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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크와아아아!”
분노한 창건의 검에 검붉은 기운이 맺혔다. 이왕 이렇게 된 것, 모조리 힘으로 밀어낼 작정이었다. 어느새 백색 운무는 창건을 휘감고 있었다.
“마령폭(魔靈爆)!”
푸화악!
흑야에 맺힌 검기가 폭발적으로 솟아올랐다. 대기마저 바작바작 갉아먹는 검기가 백색 운무에게 휘둘러졌다. 창건은 백색 운무가 완전히 흩어질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이게 웬일인가. 백색 운무가 오히려 검기를 머금은 흑야에게 몰려들었다. 백색 운무가 검기에 닿는 순간, 천지를 찢어발길 기세를 가졌던 마령검기가 맥없이 흩어졌다.
“크, 크윽! 언제까지…….”
창건은 진기가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흑야의 검신에 다닥다닥 달라붙은 백색 가루가 검기를 빨아먹고 있는 것이다.
황급히 검을 떨치려고 했으나, 손에 딱 달라붙어 떨어지지를 않는다. 창건은 짐승처럼 울면서 발버둥을 쳤다. 그러는 사이 허공에 머물렀던 백색의 가루는 흑야의 검신을 완전히 뒤덮었다.
콰득!
가루는 다시 뭉쳐 돌처럼 단단해졌다. 묵검은 석검(石劍)이 되었다. 뭉툭한 몽둥이 같은 백색의 석검이다.
콰득! 콰드득!
석검은 다시 한 번 변화를 일으켰다. 검신을 에워싼 돌의 두께가 더욱 얇아졌다. 가루가 압축되고 압축되어 마침내 흑야의 원래 두께와 거의 차이가 없어졌다.
“크, 크으으으! 언제까지 나를 가둬 둘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크아아아아!”
흑야라고 새겨진 이름마저 백색의 검신 표면에 드러났다. 창건은 여전히 흑야를 놓지 못하고 진기를 빨리고 있었다. 단전의 허탈감이 느껴질 무렵, 창건은 이를 바득 깨물면서 허공으로 흑야를 떨쳐 냈다.
슈각.
허공에서 핑그르르 회전한 흑야가 석실 바닥에 부드럽게 꽂혔다. 창건은 분노에 찬 눈으로 흑야를 노려보다가 부들부들 떨면서 쓰러졌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오랜만에 느끼는 숙면의 개운함이다. 머릿속이 시원하고 몸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창건은 달콤한 잠의 여운을 만끽하며 서서히 눈을 떴다.
“후아, 잘 잤다. 얼레? 여긴 어디야?”
늘어지게 하품을 하던 창건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그가 잠에서 깬 곳은 엄청나게 넓은 석실이었다.
수백 자루의 병기가 진열된, 일종의 병기고 같았다.
“왜…… 여기서 자고 있던 거야?”
그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잠이 덜 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꿈을 꾸나?’
어쨌든 어딘지 확인이나 할 요량으로 몸을 일으키는데, 이상하게도 몸이 무척 가벼웠다.
아무리 여름이라 해도 돌바닥에서 자는 건 등이 배긴다. 차라리 바닥이 흙이면 모를까, 딱딱한 돌덩이 위에서 자면 근육이 긴장으로 굳는다.
그런데 창건의 몸은 오히려 가뿐하고 활기가 넘쳤다.
‘별일도 다 있네. 도대체 여긴 어디야?’
보약이라도 먹고 정양한 기분이다. 창건은 도대체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되짚었다.
‘술을 마시고…… 기혈이 들끓어서…….’
기억이 거기서 토막 났다. 어딘가를 향해 계속 걸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때는 이미 정신이 반쯤 나간 데다가 시야까지 붉게 변해서 아무것도 보이질 않았다.
‘그러고 보니 왜 세상이 붉게 보였지? 취해서 그런가? 정말 별일이네.’
창건은 기이한 일이라 생각하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술 마시면 세상이 이상하게 보이는 게 어디 하루 이틀 일인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생각을 접었다.
‘그나저나 왜 이렇게 가뿐하지? 어제는 죽을 것 같았는데…….’
