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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홀로 남은 창건은 침대에 털썩 누웠다. 마도의 초절정고수를 직접 목도하고 나니 식은땀으로 옷이 흠뻑 젖었다.
암혈일혼 흑염군, 파천마제가 없었다면 능히 마교를 지배할 자라고 명성이 자자했다.
‘파천마제 뇌일혁의 오른팔, 불꽃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자…….’
단정한 외모만 보면 진중한 문사풍의 중년인이었다. 손에 책을 쥐여 주면 아마 누구나 그를 문사로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외모만 보고 평가를 내렸다가는 험한 꼴을 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평소에는 냉정하고 차분해 보이지만…… 저기에 속으면 안 되지. 한 번 열 받으면 주위 가리지 않고 모두 불태워 버리는 화귀(火鬼)니까…….’
모두 무림맹에서 들은 소문이다. 창건은 늘어지게 한숨을 쉬었다.
“후우, 진짜 죽는 줄 알았네.”
흑염군은 또한 치밀하기 짝이 없는 성격이라고 들었다. 그런 만큼, 가짜인 게 탄로날까 봐 목이 뻣뻣해지도록 긴장한 것이다.
“두 달 후란 말이지…….”
정말로 교주가 되면 빼도 박도 못하게 된다. 교주가 사라지는 것과 소교주가 사라지는 것, 둘 다 엄청나게 큰 문제겠지만 소교주가 사라지는 편이 조금 파장이 덜하리라.
“좋아. 앞으로 두 달이야.”
창건은 누운 채로 허공을 향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살아남고 말겠어. 악착같이 살아남아서 무림맹으로 돌아갈 거야! 소교주 행세가 언제까지 먹힐지 모르겠지만 말이야. 아예 마교의 비전 무공이나 기밀까지 빼돌려서 가는 거야!”
자신을 위한 다짐이었다.
“위기는 곧 기회라고 했어! 전화위복으로 오히려 공을 세우면 되잖아!”
이왕 이렇게 된 것, 창건은 확실하게 마교인들을 속이기로 작심했다. 사실 공을 세우지 못해도 큰 상관은 없다. 요는 자신의 목숨이요, 인생이다. 엉뚱한 곳에서 비명횡사할 수는 없다.
‘소교주. 소교주 행세를 하려면 그놈을 잘 알아야 해.’
창건은 생각을 전환했다.
‘뇌동고…… 그 녀석은 어떤 놈이었을까.’
얘기를 들어 보니, 뇌동고는 태어나자마자 성지라는 곳에 보내진 모양이다. 외부에 나오지도 못하고 열일곱 평생을 수련으로 보냈다고 한다.
‘그래서 그렇게 싸가지가 없었나.’
단 한 번 만났을 뿐이지만 잊을 수 없는 인상이었다.
처음 만난 사람을 하인처럼 부리는 특권 의식이라니,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인간이 아니다.
‘돈 많고 연줄 많은 자식들 중에서나 간혹 보이는 성격인데 말이야. 그래, 무림맹에도 한 명 있었지.’
창건의 뇌리에 한 남자가 떠올랐다.
“황보진양. 그 자식이 그랬지.”
창건이 열두 살이 됐을 때 황보진양을 처음 만났다. 한창 무림맹의 수련생으로 생활하던 참에, 또래의 아이가 수련생으로 들어왔다는 얘기를 듣고 무척 반가웠다.
친구로 지내려고 찾아갔더니 돌아오는 건 싸늘한 경멸뿐이었다.
‘뭐야, 부모도 없는 천한 것이 어디서 수작을 걸어!’
그때는 몰랐다. 사대세가의 수좌인 황보세가의 자식에게 고아가 말을 거는 게 죄가 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얼마나 서러웠는지 모른다. 황보세가의 자식에게 무시당하기 싫어서 창건은 더욱 열심히 수련했다. 저런 녀석에게 지지 말아야겠다는 오기의 발로였다.
