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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얘기는 여기서 끝이다.”
진효가 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서운…… 얘기였습니다.”
창건은 실제로 공포에 질려 있었다. 소교주를 노린다는 말은 곧 자신의 목숨을 노린다는 말과 같았다.
‘어쩌면 더 일찍 도망쳐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들이 즉위식까지 얌전히 기다려 준다고 장담할 수 없어.’
뇌옥에 갇힌 죄수의 말을 완전히 믿을 수는 없다. 그러나 창건은 노인의 말이 최소한 높은 가능성을 지녔다고 받아들였다. 자신의 목숨이 걸린 일이라 더 민감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네가 도울 일이 있겠느냐?”
진효는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다. 경비무사에게 사실을 털어놓아 봤자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
창건은 고심하다가 대답했다.
“저…… 저는 소교주님의 시녀를 잘 알고 있습니다.”
“호오, 소교주의 시녀를?”
“예, 그래서…… 잘만 하면 소교주님께 이와 같은 사실을 알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진효의 표정이 살짝 바뀌었다.
“그만 두어라. 시녀의 말을 누가 믿는단 말이냐. 설령 전할 수 있다 하여도…… 그 이전에 사귀당에게 발각되면 목숨을 잃을 것이다.”
“아니요. 방도를 강구하겠습니다. 제가 기필코 소교주님께 사귀당의 야망을 폭로하고, 선배님들의 무죄를 입증하겠습니다.”
창건은 당당하게 말했다. 실상은 스스로가 소교주로 행세하고 있으니, 동경을 보고 말하면 될 일이었다.
진효의 표정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네게 왜 이런 얘기를 들려준 줄 아느냐?”
“마교의 앞날을…… 걱정하시기 때문이 아닙니까.”
“네가 나를 선배라 불렀기 때문이다.”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창건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뇌옥에 갇힌 뒤로…… 누구도 우리를 마교도로 인정해 주지 않았다. 경비병들조차 우리를 경멸했지. 한때 마교의 영웅 소리까지 들었는데 말이다.”
“…….”
“네가 누군가의 강요로 우리를 만나러 왔는지, 아니면 우릴 구경하기 위해 찾아왔는지 모르는 일이다. 조롱하기 위해서일 수도 있고.”
창건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반쯤은 흥밋거리로 생각하고 구경 왔기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하지만 말이다, 선배 소리를 들으니 오랜만에 마교인으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그러니 선배로서 몇 가지 충고하겠다.”
“형님…….”
비대한 몸집의 폭돈이 입을 열었다. 그러나 말을 잇지 못하고 다시 침묵했다.
“혈기에 치우쳐 섣불리 움직이지 말거라. 쥐도 새도 모르게 죽는다. 만약…… 아무도 모르게 소교주에게 말을 전할 수 있다면 사귀당의 음모를 알려라. 그리고 즉위식을 치르기 전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남도록 경계를 철저히 하라고 전해라.”
“즉위식 전에 말입니까? 어째서죠?”
창건은 이해할 수 없었다. 즉위식 전이고 후고 할 것 없이 위험하기는 매한가지가 아닌가.
“소교주와 교주는 천지차이다. 소교주로서 죽으면 후계자가 죽는 것이지만 교주로서 죽으면 하늘이 무너지는 것이다. 연달아 두 명의 교주가 죽는다면…… 그 어떤 바보라도 음모가 있다는 걸 알게 되겠지.”
그렇기 때문에 수작을 부리기 힘들다는 얘기다.
‘도망치기 전까지는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겠군.’
창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소교주님께 전하겠습니다.”
창건의 태도는 절박하고 진지했다. 진효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신중에 또 신중을 기해라. 교내에 그들의 이목이 닿지 않는 곳은 거의 없으니 누구도 믿어서는 안 된다.”
“명심하겠습니다.”
목숨이 걸린 일이다. 창건은 진효의 말을 가슴에 새겼다.
