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15화
창건은 코웃음을 쳤다.
‘흥, 어차피 무고한 서민의 고혈을 빨아먹고 살아가는 거겠지. 그래서 다들 얼굴에 윤기가 자르르 한 게야.’
마인들이 괜히 마인이겠는가. 그만큼 사악하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잠깐 본 것만으로 마교에 호의적인 시선을 보낼 정도로 창건은 어리석지 않았다.
“멈춰라! 이곳은 제한구역이다!”
공격적인 목소리가 창건을 세웠다. 상념에 빠진 채 걷고 있던 창건은 화들짝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뭐야?”
“무정살혼대인가? 뇌옥(牢獄)에는 무슨 용건으로 왔나?”
복도 끝의 철문을 지키던 무사 한 명이 무뚝뚝하게 물었다. 흑색의 철문은 두 명의 무사가 병장기를 쥐고 지키고 있었다. 지나치게 엄중한 경비다.
“여기가 뇌옥이라고?”
창건이 멍청하게 반문하자 무사들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대뜸 창칼을 겨누면서 위협적으로 일갈했다.
“수상하군! 누구냐?”
“어? 어, 수상한 사람은 아니야.”
싸늘한 예기를 뿌리는 칼날이 창건의 목을 겨눴다. 그러나 창건은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후후, 흑염군은 무서웠지만 한낱 경비병들까지 무서워할 줄 아냐? 게다가 나는 소교주의 금패까지 있다고.’
창건은 나름 믿는 구석이 있었다.
어차피 소교주는 태어나자마자 성지로 옮겨졌다. 따지고 보면 태어나서 첫 마교 구경이니, 창건의 반응이 오히려 옳은 것이다.
“무정살혼대가 뇌옥을 모를 리는 없을 터! 당장 신분과 방문 목적을 밝혀라!”
무사들의 칼날이 조금씩 더 다가왔다. 숨 막히는 살기가 터져 나왔지만 창건은 여유 있는 웃음을 흘렸다.
“아니, 그렇게 흥분할 필요 없다니까. 그저 길을 잘못 왔을 뿐이라고.”
뇌옥에는 볼일이 없다. 창건은 대충 둘러대고 왔던 길을 돌아가려고 했다.
‘뭐, 귀찮은 건 싫으니까.’
창건은 양손을 들어 올려 어깨를 으쓱거렸다.
“알았어, 알았어. 그러니까 그쪽으로 안 가면 되는 거지? 난 그만 가 볼 테니까 수고들 해.”
“멈춰라! 수상한 놈!”
무사들에게서 진득한 살기가 뻗어져 나왔다. 이어서 창칼이 창건의 목 양쪽을 옥죄었다. 힘차게 당기면 목이 떨어질 판이다. 창건은 숨이 막히는 걸 느꼈지만 태연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수상한 놈이라고?”
사실 무사들이 흥분한 것도 당연하다. 무정살혼대의 두건을 다른 사람이 쓰고 있다는 것부터 상식 밖의 일이고, 내궁에 있는 사람이 뇌옥의 존재를 모른다는 것도 수상한 일이다.
‘이대로 정체를 밝히고 벌을 줘 버려? 뇌동고 성격이면 그렇게 하겠지?’
순간 창건의 머릿속에 스치는 게 있었다.
‘가만……. 뇌옥이라면 무림맹의 포로들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가능하다. 십 년 전까지만 해도 무림맹과 치열한 격전을 치렀던 마교다. 포로 협상에서 제외된 무림맹의 고수가 있을 가능성은 충분했다.
‘만약 포로가 여기 있다면 함께 탈출할 수도 있어. 큰 힘이 될 거야.’
생각이 바뀌었다. 뇌옥에는 꼭 들어가 봐야 한다. 다른 사람들이 의심하지 않도록 적당한 이유라도 만들어서.
다행히 뇌옥 방문의 합당한 이유는 눈앞의 친구들이 대신 만들어 주고 있었다.
