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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창건은 계단을 내려가면서 생각을 정리했다.
‘현재 내 적은 둘이야.’
첫째는 마교다.
무림맹의 무사로서 마교는 불구대천의 원수다. 어느 한쪽이 완전히 몰살당하기 전까지 마교와 무림맹의 전쟁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지금은 마교의 교주 행세를 하면서 비굴하게 목숨을 부지하고 있어. 하지만 내가 살아야 마교와 싸울 수 있잖아. 불가피한 상황이야.’
창건은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정도영웅무림맹의 일원이라는 자존심과 자신의 목숨을 저울질한 결론이다.
‘어쨌든 마교는 당장 위험한 상대는 아니야. 정체를 들키지만 않으면 돼. 문제는 두 번째 적이야.’
둘째는 엄밀히 말하면 창건의 적이 아니었다. 마교의 전복을 꿈꾸는 자들, 바로 뇌동고의 목숨을 노리는 사귀장이 두 번째 적이다.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불태(百戰不殆)라 했어. 마교에 있는 동안 사귀장이 내 목숨을 노리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지. 살아남으려면…… 사귀장에 대해 잘 알아야 해.’
창건은 필사적이었다.
사귀장에 대해 터놓고 물어볼 사람이 없었다. 무엇을 물어도 의심하지 않을 사람, 설령 의심하더라도 자신에게 해를 끼칠 수 없는 존재. 뇌옥에 있는 육악마는 공교롭게도 모든 조건을 충족시켰다.
‘설령 사귀장의 음모가 육악마의 거짓말이거나 착각이라도 상관없어. 오래된 마교인들이니 만큼 다른 들을 얘기가 많아.’
계단의 끝에 다다른 창건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썩는 냄새가 뇌옥 가득히 진동했다.
‘살 거야. 살아서 무림맹으로 돌아갈 테다.’
“암천(暗天)에 마령(魔靈)이 가득하니 천하에 피바람이 불겠구나!”
날카롭게 찌르는 듯한 카랑카랑한 목소리였다.
“으음, 또 시작이냐.”
파화철권 진효는 나지막한 신음을 흘렸다. 예의 그 목소리는 육악마의 뇌옥보다 더욱 안쪽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기다려라! 하늘에서 오색의 기린(麒麟)이 내려와 마령을 정화할 것이니!”
진효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며칠 밥이 잘 나온다 했더니, 저 늙은이가 정신을 차렸구나. 으으……!”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고루비도가 이를 갈았다.
“제길, 시끄러워 죽겠습니다. 앞으로 며칠을 더 버텨야 할지…….”
음양쌍살이 똑같은 동작으로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서 죽었으면…….”
“좋겠습니다.”
둘의 말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육악마는 사흘 사이에 몰라보게 체력이 좋아졌다. 창건이 왔을 때는 말을 나누는 게 고작이었는데, 지금은 사지를 꿈틀거리면서 움직이고 있었다.
“거 조용히 좀 하쇼! 조용히 하라고!”
고루비도가 쇠를 긁는 듯한 목소리로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 그에 따라서 뇌옥 깊숙한 곳에서 들리던 목소리가 함께 커졌다.
“온다! 기린이 온다! 마령을 정화할 기린이 올 것이야!”
뇌옥이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오히려 상대의 목소리가 커지자 고루비도가 끄응 하고 신음 소리를 냈다.
“놔둬라, 고루. 상대하면 더 시끄러워진다.”
진효가 사나운 목소리로 말했다. 팔다리가 유난히 긴 편수편족이 이를 바드득 갈았다.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던 비대한 몸집의 폭돈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십 년이나 들었는데도 여전히 괴롭군요.”
“백 년이 지나도 괴로울걸.”
고루비도가 쇠를 긁는 듯한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그때였다. 멀리서부터 작은 발소리가 들려왔다. 시끄러운 괴성에 시달리고 있던 육악마가 일제히 말을 멈추었다.