“그럼 후배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소교주님께 음모를 알릴 방도를 찾고, 조만간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창건은 그들 여섯에게 일일이 포권을 취했다. 눈이 보이지 않아도 그들은 창건이 무슨 행동을 하는지 느낄 수 있었다.
“조심해라.”
진효는 떠나는 창건에게 말했다.
“제 걱정은 마십시오. 마교를 위해서라면 이 한 몸 아깝지 않습니다. 선배님들도 부디 옥체 보중하십시오.”
창건의 발소리가 조금씩 멀어지다가 이내 아스라이 사라졌다.
또옥. 또옥. 또옥.
다시 침묵이 내려앉자, 그사이로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제법 강단 있는 녀석이로군.”
진효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크흘, 귀엽긴 하군요.”
폭돈이 말을 받았다. 입을 다물고 있던 고루비도가 입술을 비틀면서 말했다.
“저 녀석이 과연 소교주에게 말을 전할 수 있을까요? 내가 보기엔 허풍 같은데.”
음양쌍살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큰 형님이 평소답지 않았습니다.”
“저런 어린애한테 알려 줘도 되는 겁니까.”
오히려 뇌옥에 갇혀 있는 그들이 더욱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지금 당장은 뇌옥에 갇혀서 연명하는 처지지만 쓸데없이 비밀을 폭로한다면 사귀당이 입막음을 할 가능성도 있었다.
진효가 피식 웃었다.
“오랜만에 바깥의 아이와 얘기를 하니 말이 술술 나오더구나. 파천마제께서 돌아가셨으니…… 소교주까지 죽고 나면 사귀당이 득세하는 건 시간문제다.”
“그건 그렇습니다만…….”
“뇌옥에 있는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지. 이미 시대에서 밀려난 늙은이들 아니냐. 하지만 말이다, 아무리 그래도 마교가 무너지는 걸 곱게 보고 있을 수만은 없다.”
진효의 말에 모두가 동의했다.
“맞는 말입니다.”
“교가 망해서는 안 되지요.”
아무리 뇌옥에 갇혀 있어도 마교를 향한 애정은 여전했던 것이다. 그들의 적은 마교가 아니라 사귀당의 흉수였다.
“사십 년 만에 처음으로 우리 얘기에 귀 기울이는 사람이 나타났다. 작은 가능성이라도 걸고 싶지 않겠느냐. 설령 그게 일개 경비라고 해도 말이다.”
진효는 뭔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저 아이는 평범한 경비무사는 아닌 것 같았다.”
편수편족이 입을 열었다.
“예? 그럼 뭐란 말씀입니까?”
“경비무사가 혼자 들어오는 꼴을 본 적이 있느냐. 아무리 마교의 규율이 느슨해졌어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필시 경비는 아닐 것이다.”
순간 진효를 제외한 육악마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 그럼 위험한 것 아닙니까. 큰형님.”
“설마…… 사귀당의 간자라거나…….”
진효가 고개를 저었다.
“이제 와서 사귀당이 우릴 떠 봐서 무엇 하겠느냐. 이미 모든 힘을 잃었다고 안심했겠지. 무슨 목적을 갖고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다음에 다시 찾아온다 해도 너희들은 내색하지 마라.”
육악마는 수긍하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진효는 단단히 못을 박았다.
“악의는 없어 보였다. 우리끼리 지루하던 차에 말 상대를 해 주면 그것만으로 즐겁지 않겠느냐.”

“으윽, 눈부셔.”
뇌옥과는 달리 밖은 여전히 환했다. 창건은 눈을 찡그리며 철문을 빠져나왔다.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무사들이 창건을 반겼다.
“구, 구경은 잘하셨습니까.”
“구경은 무슨, 정말 시체뿐이라 속이 뒤집히는 줄 알았다.”
침을 뱉고는 손을 탁탁 털었다. 무사들이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런 곳에 매일 들어가다니 너희들도 힘들겠군.”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사흘에 한 번 음식을 갖다 줄 뿐입니다.”
