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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천하제일귀 1권



천하제일귀 1권(1화)
서장


쏴아아아.
굵은 장대비가 내렸다. 흙도 나무도 심지어는 바위마저도 흠뻑 젖은 채로, 차가운 빗발에 온몸을 떨어 댔다.
그리고 두 명의 노인.
단단하기 그지없어 보이는 절벽에 몸을 기댄 채 앉아 있다. 그 모습이 무척이나 힘겨워 보였는데, 자세히 살피니 온몸의 크고 작은 상처들 사이에서 시뻘건 선혈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왼편에 앉아 있는 노인의 어깨에서부터 옆구리까지 깊게 베인 칼자국. 이것은 옆에 앉아 있는 노인에게 비하면 그나마 작은 상처였다.
오른쪽에 앉은 노인은 오른팔이 아예 뜯겨져 나가 있다.
무인에게는 목숨보다도 더 소중하다는 오른팔. 그것을 잃었으니 이게 큰 상처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피가 철철 흘러넘치는데도 노인은 그저 그렇게 앉아 있었다. 더 이상 움직일 힘도 남아 있지 않은 모습.
노인들의 몸, 옷 그리고 머리는 흠뻑 젖어 시린 김을 뿜어 댔다. 주위엔 빗물과 뒤섞인 피가 웅덩이를 만들었다.
시선을 옮기니 노인들이 몸을 뉘이고 있는 절벽이 보인다.
바스러질 대로 바스러져 거미줄처럼 금이 가 있다. 필시 큰 충격을 받은 두 노인이 튕겨져 나가면서 절벽에 부딪친 게 틀림없었다.
무엇이었기에 이런 흔적을 남긴단 말인가?
그때, 이제는 외팔이가 된 노인이 가까스로 입을 연다.
“흘흘, 힘겨웠네. 하지만 이것으로 끝이겠지.”
“…….”
“귀륭, 자네. 어울리지 않게 낙심하는 건가? 자네는 약하지 않았네. 아니, 하늘을 울릴 정도로 자네는 강했네.”
귀륭이라 불린 노인, 그의 눈이 마치 귀신의 눈처럼 붉은 빛을 뿜어 댄다.
“큭큭, 그래. 하늘을 울렸지. 그게 다였어.”
“…….”
“내가, 이 단귀륭이 고작 그게 다였다는 거지.”
자괴감이 섞인 한탄. 굳건하면서도 강직한 인상을 가진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외팔이 노인이 재빨리 답했다.
“……그가 너무 강했을 뿐이야.”
“큭, 형편없군. 항상 오만하고 도도하던 태황의 모습과는 영 반대로구나.”
“흘흘, 그래. 오만했지, 오만했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만했네. 그리고 그 결과가 이것이지.”
태황이라 불린 노인, 그가 눈동자만을 굴려 자신의 오른팔을 내려다봤다. 그러나 폭포수처럼 흘러내리는 피만이 눈에 들어올 뿐.
“나의 오른팔…… 아니 이제 곧 죽을 테니 내 명줄이겠군. 내 목숨과 자네의 목숨을 맞바꿔 지켰으니, 그나마 다행이네.”
“지켜? 자네가 지키려 했던 중원, 그건 지켰지. 하나 내 자존심은 지키지 못했네.”
홍안의 노인이 이를 바득바득 갈며 말했다.
태황은 피식 웃었다.
“후후, 그래. 교주께선 강호보다야 교주의 자존심이 더 중했겠지.”
“……닥쳐라. 나에게 시간이 조금만 주어졌다면 저딴 괴노인쯤은…….”
태황이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으며 말을 끊었다.
“후, 자네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이야. 죽을 때가 되면 사람은 변한다는 게 맞는 말이긴 한가 보네, 흘흘.”
홍안의 노인은 잠시 말을 멈췄다. 저 자신도 그런 말을 내뱉었다는 게 놀라웠다.
“카악, 퉤!”
그는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피를 게워 내고는 심호흡을 했다. 점차 의식이 흐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태황도 마찬가지였다.
“그보다. 이젠 어쩔 텐가?”
“무얼 말인가?”
“네놈은 듣지 못했군.”
태황이 무슨 소릴 하냐는 듯 눈을 깜빡였다.
“괴노인이 죽기 직전 한 말을 듣지 못했단 말인가? 혈불살즉 후귀혈생(血不殺卽 後歸血生).”
“……!”
“완전히 죽지 않았네. 다시…… 다시 돌아올 것이야.”
