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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흘흘, 늙은이 얼굴에 금칠을 해 주다니 목적이 있군요?”
“하하, 장로님은 못 속이겠군요. 사실은…… 여쭐 게 있어서 왔습니다.”
갑자기 여쭐 것이라니, 매로검은 짐작할 수가 없었다.
“무엇이지요?”
“그게, 저어…… 창건이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일태천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창건이 찾아간 고향은 호남에서도 광서에 가까운 쪽입니다. 이번 마교주의 죽음으로 시끄러워진 곳이니…… 그 사이에 휘말린 게 아닌가 걱정이 됩니다.”
매로검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전까지 자신이 걱정하고 있던 바이기도 하다.
“물론 무사하겠지만 말입니다, 너무 늦어지면 풍운청룡단에서 입단을 취소하겠다는 공문이 내려왔습니다. 솔직히…… 그렇게 된다면 너무 억울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어째서지요? 맹의 규칙상 약속된 시간에 도착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엄격한 제재를 가하게 되어 있는데요.”
매로검은 웃음기를 지우고 답했다. 일태천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물론 그건 저도 압니다. 하지만 그 녀석이 얼마나 노력했는지, 얼마나 힘들게 지냈는지 곁에서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단 말입니다. 재능이 있고…… 뒷받침만 있다면 크게 될 녀석입니다. 그런 씨앗을 싹도 트기 전에 밟아 버려서야 곤란합니다.”
일태천은 감정에 호소하되 흥분하지 않고 차근차근히 말했다.
“그래서 제게 하고 싶은 말이 뭐지요?”
매로검이 물었다.
“금번 풍운청룡단의 입단 추천을 매로검 장로님께서 해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만약…… 창건이 늦어지게 된다 해도 장로님께서 신경을 써 주시면…….”
일태천은 말끝을 흐렸다. 이것은 편애(偏愛)를 요구하는 꼴이다. 그러나 일태천으로서는 너무나 아까운 재목이었다. 그렇기에 남의 일인데도 발 벗고 나서는 것이다.
‘창건, 좋은 사람을 만났군요.’
일태천은 의협심이 넘치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비록 그런 본성 때문에 출셋길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청렴결백한 사람으로 유명했다.
“창건이 돌아오면 생각하기로 하지요.”
매로검은 온화한 미소를 띠고 말했다.
무사히 돌아오라고, 마음속으로 빌면서.
한편, 창건에게 호남 특산주를 부탁했던 일태천은 제발 술과 함께 무사히 돌아오라며 별에 대고 기원했다.

창건이 마교에서 깨어난 지도 벌써 팔 일이나 지났다. 그 사이 창건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이튿날 째에 아침을 먹고 몸져누운 것이다.
‘사람이 먹을 걸 줘야 먹지. 그런 걸 먹이니 몸이 배겨?’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쑤시고, 밤낮으로 열이 들끓어서 병자처럼 누워 있었다. 오 일이 지나서야 병세가 가라앉았고 팔 일째가 되니 제법 살 만했다.
‘사람은 적응하는 동물이라고 했던가. 빌어먹을 뇌동고 취향의 음식도 자꾸 먹다 보니…… 아프지는 않네.’
창건은 아침을 간신히 다 먹어 치웠다.
아침상을 물리고 몸단장을 마치고 나니, 팔 일 만에 흑염군이 방문했다. 창건은 심호흡을 크게 하고는 그를 맞이했다. 역시 얼굴을 대하는 것만으로 크게 위축되는 기분이었다.
‘움츠러들면 안 돼. 기호지세(騎虎之勢)다. 정신 똑바로 차려야 끝까지 버티는 거야.’
창건은 짐짓 턱 끝을 들어 올렸다. 어깨를 떡하니 넓게 펴고 거만하게 의자에 등을 기댔다.
“어, 와, 왔어?”
경어를 쓰는 것도 그만두기로 했다. 뇌동고의 성격이 들은 대로라면 절대로 말을 높이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으으, 떨리네.’
