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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흠…… 이십일 대 파천마제 편이 없는 게 아쉽네. 육악마에게 들은 내용과 비교할 수 있었을 텐데.’
창건은 내친 김에 두 권 더 꺼냈다. 서책은 손바닥만큼 얇아서 들고 다니기에도 무리가 없었다.
그때였다.
“어?”
창건은 언뜻 마쟁록이 뽑힌 사이로 무언가를 보았다. 책장 뒤쪽에 바싹 붙어 있는 또 한 권의 책이었다.
“뭐야, 정리를 어떻게 했기에 책이 안에 끼었어?”
괜히 호기심이 동한다. 어떤 책인지 이름이라도 보이면 그냥 지나칠 텐데, 끄트머리만 살짝 보이니까 괜히 꺼내 보고 싶었다. 창건은 아예 마쟁록을 싹 빼 버리고 책장 벽에 붙어 있는 책을 꺼냈다.
“에, 에이취! 에췻! 이거 쓰레기 아냐?”
책을 빼느라 먼지가 피어올라 코를 간질였다. 창건은 있는 대로 재채기를 했다.
“후에취! 뭐야, 제목도 없어?”
역시 마쟁록처럼 손바닥만 한 크기의 책자다. 그런데 표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내용도 백지야?”
뭔가 속은 기분이다. 첫 장부터 끝까지 쫙 넘겨 본 창건은 인상을 찡그렸다. 혹시 숨겨진 비급 같은 게 아닐까 하고 내심 기대했다. 그러나 텅텅 빈 백지만이 창건을 반겼다.
“혹시 노린 거 아냐? 비급인 줄 알았다가 실망하라고.”
누군지는 몰라도 못된 장난임에는 틀림없다. 창건은 마쟁록을 제자리에 꽂아두고는 혹시나 하는 기분으로 백지 책자를 챙겼다. 세 권의 마쟁록과 함께.
‘혹시 모르는 거야. 촛불에라도 그을리면 숨겨진 글씨라도 나오지 않을까?’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백지 책자는 크기도 적당하고 가벼워서 직접 뭔가를 적어 넣기에도 적당해 보였다.
‘여차하면 마교의 기밀을 파헤쳐서 적어 가자. 따로 책을 만들지 않아도 되니 편하네.’
그 이후에는 그다지 시선을 끄는 책을 발견할 수 없었다.
“역시 공용 서고라 쓸 만한 게 없네. 내일은 교주 전용 서고에라도 가 볼까.”
여차하면 마교의 비급들을 빼돌릴 수도 있을 것이다. 창건은 공용서고에서 더 볼 것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빠져 나오려고 했다.
그때였다. 서고 바깥으로부터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소교주님! 소교주님! 여기 계십니까?”
“어? 여기 있는데, 누구냐?”
창건이 대답하자 곧 눈앞에 회의무복을 입은 무인이 유령처럼 나타났다.
“유, 유령대구나.”
창건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갑자기 눈앞에 나타나는 거…… 적응하기 정말 어렵다.’
귀신을 보는 기분이라 매번 소름이 돋았다. 창건은 태연을 가장하고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야. 나는 왜 찾아?”
“예, 소교주님을 뵈옵니다. 연회 준비가 모두 끝났다고 소교주님을 모셔 오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래? 그럼 가야지.”
창건은 들고 있던 책을 던져 버리고 유령대원을 따라나섰다.



제7장 천마보고(天魔寶庫)


좋은 술과 좋은 음식이 함께하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즐거운 법이다. 창건은 얼마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호랑이 소굴만 아니라면 말이지.’
연회장에 도착해서 둘러보니 호랑이라는 표현도 모자랄 마인이 여덟 명이나 있었다. 모두 자신의 이름으로 중원 무림에 피바람을 날린 경력이 있는 사람들이다.
암혈팔혼.
흑염군, 적혈화, 청빙(淸氷), 정철, 백뢰, 사림, 자야, 천마(天馬)의 여덟 명을 한데 묶어서 암혈팔혼이라 일컫는다.