그러나 태어났을 때부터 벌모세수를 받고, 집안의 비전절기를 이어받은 황보진양이다. 격이 달라도 너무나 달랐다.
애초에 황보진양은 무림맹에서 아랫사람의 생활을 익혀 보라는 황보가주의 명령 때문에 들어온 녀석이다. 굳이 수련생 생활을 거치지 않아도 무림맹의 높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는 말이다.
‘너와 나는 달라’라고 말하는 그 눈빛이란, 주위 사람을 깔보는 그 태도란, 정말 역겹기 짝이 없었다.
‘흥, 어차피 갈 길이 다르지. 그 자식은 무림맹의 간부가 될 테고 장차 황보세가를 물려받을 테니까.’
창건이 보기에 황보진양은 자질이 그렇게 뛰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같은 무공을 배워도 창건이 한 발 앞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줄이 있는 고수들에게 집중적으로 가르침을 받는 덕분에, 항상 최종적으로 앞서는 건 황보진양이었다. 그때마다 창건은 얼마나 허탈하고 억울했는지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하던 창건은 인상을 찡그렸다.
‘지금 무슨 생각하는 거야. 뇌동고에 집중해도 모자랄 판에…….’
황보진양을 떠올리자 열등감 때문에 기분이 나빠졌다. 창건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아니, 그래도 비슷한 점이 많은 것 같아. 차라리 도움이 되겠어.’
황보진양이나 뇌동고는 같은 과다.
바로 안하무인의 부류.
창건은 뇌동고의 첫인상을 결론지었다. 그러나 혼자만의 경험으로 사람의 성격을 알아내는 건 지나치게 편협한 결과를 가져온다. 다각도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밖에 누구 있어요?”
창건이 부르자 아까의 시녀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필요한 게 있으신가요, 소교주님?”
“아, 필요한 건 없고…….”
꼬르륵.
배 속이 요란하게 울렸다. 창건은 머쓱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으으, 우선 요깃거리 좀 갖다 줘요.”
무표정했던 시녀의 입매가 아주 살짝 씰룩거렸다. 웃고 싶은데 웃지 못하는 모양이다. 하긴, 규율이 엄격한 곳에서 시녀가 함부로 웃었다가는 경을 치는 게 보통이다.
“알겠습니다. 금방 가져올게요.”
“그리고 가는 김에 두건 좀 가져다 줘요.”
“두건이라고요?”
시녀가 반문했다.
“그래요, 얼굴을 가리는 두건. 없으면 두건 대용으로 쓸 천이라도 좀 끊어다 줘요. 검은색이면 좋겠는데. 보다시피 내 얼굴이 이래 놔서.”
“아아…… 알겠습니다. 금방 대령할게요.”
시녀는 이해하겠다는 눈빛으로 수긍하고 사라졌다. 솔직히 벌써 마음이 진정된 것은 아니었다. 아직도 동경을 봤을 때의 얼굴이 뇌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그러나 그런 것에 연연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제길…… 나름 무림맹에서도 손꼽히는 미남이었는데. 인생이 꼬여도 더럽게 꼬였어.’
창건은 자신의 얼굴을 슬쩍 손으로 쓸어 보았다. 손끝에 걸리는 우둘투둘한 혈관의 느낌이 끔찍했다.
‘이게 다 빌어먹을 뇌동고 때문이야. 젠장, 죽은 녀석을 탓해서 뭣 해!’
창건은 한숨을 푹푹 쉬면서 시녀를 기다렸다. 시녀는 채 일 각도 지나지 않아서 쟁반에 죽사발을 받치고 돌아왔다.
“해물죽을 끓여 봤어요. 입에 맞으실지 모르겠습니다.”
“어? 직접 끓였어요?”
“예, 원래 주방에 있었거든요. 시간이 너무 늦어서…….”
