…….”
“됐다. 이미 벌어진 일을 어쩌겠느냐. 그만 나가 보거라.”
창건은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다가 결국 울상을 짓고 재차 사과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럼 후배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찬합을 주섬주섬 챙겨서 밖으로 향하는 창건이었다. 진효는 갑자기 그를 불렀다.
“이름이 동고라고 했던가?”
“예? 아, 예. 후배의 이름이 맞습니다.”
“약과는 정말 맛있었다. 고맙구나.”
의외의 칭찬에 창건은 환히 웃었다.
“다음에 또 가져오겠습니다. 그럼 그때까지 안녕히 계십시오.”
창건이 꾸벅 인사를 할 때였다. 갑자기 진효가 손가락 끝으로 돌바닥을 따닥, 하고 가볍게 두드렸다. 그러자 고루비도가 늘어져 있던 오른손의 손목을 가볍게 튕겼다.
시이이익.
아주 미세한 공기의 흐름이 생겼다. 인사를 마치고 뒤돌아서는 창건은 순간 찬합을 들고 있던 왼손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어엇?”
찬합을 싸맨 비단 보자기가 끊어지면서 찬합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이런!”
창건은 무의식중에 두 개의 찬합을 발로 차올렸다. 그러곤 발이 닿지 않는 찬합은 풀어헤쳐진 보자기를 가볍게 휘둘러 잡아챘다.
“휴우……. 운이 좋았다.”
창건은 한 호흡 만에 간신히 찬합을 모두 끌어안을 수 있었다. 바닥에 떨어진 게 하나도 없자, 창건은 운이 좋다며 헤죽 웃었다.
‘저럴 수가!’
멀리서 기척을 느끼던 육악마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헤헤, 후배가 칠칠치 못해서 찬합을 쏟을 뻔했습니다. 그럼 정말 가 보겠습니다.”
창건은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찬합을 가슴에 안고 사라졌다.
“저, 저놈은 도대체 뭡니까?”
고루비도가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가 손목을 튕겨서 날린 것은 날카롭게 갈아 낸 돌조각이었다. 그는 눈이 보이지 않아도 자유롭게 비도를 날릴 수 있는 경지였다.
“분명 흑풍회선(黑風回旋)에 풍오각(風烏脚)이었다. 그것도 무의식중에 펼쳐 낼 수 있는 경지라니…….”
진효 또한 잔뜩 긴장한 상태였다.
“그것들은 교주 비전의 무공일 텐데요.”
폭돈은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흑풍회선과 풍오각은 이름만 널리 알려진 교주의 비전무공이다. 흑풍회선은 병장기를 자신의 몸처럼 이용하는 병기술이고, 풍오각은 절정에 이르면 마치 바람 속에 녹아든 검은 새와 같이 민첩하고 예리하다고 전해진다.
“다음에 다시 오면…….”
편수편족이 살기를 띠었다.
“확실히 알아보지요. 가벼이 생각할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진효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그래야겠다.”
그렇게 말한 진효는 주먹을 꾹 쥐었다가 허공을 향해 질렀다. 피잇! 허공에 하나의 선이 질러졌다가 사라졌다. 진효의 주먹은 언제 그랬냐는 듯 제자리에 있었다.
파드득.
진효가 겨냥했던 복도의 천장은 깊게 파여 있었다. 거대한 주먹의 모양으로.
“만약 또다시 우리를 이용하려는 자가 있다면…… 그때는 구족까지 모두 찢어 죽일 것이다.”

한편, 자신의 생명이 경각에 달렸다는 것도 모른 채 뇌옥에서 빠져나온 창건은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암천의 마령은 암천마령기를 뜻하는 것일 테고…… 그렇다면 기린과 은월은 뭐지?’
기린은 상상 속의 영수다. 지상에 기린이 내려오면 길조라 하여 평화가 찾아온다는 옛날 얘기는 창건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막연한 얘기는 아니리라.
‘아냐, 기린은 황제의 출현을 뜻한다고도 했으니까…… 마교를 무너뜨릴 사람? 그렇게 해석하면 되나? 그럼 은월은 뭐지?’
은월은 더욱 헷갈렸다. 풀이하면 숨겨진 달이다. 기린은 비교할 대상이라도 있는데 은월은 갈피조차 잡히지 않았다. 하루 종일 생각에 잠겼던 창건은 결국 밤중에 후원으로 나갔다.
“숨겨진 달이라…….”
창건은 하늘을 보고 있었다. 딱 반만 차오른 반달이 떠올랐다.