마교를 이끄는 여덟 무인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들은 각기 마교 최고의 정예 부대를 이끌고 있다. 각 부대의 무력은 명문정파 한 곳을 능히 감당할 정도이니 사실상 여덟 개의 문파라고 보아도 무방했다.
창건이 연회장에 당도하자, 여덟 명의 절정고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교주님을 뵈옵니다.”
“소교주님을 뵈옵니다.”
그들은 공손히 포권하며 창건을 맞았다.
‘미, 미치겠네. 무슨 존재감이 이렇게…….’
막상 연회장에 들어온 창건은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허리를 숙이고 포권한 그들에게서 막대한 경력을 느낀 것이다. 특별히 외기를 발산하지 않아도 자연히 흘러나오는, 그야말로 절대자의 기도였다.
“바, 반갑다.”
창건의 목소리가 일순간 떨렸다. 당당하게 하대를 하려고 했는데 그들의 기세에 눌렸다.
‘안 돼! 이렇게 했다가는 들킬 거야! 창건아, 살고 봐야지. 목숨을 구하려면 호랑이 아가리에 머리라도 디밀어야 될 판이야!’
창건은 주먹을 꽉 쥐었다. 암혈팔혼은 아직 포권지례를 거두지 않고 있었다.
‘나는 뇌동고다. 나는 천하에서 가장 건방진 뇌동고다.’
창건은 반복해서 스스로를 타일렀다.
허리를 곧추세우고 어깨를 반듯하게 폈다. 턱은 살짝 올려서 거만하게 팔혼을 내려다보았다.
“내 이름은 뇌동고. 앞으로 그대들의 주인이 될 사람이다. 잘 부탁한다.”
창건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비록 허세였을지언정 창건으로선 목숨을 걸고 꺼낸 말이다.
대기에 작은 파문이 일었다. 소교주의 거만한 태도는 암혈팔혼에게 신선한 인상을 주었다.
“그럼 모두 앉지. 배고파서 죽는 줄 알았네.”
주도권을 뺏겨도 곤란하다. 창건은 너스레를 떨면서 가장 상석에 앉았다.
‘살 떨려서 죽겠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저런 인간들이랑 밥을 먹으라고?’
연회에 참석한 창건은 평정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흑염군 하나도 무서운데 여덟이나……. 미치겠네.’
음식상은 거하게 차려졌고 즐거운 음악까지 귀에 들리는데, 도무지 즐길 수가 없었다. 즐기기는커녕 정체가 들통 날까 봐 가슴이 미친 듯이 뛰었다.
‘이러면 안 돼. 들키지 않으려면 오히려 당당하게. 으아, 손 떨린다.’
창건은 태연한 태도를 가장하면서 오리 고기를 입에 가져다 넣었다.
“뇌옥에 가셨다고 들었습니다.”
“푸흡, 쿨럭.”
창건은 고기를 삼키다 말고 기침을 했다. 잔뜩 긴장하고 있었는데 다짜고짜 질문을 받아서 깜짝 놀랐다.
‘역시 벌써 알고 있네.’
창건은 흑염군을 바라보았다. 사람을 꿰뚫는 듯한 날카로운 시선 때문에 간이 철렁거렸다. 창건은 일부러 가벼운 목소리로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아, 뇌옥 말이야? 발길 닿는 대로 가다 보니까 어쩌다 구경하게 됐어. 별로 볼 게 없더라.”
“수십 년 된 죄인들만 있으니까요. 원하신다면 내일은 안내를 붙여 드리겠습니다. 내궁은 워낙 복잡해서 제대로 보기 힘드실 겁니다.”
“아냐, 지금 이대로가 편해. 누가 따라다니는 건 워낙 질색이라.”
감시가 붙는 건 미연에 잘라 내는 게 상책이다. 설령 내궁 안에서는 일거수일투족을 감시 당한다고 해도, 공공연히 감시가 붙지 못하게 하는 편이 운신하기에 자유롭다.
“혼자 다니면서 익히는 편이 누가 알려 주는 것보다 몇 배는 빨리 익히는 법이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알겠습니다.”