흑염군은 인사를 올리자마자 창건의 얼굴을 보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반말 때문인 줄 알고 창건은 황급히 사과할 뻔했다.
“그건 무정살혼대의 두건이군요.”
간신히 ‘미안해요. 말 높일게요’라는 말을 되삼킨 창건은 말을 돌렸다.
“으음, 알다시피 얼굴이 이래 놔서…….”
“소교주께서 아랫것들의 의건을 쓰시다니요, 격이 떨어집니다. 제가 곧 인형지주(人形蜘蛛)의 실로 두건을 만들어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이걸로 충분해.”
어째 총관보다 더하다. 천잠사나 인형지주의 실로 만든 물건은 모두 천금의 값어치를 가진 기물(奇物)로 취급된다. 한낱 두건을 만드는 건 무명천이면 족하다. 비단이면 감지덕지고.
“어차피 얼굴이 나을 때까지만 쓰고 있을 거니까 신경 쓸 것 없어. 기껏해야 한 달 쓸 건데 번거롭게 그럴 필요 있나.”
“알겠습니다.”
흑염군은 깨끗이 수긍했다.
“그보다 오늘 저녁에 환영 연회를 가질 예정입니다. 다른 팔혼을 소개시켜 드리겠습니다.”
“저녁? 알겠어. 그런데 연회가 저녁이면…… 그전에 마교를 구경해도 될까? 방에만 있기 갑갑해서 말이야.”
갑작스러운 요구에 흑염군이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대답했다.
“내궁만이라면 구경하셔도 좋습니다. 외궁은 번잡스러우니 시간을 두고 천천히 보셔야 할 겁니다.”
마교 내외궁의 구분은 창건도 알고 있었다. 외궁은 일반 문도들이 기거하고 수련하는 곳, 내궁은 지배자들이 기거하는 곳이다.
‘후훗, 그것도 좋지. 알짜배기는 내궁에 있을 테니까.’
창건은 속내를 감춘 채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좋아. 워낙 몸이 찌뿌드드해서 말이야. 심심하기도 하고.”
“좋을 대로 하십시오. 그럼 길 안내를 붙여 드리겠습니다.”
“아냐, 아냐. 그것도 됐어. 발길 닿는 대로 혼자 다니는 게 속 편해. 혹시 길을 잃더라도 소리 한 번 지르면 데리러 올 거 아냐.”
안내가 붙어 봐야 감시가 될 뿐이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려면 혼자 몸이 편하다.
“으음, 알겠습니다. 대신 내궁을 벗어나 외궁 쪽으로 산을 내려가시면 안 됩니다. 구궁사살진(九宮四殺陣)이 펼쳐져 있어서 자칫 잘못 빠져들면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구궁사살……? 아, 알았어. 기억해 둘게.”
“명화산 초입부터 중반까지는 외궁, 중반부터 상부의 일부까지는 내궁입니다. 산의 정상에는 조사전(祖師殿)이 있습니다. 조사전으로 가는 길에는 흑운환마진(黑雲幻魔陣)이 있으니 역시 오르시면 안 됩니다.”
“……알겠어. 그러니까 내궁을 벗어나면 안 된다는 거지?”
듣기만 해도 살 떨리는 이름들이다. 흑운환마진도, 구궁사살진도 악랄하기 짝이 없는 진법들이라 잘못 발을 들여놓으면 순식간에 정기를 빨려 시체가 된다.
과연 마교의 본거지라 할 만하다며 창건은 혀를 내둘렀다. 그러나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후원에서는 길만 따라서 걸으십시오. 꽃을 잘못 만지면 화독에 감염될 것입니다. 미약 성분이 섞인 식물독이라, 만독불침지신을 이루었어도 탈이 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흑염군의 설명은 한참이나 이어졌다.
창건은 정말 농담이 아니냐고 묻고 싶어졌다.
그의 말대로라면 명화산은 죽음의 땅이다. 제대로 길을 모르고 무작정 들어왔다가는 수만 명이 쳐들어와도 시체로 변할 뿐이다.