“숨겨진 달은…… 아하! 그믐달이구나! 맞아, 그믐에는 달이 뜨지 않지!”
창건은 짝 하고 손뼉을 쳤다. 그러더니 이내 인상을 찌푸렸다.
“그믐달이 뭘 어쨌다고!”
오히려 더 헷갈린다. 창건은 주먹으로 자신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쉬운 게 하나도 없네. 도대체 뭐야? 정말 미쳐서 주절거린 거에 불과한 거야?’
실마리를 잡은 듯한데,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창건은 깊게 한숨을 쉬었고 하늘을 보며 삿대질을 했다.
“왜 내 인생을 이렇게 꼬아 놓은 거야! 젠장!”
한편, 멀리서 경계를 서고 있던 유령대원들은 민망함을 참기 위해서 아예 다른 자리로 이동해 버렸다.
갑자기 달밤에 나타난 교주가 달을 보고 중얼거리다가 기뻐하다가 스스로 머리를 쥐어박는 꼴이 꼭 미친 사람 같았기 때문이다.
교주의 수치스러운 모습이라 판단하여 그들은 자리를 비켰으나, 후원에는 여전히 두 인영이 모습을 숨긴 채 창건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의 눈빛은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다.
“아악! 짜증나! 도대체 어쩌라고!”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있다고 생각한 창건은 하늘에 대고 소리를 질러 대고 있었다.
그림자에 몸을 숨긴 인영 하나가 신경질적인 어투로 말했다.
“도대체 뭘 하는 거지?”
곁에 있던 다른 인영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는 보다 차분하게 대답했다.
“글쎄……. 하늘에게 뭔가 따지고 있는 것 같은데.”
“정말 저놈이 암천마령기를 전수 받은 소교주란 말인가? 보고 받은 것과는 틀리잖아?”
인영들은 잠시 침묵했다. 말없이 창건이 하는 양을 지켜보았는데,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반복하고 있었다.
키가 크고 깡마른 인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지난 며칠 동안 지켜본 것만 해도 이상해. 성지에서 온 정보에는 분명 ‘여색을 밝히고 포악하며 생각이 없다’고 했는데, 그중 맞는 정보는 마지막 하나뿐인 것 같군.”
그의 말을 듣고 곁에 있던 키가 작고 왜소한 인영이 팔짱을 낀 채로 차분히 대답했다.
“흐음, 아무래도 암천마령기를 전수 받고 부작용이 생긴 게 아닐까? 역대 교주의 기록을 보아도, 암천마령기를 받고 성격이 바뀌었다는 얘기는 꽤나 많지.”
깡마른 인영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의 눈에서는 살기가 뻗어 나왔다.
“그렇다 해도 빈틈이 너무 많아. 허접한 유령대도 물러갔겠다…… 지금이 절호의 기회인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품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다시 모습을 드러낸 손에는 새카만 수리검이 여덟 개나 쥐어져 있었다.
“그만두게, 칠랑(八狼). 우리의 임무는 감시뿐이야.”
“하지만……! 육풍(六風), 이건 절호의 기회란 말일세!”
육풍이라 불린 왜소한 자가 고개를 저었다.
“가능성이 너무 낮아. 그전에 유령대가 달려올 걸세.”
“까짓 유령대! 교주를 죽이고 따돌리면 되지!”
칠랑은 그렇게 말하면서 수리검을 당겼다. 그의 전신에 팽팽한 긴장감이 돌았다. 마치 쏘아지기 직전의 활처럼.
“그만두게. 며칠 전 연회에서 교주가 절혼장을 펼쳤다는 얘기를 벌써 잊었나?”
“아직 칠 성의 경지에도 이르지 못한 절혼장? 그 정도는 나도 꺾을 수 있어.”
칠랑이 코웃음을 쳤다. 그러나 육풍은 칠랑의 오른손을 붙잡았다.
“그 정도는 위험한 경지가 아니네. 하지만 교주가 저항할 여지가 있다는 건 사실이야. 십 할의 확률로 일격에 죽일 수 없다면 그만두게.”
“하지만 이렇게 좋은 기회를…….”
칠랑은 아쉬운 듯 여전히 창건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기세는 한풀 꺾여 있었다. 육풍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를 도닥였다.
“조급함을 버리게. 어차피 마교는 주군과 우리의 것이 될 테니까. 계획은 완벽하게 진행되고 있네.”
“알겠네.”
육풍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기묘한 미소를 흘렸다.
“어차피 몇 번 보지 못할 달이니 지금 실컷 봐 두는 것도 좋겠지.”
