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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간만에 입이 트인 놈이 왔으니 얘기나 들어 보자. 경비 놈들은 죄다 꿀 먹은 벙어리여서 답답해 죽는 줄 알았다. 요즘 바깥세상은 어찌 흘러가느냐?”
다시 굵직한 중저음의 목소리가 말했다. 창건은 떨림을 조금 진정시켰다.
‘대단한 노인들이군. 다 죽어 가는 꼴로도…… 저렇게 활기차게 보일 수 있나.’
이제 보니 조금도 불쌍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과연 마교를 뒤엎어 보겠다고 반기를 들 만한 사람들이다.
“무림맹과의 싸움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이렇다 할 진전이 없습니다. 교주님께서 교의 내실을 다지는 데 집중하셨으니까요.”
기형적으로 손발이 긴 노인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팔다리가 너무 길어서, 만약 일어날 수만 있다면 꽤나 볼만할 거인일 듯싶었다.
“끌, 아직도 무림맹을 쓸어버리지 못했단 말이냐?”
“예, 십이 년 전에 호북(湖北)까지 치고 들어갔으나, 아쉽게도 무림맹에게 저지당했습니다.”
그 뒤로 호남 아래로는 마교의 세력, 호북 위로는 무림맹의 세력으로 중원이 양분됐다. 창건은 자신이 아는 한도 내에서 마교를 중심으로 얘기를 풀어 나갔다.
살집이 비대한 노인이 한숨을 쉬었다.
“크헐, 파천마제 님의 힘이라면 무림 일통도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거늘.”
“카카캇, 교주님이라고 독불장군인가.”
난쟁이 노인이 기분 나쁘게 웃었다. 다시 살찐 노인이 고개를 저었다.
“허헐, 아닐세. 내가 교주님이 갓 즉위하셨을 때 비무를 청하지 않았는가. 십 초도 견디지 못하고 패했지. 정말…… 인간이 아니었어.”
두 노인이 말을 주거니 받거니 했다. 창건은 가만히 듣다가 살짝 끼어들었다.
“교주님께서 그렇게 강하셨습니까?”
순간 대화가 뚝 멈췄다. 노인들의 얼굴에 기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지, 질문이 이상한가?’
무림맹에 있을 때 파천마제의 소문은 귀가 따갑도록 들었다. 그러나 적에 대한 소문이니 만큼 많은 가감이 있었으리라. 아무리 마교주가 강해도 무림맹주 강유학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소문이었다.
중후한 목소리의 노인이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상한 꼬마로군. 마교인이 교주를 의심한단 말이냐?”
“그, 그게 말입니다. 아직 말씀드리지 않았지만…… 교주님께서 얼마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더는 볼 기회가 없으니…….”
창건이 주저리주저리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중후한 목소리의 노인이 그의 말을 끊었다.
“잠깐! 돌아가시다니…… 누가 말이냐?”
“누, 누구라니요. 파천마제 뇌일혁 교주님께서…….”
노인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흉수는 누구냐?”
“휴, 흉수라뇨?”
“감히 교주님을 시해한 흉수 말이다!”
노인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창건은 깜짝 놀라서 세 발자국이나 물러났다.
‘내, 내공도 없는데 어떻게 이런 위압감이 느껴지지?’
폐인이 된 몸으로 내뿜는 기세가 일대종사의 그것이었다.
“휴, 흉수는 없습니다. 연공 중에 닥친 주화입마로 돌아가셨다고…….”
“크하하하핫! 주화입마라니!”
창건의 얼굴이 붉어졌다. 당치도 않은 소리를 해 버린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뭐야, 왜 웃어. 흑염군이 분명 주화입마라고 했는데…….’
창건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뭐가…… 잘못됐습니까?”
다른 노인들도 반응이 이상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표정이 일그러진 사람부터 시작해서, 코웃음을 치거나 부들부들 떠는 사람까지 있었다.
폭소를 터뜨리던 노인의 웃음이 이내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는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꼬마야, 주화입마를 왜 걸린다고 생각하느냐.”
“그야…… 무리해서 수련하는 사람이나 잘못된 방식으로 수행하는 사람에게 찾아오지 않습니까.”
“그래, 바로 알고 있다. 그런데 교주께서 주화입마에 걸릴 이유가 있겠느냐?”
창건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건 너무 막연한 소리다.
“하지만 교주님께서는 무림맹주와 더불어 무상의 경지에 오르지 않으셨습니까. 더욱 높은 경지를 개척하려고 무리를 하신 게 아닐는지요.”
창건은 자기도 모르게 무림맹주를 언급했다.
‘아이구, 내 입아.’
제 발 저린 표정으로 노인을 조마조마하게 쳐다보았다. 그는 창건의 실수를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아주 가끔, 늙은이들도 주화입마에 빠지는 일이 있다. 하지만 그건 욕심을 이기지 못해서다. 위험한 것을 뻔히 알면서도 무리수를 두는 자들 말이다.”
“그,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더욱 그럴 수도 있지 않습니까. 교주님도 더 높은 경지를 추구하시다가 그만…….”
