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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안하무인(眼下無人)에 후안무치(厚顔無恥)도 모자라서 인면수심(人面獸心)이다. 세상 살다 이런 때려죽일 놈의 이야기는 처음 들었다.
내심 길 가다가 사람을 죽였다는 죄책감이 있었는데, 그런 죄의식마저 일거에 씻겨 내려가는 듯했다.
‘소문은 소문이야. 사실에서 가감될 수 있어. 하지만 들은 걸 반으로 추리고, 다시 거기서 반으로 추려도 이건 개새끼야.’
향월은 창건의 속도 모르고 얘기를 마치고는 쑥스럽게 웃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놀랐어요. 소교주님이 계속 경어를 쓰시고, 너무 예의 바르게 대해 주셔서……. 그런데 이제 헛소문이라는 걸 알겠어요. 역시 소문은 믿을 게 못 되는군요.”
창건은 속이 쓰렸다.
순진무구하게 웃는 향월의 믿음을 깨뜨려야 한다니 마음이 아팠다.
“모두 사실이야.”
“예?”
“모두 사실이라고. 본산에 어디까지 소문이 났나 했더니, 모두 제대로 알고 있군. 크크큭, 제대로 알고 있다니 내숭을 떨 필요도 없겠어. 교주가 되는 김에 점잔 좀 떨어 보려고 했더니.”
향월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미안, 너처럼 순진한 사람은 소교주가 변했다고 믿겠지만, 다른 사람들은 의심할지도 모르거든. 최대한 본래 모습과 가까워야 해.’
창건은 마음속으로 사과를 하고 향월을 내쫓았다. 만약 진짜 뇌동고였다면 그대로 향월을 취했겠지만, 그것까지는 무리였다. 그러나 앞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될지 대강 감은 잡혔다.
안하무인, 후안무치, 인면수심.
열두 글자만 기억하고 있어도 틀림없는 뇌동고라는 소리를 들을 게다.



제5장 탐색(探索)


오랜만에 아주 깊게 잠들었다.
꿈속에서 창건은 풍운청룡단의 당당한 일원이었다. 번쩍이는 청룡검을 허리에 차고, 멋진 청의무복을 차려입은 그는 무림맹의 촉망받는 후기지수였다.
“크하핫! 그대와 같은 젊은 고수가 있어 무림의 평화가 지켜지는 것이다!”
무림맹주 승천비룡(昇天飛龍) 강유학(强流虐)이 창건의 무재에 찬사를 보냈다.
“하잘 것 없는 재주라 부끄럽습니다.”
창건은 겸손을 잃지 않았다. 그것이 오히려 더욱 마음에 들었는지 강유학은 창건을 와락 끌어안았다.
“어찌 그대와 같은 젊은이가 이제야 내 앞에 나타났단 말인가! 앞으로 창건, 그대는 내 진전을 이어 무림의 구세주가 되리라! 또한 사랑하는 내 손녀딸의 결혼상대로 허락한다!”
무림맹주의 후계자에, 하남제일미(河南第一美) 강사연(强獅鳶)을 아내로 맞이하란다. 정도무림인으로서 최고의 행운을 누리는 것이다. 창건은 겸손을 잃지 않고 공손히 대답했다.
“맹주님의 뜻을 기꺼이 따르겠습니다.”
“맹주님이 아니라, 할아버지라 부르거라. 네가 손녀사위가 될 것이니 우리는 남이 아니다. 나를 친할아버지처럼 여기면 될 것이 아니냐.”
“흐, 흐흑. 맹주님,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허어! 할아버지라 부르라니까!”
창건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강유학을 올려다보았다. 근엄하기만 했던 그의 얼굴은 푸근하게 웃고 있었다.
“할아버지…….”
왜 갑자기 강유학이 사위로 맞아들인다고 한 것일까. 언제 무림맹으로 돌아온 것일까. 창건은 순간 의아하게 여겼고, 덕분에 꿈에서 깨 버렸다.
아득하게 의식이 흐려지더니 이내 맑아졌다.
눈을 뜨니 화려한 침실이 눈에 들어왔다. 창건은 인상을 구기면서 투덜거렸다.
“빌어먹을…… 꿈이잖아.”