‘그냥…… 안내를 붙여 달라고 할까?’
겁이 덜컥 났다. 그에 비례해서 오기도 치솟았다. 창건은 겁을 억누르고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천하의 마교가 뭐가 무섭다고 그렇게 조잡한 짓을 많이 해 놨어. 쯧, 알겠어. 내궁에서 벗어나지 않고 길로 다니면 되겠네.”
“후훗, 맞습니다. 그럼 이걸 가져가십시오. 맡아 두고 있었습니다.”
흑염군이 무언가를 내밀었다. 바로 뇌동고에게서 훔쳐 낸 금패였다. 소주라고 양각된 글씨가 너무나도 흉물스럽게 보였다.
‘흥, 써먹어 주마.’
창건은 태연히 금패를 받아 들었다. 흑염군은 희미한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다행입니다.”
“뭐가?”
“원래 당찬 분이라고 들었는데, 그동안 너무 힘이 없어 보여서 걱정했습니다. 다행히 오늘은 기운을 차리신 모양이군요.”
“나는 똑같은 것 같은데, 다를 게 있나?”
창건이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답했다. 물끄러미 창건의 얼굴을 바라보던 흑염군이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냥 안색이 좋아 보여서 드린 말씀입니다. 그럼 저녁에 뵙겠습니다.”
흑염군은 볼일이 모두 끝났는지 공손히 포권을 하고 사라졌다.
“후아, 후아. 무서워 죽는 줄 알았네.”
창건은 침상에 털썩 주저앉았다. 다리가 풀려서 덜덜 떨리고 있었다. 어째서인지 몰라도 흑염군의 눈을 마주 보고 있자니 심장이 오그라드는 기분이었다.
“나는 무례한 놈이다. 후안무치하고 단순무식한 놈이다. 후아, 후아. 안색이 좋아 보여? 저거 분명 내가 반말한다고 은근히 비꼰 거 맞지?”
어제까지 경어를 썼던 창건이다. 그러나 향월에게 뇌동고에 대해서 듣고 태도를 바꿨다. 퍽이나 존장을 존중할 놈이다. 소교주의 위세를 믿고 막말을 하는 편이 설득력이 있다.
“후아, 후아, 조금만 더 있었으면 기절했을 거야.”
오로지 오기 하나로 버텼다.

“사형, 소교주님을 만나고 오는 길이지요?”
복도에서 마주친 적혈화가 은근히 눈웃음을 쳤다.
그녀의 눈에는 색음정기(色陰情氣)가 어려 있어 그 자체로 섭혼술이다. 몸의 굴곡이 드러나는 홍의를 입고 교태를 부리는 적혈화는 숨 막힐 정도로 진한 향을 뿜어내는 꽃이었다.
“그래, 지금 뵙고 오는 길이다.”
“어떤 사람이에요?”
적혈화가 눈을 빛냈다. 흑염군은 피식 웃었다.
“오늘 연회에서 뵙게 될 텐데 뭐가 그리 급하냐.”
“궁금해서 그래요. 듣기로는 망나니였다고 하는데…….”
“입 조심해라.”
“진작 소문난 것 알고 계시잖아요.”
적혈화가 눈을 찡긋거렸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흑염군이 한숨을 쉬었다.
“소문과는 다르더구나.”
“다르다니요? 망나니가 아니라는 건가요? 알겠어요. 망나니라고 안 부를게요! 노려보지 말아요!”
호들갑스럽게 적혈화가 엄살을 피웠다. 흑염군은 그녀와 나란히 복도를 걸으면서 나지막이 말했다.
“내게 하대를 하시더구나.”
“……하대를 했다고요?”
“그래, 사실 나도 소교주님의 소문을 듣고 적잖게 걱정했다. 그래서 미리 기를 잡을 작정으로 암중에 진기를 퍼뜨렸지.”
