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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믿어 줘야 되는데…….’
사실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향월이 자신이 아는 시녀인 것도 사실이고, 사귀당에 대해 알아보러 온 것도 사실이다.
‘다만 내가 경비무사라고 한 것은 거짓말이지만…… 어쩔 수 없어.’
다행히 납득했던 걸까. 진효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이미 모두 얘기했다. 그 외의 이야기는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는 게 낫지 않겠느냐. 우리가 겪은 것은 사십 년 전의 사귀당일 뿐이다.”
창건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알고 싶은 것이 바로 과거의 사귀당입니다.”
“과거의 사귀당이라?”
진효가 이상하다는 듯이 반문했다. 창건은 이때가 기회다 싶어서 질문을 던졌다.
“진 선배님, 혹시 사귀당이 아닌 오귀당을 아십니까?”
그때였다. 진효뿐만이 아닌 육악마 전원에게 기묘한 기류가 흘렀다.
‘왜, 왜 그러지?’
창건은 당황해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모든 이의 표정이 조금씩 일그러져 있었다. 진효가 의아하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허어, 어디서 그 이름을 들었느냐. 아직도 오귀당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창건은 고개를 저었다.
“사람에게서 들은 게 아니라 기록에서 보았습니다.”
진효의 미간이 더욱 찌푸려졌다.
“더욱 말도 안 된다. 그럴 리가 있나. 남아 있는 기록이 없을 텐데…….”
마지막 말은 혼잣말에 가까웠다. 그제야 창건은 진정 뭔가 내막이 있음을 깨달았다.
‘기록이 원래 없던 게 아니라 사라진 거로군. 없애 버린 거였어.’
머릿속에서 뭔가 차근차근 맞춰지는 기분이었다. 창건은 오귀당이라는 이름에 뭔가 음모가 있었으리라 추측했다.
창건은 또렷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남아 있습니다. 간칠전 서고에서 마쟁록에서 보았습니다.”
“허어, 마쟁록……. 그걸 보는 사람이 있기는 하군.”
진효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마쟁록은 마교와 무림맹의 전쟁사를 기록한 책이다. 마교 내에서 읽을 사람만 읽는 책이며 보관용 실록은 따로 있다. 교주가 바뀔 때마다 한 권이 추가되지만 실제로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정말 엉뚱한 책을 뒤졌구나. 마쟁록이라니…….”
진효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말했다.
“원래 외궁에는 당이 하나 더 있었다. 흑수당, 적오당, 폭풍당, 청운당과 더불어 오귀당이라 불렸지. 다섯 번째 당의 이름은 지사당(地蛇堂)이었다.”
“지사당…….”
창건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사당은 오귀당으로 불릴 정도로 세력이 거대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모종의 이유로 사라지고 말았지.”
“사라졌다고요?”
“그래, 완전히 사라졌다. 기록 속에서도, 건물도, 당주도 모두 사라졌지.”
“그럴 수가 있습니까?”
“기록은 지우면 되는 것이고, 건물은 무너뜨리면 되는 것이며, 당주는 죽이면 그만 아니겠느냐. 그게 벌써 구십 년 전의 일이다.”
십 년만 보태면 백 년이다.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나는 열 살이 되던 해에 우연히 오귀당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
“내가 태어나기 십 년 전에 지사당이 사라졌다. 이십 년의 시간이 지났다는 얘기다. 그렇게 시간이 지났는데도 지사당의 얘기를 꺼내는 건 금기였다. 그 뒤로는 차차 잊혀졌지.”
“지사당이 망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까지는 모르지. 반역을 꿈꾸었다는 얘기도 있고, 금지된 사공을 익혔다는 얘기도 있었다. 그러나 정확한 이유는 나도 듣지 못했다.”
‘역시 지나친 비약이었나.’
창건은 생각에 잠겼다. 육악마가 사십 년 전에 사귀당의 이상조짐을 발견했다면, 실제 준비는 훨씬 이전부터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다른 사귀당이 지사당이 사라지는 데 관여했을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했는데…… 구십 년의 간극은 너무 길어.’
거기까지 생각한 창건은 마음을 고쳐먹었다.
‘아니, 그래도 수상한 건 마찬가지다. 지사당의 파멸이 당당한 것이었다면 교에서 직접 기록을 지웠을 리가 없어. 말할 수 없는 이유가 있는 건가?’
속단을 내리기에는 이르다. 그 어느 것도 뚜렷하게 밝혀진 것은 없었다. 창건은 추측에 추측을 더하다가 이내 포기했다.
‘더 이상 깊이 파고들어 봐야 좋을 게 없겠다. 그 정도로 철저히 지워졌다면 알아내기도 쉽지 않겠구나.’
창건은 곧 새로운 질문들을 떠올렸다.