창건은 대뜸 태도를 바꿔서 거만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너희들, 며칠 전에 소교주님이 왔다는 건 알고 있냐?”
“무슨 딴소리냐! 네 신분을 밝히라고 했다!”
여전히 칼날은 창건의 목에 걸려 있었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를 지경이다. 그래도 창건은 거만함을 잃지 않았다.
“쓰으…… 이것들이 정말 상황 파악 못하네.”
창건이 서서히 팔을 들어 올렸다. 무사들이 경계하지 않도록 아주 천천히. 그의 양손은 목을 옥죄고 있는 칼날을 잡았다.
“뭐, 뭐냐! 허튼짓하면 베어 버린다!”
아니, 절대로 벨 수 없다. 창건은 그들의 심리를 파악했다. 비록 무공은 자신보다 훨씬 고수일지언정, 소교주에 대한 두려움이 가득해서 섣불리 행동할 수 없다. 단지 창건이 소교주를 입에 올렸다는 이유 때문에.
‘거만하게, 위협적으로. 그거면 돼.’
창건은 입매를 비틀어서 웃었다. 한쪽 입매만 일그러진 비웃음이다.
“그 소교주님 성격이 괴팍하다는 것도 들었겠네?”
“그, 그건…….”
무사들의 눈이 흔들렸다. 소교주를 운운하면서 괴팍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수틀리면 사람 죽이는 걸 예사로 한다는 것도 들었겠지?”
“그, 그게 네놈이랑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네가 소교주님의 호위무사라도 되느냐! 당장 칼을 놓지 않으면 베겠다!”
“베어 봐.”
“뭐야?”
“소교주를 베고도 살 자신이 있으면 베어 보라고.”
무사들의 눈에 경악이 서렸다.
“즈, 증명을…….”
창건은 혀를 찼다. 과연 문지기밖에 될 수 없는 놈들이다. 실력도 없으면서 눈치도 없다. 내궁에서도 최하위의 부류이리라.
창건은 품에서 금패를 꺼냈다.
“내가 그 소교주님이다. 죽을래?”
“허, 허억! 소교주님을 뵙습니다!”
무사들이 겨누고 있던 병기가 대번에 거두어졌다.
털썩! 두 무사가 무릎을 꿇고 예를 취했다.
“쯧쯧, 사람이 눈치를 줬으면 알아서 기어야지. 그래서 오래 살겠어?”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이구동성으로 복창한다. 창건은 능글맞게 웃음을 터뜨렸다.
“후흐흐, 죽을죄를 지었으면 죽어야지.”
“자, 자결하겠습니다!”
겁만 줄 작정이었는데 두 놈이 모두 칼날로 목을 그으려고 했다. 창건은 깜짝 놀라서 연환각으로 무사들의 손목을 걷어찼다.
퍼퍽!
“이런 미친 자식들을 봤나! 죽여도 내 손으로 죽인다! 내가 언제 자결하라대?”
“죄송합니다!”
쿠웅! 무사들이 이마를 땅바닥에 내리찍었다. 쿠웅! 쿠웅! 계속 찍어 대는 꼴이 금세 머리가 깨져 버릴 것만 같았다.
‘죽으라는 말을 듣자마자 자결이라니, 마교는 역시 지독한 곳이구나. 농담 한마디 잘못했다가는 수백 목숨을 죽이는 것도 한순간이겠다.’
그러나 이건 마교의 위계를 잘못 파악한 창건의 착각이었다. 감히 소교주의 목에 칼날을 겨누고도 목숨을 구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마교의 누구도 하지 않았다.
“관둬라, 무식한 놈들아! 흥이 가셨다. 뇌옥 구경이나 하게 문이나 열어.”
무사들이 핏기가 가신 얼굴로 덜덜 떨면서 자물쇠를 땄다.
끼이익.
육중한 철문이 기괴한 비명을 지르면서 열렸다.
철문은 지하로 통했다. 돌계단을 밟아 내려가자, 몇 걸음 걷지 않았는데도 축축하고 음산한 기운이 느껴졌다.
