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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우우우웅!
단단하게 굳어 있던 암천마령기가 깨어났다. 질척하게 굳었던 진흙이 꿈틀거리면서 혈관을 타고 흘렀다.
‘크윽, 아파! 누가 좀 도와줘!’
창건은 술잔을 내려놓는 자세 그대로 덜덜 떨었다. 뒤늦게 그의 상태를 눈치 챈 흑염군이 다급히 물었다.
“교주님?”
“크, 크윽……!”
“교주님, 괜찮으십니까?”
흑염군은 상상도 못했다.
암천마령기가 완전히 겉돌고 있다는 걸, 작은 자극만으로도 안정이 깨진다는 사실을. 암천마령기공을 익힌 소교주라면 절대로 그럴 일이 없었으니까.
“우, 우으윽.”
“교주님!”
이제는 나머지 팔혼도 창건의 상태를 보고 긴장했다.
‘미치겠네…….’
목구멍으로 비릿한 핏물이 올라왔다. 창건의 입가에 가느다란 혈선이 그려졌다.
“독인가!”
흑염군이 자리를 박차고 뛰어올랐다. 공중을 날 듯이 다가온 흑염군은 창건의 잔과 병에 손을 뻗었다. 허공섭물, 병과 잔이 각각 손에 잡혔다.
“술은 아니다.”
흑염군이 말했다. 이어서 사림이 새하얀 백침을 꺼내서 창건이 먹은 음식을 찔러 보았다.
“음식도 아닙니다. 독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적혈화가 창건의 맥을 짚으려고 했다. 그러나 창건은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들키면…… 안 돼…….’
술과 고통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었다. 단지 자신의 상태를 알리면 들킬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엄습했다.
“저리…… 가…….”
창건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혈도를 뭉개면서 암천마령기가 이동한다. 조금만 시간이 지체되어도 죽을 판이었다. 그렇다고 암혈팔혼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었다.
‘이대로 가면…… 죽어…….’
창건은 이를 악물었다.
‘이제 암천마령기가 녹았다면…… 진기로 흐르리라. 내 뜻에 따라 움직여! 한 번만이라도……!’
창건은 그야말로 필사적이었다.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도 깨닫지 못했다.
단전에서 노도와 같이 흐르는 암천마령기를 우수로 도인했다. 지나가는 혈도마다 다치고 걸레처럼 찢어졌다. 온몸이 찢겨 나가는 고통이 엄습했다.
‘살아야 돼……. 넘치는 힘을 외부로…… 넘침은 모자람만 못하니…… 그릇이 깨지기 전에…….’
그야말로 필사적이다.
내부에 고인 힘을 외부로 발출하는 것만이 살길이다. 창건은 가장 익숙한 오른손으로 모든 진기를 도인했다. 그의 오른손에 흐릿한 어둠이 내려앉았다.
“절혼장!”
흑염군이 눈을 크게 뜨며 외쳤다. 창건이 암천마령기를 운용한 방식은 틀림없는 절혼장이었다.
‘어둠으로 혼을 끊으니, 그 이름이 절혼장이라…….’
창건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절혼장의 묘리를 떠올리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 머릿속에서 말해 주는 것만 같았다.
“제발…… 나가…….”
창건은 이를 악물고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어둠이 넘실거리는 오른손으로 탁자 위에 놓인 술병을 움켜잡았다.
사라라락.
백옥으로 만든 술병이 고운 가루가 되어 흘러내렸다. 그 안에 담겼던 술은 순식간에 끓어올라 증발했다. 자욱한 안개가 피어올랐다. 창건은 손으로 허공을 움켜쥔 것처럼 주먹을 쥐었다.
치이이이익.
뭉게뭉게 피어오른 술 안개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누구도 말을 꺼내지 못했다. 짧은 침묵 속에 경악이 곁들여져 있었다. 창건은 이윽고 한숨을 토했다.
‘후아, 이제 조금 살겠다. 기절하는 줄 알았네.’