어제처럼 기혈이 들끓었으면, 목숨을 건지더라도 몇 개월은 정양을 해야 할 정도로 내상을 입는 게 정상이다. 그런데 창건의 몸은 가뿐하기 짝이 없었다.
‘뭐, 잘됐으면 된 거지.’
창건은 어젯밤에 죽을 뻔했다는 사실만 어설프게 기억했다. 몸이 멀쩡하니 다행이다. 창건의 관심은 자신에게서 주위로 옮겨갔다.
“여기 정말 무기 많네. 하나쯤…… 가져가도 되려나.”
처음에는 병기고라고 생각했다. 술 마시고 엉뚱한 병기고에 처박힌 거라고. 그러나 병기를 하나하나 살펴 본 창건은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귀, 귀한 것들이다! 자오철(紫烏鐵)에 만년한철(萬年寒鐵)에, 백련정강(百鍊精剛)에…… 이, 이건 보석으로 만들었네?”
창건의 눈이 빠르게 병기를 훑었다. 하나같이 값을 매기기 힘든 기물들이었다. 무인이란 좋은 병기를 보면 환호하는 법. 창건도 예외는 아니었다.
‘가져가도 될까? 으으음…… 아무렴, 내가 교주인데 하나 정도는 괜찮겠지? 괘, 괜찮을 거야.’
어젯밤에 팔혼이 바치겠다는 것들을 모두 ‘내 것이 아니다’라면서 거절했던 창건이다. 이미 자신의 신념은 잊었는지 신나서 병장기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열에 들떠서 도검을 살피던 창건은 이내 어깨를 늘어뜨리며 한숨을 쉬었다.
“쳇, 이것들은…… 못 쓰겠군.”
그럴 수밖에 없었다.
공교롭게도 모두 사이한 기운을 풍기는 병기들이었다. 무림맹에서는 마병(魔兵)이라 부르는, 정도의 무인이 쓸 수 없는 것들이다. 무림맹에 돌아가면서 마기가 흐르는 검을 가져갈 수는 없다.
창건은 울상을 지었다.
‘여기 있는 동안만이라도 쓰면 안 되나……. 아냐, 아서라. 괜히 욕심만 생기겠다.’
그래도 미련이 가시지 않는지 창건은 비교적 마기가 적게 흐르는 검을 뽑아 보았다. 스르릉, 검명이 시원하게 울렸다. 균형도 무게도 알맞았다.
“하압!”
창건은 허공에 낙일검 일초식을 그려 보았다. 허공에 흐릿한 태양의 형상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창건은 눈앞에 펼쳐졌던 검영을 음미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틀렸어. 살기가 너무 짙어. 이런 건 못 쓰겠군.”
탁.
소리 나게 검을 검집에 꽂아 넣은 창건은 던지듯이 진열대 위에 내려놓았다.
‘씨, 그냥 만지지 말걸. 아쉬움만 커지네.’
창건은 눈을 질끈 감고 석실을 나서려 했다.
“어? 이건 또 뭐야.”
열려 있는 문으로 걸어가던 창건은 눈을 빛냈다. 돌바닥에 깊숙이 꽂혀 있는 순백의 검을 발견했던 것이다. 검신이 반쯤 드러난 검은 스스로 빛을 머금은 듯 우아하게 빛나고 있었다.
“머, 멋지다…….”
창건은 침을 꿀꺽 삼켰다.
‘마검이 아니야……. 오히려 정한 기운이 흐른다.’
사악한 기운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게다가 깊은 현기가 흐르고 있었다.
‘값을 매길 수 없는 명검이다. ……이런 건 본 적도 없어.’
창건은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어 검을 쥐었다.
시원하다. 백색의 검을 쥐는 순간,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시원한 청량감이 몰려왔다.
스륵.
아주 약간만 힘을 주었는데도 검이 가볍게 빠져나왔다. 창건은 보물을 다루듯 조심히 검을 살폈다. 돌바닥에 꽂혀 있었는데 이빨 하나 나가지 않았다.
“흑……야……?”
