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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촤악!
갑자기 찻물이 힘을 잃더니 무릎으로 쏟아져 내렸다. 창건은 깜짝 놀라서 펄쩍 뛰었다.
“어머, 괜찮으세요?”
“괜찮아. 괜찮아. 놀라서 그랬어.”
창건이 손을 휘휘 저었다. 적당히 식은 찻물이었기에 화상 입을 일은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왜 갑자기 찻잔이 가루가 돼?’
창건이 의아한 눈으로 바닥에 쏟아진 찻잔의 가루를 살폈다. 곱디고운 청색의 가루였다.
‘얘기로는 들어 본 적 있어. 막대한 진기를 주입하면 사물이 아예 가루가 된다고……. 하지만 나는 그런 경지가 아닌데.’
경지가 아닌 정도가 아니라, 백 년을 고련해도 얻기 힘든 내공이다.
“저어…… 차를 다시 내올까요?”
“아니, 됐어.”
너무 깜짝 놀라서 입맛이 뚝 떨어졌다. 창건은 손을 털면서 고개를 저었다.
“차보다도 혹시 약과 더 남았어?”
“아, 아니요. 이렇게 맛있게 드실 줄 몰라서 조금만 만들었어요.”
향월은 황급히 덧붙였다.
“하지만 지금 당장 가서 만들어 올 수 있어요. 반 시진 정도 걸리니까요.”
“아냐, 그럼 됐어. 오늘은 충분히 먹었으니까…….”
창건이 피식 웃으면서 거절하자 향월은 금세 풀 죽은 얼굴이 됐다. 표정을 관리하려고 해도 눈매가 처지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창건은 생각에 잠시 잠겼다가 말을 이었다.
“오늘은 됐고, 사흘 후에 만들어 주겠어? 그날은 돌아다니면서 간식 겸 먹을 거니까 좀 많이 만들어 주면 좋겠는데.”
향월의 얼굴이 대번에 밝아졌다. 그녀는 웃으면서 말했다.
“물론이죠! 최선을 다해 만들겠습니다.”
창건은 씩 웃으며 손을 휘저었다.
“좋아, 그럼 가 봐. 오늘은 덕분에 잘 먹었어.”
“예,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향월은 신난 목소리로 답하고는 방을 빠져나가려고 했다. 순간 창건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질문을 던졌다.
“아, 혹시 오귀당이라고 들어 봤어?”
“오귀……당이요? 사귀당이 아니고요?”
창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향월은 미간을 찌푸리고 생각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이에요.”
“응, 그렇겠지. 내가 잘못 봤나 봐. 신경 쓰지 마.”
창건은 책으로 시선을 돌리고 손만 휘휘 저었다. 향월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방을 조용히 빠져나갔다.
“역시…… 겨우 칠십 년 전의 일인데, 마교인도 모르는군.”
창건은 의미심장한 눈으로 책을 노려보았다.
“내막이 있어.”
향월과 약속한 사흘이 흘렀다.
그사이에 창건은 자신의 몸에 심각한 변화가 생겼다는 걸 깨달았다. 찻잔이 가루가 된 이후로, 시시때때로 주변의 물건들이 망가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틀 전에는 서고의 문고리를 쥐었다가 그대로 구겨 버렸다.
“이, 이거 불량품 아니야?”
창건이 멋쩍게 웃자 마침 지나가던 시녀 한 명이 미심쩍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내궁의 문고리는 오랫동안 사용하기 위해서 모두 강철로 만듭니다, 교주님.”
“…….”
그때는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우연히 오래된 강철 고리가 부실해져서 망가진 거라고.
그런데 어제는 돌계단을 걸어 내려가다가 발자국을 찍어 버렸다. 창건의 족적(足跡)이 한 치 두께로 움푹 파였다.
“무, 무른 돌이지?”
“운남의 대리석입니다. 무른 편은 아닙니다, 교주님.”
근처를 경계하던 무사가 경악한 표정으로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다. 창건은 그제야 자신에게 문제가 생겼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오늘 아침이 결정적이었다.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해서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갑자기 의자가 바스라지면서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이거 불량품 아니야? 썩은 나무로 의자를 만들면…….”
불평을 터뜨리던 창건은 뭔가 생각난 게 있었는지,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혹시 이것도…… 튼튼하고 비싼 거야?”
향월은 깜짝 놀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최고급 자단목(紫檀木)으로 만든 의자입니다. 썩은 나무일 리가 없는데요. 어째서 갑자기…….”
창건은 머리가 아파 오는 것을 느꼈다. 일련의 사건을 종합하면 범인은 창건 자신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일단 자신이 범인이라는 가설을 세우자 그에 합당한 근거도 댈 수 있었다.
‘암천마령기가 멋대로 뻗어 나오는 건가?’
대리석에 족적을 남기고 강철을 구겨 버리려면 자신의 내력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애초에 암천마령기가 주입되면서 태을지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렇다고 완전히 몸에 녹아들었냐 하면 그것도 아닌데…….’