자박자박.
통로가 좁아서 그런지 유난히 발소리가 크게 들린다. 돌계단을 따라 내려가던 창건이 나지막이 말했다.
“따라오게?”
창건의 뒤를 따르던 두 무사가 화들짝 놀랐다.
“예? 예, 저희가 안내하겠습니다.”
“됐어. 걸리적거려.”
무림맹의 포로가 있다면 자신의 정체를 밝힐 생각이다. 옆에 마교인이 있다면 곤란하다.
“하, 하지만 위험하실 수도 있으니 만일을 위해서라도…….”
“됐다고. 어차피 감방에 따로 갇혀 있을 거 아냐. 뚫고 나올 정도로 허술해?”
무사들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저희가 알기로는 한 번도 뚫린 적이 없습니다.”
창건은 씩 웃었다.
“그거면 됐지, 뭘. 그런데 여긴 어떤 녀석들이 수감되어 있기에 이렇게 경비가 허술한 거야?”
내심 무림맹의 포로이길 바랐다.
창건은 허술하다고 말했지만, 무사들은 감히 소교주에게 기세를 드러내지 못했을 뿐 강호에 나가면 능히 일류 행세를 할 자들이었다. 게다가 내궁 팔전(九殿)에 있는 뇌옥이니 감히 외부에서 침입할 수도 없다.
“마교의 죄인들입니다.”
“죄인?”
“예, 교단에 반기를 들었던 교도들이거나 큰 죄를 지었던 교도들이 갇혀 있습니다.”
“이해가 안 가는데…… 그럼 거물들이라는 소리잖아. 내궁에 가둬 두면 더 위험한 것 아냐?”
반기를 들 정도의 인물이라면 지지 기반도 상당했을 것이다. 그런 녀석들을 권력의 중심부 가까이에 두는 건 상식적으로 이상했다.
“그게 그렇지도 않습니다. 완전 시체나 다름없으니까요. 보면 아실 겁니다.”
“흠…… 알았어. 마교의 죄인들이라…… 좋은 구경을 하겠군. 그럼 들어간다. 돌아가서 문이나 지켜.”
“옛!”
무림맹의 포로가 없다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일이 생각처럼 풀려 주지를 않네. 정도의 선배 고수들이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러나 마교의 역도들이 모여 있다니 나름 흥미가 생겼다. 창건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제6장 뇌옥(牢獄)
계단은 생각보다 훨씬 깊었다.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얼마나 깊이 판 거야.”
창건이 참다못해서 투덜거릴 때쯤에야 계단이 끝났다.
“도착한 건가?”
창건은 멍하니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계단이 끝나고 나타난 곳은 음습하기 짝이 없는 지하 석실이었다.
또옥. 또옥.
어디선가 물이 새는 모양이다. 쾌적한 지상과는 달리 습하고 끈적거린다. 공기가 무척 탁해서 목이 깔깔하다.
‘귀신이라도 나올 것 같네.’
창건은 눈을 찌푸리고 주위를 살폈다. 벽에 꽂힌 횃불로는 턱없이 빛이 모자랐다. 잠시간 어둠에 익숙해지고서야 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석실 정면에 긴 복도가 펼쳐져 있었다. 좌우로는 무수한 쇠창살 문이 붙어 있었다. 대부분의 감방은 텅 비어 있었다.
“뭐야. 죄다 비었잖아.”
창건은 투덜거리면서 복도를 걷다가 이내 헛바람을 들이켰다.
“……뼈?”
비었다고 생각한 감방에는 인골(人骨)이 있었다. 그가 지나친 대부분의 감방에 하얗게 빛나는 뼈가 누워 있었다. 창건은 순간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으, 으으…… 무슨 짓거리야. 죄수는 없고 뼈다귀만…….”
그때였다.
“크헐, 누가 왔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창건은 깜짝 놀라 복도 안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게, 밥 주는 날이 아닐 텐데.”