창건은 술잔을 잡았다. 알싸한 향이 코를 자극했다. 백년산삼을 열 뿌리나 넣었다는 백년십삼주(百年十蔘酒)다. 한 항아리 값이면 집도 한 채 살 수 있을 정도로 귀한 술이다.
‘풍운청룡단에 들어간다고 기뻐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지금은 마교 소교주 행세를 하면서 천하의 귀한 술을 마시는구나. 기이하다, 기이해.’
백년십삼주가 목구멍을 타고 흘러 들어갔다. 배 속에서 불길이 치솟는 듯 화끈했다. 직접 담근 더덕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맛이 좋았다.
“교주님, 제 잔도 받으세요.”
고혹적인 목소리로 다가오는 여자가 있었다. 암혈이혼, 적혈화였다.
‘피에 물든 꽃을 조심하라고 했지. 무림에서 가장 조심해야 할 꽃, 적혈화. 그녀의 혈화수(血花手)는 무림 일절…….’
창건은 적혈화에 대한 기억을 떠올렸다. 나이는 정확히 알려진 바 없으나, 예순은 족히 넘었다고 한다. 그러나 눈앞의 여인은 주름 하나 없는 매혹적인 미녀였다.
‘그러고 보니 암혈팔혼 모두 오십 대 이상이라고 들었는데……. 마공을 익히면 젊어지나?’
창건은 나머지 암혈팔혼을 곁눈질하고는 혀를 내둘렀다. 나이가 많아 보이는 사람도 기껏해야 삼십 대로 보였다.
“그래, 한잔 따라 봐.”
창건은 거만하게 술잔을 내밀었다. 그러다가 문득 적혈화가 방금 부른 호칭을 되새기고 눈을 크게 떴다.
“지금 뭐라고 불렀어?”
대답은 흑염군 쪽에서 나왔다.
“정식 즉위식까지는 두 달이나 남았지요. 그래서 그 이전에 먼저 교주의 자리에 앉으시고 상징적으로 즉위식만 두 달 뒤에 하기로 했습니다.”
길일(吉日)을 뽑아 놨으니 그날에 해야 된다는 것이다. 다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듯했다. 어차피 교주가 될 사람이니 조금 당겨진들 무슨 상관일까.
그러나 창건은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다.
“그, 그럼 마교 내에는 이미 내가 교주가 됐다고 공표한 건가?”
“공표는 아닙니다. 다만 내외궁의 요인들에게는 모두 알렸습니다.”
“으음, 잘했어.”
창건은 마뜩찮은 목소리로 답했다.
내외궁의 요인이라면 사귀장도 필시 끼어 있을 터다. 창건은 마음이 다급해졌다.
‘가만히 놔둬도 내 목을 치려고 들 텐데…… 교주가 되었다고 알리면 괜히 들쑤시는 꼴이잖아. 게다가…… 이미 교주로 인정했다면 도망가고 나서 생길 파장도 더욱 커질 텐데…….’
어떻게 생각해도 창건에게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취소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고생길이 훤하게 보이는구나. 하하하, 제발 부탁이니 내가 도망가 줄 테니까 사귀당인지 사마귀인지는 제발 얌전히 있어 다오.’
창건은 기원하고 또 기원했다. 일이 이렇게까지 진행되니 어쩐지 자포자기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러니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교주님.”
적혈화가 배시시 웃으며 술을 따랐다. 그녀가 가까이 다가오자 진한 사향 냄새가 풍겼다. 게다가 복장도 몸의 굴곡이 온통 드러나는 것이라 창건은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도저히 시선을 둘 데가 없구나. 이익, 이런 경박한 여자 같으니.’
창건은 숨을 멈췄다. 적혈화는 창건이 술을 마시기를 기다리는 듯 자리로 돌아가지 않고 있었다.
‘자기도 술을 달라는 건가.’
창건은 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배 속에서 불길이 일었다. 창건은 술병을 들었다.
“적혈화도 한잔 받지.”