백색의 검신에 흑야라는 새김이 있다.
“네 이름이 흑야구나.”
창건이 활짝 웃으면서 검신을 손으로 쓸었다.
처음이다. 검을 만지면서 행복하다는 기분이 든 것은.
창건은 싱글벙글 웃으면서 검을 들고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이건 가져가도 되겠어. 그런데 도대체 뭐로 만든 거지?’
맑은 백색의 검신은 도무지 금속으로 만든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러나 짐작 가는 바도 없었다.
“마교에도 쓸 만한 검이 한 자루쯤은 있구나. 하하, 좋아. 너를 내가 쓰겠어!”
손에 착 달라붙는 느낌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창건은 희희낙락 웃었다.
“가만……. 검집도 있어야겠지.”
마침 아까 휘둘러 본 검의 검집이 제격이다. 창건은 진열대의 마검에서 검집만 뽑고 흑야를 대신 꽂았다. 맞춘 듯이 꼭 맞았다.
“하하하, 아주 그럴듯한데? 그럼 앞으로 잘 부탁한다, 흑야.”
순간, 희미하게 흑야가 진동했다. 창건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거 지금 대답한 거 아냐? 히히, 기분 탓인가? 그나저나 이런 명검이 검집도 없이 나뒹굴다니……. 역시 마교에서 명검 취급받는 건 사악한 검뿐인가?’
마교에 대한 완벽한 몰이해가 아니면 빚어낼 수 없는 결론이었다.
명검은 누가 쥐어도 명검인 법이다. 아쉽게도 정정해 줄 사람이 없었다. 창건은 멋대로 납득하고는 병기고의 방을 빠져나왔다.
그를 맞이한 방은 책들이 가득 꽂혀 있는 거대한 서고의 방이었다.
‘가만……. 여기가 혹시 교주 전용의 서고 아냐?’
언뜻 봐도 어제 들렀던 서고보다 훨씬 책의 양이 많았다. 뿐만 아니라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 배가 고파진 창건이었기에 책은 나중으로 미루고 그대로 통과했다. 마지막 방에는 금은보화가 가득했다.
“……돈이네.”
창건은 순간 가슴이 떨렸다. 저 정도의 돈이면 팔자 고치는 데 충분하고도 남았다. 자손 대대로 부귀영화를 누릴 수도 있다.
“아, 아니야. 정신 차리자. 아무리 내가 타락했어도 마교의 재물에 관심을…….”
창건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정말 그럴까? 어차피 마교의 것인데, 여기 놔두면 마교 녀석들이 나쁜 짓 하는 데에 쓸 텐데……. 게다가 돌아갈 여비도 필요하잖아.’
가만 생각해 보니 금은보화에 손을 대야 할 이유가 너무나 많았다. 창건은 말을 바꿨다.
“그래, 관심을 보여도 돼. 내가 좋은 데에 쓰면 되지, 뭐.”
이미 명검도 하나 챙겼는데, 금은보화 몇 개 줍는 데 양심의 가책을 받을까.
창건은 무심한 눈길로 금은보화를 둘러보더니 가장 가볍고 값나가는 보석들만 골라 한 주머니 챙겼다.
고작 주먹 두 개를 합친 것만큼의 양이었지만 상단도 가볍게 사들일 수 있을 정도로 값나가는 보석들이었다.
‘대충 집 한두 채는 살 수 있지 않을까……. 흐흐, 나중에 도망칠 때 갖고 가야지. 이건 도둑질이 아니라 엄연히 탈출 자금 조성이야. 암.’
이제 돈 없어서 설움 받을 일은 없겠다. 창건이 허리에 찬 주머니를 툭툭 두드리면서 웃는데, 굳게 닫힌 철문 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교주님, 안에 계십니까?”
흑염군의 목소리다. 창건은 그제야 화들짝 놀라 정신을 차렸다.
‘그, 그러고 보니 간밤에 여기 와서 잤다는 건…… 내가 없어져서 찾고 있었다는 얘긴가?’
창건은 황급히 철문 쪽으로 달렸다. 걱정시키는 것은 상관없지만 필요 이상으로 이쪽에게 관심을 보이면 곤란하다.