마교 교주라고 해탈한 도사가 아닐 테니 충분히 그럴 수 있지 않은가. 그러나 창건은 노인의 표정을 보고 점점 자신이 없어졌다.
“일정 경지를 넘어서면 너도 알게 될 것이다. 무(武)에서 만큼은 느림이 빠름을 앞선다. 나 진효(鎭嚆)도 그 정도의 경지에는 올랐다.”
“그렇……습니까?”
“무리하지 않아도 빨리 갈 길을 알고 있는데 위험수를 두겠느냐. 교주께서 주화입마로 돌아가셨다라……. 흉계(凶計)로다.”
만약 창건이 풍운청룡단에서 수련을 쌓았다면 곧 깨달았을 이치다. 그러나 하급무사 생활만 거친 그에게는, 절정고수들의 무리(武理)는 접하기 힘든 것이었다.
‘가만. 그런데 이 사람은 반역도로 잡혀 온 사람이잖아. 왜 계속 교주 편을 드는 거야?’
창건은 불현듯 스친 생각에 의아함을 가졌다. 진효라는 이름의 노인은 은근히 교주를 옹호하고 있었다. 극존칭을 붙이는 걸 봐서는 여전히 존경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진효는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다음 대 교주는 정해졌느냐.”
“아, 예……. 성지에서 소교주님께서 오셨습니다. 곧 즉위식을 올리실 거라고 들었습니다.”
왠지 가슴이 뜨끔해지는 창건이었다.
“소교주라……. 그들이 소교주까지 죽일지도 모르겠군.”
창건은 순간 간이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소교주? 나? 누가 죽여? 왜 죽여!’
“후우, 이제 마교의 운명도 끝인가.”
진효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창건은 피가 모조리 빠져나가는 기분을 맛보았다.
‘누가? 누군데? 뭔가 알고 있다면 말하라고!’
뇌옥에 갇혀 있는 역도들의 말 따위, 믿을 가치가 없다. 그렇게 치부하려고 했는데 자신의 목숨이 걸리고 나니 얘기가 달라졌다.
‘무슨 얘기인지 캐내야 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창건은 마음을 가다듬고 진효에게 말을 건넸다.
“저…… 진 선배님, 후배가 한 가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말해 봐라.”
천천히, 그리고 확실히.
“선배님은 제게 교주님의 부고를 들으셨을 때부터 뭔가를 걱정하시는 듯했습니다. 무엇을 걱정하고 계신 겁니까?”
창건은 예의를 잃지 않으면서도 직설적으로 말을 이었다.
“혹시 누군가의 흉계를 짐작하고 계시는 게 아닙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게밖에 답이 나오질 않았다. 진효는 침묵했다. 눈이 없으니, 입을 열지 않으면 어떤 교감도 나눌 수 없었다.
“한낱 경비가 알 얘기가 아니다. 쓸데없는 호기심을 접어라. 목숨을 잃을 수도 있으니.”
진효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창건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후배가 돕고 싶습니다!”
“……돕겠다고?”
“예!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돕고 싶습니다! 후배가 감히 선배님께서 혼잣말하시는 걸 듣고 추측해 보았습니다! 지금 마교를 뒤흔들 암중 세력이 존재하는 것 아닙니까?”
진효가 ‘호오, 이것 봐라’ 하는 표정을 지었다.
“비록 제가 한낱 경비무사일지언정, 마교를 위하는 마음은 누구보다도 크다고 자부합니다. 제발 후배가 도울 수 있도록, 무엇을 걱정하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진심이 절절이 담긴 외침이었다. 창건은 정말 절박했다. 진효는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너 하나 안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다.”
“하지만……!”
“사십 년 전에도 그랬으니까.”
창건은 다시 한 번 애원하려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결국 진효가 얘기를 시작한 것이다.
“내 이름은 진효. 사십 년 전에는 파화철권(破花鐵拳)이라 불렸다.”
“파화철권…… 이, 이십사매화검수(二十四梅花劍手)!”
창건이 비명처럼 소리쳤다.
“호오, 나를 알고 있구나.”
어찌 모르겠는가. 이십사매화검수가 단 한 명의 마교인에게 깨진 일화는 너무나도 유명한데. 화산파 최대의 굴욕이 아닌가.
‘……파화철권의 말년이 이렇게 비참하다니.’
진효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저쪽의 쌍둥이는 음양쌍살(陰陽雙殺), 커다란 녀석은 폭돈(暴豚), 난쟁이는 고루비도(?뀜飛刀), 길쭉한 녀석은 편수편족(鞭手鞭足)이다. 들어 본 적이 있느냐?”
“아…….”
창건은 말도 못하고 입만 쩍 벌렸다. 모두 한 시대를 풍미했던 마교의 대표적인 고수다. 벌써 사십 년 이상 된 이야기지만, 무림맹에서 귀가 떨어지도록 듣던 이름이다.
그들을 일컬어 마교의 육악마(六惡魔)라 불렀다. 암혈팔혼에는 미치지 못하는 명성이었지만, 당시 그 손속의 잔악함과 괴이신랄한 무공으로 공포의 대상이었다.