“그런데도 했다고요? 세상에, 사형의 기백이면 호랑이도 숨 막혀서 죽을 텐데. 암천마령기도 아직 융화되지 않았을 테고. 확실히 그냥 망나니는 아니네요.”
적혈화가 놀랐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흑염군은 희미하게 웃었다.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창건은 오전부터 분주하게 움직였다. 목적은 마교의 탐색. 어차피 오늘은 시작에 불과하니 길만 익혀 둘 생각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방에서 나온 창건은 그것마저도 꽤나 허황되다는 걸 깨달았다. 마교의 내궁은 생각보다 훨씬 넓어서 하루 종일 헤매도 다 보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뭐가 이렇게 복잡해! 무슨 궁궐도 아니고!’
내궁에는 아홉 개의 전각이 있다. 중앙에는 창건이 기거했던 천마궁(天魔宮)이 있고, 팔괘의 배치에 따라 여덟 개의 전각이 천마궁을 감싸고 있다.
‘제길, 이렇게 넓으면 하루 동안 길을 익히는 건 무리야. 그냥 구경이나 해야겠다.’
한 번 보면 잊지 않는 수재가 아니고서야 하루 안에 내궁의 길을 모두 꿰뚫는 것은 불가능하다. 창건은 미련 없이 포기하고는 정말로 발길 닿는 곳으로 움직였다.
말로만 듣던 마교에 들어왔건만, 정작 피가 튀기고 살이 찢기는 잔인한 모습은 보지 못했다. 이곳이 내궁이기 때문일까. 장엄할 정도로 강맹한 기세를 가진 고수들은 있었지만 피 냄새를 풍기는 무인은 찾기가 힘들었다.
‘시간이 오래 걸릴 테니 서류 같은 걸 훔쳐보는 건 무리야. 애초에 그런 장소에 가는 것만으로 의심받을 짓이다. 비급이 모여 있는 보물 창고? ……매력적이긴 하지만, 내공을 일으킬 수 없는 지금은 무용지물이야. 도망 나갈 때가 되면 모를까.’
창건은 느긋하게 산책을 즐기기로 했다. 너무 긴장하고 있으면 오히려 쉽게 지칠 수 있다.
‘간칠전(艮七殿)이라…….’
간칠전은 천마궁을 기준으로 동북쪽에 있었다. 창건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교에서 도가 사상을 따라 건물을 짓다니…… 희한한 일일세.’
간(艮)은 팔괘 중 일곱 번째에 해당한다. 또한 동북을 상징하기도 한다. 음양팔괘에 들어맞는다.
‘건일전(乾一殿)이며 태이전(兌二殿)까지……. 지금껏 지나친 전각들도 이런 이름이었지. 천마궁만 빼면 도가 문파라고 해도 믿겠다.’
창건의 생각은 지나친 비약이라고 볼 수 없었다. 실제로 여덟 개의 전각의 배치는 은근한 현기(玄機)가 느껴졌다.
‘주화입마에 빠진 미친 도사가 마교를 세웠다는 얘기가 있었지…….’
너무나 허황된 소문이었다. 마교 스스로도 부정했고 도가 문파들도 헛소문으로 치부했다.
‘그런데 분명 도가의 영향이 느껴진단 말이야.’
창건은 미간을 찌푸렸다.
‘에이, 그게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마교의 역사는 오백 년이나 된다. 그 발단이 어찌 됐든 간에 지금은 천하에서 가장 사악한 집단일 뿐이다.
창건은 간칠전을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아무리 봐도 사악한 인간들만 모여 있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마교는 온통 피 칠이 되어 있을 줄 알았는데…….’
곧 점심때인지 밥 짓는 냄새가 흘렀다. 복도 곳곳은 그림이며 조각상으로 제법 꾸며 놓기까지 했다.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긴 하구나.’
분위기는 조금 달랐지만, 분명 사람이 사는 곳으로 보였다. 시녀들이나 무사들의 표정을 보면 알 수 있다. 활기차게 지낼 수 있는 건 그만큼 살 만한 곳이라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