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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


“어제 자리를 떠나실 때 안색이 좋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천마보고로 향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많이 놀랐습니다.”
“천마보고? 그게 뭔데?”
창건이 생뚱맞은 표정으로 되물었다. 흑염군은 약간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문 위를 가리켰다. 창건은 그의 손짓을 따라 문 위에 걸린 현판을 보았다.
‘천마보고라…….’
“교주님만이 출입할 수 있는…… 보물 창고입니다. 이미 보셨겠지만 금(金), 서(書), 병기(兵器), 약(藥)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약? 약은 못 보고 나왔는데.’
나중에 다시 확인해 봐야겠다고 다짐하는 창건이었다. 창건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군. 어쩐지 희한한 게 많더라니……. 아, 나 하나도 손 안 댔어. 나뒹구는 칼 한 자루 주웠을 뿐이야. ……괜찮지?”
창건이 지레 찔끔해서는 말했다. 흑염군은 그제야 창건이 못 보던 검을 차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천마보고에 있는 모든 보물은 교주님의 것입니다. 원하는 대로 사용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검은…… 교주님 대대로 전해지는 칠귀검(七鬼劍)이 있다는 것을 아시지요? 공교롭게도 칠귀검만큼은 규율상 즉위식 이전에는 패용하실 수 없으니, 그때까지 천마보고의 검을 쓰시면 될 것 같습니다.”
“어? 어, 그래. 그럼 되겠네. 잘됐다.”
애초에 악명 높은 칠귀검 따위는 손도 대고 싶지 않았다. 창건의 대답을 들은 흑염군은 이윽고 주저하다가 물었다.
“그런데…… 천마보고의 문은 도대체 어떻게 여셨습니까?”
“응? 드, 들어갈 때는 기억이 안 나는데. 나올 때는 그냥 밀고 나왔고.”
“밀고…… 말입니까?”
흑염군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응. 밀고 나왔지.”
창건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맨손으로…… 말입니까?”
“맨손으로.”
창건은 딱 잘라 대답했다.
‘왜 이렇게 꼬치꼬치 물어? ……내가 또 꼬투리 잡을 짓이라도 했나?’
흑염군이 입을 다물고 침묵했다. 뭐라고 말을 하려는 표정이었는데 감히 꺼내지를 못하는 모양이다.
“왜 그래? 뭐 잘못됐어?”
“아니, 그게…… 천마보고에는 열쇠가 있습니다. 문 옆에 꽂으면 기관이 작동해서 저절로 열리지요.”
흑염군이 품속에서 검은색의 상자를 꺼냈다. 그 안에는 은 세공품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정교한 무늬의 열쇠가 들어 있었다.
“이것입니다. 본래 술자리가 끝나고 교주님께 드리려고 했는데 경황이 없어서 전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열쇠도 없이 여셨다니…….”
“그, 그러게? 원래 안 잠겨 있던 거 아냐?”
창건은 당황해서 대답했다. 왠지 자신이 못 들어갈 곳을 들어간 기분이었다.
흑염군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닙니다. 애초에 천마보고의 문은 잠기지 않습니다. 오철로 된 문의 두께만 한 뼘이고, 높이가 십오 척입니다. 무턱대고 민다고 밀릴 문이 아니지요.”
흑염군은 한숨을 쉬더니 상자 안의 열쇠를 가리켰다.
“이 열쇠를 문 옆에 꽂으면 기관이 작동해서 문이 저절로 열립니다.”
창건은 오철문을 되돌아보고 두 눈을 껌뻑였다. 무식하게 크다고는 생각했는데 무게까지 무식할 줄은 몰랐다. 창건이 피식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거짓말. 말도 안 돼. 그럼 내가 열 수 있을 리가 있나.”
“……그런데 어제 유령대의 일부가 교주님께서 문을 여는 모습을 보았다고 합니다.
“유령대가?”
“모르셨겠지만 천마보고는 무정살혼대와 유령대가 함께 수호하고 있습니다.”
창건은 자기도 모르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극도의 은신술을 발휘하는 고수들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흑염군이 진지하게 말했다.
“그래서 짐작컨대, 교주님의 암천마령기가 융화되기 시작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어제 연회에서 보여 주셨던 절혼장이나, 천마보고를 힘으로 들어가신 점을 생각하면 말입니다.”
창건은 깜짝 놀랐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얘기다. 암천마령기가 몸에 녹아들면 어쩌란 말인가. 기맥에 뭉쳐 있을 때는 그나마 무림맹에 돌아갈 가능성이 있었지만, 만약 단전까지 흘러들어가서 안착한 거라면 무림맹의 적으로 찍힐 가능성도 있었다.
‘어디 한 번…….’
은근히 호흡을 가다듬어서 내기의 흐름을 확인했다. 정말로 암천마령기가 녹아든 것인가?
‘아니, 아니다!’
상황이 조금 달라지긴 했다. 혈맥에 쌓였던 암천마령기가 상당량 자취를 감춘 것이다. 사라진 태을지기는 여전히 보이지 않았지만, 이만하면 폭주는 멎은 것 같았다.