‘마교가 전복되면 오히려 무림맹의 득이다. 망하거나 말거나, 마교가 알아서 하고…… 나는 도망이나 가야겠다.’
다행히 육악마는 마교의 오랜 고수였다. 비록 절정의 명예를 떨칠 때 뇌옥에 잡히기는 했지만, 한때는 무림에 이름이 드높던 고수들이다.
‘내궁에서 밖으로 도망칠 길 정도는 알겠지.’
창건은 탈출로를 알아내기 위해서 적당히 질문을 정리했다. 그런데 막 창건이 입을 열려고 하는 때였다.
“정히 후배가 지사당에 대해 알고 싶다면 지사당의 생존자를 만나 보게 하는 건 어떻습니까.”
쇠를 긁는 듯한 목소리, 난쟁이처럼 작은 고루비도가 입을 열었다. 창건은 깜짝 놀라서 고루비도에게 시선을 돌렸다.
“생존자가…… 있습니까?”
고루비도가 누런 이를 드러내고 히죽 웃었다.
“캇캇캇, 지사당이 사라질 때 지사당주 황현우(況賢愚)는 죽었으나 둘째 아들 황맹(況萌)은 목숨을 건졌다.”
창건은 의구심이 솟구쳤다. 그 정도로 철저히 지사당의 흔적을 지웠는데 당주의 아들이 살아 있다니. 이상한 게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실마리를 잡았다! 사귀당의 음모는 장차 무림맹에도 크나큰 영향을 끼칠 터! 미리 알아 둔다면 큰 공을 세울 수도 있다.’
창건은 마음을 정했다.
“그를 만나려면 어디로 가면 됩니까?”
창건이 다급하게 묻자, 진효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고루비도를 꾸짖었다.
“고루야, 놀리는 것도 적당히 하거라.”
“카카캇, 놀리다니요. 후배가 원하니까 알려 주자는 것 아닙니까.”
“고루야!”
그러나 진효가 다시 한 번 엄한 목소리로 고루비도를 부르자, 고루비도는 입을 닫고 조용해졌다.
“진 선배님, 지금 황맹 선배는 어디 계십니까?”
“소용없다. 만나 봐야 아무 것도 듣지 못할 것이다.”
“제가 직접 여쭙겠습니다. 혹시 모르지 않습니까.”
창건은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그러나 진효는 한숨을 쉬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런 얘기가 아니다. 내가 들을 수 없다고 한 건, 그가 이미 오래전에 미쳐 버렸기 때문이다.”
“예에?”
창건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진효는 살짝 고개를 돌려서 불이 켜지지 않은 복도의 안쪽을 향했다.
“황맹을 만나고 싶다면 멀리 갈 것도 없다. 저 복도를 지나서 안쪽으로 들어가면 되니까.”
창건은 고개를 돌려 복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그, 그렇다면 아까부터 소리치고 있었던 그 사람이 바로 황맹 선배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래서 내가 소용없다고 누누이 말하지 않았느냐.”
창건은 얼빠진 표정이 되었다.
‘오귀당의 실마리를 잡기 위해서 이곳에 왔는데, 정작 지사당의 후계자가 잡혀 있었다니…….’
호기심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창건은 점차 마교의 비밀에 접근하고 있다고 직감했다.
“한번 만나 뵙겠습니다.”
진효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을 대로 해라. 단, 너무 자극하지는 말아라. 그 노인네가 시끄럽게 굴기 시작하면 버틸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창건은 찬합을 들고 황맹이 있는 복도의 끝으로 다가갔다. 그곳에는 반쯤 썩어 버린 육체로 생을 부지하는 사람이 있었다. 머리털은 모두 빠져 버렸고, 사지육신은 목내이처럼 말랐다. 아주 가늘고 긴 숨소리만이 그가 살아 있다는 걸 증명했다.
‘차라리 시체라고 해도 믿겠다.’
창건은 주저하다가 인사를 건넸다.
“아, 안녕하십니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후배는 동고라고 합니다. 황맹 선배님이시지요?”
황맹은 잠을 자는 것처럼 규칙적으로 숨을 쉬고 있었다. 창건은 찬합을 꺼내서 약과라도 넣어 주려고 했으나, 황맹의 몸이 심하게 마른 것을 보고 그만두었다. 음식도 소화시키지 못하는 몸이다. 약과 같은 기름기가 들어갔다가는 탈이 나서 죽을 수도 있다.
“혹시 듣고 계시다면 도와주십시오.”
창건은 염치불구하고 입을 열었다.
“마교가 위험합니다. 사귀당이 음모를 꾸미고 있습니다.”
여전히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뇌일혁 교주님은 사귀당의 술수에 목숨을 잃으신 것 같습니다. 이제는 하나 남은 소교주마저 위험합니다.”