주방장이 없었다는 얘기다. 창건은 해물죽의 맛깔스러운 냄새와 모양을 보고 감탄했다. 역시 소교주의 시녀쯤 되면 못하는 게 없는 모양이다.
“아하, 고마워요. 잘 먹을게요.”
창건은 히죽 웃고는 죽사발을 받아 들었다. 시녀의 표정이 일순간 미묘하게 바뀌었다. 창건은 그것을 눈여겨봤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각종 어패류를 넣고 끓인 해물죽은 정말 맛이 좋았다. 굶주렸던 창건은 단숨에 몽땅 비워 버렸다. 식사가 끝나자 상을 치운 시녀는 고운 비단에 받쳐서 흑색의 두건을 내밀었다.
“와…… 지금 만들어 온 것 같진 않고, 어디서 구했어요?”
재질이 부드럽다. 시험 삼아서 머리에 두건을 써 본 창건은 감탄했다. 바람이 솔솔 통해서 전혀 답답하지 않았다. 두 눈만 내놓고 있는데도 맨얼굴로 있는 기분이었다.
“총관께 여쭈었더니 마침 무정살혼대의 지급품이 있다면서 내주셨습니다. 급한 대로 이걸 쓰시고, 닷새만 말미를 주시면 천잠사(天蠶絲)를 구해서 두건으로 만드시겠다고…….”
“아, 아니, 그렇게 거창한 건 필요 없어요. 이거면 충분해요.”
천잠사로 만든 의복이나 수투는 천금의 가치를 갖는다고 한다. 그런 천잠사를 한낱 두건을 만드는 데 낭비하다니, 가치 기준이 판이하게 다르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차라리 그 돈을 날 줘.’
그 편이 여러모로 낫다.
게다가 무정살혼대는 정도에서 치를 떠는 살수 집단이다. 무인이라기보다는 어둠의 살수, 그래서인지 그들이 쓰는 두건도 굉장히 뛰어난 물건이었다.
창건은 두건의 입만 끌어내려서 시녀가 따라 주는 차를 음미했다.
“자, 그럼…… 배도 채웠고 두건도 구했으니…….”
창건이 힐끗 창밖을 보았다. 한없이 어둡다. 풀벌레 우는 소리만 찌륵찌륵 들려왔다. 창건이 잠시 뜸을 들이자 시녀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저어…… 혹시 양기(陽氣)를 풀고 싶으신 거라면…….”
“에?”
“요령대주께서 언제든지 요령대의 여인들을 보내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경험이 없어서 실망하실지도 모른다고…….”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창건이 당치도 않다는 듯이 얼굴을 붉혔다. 아무리 놈팡이 소교주가 되기로 마음먹었지만, 그래서 어지간한 일에는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했지만, 동정의 몸으로 이런 소리를 들으니 귓불까지 뜨거울 지경이다.
그러나 시녀는 오히려 진지한 얼굴로 답했다.
“사양 말고 언제든지 말씀하세요. 혹시 처녀가…… 취향이시라면 저도…….”
“이봐요! 그런 거 아니라니까!”
결국 창건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얼굴이 익은 사과처럼 시뻘게진 상태였다.
“주, 주제넘은 참견이었다면 죄송합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후우, 됐어요. 나는 다만 좀 물어볼 것도 있고…… 밤도 깊은데 잠은 안 오니까 심심해서 대화를 하려고 했을 뿐이라고요.”
하아아, 말을 마친 창건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이해가 가질 않는지 시녀는 의혹에 잠긴 눈으로 되물었다.
“미천한 제가 감히 소교주님의 대화 상대가 된다는 것은…….”
“심심풀이 대화 상대는 신분의 귀천이 없는 법이예요. 거기 앉아요. 그런데 왜 내가 음…… 그게 필요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아, 그보다 먼저 이름이?”
창건이 빠르게 말을 이어 가자 시녀는 더 이상 반문하지 못하고 자리에 앉았다.