‘관심도 관심이지만 창피해!’
그런데 막 창건이 뛸 때였다.
콰직!
창건은 다급히 석실 바닥을 박찼다. 그런데 단단하게 보였던 석실 바닥이 푹 꺼졌다.
“어?”
그 반동으로 창건의 몸이 허공으로 붕 날아올랐다. 오 장 거리를 훌쩍 뛰어넘은 창건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닥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뭐, 뭐야. 돌로 만든 바닥 아니었어?”
다시 봐도 돌이다. 그것도 단단하기 짝이 없는 운남의 대리석을 깔아 놓은 것이다.
‘푸, 푹 꺼졌어. 이거 혹시 함정이나 기관 아냐?’
그렇게 보기엔 아무런 해가 없었다. 다만 바닥이 깨져서 꺼져 있을 뿐이다. 창건이 미처 깊은 생각에 잠기기도 전에 흑염군이 재촉했다.
“교주님, 제 말이 들리십니까?”
“어! 들려! 들려!”
창건의 외침이 석실 안에 울려 퍼졌다.
“안에 계시면 대답해 주십시오.”
“들린다니까!”
창건이 빽 소리를 질렀다.
공교롭게도 밖에서는 창건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했다.
“교주님!”
“나 여기 있다니까! 그런데 이건 어떻게 여는 거야!”
어떻게 밀어 볼 의지조차도 꺾어 버릴 정도로 거대한 철문이다.
‘내가 열 명 달라붙어도 못 열겠다. 이거 무슨 수로 여는 거야?’
창건은 철문 주위를 살폈다.
‘혹시 저절로 열리는 기관장치가…… 젠장, 안 보여.’
결국 창건은 거대한 철문에 달라붙어 양손으로 힘껏 밀었다. 손잡이도 기관도 보이지 않았기에 맨손으로 밀어 본 것이다. 그러나 워낙 무겁기 때문일까. 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이…… 빨리 나가야 술 먹고 뻗었다는 오명을 피할 텐데!’
창건은 안간힘을 쓰면서 철문을 밀었다.
순간, 기이한 활력이 전신을 휘돌았다. 단전으로부터 시작된 뜨거운 파동이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끼, 끼기긱.
철문이 기괴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어, 어어?”
창건은 놀라서 입을 뻐끔거렸다. 철문은 의외로 가벼웠는지 그가 갖은 힘을 기울이자 결국 열렸다.
“교주님!”
흑염군이 다시 소리쳤다.
‘뭐야, 벌써 내가 여기 있는 걸 알고 있다는 소리잖아.’
그렇지 않다면 저렇게 끈질기게 부르고 있을 리가 없다. 창건은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 술 마시고 창고에서 처잤다. 눈치가 있으면 좀 비켜 줄 일이지, 그걸 계속 부르냐?’
“그래, 나간다! 나가!”
창건이 열어젖힌 문 뒤로는 긴 복도가 있었다. 그리고 그 끝에는 지금 열었던 것과 같은 철문이 또 버티고 있었다.
“뭐야, 저건 또?”
오로지 술 마시다 뻗었다는 민망함 때문에 창건은 후다닥 뛰었다. 자꾸만 몸이 허공으로 튀어 오르는 바람에 애를 먹었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콰앙!
문에 도달하자마자 양손으로 힘껏 밀었다. 흡사 후려치는 것처럼 육장을 내밀었는데, 손이 닿는 순간 철문이 굉음을 내면서 활짝 열려 버렸다.
끼이이이익!
아까보다 훨씬 쉽게 열렸다. 창건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아야야!”
대신 손바닥이 화끈거리고 쓰라렸다. 불에 덴 것처럼 뜨겁기까지 했다.
“교, 교주님?”
문이 활짝 열리자 흑염군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창건은 쌍장을 힘껏 뻗은 자세 그대로 굳었다.
“미, 미안. 많이 찾았나? 술 먹고 깨 보니까 여기더라고. 하하하하!”
흑염군은 창건의 너스레를 보고는 평정을 되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