창건 스스로는 마기를 전혀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며칠 전 연회에서 술을 마시고 정신을 잃은 이후로는 내력만 사라졌을 뿐 몸은 가뿐하기 이를 데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네.’
창건은 향월을 내보내고 홀로 앉아 젓가락을 쥐고 있었다.
“휴, 어쨌든 이대로 가다가는 사람도 다칠 수 있으니까…… 그 전에 조절하는 연습을 하자.”
창건은 다짐하듯이 중얼거렸다. 암천마령기가 시시때때로 발산된다면, 그걸 조절하는 법을 익히면 될 일이다.
‘힘은 쓸수록 조절이 되는 법. 어디 한번 제어해 보자.’
창건은 내공 수련을 할 때처럼 호흡을 골랐다. 운기조식을 하는 대신에 가볍게 호흡을 고르고, 손에 쥐고 있는 젓가락에 신경을 집중했다.
‘일점집중(一點集中), 몸 안에 잠든 힘이 손끝으로 몰린다고 상상하고 단번에 쏟아 내는 거야.’
창건은 내력발산(內力發散)의 수를 응용하여 암천마령기를 이끌어 내려고 했다. 천천히 숨을 내뱉고, 들이마시고 또 내뱉는다. 호흡은 점점 가늘어지고 창건의 신경은 온통 손에 쥐고 있는 젓가락으로 집중됐다.
창건은 눈을 부릅뜨면서 외쳤다.
“부서져라!”
부들부들, 젓가락이 쉴 새 없이 떨렸다. 창건의 이마에 굵은 땀방울이 흘렀다.
“제길……. 그럼 구부러져라!”
여전히 떨릴 뿐이다. 창건의 떨리는 손과 함께. 창건은 이를 악물고 외쳤다.
“가루가 되라! 바스라져라! 뭉개져라! 악! 악! 악! 부러지기라도 해!”
창건은 바락바락 소리쳤다. 잘될 것만 같았는데 젓가락은 그런 창건을 비웃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창건은 젓가락을 씹어 먹을 것처럼 노려보면서 이를 갈았다.
“왜 안 되지? 내 생각이 틀렸나? 아니면 방법이 틀렸나? 이이익, 좀 부러져! 제기랄, 안 되잖아!”
창건은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리다가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은젓가락은 섬세한 빛을 뽐내면서 끝까지 창건의 기대를 저버렸다.
“하아, 하아……. 내가 뭐 하는 짓인지…….”
창건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역시 엉뚱한 생각이었나 보다 생각하면서.
‘암천마령기는 무슨 암천마령기. 찻잔은 금이 간 거였고, 철 고리는 녹슬었으며, 대리석은 풍우에 찌들어 약해졌겠지. 자단목은 썩은 거고 말이야. 제기랄, 얼어 죽을 암천마령기!’
투덜거리던 창건의 시선은 문득 문 앞에 있는 향월에게 닿았다. 그녀는 참으로 기이한 것을 본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
눈이 마주치자 향월은 화들짝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고는 황급히 인사를 올렸다.
“교, 교주님을 뵈옵니다.”
놀라기는 창건도 마찬가지였다. 방금 전까지 추태를 부리고 있던 입장이라 더했다.
“너 왜 거기 있냐?”
“모, 못 들으셨어요? 아까 전에 종을 울리고 들어온다고 말씀드렸습니다만…….”
향월이 당혹한 얼굴로 대답했다.
“종소리? 그런 거 들은 적 없어. 아니, 그보다 아까라니? 언제 들어온 거야!”
“구부러져라……라고 외치실 때부터였어요.”
창건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두건 아래 감춰져 있어서 참으로 다행이라고 그 와중에도 생각했다.
‘맙소사, 고래고래 소리를 지를 때였군. 망할! 대답이 없으면 들어오지 말아야지!’
창건은 자연스럽게 손을 내리면서 들고 있던 젓가락을 등 뒤의 침상으로 던져 버렸다.
“어험, 그, 그랬어? 들어왔으면 기척이라도 좀 내지.”
“인사도…… 올렸는걸요.”
“…….”
“교주님을 뵈옵니다라고…….”
변명의 여지가 없다. 젓가락에 집중하느라 듣지 못했던 것이다.
‘별수 없어. 웃어넘기자.’
창건은 짐짓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 그랬어? 사실은 내가 뭣 좀 연습하느라고 듣지 못했나 봐. 그러니까…….”
그렇게 말하면서 향월에게 한 발짝 다가갔다. 순간 향월이 어깨를 움찔 떨었다. 잔뜩 겁을 먹은 기색이다.
‘지금 뒷걸음질 치려던 거 아냐? 나 안 미쳤어!’
향월은 차마 도망은 가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움찔움찔 떨었다. 창건은 가당찮은 오해를 받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후우, 그래서 무슨 용건으로 왔는데?”