폭돈이 이상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오늘 식사는 벌써 왔다 갔는데…… 누구지?”
귀를 기울이던 고루비도가 입을 벌리고 웃었다.
“캇캇캇, 사흘 전의 그 꼬맹이 발소리다.”
그의 말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창건이 모습을 드러냈다. 창건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두리번거리다가, 이내 포권을 취했다.
“후배 동고가 선배님들을 뵙습니다.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진효가 피식 웃었다.
“고작 사흘 지났는데 안녕은 무슨 안녕이냐. 이곳이야 항상 똑같지.”
그러나 창건은 알아보았다. 육악마의 혈색이 이전보다 훨씬 좋아졌다는 걸. 게다가 목소리에도 전에 없던 활기가 있었다. 창건은 환하게 웃었다.
“그래도 좋아 보이시니 다행입니다. 그런데…… 혹시 이곳에 다른 사람도 있습니까? 밖에서 들으니 다른 사람 목소리가 들리던데요.”
진효의 얼굴에 떨떠름한 표정이 떠올랐다.
“들었느냐?”
“예, 워낙 소리가 커서 멀리까지 들렸습니다.”
창건이 말하는 순간, 뇌옥 깊숙한 곳에서부터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기린! 기린이 마령을 걷어 내면 암천에는 비로소 은월(隱月)이 드러나리라! 크하하하핫! 마교여, 기린을 조심하라! 오색의 빛을 뿜어 마령을 녹이리라!”
귀가 아플 정도로 시끄러웠다. 창건은 황급히 귀를 막았고, 인상을 찡그리면서 뇌옥 안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아직도 복도는 길게 이어져 있었다. 창건은 미간을 찌푸리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안에도 사람이 있단 말이야?’
분명 안쪽에서 들린 소리다. 하지만 불빛이 꺼져 있어서 복도 안쪽으로는 아무것도 보이질 않았다. 애초에 그쪽에는 사람이 없을 거라 여겼던 것이다.
“후우, 정신을 놓은 사람이다. 우리가 처음 들어올 때부터 저러고 있었지. 그때는 조금 덜했지만.”
“사, 사십 년이나 말입니까?”
창건이 어이없다는 투로 반문했다. 다른 사람에게도 그렇겠지만 이제 고작 열일곱인 그에게 사십 년은 굉장히 긴 시간이었다.
‘나라면 진작 미쳐 버렸을 거야.’
진효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보다 훨씬 되었을 게다. 우리가 들어왔을 때도 최고참이었으니까.”
“대단하군요……. 그때는 뇌옥에 선배님들이 더 많았습니까?”
최고참이라는 건 다른 사람도 있었다는 얘기다. 창건이 묻자 진효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암, 그때만 해도 얼추 오십 명은 있었다. 어찌 뇌옥에 잡혀오는 사람이 한둘이겠느냐. 시간이 흐르면서 다 죽었다.”
창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나오면서 보았던 하얗게 닳은 인골은 족히 백여 구는 되었다.
‘하긴 이런 꼴로 오래 사는 게 오히려 괴물이지. 사흘에 한 번 밥 주고, 사지육신을 망가뜨리니…….’
창건은 새삼 육악마가 여태껏 살아 있다는 사실이 두려워졌다. 어지간히 튼튼한 사람이라도 단전에 대못을 박아 놓으면 한 달도 못 가서 죽으리라.
자세를 바꿀 수 없으니 전신에 욕창이 생기고, 피가 돌지 못해서 살이 서서히 썩어 들어갈 것이다. 시각을 빼앗고 힘줄을 끊어 놓았으니 자연 쇠약해지는 심신은 스스로 죽음을 찾을 것이다.
‘이런 곳에서 사십 년이나 버티다니, 정말 독한 인간들이다.’
창건은 곧 뇌옥 안쪽에서 소리치는 죄수에 대해서 신경을 끊었다. 이미 미쳐 버린 사람보다 육악마에게 들을 것이 훨씬 많았다.