창건은 마음이 다급해졌다.
‘내 목숨이 급하다구요. 할아버지, 좀 일어나 봐요. 젊은 사람 살리는 셈 치고요. 예? 사귀당에 대해 뭘 좀 알아야 피해도 피할 거 아닙니까.’
정도영웅무림맹에 세울 공은 두 번째다. 첫째로는 일신상의 안위가 중요했다.
“황맹 선배님, 제 말이 들리십니까? 지금 상황이 급하다니까요?”
창건은 쇠창살을 잡고 흔들었다. 철컹, 철컹. 시끄러운 소리가 났지만 황맹은 깨어나지 않았다.
‘아까 시끄럽게 떠들더니 지쳐서 잠든 건가. 휴우.’
창건은 창살을 붙잡고 그대로 주르륵 미끄러져서 주저앉았다. 창건이 그만 포기할까 고민할 때였다.
“끄끄끅.”
벽에 못 박힌 황맹에게서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창건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 일어났어요?”
황맹이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그는 마치 창건이 있는 곳을 정확히 꿰뚫는 듯이 시선을 맞추었다. 눈은 감았으나 앞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바짝 마른 황맹의 입술이 서서히 열렸다.
“끄끅, 교주께서…… 직접…… 왕림하셨구랴…….”
순간, 창건은 벼락을 맞은 것처럼 놀랐다.
‘뭐야, 지금 이거 알고 하는 소리야?’
두건 아래 감춰진 창건의 얼굴에는 온통 핏기가 가셨다.
“마교…… 앞에…… 저주…… 있으라…….”
“뭐, 뭐라고요?”
“기린이 돌아와…… 암천의 마령을 걷어 내니…… 숨겨진 달이 드러나…… 온 세상을 밝히리라!”
처음에는 모기처럼 가느다란 목소리였다. 그러던 것이 점점 커지더니, 이내 귀를 막아도 들릴 정도로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마교는 이제 종말을 맞이하리라! 시체로 쌓은 탑이 무너지고, 고혈을 빨아 찌운 살이 썩어 들어가니 남은 것은 파멸뿐이다!”
“뭐, 뭐라고 하는 겁니까!”
창건이 마주 빽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귀청이 터질 정도로 시끄러운 황맹의 목소리에 묻혀 버렸다. 황맹은 천장을 향해서 목청껏 소리를 질렀다.
“세상을 희롱하는 암천의 마령이여, 돌아올 기린 앞에 흩어질 가녀린 운명이여! 끄하하하! 운명의 시간이 도래했으니, 모두 종말을 대비하라!”
창건은 귀를 틀어막고 반대쪽 철창까지 물러섰다. 그런데도 뭐라고 하는지 똑똑히 들렸다.
‘이 정도면 음공(音功)이라 해도 믿겠다. 내력도 없는 노인이 어찌……!’
창건은 그의 외침만으로 속이 진탕되는 것을 느꼈다. 황맹이 무공의 고수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하나 그는 반 시체의 폐인이 아니던가.
‘가만……. 암천의 마령이라면 암천마령기를 뜻하는 것일 터. 기린? 은월? 그건 또 뭐란 말이냐?’
창건은 이를 바득 갈더니 뱃심을 끌어올려서 외쳤다.
“선배님! 무슨 소린지 모르겠습니다! 기린은 무엇이고, 은월은 무엇입니까!”

육악마는 있는 대로 인상을 구기고 있었다. 또다시 지긋지긋한 황맹의 외침이 들렸던 것이다.
“저 미친 노인네가 또 시작이로군.”
편수편족이 이를 갈면서 말했다.
“고루비도, 후배를 선동하면 어쩝니까. 더 시끄러워졌잖아요.”
폭돈이 울상을 지으면서 한마디 보탰다. 고루비도는 입술을 댓발 내밀고 툴툴거렸다.
“제기, 꼬맹이를 놀려 주려고 말한 건데…….”
자승자박이다. 고루비도는 괜한 얘기를 했다며 육악마의 빈축을 샀다.
그때까지 입을 다물고 있던 음양쌍살이 의심스럽다는 듯 말했다.
“아무래도 그 아이…….”
“정체가 수상합니다.”
고루비도가 깜짝 놀라 음양쌍살 쪽에 대고 말했다.
“응? 수상하다니, 그 아이 그냥 경비무사잖아?”
눈치가 어지간히 없다. 고루비도를 제외한 모든 육악마가 한숨을 쉬었다.
“아니, 왜들 그래? 그럼 뭐란 말이야!”
쇠를 긁는 듯한 목소리로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 진효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를 달랬다.
“목소리를 낮춰라, 고루. 아직 그 아이가 나가지 않았다.”
“뭐란…… 말입니까, 큰형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