‘혹시…… 내 체질에 안 맞는 공력이라 잠자는 사이에 빠져나갔나? 확실히 그럴 수도 있어.’
창건이 묵묵히 듣고만 있자 흑염군이 먼저 제안했다.
“교주님을 진맥해 봐도 되겠습니까?”
“음…… 좋을 대로…….”
어설프게 거절하기보담 그냥 허락하는 게 낫다. 흑염군은 창건의 완맥을 쥐고 진기를 흘려 넣었다. 곧 한 차례 몸을 확인한 흑염군은 완맥을 놔 주면서 말했다.
“으음, 이상하군요. 혈맥에 뭉쳐 있던 암천마령기가 풀린 것은 좋은 일인데, 어디로 숨었는지 모르겠군요. 하지만 그 정도의 괴력을 발휘하셨다면 내공을 얻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인데…….”
흑염군은 말끝을 흐렸다.
“판단이 어렵군요.”
아무리 마교의 절대고수로 추앙받는 흑염군이라도, 교주의 암천마령기만은 불가사의한 영역이었다. 어떤 효능을 발휘하는지도 천차만별이라 섣불리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음, 다시 밀어 볼까?”
“그렇게 해 주시면 훨씬 알기 쉬울 겁니다.”
어차피 마교의 내력 따위를 얻으면 목숨이 위태롭게 되는 창건이다. 마음이 다급하니 미리 확인해 놔야 했다. 그는 자신이 밀고 나왔던 오철문 앞에 다가갔다.
“흐아아아앗!”
창건은 벼락같이 기합을 내지르며 오철문을 밀어붙였다.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어라?”
아까는 힘껏 밀어붙이니 문이 열렸다. 그런데 이번에는 오히려 반탄력으로 창건이 밀려날 지경이었다.
“이, 이게 왜 이러지?”
창건은 뒤로 튕겨 나더니 멋쩍게 웃었다.
“하하, 이거 안 되는데……?”
창건이 하는 짓을 가만히 지켜보던 흑염군은 결국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진기가 움직이는 어떠한 징조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으음, 아무래도 암천마령기와의 체화가 완전히 이루어진 것은 아닌가 보군요.”
흑염군의 목소리에는 아쉬움이 깃들어 있었다. 창건은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야. 그런 게 내 몸에 녹아 버리면 영영 못 돌아간다고.’



제8장 모색


거처에 돌아온 창건은 서고에서 챙겼던 마쟁록을 침상 위에 늘어놓고, 가장 최근의 것인 이십대 교주의 것부터 집어 들었다. 마교 입장에서 서술했다 뿐이지, 무림맹과의 전쟁사를 기록한 것이다.
“하암, 뭐야. 거의 다 아는 내용이네.”
창건은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무림맹에서 가르쳤던 역사와 별반 다른 게 없다. 입장의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재미있을 줄 알았더니, 쳇.”
별로 재미가 없다. 딱딱한 이야기들만 적혀 있으니 글공부를 하는 기분이다. 창건은 책을 덮을지 계속 읽을지 고민하면서 한 장씩 대충 훑어 넘겼다.
“어?”
이십 대의 마쟁록을 모두 읽고, 십구 대의 마쟁록을 펼친 창건의 눈이 커졌다.
“잘못 썼나? 이럴 리가 없는데.”
창건은 눈을 비비고 확인하더니, 황급히 다음 장을 넘겨 보았다.
“뭐야, 다음 장에도 똑같잖아.”
창건은 인상을 찡그렸다.
“왜 사귀당(四鬼堂)이 아니라 오귀당(五鬼堂)이라고 쓴 거지?”
이상한 일이었다. 마쟁록은 마교의 역사를 기록하는 만큼, 작은 용어 하나조차도 틀리는 법이 없었다. 그런데 네 개의 당을 묶어 부르는 사귀당이 어째서 오귀당으로 쓰여 있단 말인가.
“어디 십팔 대에는…….”
창건은 십구 대의 마쟁록을 내려놓고, 십팔 대 마쟁록을 펼쳤다.
“여기에는 뭐라고 나와 있으려나.”
촤라라라락, 창건은 내용도 읽지 않고 단어만 확인하면서 책장을 빠르게 넘겼다. 채 이 할도 넘기지 않았는데 원하는 단어를 찾을 수 있었다.
“여기도 오귀당이네? 뭐야, 이십 대 이전에는 원래 오귀당이었던 거야?”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소교주의 목숨을 노린다는 사귀당의 얘기다. 창건은 민감하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파천마제의 통치 기간이 사십팔 년, 이십대 교주 흑운마제가 이십사 년……. 최소한 칠십 년 전에는 당이 하나 더 있었다는 얘긴가?”
창건은 생각에 잠겼다. 십구 대 마쟁록을 봐도 오귀당이 사귀당이 된 이유는 적혀 있지 않았다.
‘고의적으로 누락됐거나, 아니면 비밀리에 벌어진 일이야. 그만한 크기의 조직이 없어지는 데 마쟁록에 기록 한 줄 없다는 건 말이 안 돼.’