“사흘에…… 한 번?”
창건은 자신이 봤던 광경을 떠올렸다.
‘폐인이 된 마인들이다. 쇠약해진 몸으로 사흘에 한 번 음식을 받는다고?’
그렇게 사십 년을 버텼단 말인가. 말할 수 없는 불쾌감이 엄습했다. 창건은 속마음을 내색하지 않고 코웃음을 쳤다.
“하, 용케 안 죽고 버티는군. 대단해.”
“그러게 말입니다. 뭐니 뭐니 해도 수십 년 전에는 제법 이름을 날리던 마인이었으니까요. 육악마라고 들어 보셨습니까?”
“육악마? 호오, 그게 누군데?”
창건이 모르겠다는 듯 되물었다.
“예, 지금 살아 있는 자들은 사십 년 전에 이름을 날렸던 육악마라고 합니다. 교주님 암살을 기도한 죄로 잡혀서 저 꼴이 됐지만 말입니다. 한때 잘나가던 자들이니 만큼 잘 죽지도 않는 모양입니다.”
이미 모두 알고 있는 얘기다. 설마 창건이 육악마와 대화를 하다 왔을 거라 생각지 못한 경비는 술술 주워섬겼다.
“아버님을 암살하려 했다니, 찢어 죽일 놈들이군. 저런 놈들을 살려 놨나?”
“어차피 교단의 반역자들이라…… 사실 밥 주는 것도 아깝습니다. 가끔은 닷새에 한 번 주기도 하지요.”
순간 창건은 욕지기가 치밀었다. 두 명의 무사 모두 잘했다는 듯이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내가 아무리 무림맹의 사람이라지만…… 너 같은 놈들보다 뇌옥의 육악마가 훨씬 된 사람이라는 건 알겠다.’
창건은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는 화를 억누르며 말했다.
“감히 아버님의 암살을 기도한 녀석들이라…… 늑대 밥으로 주면 좋겠구나.”
“그, 그렇습니다. 늑대 밥으로 제격이지요.”
무사들은 창건의 비위를 맞추느라 되는 대로 맞장구를 쳤다.
“저런 녀석들을 살려 둬서 뭐 하겠느냐. 즉위식이 끝나는 대로 육악마를 처형하겠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죽일 놈들이지요.”
무사들이 반색했다. 그들로서는 사흘에 한 번씩 뇌옥에 내려갈 이유가 없어지는 것이니, 반대할 이유가 없다.
“어떻게 죽이는 게 좋을까? 흐흐, 좋아. 굶주린 늑대의 우리에 모두 처넣겠다. 교의 무사들이 지켜보도록 하겠다. 좋은 볼거리가 되지 않겠느냐.”
무사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소문대로 잔악한 소교주였던 것이다. 아직 정식 교주에 오르지도 않았는데 벌써 처형할 궁리부터 하고 있단 말인가.
“부, 분명 재미있을 겁니다.”
“그렇고말고요. 정말 좋은 생각이십니다.”
창건은 활짝 웃으면서 무사들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흐흐흐, 좋은 생각이지. 그때까지 최소한 육악마가 걸어 다닐 수 있게 조치해라.”
“예?”
경비무사가 깜짝 놀라 반문했다.
“당연한 것 아니냐. 움직이지도 못하는 반송장을 던져 주면 무슨 재미로 보겠어. 기어서라도 도망치는 꼴을 봐야 즐겁지 않겠느냐.”
창건이 경비무사들의 귀를 잡아당겼다.
“상상해 봐라. 살이 뜯겨 나가는 사람의 비명 소리를……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꼴을 말이다. 크크큭, 정말 재미있을 거야. 그렇지?”
이쯤 되면 미치광이다. 경비무사들은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 음산하고 광기 어린 목소리로 속삭이니 소름이 돋았다.
“명심해라. 두 달 안에 육악마가 거동을 하지 못한다면, 네놈들도 같이 늑대 우리에 처넣을 게야.”