어째 모든 일이 너무 쉽게 풀렸다. 무림맹주의 후계자에 하남제일미의 남편이라니, 정도무림인이라면 누구나 꿈꿀 법한 이상적인 삶이다.
‘후, 생전 처음으로 비단 금침에서 잠을 자니 꿈도 호화 급으로 꾸는구나.’
창건은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휘휘 저었다. 애초에 꿈을 잘 꾸지 않는 체질이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가끔 꾸는 꿈은 꼭 어떤 방식으로든 들어맞았다.
‘특히 안 좋은 쪽이었지. 제길, 잊어버리자. 부정 탈라. 본 적도 없는 하남제일미에, 몇 번 먼발치에서 본 게 전부인 맹주님이 왜 꿈에…… 에휴.’
길게 한숨을 쉬었다. 비단 금침을 덮고 있어도 마음이 답답했다.
“기침하셨습니까.”
낯이 익은 목소리다. 낭랑하게 울려서 귀가 즐겁다. 창건은 어젯밤에 나누었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반말로 대답했다.
“어, 향월이구나. 나 일어났는데.”
“조반을 가져왔습니다.”
문이 열리더니 향월이 음식상을 옮겼다. 창건은 몸을 일으키려다가 음식상이 향하는 곳을 보고는 우뚝 멈췄다.
“침상 위에서 먹는 거야?”
“예, 몸이 불편하시니까요. 평소에도 귀찮으시면 이렇게 드시고요.”
“호사스럽네.”
창건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식사 예절이 근본부터 틀리다. 이게 있는 자들의 특권이라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이왕이면 즐겨야지.’
마교 소교주의 자리는 황족이 부럽지 않다. 원하는 대로 재물을 손에 넣을 수도 있고, 궁을 짓고 첩으로 가득 채울 수도 있다. 손짓 한 번이면 일만 이천 명의 마교 무사들이 집결한다. 산해진미가 올려진 식사는 그중에서도 정말 소소한 즐거움이다.
‘양심껏 즐기는 거야. 평생 이런 식사를 언제 해 보겠어.’
본래 미식을 즐기던 창건이다. 무림맹 장로들에게 뇌물로 넘긴 약재와 과실로 담근 술도 그런 취미에서 나온 것이다. 척박한 환경에서도 맛있는 음식을 찾아 먹는 성격이다.
“그럼 맛을 볼까.”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송아지 뒷다리를 집어 들었다. 육즙을 흠뻑 머금은 육질에 침이 절로 넘어간다. 창건은 행복한 표정으로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으적으적.
“…….”
천천히 고기를 씹던 창건의 움직임이 점점 느려졌다. 둥글게 휘었던 눈매도 점점 굳어졌다.
‘이, 이게 무슨 맛이야.’
엄청나게 맵다. 그런 주제에 코끝이 찡할 정도로 시다. 소금도 한 주먹 넣었는지 목구멍이 까끌거리도록 짜다. 양념 통이라도 쏟지 않고서야 이런 맛이 나올 수가 없다.
향월이 조마조마하게 바라보다가 창건의 움직임이 멈추자 조용히 고했다.
“간밤에는 제가 잘 몰라서 죄를 지었어요. 소교주님은 간을 세게 해서 드신다는 걸 오늘에야 소식을 듣고 알았습니다. 주방장이 성지에서 드시던 것과 최대한 비슷하게 올리겠다며 만든 건데…… 어떠신지요?”
“아, 아하하. 성지에서 내가 먹던 대로 만들었다고?”
“예, 성지에서 도착한 전서응에 소교주님께서 평소 즐기시던 요리법이 적혀 있었어요. 어제 제가 만든 죽은 드시기에 고역이셨을 텐데…… 정말 죽을죄를 지었어요.”
고역이 아니라 천상의 맛이었다. 이런 음식만 계속 먹는다면 마교에 눌러앉아도 좋지 않을까 생각할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지금 느끼는 건 지옥이다.
‘빌어먹을! 혓바닥이 어떻게 됐기에 이런 음식을 먹고 살았다는 거야.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아니잖아!’
처음에는 향월이 자신을 고문하는 게 아닌가 의심했다. 간밤에 놀리고 겁을 줬으니, 시녀 나름의 귀여운 항의가 아닐까 하고. 그러나 이게 웬걸, 원래 소교주의 취향이란다.