창건은 인상을 찡그리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마쟁록을 침상에 휙 던져 버리고 그 옆에 누웠다.
“후, 내 코가 석 자인데 사귀당이 오귀당이었던 게 뭐가 중요해. 오지랖 넓게 굴지 말고 도망갈 방법이나 생각해 보자.”
그때였다.
차릉 하는 맑은 종소리가 들렸다.
“누구야?”
“향월입니다. 다과를 좀 가져왔어요.”
창건은 반색했다. 마침 목이 마른 참이었다.
“잘됐네. 들어와.”
문이 소리 없이 부드럽게 열렸다. 향월이 소반에 받쳐 온 것은 달콤한 약과와 용정차였다.
‘약과다!’
창건은 달콤한 군것질거리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특히 약과라면 장에 나갈 때마다 사 먹을 정도로 즐겼다. 그간 마교에서는 군것질을 못해서 입이 근질거리던 참이었다.
“고마워. 잘 먹을게.”
창건은 싱글벙글 웃으면서 입을 가린 두건을 내렸다. 약과를 듬뿍 베어 물고 우물거리다가 목이 메면 차를 마셨다. 입 안 가득, 달콤한 약과의 맛과 쌉쌀한 용정차의 향이 어울려 멋진 조화를 이루었다.
‘그래, 이거야! 맛있는 걸 마음대로 먹고 싶었다고. 뇌동고가 먹는 이상한 거 말고!’
창건은 감격까지 했다.
“약과…… 좋아하시나요?”
향월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순간, 창건은 약과를 입 안에 우겨 넣으려던 자세 그대로 굳어 버렸다.
“왜, 왜?”
불안감이 엄습했다.
“누, 누가 나 약과 안 좋아한대?”
만약 그런 얘기라도 있었다면 큰일이다. 정체를 들키는 게 두려워서 역겨운 밥을 먹고 버틴 창건이다. 아무리 좋아하는 약과라도 눈물을 머금고 포기해야 하는 것이다.
다행히도 향월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그런 얘기는 듣지 못했사옵니다만…….”
‘사옵니다만? 그럼 뭐, 왜 사람 불안하게 해!’
“너무 맛있게 드시는 것 같아서 여쭈었어요. 요즘 입맛도 없어 보이시고 해서…….”
하마터면 체할 뻔했다.
‘내가 식욕이 없어 보였나? 하긴, 그 괴상한 음식들을 억지로 먹고 있었으니…….’
어쨌든 약과는 먹어도 된다는 소리다. 창건은 안심하고는 약과를 입에 가져가서 우적우적 씹었다.
“험험, 원래 약과를 좋아하는 건 아닌데…… 이건 특별히 맛있네. 솜씨 좋은 숙수가 만들었나 봐.”
향월의 얼굴에 붉은 기가 감돌았다. 창건은 약과 먹는 데에 집중하느라고 눈치 채지 못했다.
“다행입니다. 교주님 입맛에 맞으시다니…….”
“응? 이거 혹시……?”
“예, 제가 만들었사옵니다.”
향월이 감격한 듯이 말했다. 볼을 붉히고 어쩔 줄 몰라 하는 게 무척 귀여웠다. 창건은 눈을 껌뻑이다가 다시 물었다.
“진짜? 진짜 네가 만들었어?”
“예…….”
“이렇게 맛있는 약과는 처음 먹어 봤어. 너 제법 재주가 좋구나.”
공치사가 아니었다. 실제로 향월이 만든 약과는 맛도 모양도 최상급이었다. 전문 숙수가 만들었다고 해도 믿을 판이었다.
창건이 칭찬하자 향월의 얼굴이 홍시처럼 빨개졌다. 그녀는 화끈거리는 얼굴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숙이고 차를 따랐다. 창건은 자기도 모르게 그녀를 넋 놓고 바라보았다.
백옥처럼 새하얀 얼굴에 호수처럼 깊은 눈동자, 시원하게 뻗은 콧날, 붉은 입술이 감추고 있는 하얗고 가지런한 치아…… 일개 시녀라고 생각하기엔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창건은 마른침을 삼켰다.
‘적혈화보다는 오히려 이런 여자가 내 취향…… 아니,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이야! 도망 나갈 생각을 해야지, 마교의 여자를 어찌! 엇험!’
창건은 괜히 창피해져서 얼굴을 붉히고 헛기침을 했다.
“엇험, 엇험.”
그러고는 목이 칼칼해서 차를 마시려고 했다.
그때였다.
푸스스스.
무언가 창건의 무릎으로 쏟아져 내렸다. 창건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의 무릎을 보았다.
‘이, 이게 뭐야?’
향월이 경악해서는 창건을 불렀다.
“교, 교주님? 그게 뭐죠?”
창건은 어이가 없었다.
무릎으로 쏟아져 내린 것은 가루가 된 찻잔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손아귀에 남은 것은 허공에 둥실 떠 있는 찻물이었다. 찻잔에 담겼던 모양 그대로다.
“나도 몰…… 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