경비무사들은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예, 알겠습니다!”
창건은 두건 너머로 슬며시 웃었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 적어도 밥은 잘 줘야 할 거 아니야. 사흘에 한 번이라니…….’
창건은 복도의 창밖으로 떠오른 해를 보고 시간을 가늠했다.
“어디 보자…… 아직 저녁까지는 시간이 남았고. 여기 서고(書庫)가 어디지?”
“어느 서고 말씀이십니까?”
“여러 갠가?”
그제야 창건이 마교 내부 사정에 깜깜하다는 걸 깨달은 무사가 황급히 설명했다.
“내궁에는 서고가 세 곳이 있습니다. 누구나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서고는 팔전에, 팔대(八隊)의 간부급 이상이 출입할 수 있는 서고는 일전에, 그리고 교주님 전용의 서고는 천마궁에 있습니다.”
“호오, 그래?”
교주 전용의 서고라니 무척 구미가 당긴다. 그러나 필히 출입을 통제할 터였다. 즉위식도 치르지 않은 소교주가 들어간다면 필경 말이 나오리라. 잡음은 최소한으로 줄여야 한다.
간부들이 사용한다는 서고도 마찬가지다. 그 정도라면 보는 눈이 많을 것이다. 사용하는 사람이 적으니 어떤 책을 봤는지 확인하는 것도 너무나 쉽다.
창건은 이내 결정했다.
“가까운 곳이 좋겠다. 가는 길을 알려 줘.”
무사는 군말 없이 자세히 길을 알려 주었다.

“으아, 묵은 냄새.”
창건은 서고의 문을 열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무림맹에서 하급무사들에게 허용된 서고에 갔을 때와 똑같은 냄새가 났다. 퀴퀴한 책 냄새가 코를 찔렀다.
“제일 하급이라더니 징그럽게 많네.”
서고는 무척 넓었다. 책의 종류는 무서에 국한된 게 아니라, 기본적인 학문부터 시작해서 갖가지 잡학까지 고루 갖춰져 있었다.
“책은 많은데…… 휘유, 먼지 쌓인 것 좀 봐라.”
창건은 혀를 찼다.
사람 사는 곳은 어디든 똑같은 모양이다. 무림맹의 서고도 이렇게 먼지만 가득 쌓였다. 절세 비급이 서고에 꽂혀 있을 리도 없으니, 찾는 사람이 거의 없다. 책을 읽을 시간에 수련을 하기도 바쁘다.
“보자…… 보자…… 어떤 게 도움이 되려나.”
지금 창건에게 가장 큰 장애물은 마교에 대한 몰이해였다. 무림맹에서만 들은 마교의 정보로는 턱없이 모자라다. 게다가 편협하게 치우쳤다.
그나마 무공 서적들은 먼지가 덜 앉았다. 그 외의 책들은 완전 먼지 구덩이 속에 파묻혔다.
“으이그, 청소 좀 하지. 어? 마쟁록(魔爭錄)?”
문득 창건의 시선이 한 서책에 닿았다. 엄청 낡은 책인데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있다. 무림맹에서 정천실록(正天實錄)이라는 이름의 역사서를 만드는 것처럼, 마교에도 마쟁록이라는 게 있다.
“오, 이거 좋은데……!”
마쟁록은 열네 권이나 꽂혀 있었다. 각각에는 칠(七)부터 이십(二十)까지 숫자가 쓰인 게, 전부 다른 내용인 듯싶었다. 창건은 마지막 권을 집었다.
“이십대 교주, 흑운마제(黑雲魔帝). 아하, 교주 별로 책을 나눴군. 뇌일혁 교주는 죽은 지 얼마 안 됐으니 아직 책이 없는 것이고……. 좋아, 이걸 보자.”
몇 장 훑어보니, 완벽하게 마교의 입장에서 서술된 책이다. 무림맹에서 ‘전략상 승리를 위한 후퇴’라고 서술된 내용이, ‘무림맹 격파’라고 쓰여 있었고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