또 다른 목소리가 말을 받았다.
‘제길, 살아 있는 죄수들은 안쪽인가.’
창건은 걸음을 빨리하여 해골들을 지나쳤다. 수십 개의 방을 지나치고서야 노인들의 목소리가 가까워졌다.
“특식이라도 주려나?”
“키키, 처음 듣는 발소리인데.”
악취가 났다. 노인들의 목소리가 가까워질수록 썩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마침내 노인들의 감방에 도착한 창건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시체……라더니…….’
창살 사이로 보이는 감방 안은 끔찍했다.
좌우로 여섯 개의 방에 각기 여섯 명의 죄수가 갇혀 있다. 아니, 박혀 있다고 해야겠다. 대못이 아랫배를 관통한 채로 벽에 박혔다.
‘사지 힘줄을 다 잘랐어. 눈까지…… 팠군.’
창건은 숨이 막혔다.
죄수들은 하나같이 눈을 감고 있었는데, 금세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눈동자를 감싸고 있어야 할 눈꺼풀이 움푹 들어갔다. 눈알이 없다는 얘기다.
“끼끼끼, 젖비린내가 나는군. 새파란 애송이가 뇌옥에는 무슨 볼일이냐.”
벽에 박힌 노인 하나가 키들거렸다. 시체 같은 몰골을 하고도 기가 죽지 않은 모양이다.
‘반역죄로 갇힌 거라면 소교주의 신분은 쓸모없다. 오히려 흥분만 할 터…….’
창건은 표정을 바꾸었다. 울상을 짓고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노인들은 한때나마 마교의 강자들이었을 터, 어지간한 연기로는 속지 않는다.
“후. 후배 동고가 여러 선배님들께…… 인사드립니다.”
겁에 질린 목소리다. 심하게 떨려서 누가 들어도 오들오들 떨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창건은 실제로 떨고 있었다. 맹수의 앞에 놓인 것처럼 절박하게.
“크헐, 새로 온 경비냐?”
살집이 가장 비대한 노인이 물었다.
‘다른 이들은 말라 비틀어졌는데 혼자 살이 찌다니…… 필시 특이한 기공을 익힌 모양이구나.’
창건은 공손하게 대답했다.
“예, 그렇습니다. 오늘부터 선배님들이 계신 뇌옥을 경비하는 임무를 받았습니다.”
“카카캇, 선배라니…… 오랜만에 들어 보는 소리구나.”
창건의 인사를 듣고 난장이처럼 작은 노인이 목청껏 웃음을 터뜨렸다. 쇠를 긁는 듯한 웃음소리다. 창건은 더욱 움츠러들었다.
‘온갖 특이한 인간들은 다 모아 놨구나.’
그때였다. 여태껏 조용히 있던 노인 하나가 가볍게 손짓했다. 그러자 웃음소리가 뚝 그쳤다.
‘저자가 이곳의 우두머리 격이로구나.’
창건은 상대를 확인했다. 고된 뇌옥 생활에도 여전히 기골이 장대한 노인이었다. 비록 단전은 꿰뚫렸을지언정 탄탄한 근육은 아직도 흔적이 남아 있었다.
노인이 입을 열었다.
“고작 인사를 하려고 온 건 아닐 테고, 무엇 때문에 여기까지 왔느냐?”
중후한 목소리다.
“그게, 저어…… 뇌옥의 형태도 익혀야 하고, 또 과거 마교의 영웅이셨던 선배님들을 직접 뵙고 싶어서…… 선임 경비들에게 허락을 구했습니다.”
창건은 아예 뇌옥에 처음 온 무사처럼 굴었다.
“별난 놈이로군.”
“귀여운 놈이로군.”
공손한 태도가 과히 싫지 않은 모양이다. 완전히 비슷해 보이는 두 노인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쌍둥이 노인이라…….’
왠지 생각이 날 듯 말 듯했다. 과거 세상의 혈풍을 일으켰던 마인들의 신상과 닮은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