미약하게 떨리는 듯한 노인의 목소리.
태황이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리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한 모습이다.
잠시 뒤 그가 머릿속으로 정리했던 말들을 내뱉었다.
“혈마(血魔)가 처음 나타난 것이 백 년 전일세. 그리고 그 당시 무신(武神)이라 불리던 소림의 혜능(慧能) 선사께 그는 목이 잘렸지. 그 후 백 년이 지난 지금 그의 후예가 나타났네, 백 년 전 혈마와는 차원이 다른 힘을 가진 채. 하지만 결국은 죽었네. 우리의 손에 말일세.”
“그럼…….”
죽였지만 죽지 않았다.
태황의 입에서 착잡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정말 그 말이 사실이라면. 그리고 그가 완전히 죽지 않은 게 맞다면. 아마 또다시 백 년이 지난 날 그의 후예가, 혈마의 피를 이어받은 또 다른 혈마가…….”
휘이잉.
어느새 멈춘 비대신 스산한 바람이 대지를 휩쓸었다.
그리고 그것을 따라 선황의 목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눈을 뜰 것이네.”



1장 생원(生員) 하운천(1)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빨리 말해 봐!”
한 소년을 중심으로 여러 명의 문생들이 둘러서 있었다. 그들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소년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말이야, 설란 누이가 천천히 옷고름을 잡아당기더란 말이지.”
꿀꺽. 꿀꺽.
여기저기서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홍색과 황색이 한데 모여 조화를 이루는 문복을 입은 문생들. 고풍스러우면서도 단정한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이제 막 열다섯 살이나 됐을까? 그런 문생들에게 소년의 이야기는 꿈만 같은, 호기심을 마구 자극하는 이야기였다.
“마침내 옷고름이 풀리고 나서…….”
사각.
“윗옷을 벗고…….”
사각.
“마침내 속곳까지 벗으려고…….”
사각, 사각.
“아이씨! 도대체 어떤 놈이야!”
상기된 얼굴로 이야기를 하던 소년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긴장 가득한 이야기에 책 넘기는 소리로 초를 치니 짜증이 날 수밖에.
문생들도 함께 인상을 쓰며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한 소년이 앉아 있었다. 여타 아이들과 같은 옷을 입고 긴 머리를 가지런히 묶어 넘긴 채 얌전히 서책을 들여다보고 있는 소년. 제법 준수하게 생겼다.
하나 말라비틀어진 몸과 며칠은 굶은 듯한 안색. 바람 불면 땅위에 널린 낙엽들보다 먼저 날아갈 것만 같은 모습이다.
“하운천! 내가 말하고 있는 거 안 보여? 그딴 책은 좀 조용한 곳에 가서 보란 말이다.”
소년이 외쳤지만 하운천은 귀라도 막힌 듯 여전히 책만을 내려다보고 있다.
소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 이……. 하운천, 이 자식아!”
목청껏 지른 고함에 그가 드디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예? 무슨 일이시오?”
“무, 무슨 일? 이 자식이 진짜!”
열이 머리끝까지 뻗친 소년이 하운천에게 냅다 달려들었다. 그가 주먹을 불끈 쥐며 팔을 뻗었다.
파악!
경쾌한 타격음이 아닌 둔탁한 소리.
어느새 하운천이 읽고 있던 책을 들어 올려 간신히 소년의 주먹을 막아 낸 것이다. 그러고는 미간을 찌푸린다.
“성스러운 학당에서 이게 무슨 짓이오!”
항상 차분한 모습을 잃지 않던 하운천이다.
그런 그의 처음 보는 분기탱천한 모습에 주먹을 휘두른 소년은 물론이고 뒤에 서 있던 아이들까지 놀라고 있었다.
“거기다 생원의 자격을 가지고 학문의 뜻을 품은 문생들이 어찌 주먹을 쓴단 말이오?!”
하운천이 책으로 허벅지를 탁 쳤다. 그 소리에 아이들이 움찔했다. 뒤이어 차분한 음성이 입에서 흘러나왔다.
“고지욕명명덕어천하자(古之欲明明德於天下者) 선치기국(先治其國) 욕치기국자(欲治其國者) 선수기신(先修其身) 선정기심(先正其心).”
그가 잠시 말을 멈추고 소년과 아이들을 한 사람 한 사람 차례대로 바라본 뒤 재차 말을 이었다.