“어머, 감사합니다. 교주님.”
적혈화는 활짝 웃으며 잔을 내밀었다. 그녀는 마치 만개한 화려한 꽃과 같았다. 특수한 기공을 익혔는지 눈동자에는 붉은 기운이 돌았다. 이제껏 보았던 어떤 여인보다도 숨 막히는 매력을 발산하는 적혈화였다.
적혈화는 다소곳이 술잔을 비우고는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교주님, 그간 몸을 풀지 못하셨을 텐데…… 괜찮으시다면 오늘 밤에 요령의 아이 한 명을 보내 드릴까 합니다.”
“어? 아니, 그게…….”
단도직입적으로 들을 줄은 몰랐던 터라 창건은 당황했다.
“아, 아직 몸이 피곤해서 말이야.”
“그러시다면 더욱 요령대를 부르셔야지요. 채음보양(採陰補陽)의 수를 쓸 수 있는 아이가 아주 많습니다. 기운을 차리시는데 도움이 될 거예요.”
그녀는 정말로 걱정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창건은 울고 싶어졌다.
‘요령대…… 색공을 익힌 마녀들이잖아. 정기가 빨려 죽은 남자가 한둘이야?’
그 소문이 워낙 무시무시해서 창건은 절로 소름이 돋았다. 창건이 끝끝내 거절하자 적혈화는 매우 아쉬워하면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정히 그러시다면 제가 모실 수도 있는데…….”
마지막 한마디에 창건의 안색은 온통 창백해졌다. 두건이 없었다면 표정 변화가 여실히 드러났을 것이다.
‘아무리 마교라지만 정말 너무하는구나. 어찌 남녀 간의 성스러운 행사를…….’
창건의 생각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이어서 각각의 팔혼들이 창건에게 잔을 올리러 왔기 때문이다. 그들의 잔을 받으면서 창건은 적혈화가 바치려고 했던 게 단순히 ‘여자’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일종의 충성을 맹세하는 표현이었다. 전투에 특화된 부대를 이끄는 자는 창건이 말만 하면 어떤 문파든 무너뜨릴 것을 맹세했고, 정보를 캐는 데 능한 유령대는 황궁에 다녀올 수도 있다며 창건이 원하는 바를 물었다.
‘새로운 교주가 즉위하면 가장 소중한 걸 바치는 것…… 그거였구나.’
창건은 새삼 자신이 잘못 생각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들은 교주에게 모든 걸 바칠 수 있음을 암시한 것이다.
‘하지만 내가 받을 게 아니야. 만약 내가 여기서 이들의 영혼과 같은 것들을 받았다가는…… 도망가서 교주가 아니라는 게 들통 났을 때, 지옥을 경험하게 될 거야.’
창건은 그저 웃었다. 웃으면서 그들이 바치려는 모든 것을 거절했다. 후일 필요할 때 스스로 요구하겠다면서.
“자, 오늘은 즐거운 날이니까 술이나 많이 마시지.”
창건은 연거푸 술을 들이켰다. 그렇게 마신 술이 어느새 평소 주량을 훨씬 넘어갔고, 창건은 점점 머릿속이 빙글빙글 도는 것을 느꼈다.
‘취하면 안 돼. 취해도…… 절대로 입을 열어서는 안 돼.’
창건은 혹시라도 취해서 헛소리를 할까 봐 염려했다. 그러나 문제는 다른 곳에서 터졌다.
우우웅.
“어?”
창건은 갑자기 몸에 묘한 진동을 느꼈다. 우우웅, 어디선가 이명이 들렸다. 창건은 곧 그게 몸속에서 나는 소리라는 것을 알았다.
‘암천……마령기?’
혈맥에 박혀 있는 암천마령기가 진동하는 것이다.
‘이, 이게 갑자기 왜 이래?’
이유는 간단했다.
백년십삼주는 극양(極陽)의 기운을 가진 술이다. 술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영약 쪽에 가깝다. 그런 술을 아직 제대로 안정되지 않은 몸에 들이부었으니, 암천마령기의 균형이 깨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