“육, 육악마 선배들이시군요.”
창건은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육악마가 갑자기 모습을 감췄다더니…… 모두 여기 잡혀 있었구나.’
진효가 희미하게 웃었다.
“아직도 우리가 잊혀지지는 않았나 보군. 그 이름이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옥에 갇히고 사십 년이다. 사십 년 만에 들어 보는 별호일 터였다.
“사십 년 전, 기이한 사건이 벌어졌다. 교주님의 행적이 무림맹에 낱낱이 드러났던 것이다. 당시 직접 무림맹과의 전투에 참여했던 교주님은 함정에 빠져 위험한 순간을 겪으셨다.”
창건도 알고 있다.
호북을 치고 들어온 파천마제가 이끄는 마교를, 역으로 무림맹의 정예 고수들이 포위한 것이다. 적은 피해로 파천마제를 패퇴시키는 쾌거를 올렸다는 점에서 회자되는 전투였다.
“그때는 첩자가 있는 것이라 생각했지. 아니면 어떤 식으로든 정보가 유출됐거나…… 설마 내부에 배신자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배, 배신자가 있었습니까?”
“천마궁에까지 암살자가 들어오는 판인데, 내부에 배신자가 없다면 가능한 얘기겠느냐.”
불가능하다. 창건은 토끼 눈을 뜨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당시 암혈팔혼은 무림맹과 싸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배신자를 색출할 여유조차 없었지. 그러던 어느 날, 배신자의 흔적을 우리가 발견했다.”
창건은 침을 꿀꺽 삼켰다.
“마교 내부에…… 교주님의 목숨을 노리고 직접적으로 움직이는 녀석들이 있다는 걸 알아냈지. 그러나 정작 누구인지는 찾을 수가 없었다.”
진효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날이 갈수록 ‘그들’의 움직임은 노골적으로 변했다. 교주님 만을 노린 게 아니라, 교내의 요인들을 암살해서 혼란을 야기했지.”
사십 년 전, 마교의 세력이 폭발적인 기세로 북상하다가 이유 없이 병력을 돌렸다는 기록이 있다.
‘무림맹의 철저한 방어 때문에 마교가 지친 것이라 들었는데…… 이쪽이 더 얘기가 맞는 것 같다.’
어쩐지 설득력 있는 얘기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용의자는 좁혀졌다.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결국 범인으로 추정되는 세력을 넷으로 좁힐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이 무림맹과 접선할 예정이라는 결정적인 정보를 취할 수 있었다.”
창건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 뒤의 이야기는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그들이 정말 무림맹과 접선했습니까?”
“후후, 그랬다면 우리가 여기 있겠느냐. 접선 장소를 알아내서 찾아갔더니…… ‘그들’과 암혈팔혼이 매복하고 있더구나.”
“……설마?”
“그래, 속아 버린 것이다. 교주님을 시해하려는 자들을 찾으려고 눈이 뒤집어진 우리들이 말이다.”
창건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들이…… 누굽니까.”
진효는 한 자 한 자 씹어서 내뱉듯이 말했다.
“사귀장, 바로 사귀당(四鬼堂)의 당주들이다.”
“사귀당!”
“그래, 외궁의 사귀당 말이다.”
창건은 눈을 부릅떴다.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내궁에 암혈팔대를 이끄는 암혈팔혼이 있다면, 외궁에는 사귀당을 이끄는 사귀장이 있다.
흑수당(黑水堂), 적오당(赤烏堂), 폭풍당(暴風堂), 청운당(靑雲堂), 이렇게 넷을 한데 묶어 사귀당이라 부른다. 외궁의 마교도 팔천 명은 사귀당의 소속이다.
숫자로만 따지면 마교 세력의 칠 할이나 된다.
“맙소사……. 그들이 모두 들고 일어서기라도 한다면…….”
“마교는 붕괴되겠지.”
진효가 씨익 웃었다. 창건은 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교주님이 돌아가셨으니 교를 휘어잡을 사람이 없다. 소교주 마저 죽고 난다면, 그 뒤에는 사귀당이 득세를 할 게다.”
“그들이…… 흉수인 게 확실합니까?”
창건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진효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십 년 전에는 분명 사귀당에서 함정을 팠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거라 생각한다. 다만…….”
진효는 잠깐 말을 끊었다. 뭔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다만 한 가지 기대는 할 수 있다. 그때, 우리를 유인한 것은 사귀당이었으나 정확히 어느 당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 그렇다는 말은…….”
“그래, 운이 좋으면 한 개 당의 꿍꿍이고…… 최악의 상황이라면 사귀당 전부가 반란을 획책하고 있겠지.”
창건은 마른침을 삼켰다. 진효의 눈이 보고 싶었다. 그가 얼마만큼 진실을 말하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눈이 보이지 않으니 너무나 답답했다.
‘진효는 한 개 당일지도 모른다고 했지만…… 그건 너무나 안이한 희망이다. 최소한 둘 이상으로 봐야 해.’
오랜 세월 동안 치밀한 준비를 하면서 주위 세력을 포섭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창건은 식은땀조차 모두 말라 버린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