그들은 말없이 창건을 지켜보았다.
창건은 여전히 하늘에 대고 뭔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기린…… 기린이라……. 어디서 영물이라도 나타나려나.”
이리 생각하고 저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질 않는다. 창건은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아악! 쓸데없는 데에 관심 가져서 그래! 그냥 튈걸!”
도망가자니 아직 방법을 찾지 못했고, 그냥 있자니 자꾸만 사귀당이 마음에 걸렸다. 이제는 지사당의 마지막 후예인 황맹이 했던 말조차 머릿속에 뒤죽박죽 섞였다.
‘으으으, 짜증 나!’
콰악!
창건은 발로 바닥을 세차게 굴렀다. 밤인데도 여름이라 그런지 후덥지근했다.
‘왜 더워! 더우니까 더 짜증 나잖아!’
콰악!
다시 발로 바닥을 걷어찼다. 그때마다 흙바닥에 발자국이 새겨졌다.
“아아악! 짜증 나! 짜증 나!”
창건은 발작적으로 소리쳤다.
‘풍운청룡단! 내 출셋길! 빨리 돌아가지 않으면 징계 처분 받을지도 모른다고! 아아악! 왜 내 인생에 끼어들어서 난리야! 뇌동고, 이 나쁜 자식아!’
이제 원망의 대상은 다시 뇌동고로 거슬러 올라갔다. 창건은 그 비웃는 듯한 뇌동고의 표정을 떠올리고 애먼 땅바닥을 마구 찼다.
“익! 익! 익!”
창건이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바닥을 차고 있을 때, 칠랑은 조심스럽게 다시 수리검을 꺼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저 정도로 제 정신이 아니면 한 번에 죽을 것 같은데?”
“……으음.”
그때였다.
쉬이이익!
발을 한껏 치켜든 창건의 주위로 공기가 회오리처럼 모여들었다. 후원에 심어져 있던 풀들이 뽑혀서 그에게 날아들었고, 흙이며 먼지며 할 것 없이 모여들어 회오리쳤다.
그리고 다음 순간, 창건은 힘껏 땅바닥을 발로 찍었다.
쿠와아앙!
천지가 흔들리는 폭음이 났다. 창건을 에워싸고 있던 회오리 전체가 땅바닥을 내리눌렀다. 푸욱! 반경 오 장의 바닥이 움푹 꺼졌다.
촤르르르르르.
오 장 바깥의 바닥은 후폭풍의 영향으로 사방으로 비산하고 갈라져서 튕겨 나갔다. 후원 전체가 흙먼지에 휩싸여 안개가 낀 것처럼 보였다.
“저, 저게…….”
“…….”
칠랑은 들고 있던 수리검을 조용히 품에 넣었다. 육풍은 말없이 창건이 서 있던 자리를 노려보았다. 먼지가 가라앉자 힘껏 바닥을 내려찍은 창건의 모습이 보였다.
“교주님! 무슨 일입니까!”
폭음을 들은 유령대가 속속들이 모여들었다. 전각 위에서, 담벼락 너머로 회색의 그림자가 쏟아지듯 나타났다.
“위험하군. 일단 몸을 피하지.”
육풍이 나지막이 말하자 칠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둘의 신형은 나무 그림자 속으로 녹듯이 사라졌다.
“교주님! 괜찮으십니까!”
“이게 무슨 일입니까!”
유령대가 지면에 오른발을 반쯤 박고 있는 창건을 보고 물었다. 그러나 창건은 대답하지 않았다.
“교……주님?”
조심스럽게 유령대의 부대주가 말을 걸었다.
“괜찮으신 겁니까?”
창건의 주변은 온통 초토화 되어서 폐허와 같았다. 부대주는 천천히 창건에게 다가갔다가 곧 신음을 흘렸다.
“교, 교주님……!”
창건은 눈을 뜨고 있었다. 두건 안쪽의 눈은 분명 뜨여 있었다. 그런데 그 눈이 눈동자는 없고 흰자만 있었던 것이다.
“교주님 눈이 돌아가셨다! 어서 안으로 모셔라!”
유령대는 곧 창건의 몸을 잡고 최대한 조심스럽게 지면에서 다리를 뽑아냈다.
“교주님께서 바로 눕지 않으십니다!”
유령대원 하나가 소리쳤다. 들것에 눕힌 창건의 몸은 바닥을 힘차게 내려 찬 자세 그대로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그대로 옮겨라! 그리고 흑염군 대사형을 모셔 와!”


<『마신검존』 제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