아무리 생각해도 미친 짓이다.
가만히 내버려 둬도 안정될지 모르는 것을 억지로 움직였으니, 목숨을 걸었다고 해야겠다. 그러나 의외로 훌륭하게 성공한 덕분에 들끓어 오르는 기운을 배출해서 안정시킬 수 있었다.
창건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여기서 추태를 부릴 수는 없었다.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도 거처로 돌아간 이후다.
창건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미안하지만…… 나 먼저…… 일어설게.”
“그, 그럼 저희도 일어나지요. 교주님을 모시려고 만든 자리이니…….”
“아니야……. 나 때문에 끝내지 말고…… 귀찮으니까 혼자 가게 놔둬……. 바람 좀 쏘이면 괜찮을 거야.”
창건은 따라오겠다는 사람을 모두 뿌리치고 방을 나섰다. 전신에 식은땀이 줄줄 흘렀고, 목구멍으로는 자꾸 비릿한 울혈이 치밀었다.
‘제길, 이러다 정말 뻥 터져서 죽는 거 아냐?’
상태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하다.
술 좀 마셨다고 진기가 요동치는 정도면, 평소에도 결코 안전하지 않다는 소리다.
창건은 발길 닿는 대로 걸었다. 거처로 돌아가는 길이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절로 길을 골라서 가고 있었다.
마치 원래 알았던 길처럼 익숙하게.
한편, 싸늘하게 식어 버린 연회장에 남은 팔혼은 창건이 만든 흔적을 살피고 있었다.
“두말할 필요도 없겠네. 완전한 절혼장이야.”
적혈화가 가루가 되어 버린 백옥병을 손가락으로 뒤적이며 말했다.
“체화가 늦어진다고 해서 걱정했는데…… 암천마령기와 완전히 하나가 되면 정말 강하겠군요.”
백뢰가 싱글벙글 웃었다.
“기대 이상이군.”
흑염군이 말을 맺었다. 그는 적혈화가 뒤적이던 백옥 가루를 향해 손을 휘저었다.
화르륵!
흑색의 불꽃이 일어나더니 금세 백옥 가루는 타서 없어졌다.
‘가야 해.’
무의식중에 걸었다.
스스로 걷는다는 자각조차 없었다. 시간이 갈수록 눈앞이 점점 붉게 변했고, 몸속에서 요동치는 진기의 흐름이 강해졌다.
‘가야 해.’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진득한 피비린내가 나는 목소리다.
“크……으…….”
반쯤 벌어진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피부에 뱀이 기어 다니는 것처럼 혈관이 불룩 튀어 올라 꿈틀거렸다. 녹아들지 못한 진기가 터지기 직전이다.
‘죽을 것…… 같아…….’
창건은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방금 전 진기를 쏟아 낸 것은 그야말로 한고비를 넘긴 것에 불과했다. 한번 깨어난 암천마령기는 쉬지 않고 창건의 내부를 휘돌았다.
‘가야 해.’
소리는 머릿속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몸이 저절로 소리에 따라 반응했다. 정신없이 복도를 걷고 있는 창건의 주변을 검붉은 안개가 휘감고 있었다.
‘어지러워…….’
점점 정신이 아득하게 흐려졌다.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창건의 내부로부터 무엇인가를 찾겠다는 갈망이 솟아났다. 그것은 뜨거운 의지로 변해서 창건의 의식을 잠식했다.
‘가야 해.’
창건의 의지가 아니다. 암천마령기가 다시 머릿속에 파고든 것이다. 창건은 이미 의식을 잃었다. 그런데도 몸은 계속해서 움직였다.
복잡한 복도를 수없이 돌았다. 세 갈래의 길이 나와도 창건은 자연스럽게 길을 선택해서 걸었다. 정확한 목적지를 가진 사람처럼 익숙한 몸짓이다.
얼마나 그렇게 걸었을까. 이윽고 거대한 철문 앞에 도달했다.