‘으으, 의심받지 않으려면 다 먹어야 할 텐데.’
창건은 애써 히죽 웃으면서 고기를 뜯었다. 한입 들어갈 때마다 혓바닥에 불이 붙는 느낌이었다.
“마, 맛있군. 맛있어. 딱 성지의 그 맛이야.”
“다행이군요!”
향월이 손뼉을 쳤다. 창건은 송아지 고기를 몇 점 뜯다 말고 내려놓았다.
“그런데 식욕이 없어서……. 그만 먹어도 되지?”
“에? 괜찮으시겠어요? 성지에서는 하루 네 끼를 챙겨서 어지간한 역사(力士)들보다 더 드신다고…….”
빌어먹을 뇌동고!
창건은 안색을 바꾸며 수저를 다시 들었다.
“아니, 먹지. 생각해 보니 배가 고프네. 먹자고.”
그렇게 말하고 음식상을 보고 침을 꿀꺽 삼켰다. 식욕이 나서가 아니라 긴장 때문이다.
‘아무리 그래도 멀쩡한 음식이 있겠지. 아, 말로만 듣던 자룡탈포(子龍脫抱)다.’
하얀 뱀장어 속살이 먹음직스럽게 보였다. 무림맹에서는 기름진 음식을 주지 않는다. 기껏해야 닭고기가 전부다. 창건은 자룡탈포 한 점을 집어서 입에 넣었다.
으적으적.
매콤하게 요리한 뱀장어의 풍미가 입 안에 퍼졌다.
‘……기름져! 너무 기름져! 미치게 기름져! 게다가 역겨워! 뭐야, 이거 어떻게 조리한 거야!’
창건은 차마 뱉지도 못하고 삼켰다. 옆에서 지키고 있는 시녀를 슬쩍 곁눈질하고는, 다시 자룡탈포를 유심히 살폈다. 투명한 액체가 생선살을 감싸고 있었다.
‘자, 잠깐. 저 투명한 게 다 기름이야? 어느 미친놈이 돼지기름으로 볶았어!’
애당초 돼지기름과 생선은 어울리지 않는다. 하물며 지방이 가득한 뱀장어라면 말할 것도 없다. 창건은 허탈하게 웃었다.
“하, 하하…… 돼지기름이네?”
“예. 어떻사옵니까? 성지에서 드시던 것과 같나요? 일반적인 방법으로 조리하면 드시지 않는다고 들었기에…….”
“그, 그렇지. 맞아. 나는 이렇게 먹어.”
‘뇌동고, 이 미친놈!’
창건은 분통을 터뜨렸다. 의심할 여지가 없다. 뇌동고의 식욕은 성격만큼이나 고약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찾으려던 창건의 바람은 산산이 부서져 나갔다.
화궁전구육(火宮殿狗肉)은 달았고, 와보반(瓦寶飯)은 아예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죽이었으며, 춘권(春卷)은 국물에 불려서 나왔다.
‘사람이…… 사람이 먹을 게 아니야.’
세상천지에 이런 식성이 존재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창건은 울며 겨자 먹기로 음식을 씹지도 않고 삼켰다. 눈물이 날 만큼 괴로웠다.
“와아, 정말 맛있게 드시네요.”
지켜보던 향월이 탄성을 터뜨렸다.
창건은 살의를 느꼈다.
‘이런 걸 계속 먹느니, 차라리 굶어 죽지 싶다.’
투덜거리면서도 결국 다 먹고야 말았다.
의심받을까 두려워 물조차 많이 마시지도 못했다.
창건은 죽은 뇌동고가 저승에서 복수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난 사람이라고! 이런 곳에서 호강을 누리긴 뭘 누려! 한시라도 빨리 탈출할 테다!’
앞으로 계속 이런 음식을 먹어야 한다니, 앞이 깜깜해졌다.

매로검은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간신히 차오른 손톱만 한 상현달이 매달려 있었고, 주변으로는 빛 가루를 뿌린 듯한 무수한 별이 박혀 있었다.
매로검은 이윽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창건, 무슨 변이라도 당한 건 아니겠지요.”