“그래, 무슨 일로 여기까지 왔느냐?”
생각에 잠겼던 창건은 진효의 부름에 정신을 차렸다.
“아, 제가 선배님들을 위해 뭘 좀 가져왔습니다.”
창건은 비단 보자기를 풀고 찬합을 꺼냈다. 찬합의 뚜껑이 열리자 향긋하고 달콤한 냄새가 퍼져 나왔다.
“오오, 이게 무슨 냄새지?”
폭돈이 코를 킁킁거렸다. 창건은 씩 웃으면서 말했다.
“약과입니다. 여기 계시면 식사는 몰라도 군것질거리는 맛보기 힘들지 않겠습니까. 마침 친한 시녀가 약과를 잘 만들어서 특별히 부탁했습니다. 아주 맛이 좋습니다.”
창건은 그렇게 말하고는 쇠창살 사이로 보이는 각자의 식기에 약과를 조금씩 덜어 주었다. 나무 쟁반에 담긴 식기를 슬쩍 밀자 벽에 못 박힌 그들의 앞까지 미끄러져서 도착했다.
“약과?”
육악마의 표정이 일제히 밝아졌다.
‘후후, 쓰러지게 맛있을걸.’
창건은 향월의 실력에 자신이 있었다. 분명 오랜 뇌옥 생활로 피폐해진 혀를 달래 주리라.
“예, 한번 드셔 보십시오.”
그러나 그들은 약과를 앞에 두고도 먹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식탐이 강해 보이는 폭돈조차도 식은땀을 흘릴 뿐 약과에 손도 대지 않았다.
“어라? 어째서 드시지 않습니까?”
창건이 영문을 몰라 물었다. 순간, 그의 뇌리에 스치는 게 있었다.
“혹시 독을 걱정하시는 겁니까? 그런 거라면 제가 먼저 먹어 보이겠습니다.”
무려 사십 년 동안이나 옥에 갇혀 있던 사람들이다. 갑자기 베푸는 이유 없는 친절에 의심을 갖는 것도 당연하다 여겼다.
‘너무 경솔했나? 좋아할 줄 알았는데…….’
어설프게 의심을 사게 될까 봐 두려웠다. 창건이 어쩔 줄 몰라 하는데 진효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
“진 선배님?”
창건이 걱정스럽게 그를 불렀다. 진효는 말없이 약과 하나를 집어 들었다.
“약과라…….”
진효는 천천히 약과를 손으로 매만졌다. 눈이 없어서 손으로 보는 것이리라. 이어서 코앞에 대고 냄새를 맡았다. 흐으읍, 하고 흠뻑 냄새를 빨아들이는 소리가 들렸다.
‘역시…… 독 때문인가?’
창건은 조마조마하게 진효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설마 향월이 독을 넣지는 않았겠지? 그래도 교주의 시녀로 뽑힐 정도니까 신분은 확실할 거야.’
창건은 점점 걱정스러워졌다.
촉각과 후각으로 살핀 진효는 이어서 약과를 아주 조금만 베어 물었다. 아작 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작, 아작, 아작.
진효는 꼼꼼하게 약과를 씹어서 꿀꺽 삼키더니 다시 조금 베어 물었다. 고작해야 손가락 두 개를 합친 정도의 크기인데, 하나를 다 먹는데 무척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작, 아작, 아작.
이윽고 진효가 약과 한 개를 다 먹자 다른 육악마도 약과를 하나씩 집어서 똑같은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창건은 순간 숨이 탁 막히는 것을 느꼈다.
‘맛을 음미하는 거였어. 독을 검사하는 게 아니야.’
육악마는 아주 천천히 약과를 갉아먹었다.
‘사십 년 만의 별식이니…… 가벼이 여기지 않겠다는 거겠지.’