“여기다…….”
창건의 입에서 기괴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천마보고(天魔寶庫)
창건은 일필휘지로 써 내린 현판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러고는 천장까지 닿은 거대한 철문을 육장으로 후려쳤다.
꽈앙!
거대한 폭음이 터지더니 철문이 활짝 열렸다. 창건은 이제 완전히 붉어진 핏빛 눈을 번들거리며 천마보고 안으로 들어갔다.
“부대주님, 말리지 않아도 되는 겁니까?”
창건이 사라진 이후, 어둠 속에서 녹아 나온 회의인영이 말했다. 그러자 역시 회의무복을 입은 자가 모습을 드러내며 대답했다.
“소교주님…… 아니, 오늘부터 교주님이시다. 교주님께서 들어가신다는데 누가 막는단 말이냐.”
“뭔가 이상해 보였습니다.”
“주제넘은 참견이다.”
이의를 제기했던 회의인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어둠 속으로 다시 사라졌다. 부대주라 불린 자도 사라지고 나니, 원래 아무도 없었던 것처럼 고요해졌다.
철문 뒤로는 긴 복도가 이어져 있었다. 창건은 무엇에 홀린 듯이 복도를 걸었다. 그 끝에는 또 하나의 철문이 있었다. 이번에는 가볍게 손끝으로 밀었다.
휘리리릭!
팔꿈치부터 솟아오른 흑색의 기운이 나선을 그리며 손끝으로 모였다.
콰앙!
손끝이든 육장이든 차이가 없다. 또다시 거대한 폭음이 나더니 철문이 튕겨 나가듯이 열렸다.
“후우, 하아아아……!”
창건은 천마보고 안으로 발을 들여놓으면서 크게 숨을 들이켰다. 공기 중에 흐르던 기운들이 그에게로 빨려들었다. 바로 천마보고에 흐르던 농도 짙은 마기다.
“크흐……. 어……디……냐…….”
창건의 목소리는 짐승처럼 그르렁거렸다.
입술이 비틀려 올라갔다. 송곳니가 맹수처럼 비죽이 길어졌다. 크게 심호흡한 창건은 느긋하게 걸어 들어갔다.
첫 번째 방에는 색색의 금은보화가 가지런히 쌓여 있었다. 창건은 무시하고 두 번째 방으로 들어갔다.
두 번째 방에는 수백 개의 책장에 책들이 꽂혀 있었다. 슬쩍 둘러본 창건은 세 번째 방으로 향했다.
셋째 방에는 도검(刀劍)이 가득했다. 수십 장 반경으로 수백 자루는 될 법한 도검이 진열되어 있었다.
하나같이 무시무시한 마기를 뿜어내는 마병기(魔兵器)였다.
“후으으, 하…….”
창건은 방의 중앙에 서서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곧이어 그의 시선이 사방의 도검을 훑었다.
요사한 기운을 뿌리는 쌍검(雙劍), 핏빛을 머금은 단검(短劍), 사람의 키만 한 대도(大刀), 뱀처럼 휘는 연검(軟劍) 등 없는 게 없었다.
천하의 모든 사악한 병기를 모아 놓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옥의 무기고와 같은 곳이다.
그 어떤 것을 보아도 천하일품의 병기다. 그러나 창건은 그런 것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 무시했다.
“크흐흐…….”
이내 창건의 시선이 병장기 사이에 솟은 돌 제단에 못 박혔다. 새하얀 돌로 만들어진 거대한 제단에는 칠흑처럼 어두운 기운을 뿌리는 묵검(墨劍)이 꽂혀 있었다.
“크하하핫!”
창건은 목청껏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강렬한 내력이 천마보고를 뒤흔들었다.
“내가…… 왔……다. 크하하하!”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뛴다. 피부에 솟아오른 핏줄이 쉴 새 없이 꿈틀거렸다. 창건은 묵검을 향해서 걸음을 옮겼다.