그의 깊은 노안이 착잡한 심정으로 흐려졌다.
매로검은 낮에 받았던 보고가 떠올랐다.

‘금번 풍운청룡단 입단자 창건의 귀환이 늦어지고 있습니다. 더 이상 늦어지면 입단을 취소하고 다른 후보를 대신 입단시켜야 할 것입니다.’

그런 내용이었다.
평소라면 조금 더 여유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필이면 마교 교주가 숨을 거두는 바람에, 무림맹이 전면 비상사태에 돌입한 것이다.
전쟁을 준비하는 데 가장 기본은 병력의 준비다. 당장 풍운청룡단의 숫자를 채워야 하니, 다른 후보라도 넣어야 했다. 매로검은 그게 못내 안타까웠다.
‘혜인(惠湮), 그대가 청건을 데려온 지도 벌서 팔 년이 됐어요.’
매로검은 오랜 친우를 떠올렸다.
천지기인(天地奇人) 혜인, 천하의 이치를 직접 찾아다니겠다고 모습을 감춘 무당의 도사였다. 이십 년 전에 모습을 감췄다가 팔 년 전에 갑자기 나타났던 것이다.
“무재를 주웠네. 천재는 못 되고 수재라고 보기에도 좀 모자라지만, 무림맹에서 밥이나 먹여 주시게.”
혜인은 갑자기 나타나서 매로검에게 코흘리개 꼬마를 넘겨주었다. 꼬마는 깊이 잠들어 있었다.
“천지기인께서 거둔 무재로군요. 그렇다면 당연히 무림맹의 기둥이 될 인재겠지요.”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냥 불쌍해 보여서 주웠네. 어쨌든 밥술이나 뜨게 해 주시게.”
“맹의 수련생으로 받도록 하지요. 그런데 기인께서도 완전히 돌아오신 건가요?”
“허허, 아직까지 그 이상한 말버릇은 여전하군. 낯간지러워서 못 들어 주겠네. 천지간에 아직 깨닫지 못한 이치가 산처럼 쌓였는데 돌아오긴 어딜 돌아온단 말인가.”
혜인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표홀히 사라졌다. 매로검은 곤히 잠들어 있는 꼬마를 그대로 수련생 숙소로 넘겨 버렸다.
‘천지기인께서 내게 아이를 맡긴 건, 그럴 이유가 있을 터……. 이건도 인연이니 내가 지켜보겠어요.’
매로검은 그 뒤로 팔 년 동안이나 창건이 자라는 모습을 꾸준히 지켜보았다. 이렇다 할 특별한 점은 없었다. 그저 조금 잔머리를 잘 굴리는 수련생일 뿐이었다.
아주 가끔, 틀린 것이 있으면 바로잡아 주었을 뿐이다. 그게 무공이든 예절이든.
‘마교의 교주가 죽었으니 그 여파가 호남까지 미쳤을 텐데 창건은 어떨는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 규율을 철석같이 지키는 창건이었다. 복귀일이 닷새나 지났는데도 돌아오지 않는다는 건, 분명 문제가 생겼다고밖에 생각할 수가 없었다.
매로검이 후원을 거닐고 있는데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험험, 매로검 장로님.”
무당의 도복을 입은 중년인이었다. 하급무사의 관리를 맡고 있는 삼광검(三光劍) 일태천(溢太泉)이었다.
“오, 삼광검께서 웬일이지요?”
“하하, 밤공기가 시원해서 나와 봤습니다. 오늘 너무 답답한 일이 많아서요. 일 처리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더라고요.”
답답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
무림맹은 지금 마교로 인해서 긴장의 끈을 팽팽히 당기고 있었다. 교주가 죽은 것을 계기로 전쟁을 재개할까 봐 우려되는 것이다.
“나 같은 늙은이는 이럴 때 오히려 할 일이 없지요. 일을 조금 나눠 줘도 좋을 텐데요, 흘흘.”
“아이고, 무슨 말씀이십니까. 매로검 장로님께 감히 잡무를 맡길 수는 없지요. 그런 건 저같이 경험이 모자라고 힘만 남는 사람이 하는 게 낫습니다. 매로검 장로님께서는 후학들에게 경험만 조금 나눠 주시면 됩니다.”
매로검은 인자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