창건은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방에 들어왔다는 건, 중요한 용건이 있다는 걸 의미한다. 창건이 질문하자 향월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아, 맞다! 깜박하고 있었어요. 이걸 가져다 드리려고 왔는데…….”
향월은 여태껏 등 뒤에 감추고 있던 것을 내밀었다. 비단 보자기에 싼 찬합이었다. 얼핏 봐도 꽤 커다란 것이 오 인분은 족히 들어갈 것 같았다.
“이게 뭔데?”
“사흘 전에 말씀하셨잖아요. 약과예요, 돌아다니면서 간식으로 드신다기에 찬합에 쌌어요.”
“아, 약과!”
창건은 신이 나서 찬합을 받아 들었다. 크기만 컸지, 약과가 얼마나 무거우랴 생각했던 창건은 다리가 휘청거리는 것을 느꼈다.
“우와, 엄청 많이 했나 봐?”
“많이…… 준비하라고 하셔서……. 너무 많은가요?”
향월이 볼을 붉히고 우물쭈물했다. 창건은 도리질을 쳤다.
“아냐, 이거면 충분해! 고마워!”
향월은 고개를 살포시 끄덕였다.
‘그렇게 안 봤는데 정말 손이 크구나. 덕분에 충분하고도 남겠어.’
창건은 은은히 풍겨 오는 달콤한 냄새에 침이 고이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이건 자신이 먹을 게 아니었다.
“그럼 난 가 볼 데가 있어서 나가 볼게! 약과, 정말 고마워. 잘 먹을게!”
창건은 찬합을 들고 바람처럼 방을 나가 버렸다. 홀로 남은 향월은 볼을 붉히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많이 이상한 분 같지만…… 좋은 분 같아.”
향월의 시선이 문득 침상 위에 닿았다.
침상 위에는 은빛의 가루가 흩날리고 있었다.
“어머? 뭐가 쏟아진 거람.”
향월은 정성스럽게 은가루를 모두 쓸어 내서 치워 버렸다. 아까 던진 젓가락이 거기 있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은 채.
창건이 찾은 곳은 천마궁 동북쪽의 간칠전이었다. 지난 사흘 동안 내궁의 길을 제법 외운 창건은, 한 번도 막히지 않고 자신이 목적한 곳을 찾을 수 있었다.
‘이상하게 길이 익숙하단 말이야.’
창건은 복잡한 복도를 돌고 돌아 간칠전의 가장 깊은 곳까지 들어갔다. 뇌옥이 보이는 곳에 도착한 창건은 짐짓 헛기침을 했다.
“엇험.”
“누구냐!”
멀리서부터 아른거리는 회색 두건의 인영이 다가오자 무사들은 안력을 집중해서 상대를 노려보았다. 이윽고 점점 다가오는 모습을 보니 얼마 전에 왔던 소교주라는 것을 깨달았다.
“소, 소교주님!”
복도의 끝에서 철문을 지키고 있던 무사들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예를 취했다.
“소교주님을 뵈옵니다!”
복도의 끝에서 철문을 지키고 있던 무사들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예를 취했다. 창건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들 낯빛 변하는 거 봐라. 협박이 효과가 있나 보구먼.’
창건은 그들을 날카로운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잘하고 있겠지?”
무사들은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죄수들의 식사량을 늘렸습니다. 종전에 사흘에 한 번 밥을 주던 것을, 사흘 전부터는 매일 주고 있습니다.”
창건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식사만 제대로 주어도 늙은 몸으로 버티기 한결 수월할 것이다.
“잘 먹나? 식사량을 늘려 봐야 먹지 않으면 소용이 없을 텐데?”
무사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하나도 남기지 않고 잘 먹고 있습니다. 저희가 먹는 식사와 같은 양을 주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생각보다 더 좋은 대우다. 늑대 우리에 처넣겠다는 협박이 어지간히 무서웠던 모양이다. 창건은 내심 만족하면서도 겉으로는 눈을 부라렸다.
“흐흐, 잘하는 게 좋을 거야. 저것들이 도망 다닐 수 있어야 흥이 날 테니까. 만약 너무 빨리 잡아먹혀서 흥이 식는다면…….”
창건은 말끝을 흐렸다. 그러곤 의미심장한 눈으로 두 명의 무사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너희를 처넣을 거야.’
창건의 눈빛은 흡사 그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무사들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대답했다.
“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뇌동고의 악명이 도움이 될 때도 있다. 성지에 있는 소교주의 성정이 포악하다는 것은 너무나 유명한 얘기라, 창건이 따로 더 겁을 줄 필요도 없었다.
“흐흐흐, 그래야지. 잠깐 보고 갈 테니까 문 열어.”
무사들은 군말 없이 철문을 열었다. 끼이익, 녹슨 쇳소리가 나면서 끝이 보이지 않는 계단이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