묵검은 두 줄기의 번쩍이는 황금빛 사슬로 칭칭 묶여 있었다.
봉인(封印) 당한 검이다. 사기(邪氣)를 억누르는 금줄로 묶어 버렸다. 뿐만 아니라, 제단에는 주사(朱砂)로 쓴 붉은 글씨가 가득했다. 파마, 파사의 수로 이중으로 단단히 봉인한 것이다.
제단 하단에는 경고문이 적혀 있었다.
득검자(得劍者) 필사(必死)
검을 얻는 자,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
그 또한 피처럼 붉은 글씨였다.
창건은 경고문을 보고 비죽이 웃었다. 그의 전신에 검붉은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창건은 경고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손을 뻗어 검을 잡았다.
“카아!”
창건의 팔이 터질 듯이 부풀어 올랐다. 묵검에 감긴 금빛 사슬이 팽팽히 당겨져 기묘한 금속음이 났다. 까득, 까드득.
위이이이!
제단의 붉은 글씨에서 서늘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금줄이 찬란히 빛났고, 창건은 강대한 압력이 묵검을 끌어내리는 것을 느꼈다.
“캬아아앗!”
짐승의 울부짖음이 터져 나왔다. 콰아아! 창건의 등 뒤로 검붉은 기운이 폭발하듯 솟아올랐다.
까득, 까드득.
금빛 사슬이 조금씩 늘어났다. 연결 고리가 부들부들 떨리다가 깨져 나갔다.
콰드득!
마침내 사슬이 깨져 나갔다. 금빛의 사슬 조각이 허공으로 비산했다. 제단에 박혀 있던 검신이 완전히 뽑혔다.
어둠을 머금은 칠흑의 검이다. 창건은 검을 바라보고 히죽 웃었다.
“크, 크크크큭.”
흑야(黑夜)
검신에 새겨진 글씨다. 웅장한 힘이 느껴지는 필체였다. 아마도 묵검의 이름이리라.
“내가 돌아왔다. 크하하핫!”
창건이 광소를 터뜨렸다. 이미 평소의 그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때였다.
푸스스, 백옥 같은 돌로 만든 제단이 갑자기 무너져 내렸다. 고운 가루가 되더니 허공으로 피어올랐다.
“……?”
창건이 뽀얗게 피어오르는 먼지를 보고 인상을 구겼다. 이내 귀찮은 듯이 손을 허공으로 가볍게 떨쳤다. 콰아아! 거센 바람이 불어 먼지를 휩쓸었다.
그런데 먼지는 바람의 영향을 받지 않는 듯, 잠시 출렁였을 뿐 창건의 주위를 떠돌았다.
“아직도 잔재주를 남겨 놓았나!”
뭔가 거슬린다. 창건은 이를 드러내고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그 순간, 백색 가루에 섞여 있던 주사가 붉게 빛났다.
위이이이!
“크윽!”
이상하다. 창건은 위기를 느끼고 몸을 뒤로 물렸다. 타악, 바닥을 박차는 순간 흐릿한 잔영이 되어 십 장이나 물러섰다. 마교 교주의 비전 신공, 암영천공보(暗影天空步)가 펼쳐진 것이다.
“더 이상 나를 가두지 못한다!”
따라오지 못하리라. 암천마령기에 사로잡힌 창건은 그렇게 판단했다. 허공에 춤추는 백색의 운무는 불안하게만 느껴졌다. 한시라도 빨리 자리를 뜨는 게 나으리라.
피잇!
오산이다. 백색의 운무는 암영보를 펼친 창건보다 빨랐다. 허공에서 사방으로 분산되는가 싶더니 창건을 중심으로 빗줄기처럼 쏟아졌다.
“크앙!”
창건의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허공에서 팽이처럼 선회하면서 검붉은 검풍을 사방으로 토해 냈다. 그러나 백색 운무는 잠시 일렁일 뿐, 창건을 집요하게 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