“제 이름은 향월(香月)입니다. 그런데 그거라는 게 여자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성지에서도 거의 밤마다 여체를 찾으셨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거든요.”
전혀 부끄러운 얘기가 아니라는 투다. 듣는 창건은 다시 얼굴이 달아오를 지경이었다.
‘뇌동고…… 어린 새끼가 발랑 까졌구나.’
최대한 뇌동고의 행동을 따라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핑계로 여체를 품을 생각은 없었다. 적어도 당장은 그럴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마교 소교주인 척하면서 마교의 여자들을 품는다? 그거야말로 극악무도한 악당이다.
“그러니 원하는 취향을 말씀해 주세요. 이곳에는 서역의 금발벽안 미녀까지 있답니다.”
향월은 끈질겼다. 소교주가 여자를 거절할 리 없다는 확신을 갖고 조심스럽게 다시 묻고 있었다. 창건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후우, 그랬죠. 그렇긴 한데, 지금은 내가 대법을 받아서인지 몸도 마음도 전혀 동하질 않네요. 내가 필요하다고 느낄 때 부탁할 테니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예, 알겠습니다.”
창건은 내심 가슴을 쓸어내렸다.
솔직히 당장 눈앞에 있는 향월의 미모만 해도 대단했다. 발그레한 뺨과 오뚝한 콧날, 시원시원하고 커다란 눈망울과 살짝 웃는 듯한 입매까지, 흔히 볼 수 있는 여자가 아니었다.
마음속 깊숙한 곳에서 일말의 흑심이 꿈틀대지 않았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하지만 목숨이 걸린 상황에서 어찌 함부로 행동하겠는가.
“그 외에 나에 대해서 또 어떤 소문을 들었죠?”
“소교주님에 대한 거라면…… 좋은 교주가 되실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창건이 피식 웃었다.
“들은 대로 말해요. 내 눈치 보지 말고.”
어차피 십칠 년 동안 왕래하지 않았다면 소문만 퍼졌을 것이다. 창건이 보았을 때, 뇌동고는 결코 좋은 소문이 날 부류가 아니었다. 아마 악명을 떨쳤으리라.
“호탕한 분이시고, 삼처사첩을 거느릴 분이시며, 격식에 자유로운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호탕하다는 건 성질대로 폭발한다는 뜻이리라. 삼처사첩이야 성욕이 넘쳐 나는 짐승이라는 얘기일 것이고, 격식에서 자유롭다는 건 예의범절을 모르는 후레자식일 공산이 크다.
“혹시 오해가 있을지 몰라서 그래요. 나도 이왕이면 본교에서의 평가가 궁금하기도 하고. 어차피 다른 사람한테 물어봐도 되는 일이고, 만약 향월이 거짓말을 했다면 금방 알겠죠.”
창건이 은근하게 향월을 구슬렸다.
“화내지 않을 테니까 말해 봐요. 오해가 있다면 풀고 싶으니까. 아랫사람들에게 퍼지는 소문에 귀 기울이는 것도 교주가 될 사람이 가져야 할 덕목인 걸요.”
“그, 그럼…… 정말 이건 소문에 불과하지만…….”
듣던 것처럼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향월의 입이 열렸다.
뇌동고에 대한 소문은 대부분 좋지 않은 것들이었다. 성지의 무사들과 싸움이 붙었던 것, 심지어 어떤 무사의 목숨을 빼앗고 부인을 겁탈한 것, 장로들에게 반말지거리를 하면서 덤빈 것 등등……. 향월은 나름 사실이 아닐 거라면서, 혹은 이건 소교주님에 대한 오해가 퍼졌을 거라면서 해석과 변명을 덧붙였다.
창건은 시종일관 푸근한 표정을 짓고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오호, 그랬어요?’, ‘허어, 정말요?’, ‘하하하, 그런 소문이?’라면서 말도 안 된다는 태도를 견지했다.
반 시진 동안이나 향월에게서 정보를 끌어낸 창건은 심각한 결론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