창건은 부끄러워서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자신은 약과를 그저 씹을 거리 정도로 여겼다. 아무리 좋아하는 간식이라도 그다지 큰 의미는 없는 것이다.
각자에게 돌아간 약과는 이십 개, 그중 절반 정도를 먹어 치웠을 때 진효의 입에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하아아……. 정말 맛이 좋구나.”
“입에 맞으신다니 다행입니다.”
창건이 환하게 웃었다.
“내 입맛은 무척 까다로운 편이다. 그런 나를 만족시킬 정도라면…… 너는 그 여자를 잡는 게 좋겠다.”
진효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덕분에 창건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예에? 선배님, 시녀와 저는 그런 사이가 아닙니다.”
“아니라니, 좋아하는 여자의 솜씨를 자랑하려고 가져온 게 아니란 말이냐?”
진효가 이상하다는 듯이 반문했다. 창건의 얼굴은 더욱 붉어졌다.
“그, 그런 게 아닙니다! 저는 그저 선배님들께 약과를 대접하려고…….”
진효가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앞뒤가 막힌 사람이 아니니 궁색한 변명할 것 없다. 세상에 어느 여자가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에게 음식을 만들어 주겠느냐.”
“그, 그게…….”
더욱 변명할 말이 궁색해졌다.
‘내가…… 지금은 내가 마교의 교주란 말입니다! 그 여자는 내 시녀라고요!’
창건이 아무 말도 못하고 얼굴만 붉히고 있자 진효가 쐐기를 박았다.
“보이지 않아도 귀는 있다. 네 숨소리가 거친 것을 보니 얼굴은 보지 않아도 잘 익은 사과겠구나.”
이래서야 부처님 손바닥 위다. 창건은 울상을 지었다. 속이는 일에는 재주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여자 얘기가 섞이니 감정을 숨길 수가 없었다.
‘가만……. 향월이를 생각하면서 얼굴을 붉혀? 내가? 맙소사, 마교 교주의 시녀다. 정신 차려라, 창건아.’
창건은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진효가 껄껄 웃었다. 주변의 육악마들이 한마디씩 보탰다.
“정인의 솜씨가 정말 좋구나.”
“내 생전에 이렇게 맛있는 약과는 처음 먹어 본다.”
창건은 아니라고 소리치려다가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이렇게라도 분위기가 가벼워지니 다행이다.’
육악마는 자신에게 호의를 갖고 있는 듯했다. 그렇다면 이야기를 풀어 나가기가 더욱 쉽다.
그러나 진효는 호락호락한 노인이 아니었다. 창건이 얼굴에 미소를 띠우는 순간 차가운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럼 이제 네가 원하는 것을 말해 보아라.”
“……예?”
“목적이 있어서 이런 선물까지 들고 온 것이 아니냐.”
확실히 그의 목소리는 차갑고 냉정했다. 지금까지 웃던 게 거짓말 같다.
창건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하하, 역시 너무 갑자기 들고 왔나. 하지만 내게는 시간이 없어.’
천천히 시간을 두고 경계심을 누그러뜨릴 만한 여유가 없었다. 창건으로서는 다소 의심을 받더라도 빨리 정보를 빼내야만 했다.
“그, 그것은 후배의 작은 성의로…….”
“솔직히 말하지 않는다면 나도 아무것도 도와주지 않겠다. 뇌옥에 갇힌 사람들이 대가 없는 호의를 믿으리라 생각했느냐?”
진효가 딱 잘라서 말했다.
‘제길, 어디까지 말해야 하지?’
창건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 이내 입을 열었다.
“실은 진 선배님께서 말씀하신 사귀당에 대해서 조금 알아보았습니다.”
“사귀당에 대해서?”
“예. 그러던 와중, 이상한 기록을 발견하여 여쭐 것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창건은 차분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빈손으로 오는 게 민망하던 참에, 잘 아는 시녀가 약과를 잘 만들기에 부탁하였을 뿐입니다. 다른 사심은 없습니다.”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