“대학(大學)에 나오길 자신의 밝은 덕을 천하에 밝혀 보고자 하는 사람들은 먼저 자기 나라부터 잘 다스렸고, 그런 사람들은 먼저 자신의 몸가짐과 언행을 닦았고, 또 그런 사람들은 먼저 자신의 마음을 바르게 하고자 했다고 했소.”
그가 손을 올렸다. 그리고 검지를 곧게 뻗어 소년을 가리켰다.
“공자께서도 배우셨을 터인데, 아직도 마음이 바르지 아니하니 그것부터 바로잡는 게 좋겠소.”
공자라 불리는 것을 보니 소년은 꽤 지체 높은 집안의 아들이 틀림없는 듯했다. 그리고 보통 귀한 집안의 자식들은 자존심이 셌다. 지금처럼 많은 아이들 앞에서 수모를 당하고도 참아 낼 수 있는 그런 성격이 아니란 뜻이다.
소년의 두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하운천…… 너 이 자식이…….”
그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양손을 뻗어 하운천에게로 돌진했다. 몸을 붙잡아 넘어뜨리려는 심산이었다.
“뭐하는 짓이냐!”
와락!
일갈과 함께 소년의 몸이 위로 붕 떠올랐다. 무지막지한 손아귀에 뒷덜미가 잡혀버린 것이다.
소년이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에 멋스러운 수염을 기른 기골이 장대한 중년인의 모습이 들어왔다.
“유, 윤 스승님!”
“네 이놈!”
호통 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고막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에 미간에 주름이 절로 잡힌다.
중년인은 바로 국자감 서른두 명의 조교(助敎) 중 한 명인 종팔품 윤괴춘이었다. 그는 국자감의 관리하에 있는 학당 중 이곳, 안휘성 육안(六安)에 자리한 신림학당(宸臨學堂)의 학장 자리를 맡고 있었다.
국자감은 정부에서 운영하는 교육기관을 총괄하는 곳이다. 그리고 신림학당은 그중에서도 제일 뛰어난 학당이라 소문이 자자했고 그곳에 문생들도 수재들만 모여 있다.
“처벌은 추후에 하도록 하겠다. 지금은 일단 자리로 돌아가서 앉도록! 자, 너희들도 모두 자리로 돌아가거라!”
문무(文武)를 겸비한 그였다. 소문으론 무공도 익혔다고 하는데 지금 그가 목소리에 내공을 실어 소리를 지른 바, 그것은 사실인 모양이었다.
하운천은 그런 그를 존경심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자 허리를 숙여 예를 올림에 윤괴춘도 고개를 살짝 끄덕인다.
아이들이 모두 제자리에 앉자 윤괴춘도 자신의 자리로 걸어가 허리를 꿋꿋이 세우고 섰다. 태산. 그는 하늘을 향해 우뚝 솟은 태산 같은 위엄을 뽐냈다.
윤괴춘이 진중한 분위기로 수업을 시작했다.
“과거 시험에 개시라 할 수 있는 향시(鄕試)가 얼마 남지 않았다. 그리고 향시에 합격해 봤자 성시(省試)가 남아 있고 그 뒤에 전시(殿試)가 남아 있지.”
향시란 지방에서 보는 과거 시험으로 성도에서 보는 성시를 보기 위해 치르는 시험을 말한다. 전시란 성시에 합격한 이들이 보는 마지막 세 번째 시험인데 이때 황제가 친히 이들의 앞에서 석차를 매긴다.
문인들에게는 크나큰 영광이 아닐 수 없다. 거기다 황제가 평가를 하기에 눈도장만 제대로 찍는다면 그 사람의 앞길은 그야말로 탄탄대로나 다름없는 것이다.
윤괴춘은 자신이 가져온 책들을 하나씩 내보이며 말을 이었다.
“향시에는 사서(四書)의 대학, 논어, 맹자 그리고 중용에 대한 시험일 것이다. 성시에는 오경(五經) 중 시경, 서경 주역, 예기 그리고 춘추에 대해서 나올 것이며. 전시에는 사서와 오경을 모두 아울러 시험을 치게 될 것이다.”
“사서와 오경…….”
“향시부터 사서에 대해 나온다니…….”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몇몇 문생들은 머리를 쥐어뜯기 시작했다. 나머지 문생들도 고개를 끄덕이고는 있지만 불안한 기색이 역력하다.
윤괴춘이 그들을 다독였다.
“걱정 말거라. 앞으로 일 년 동안 요점만을 짚어 수업할 것이니 노력만 한다면 합격은 문제없을 것이다.”
문생들의 눈에 희망과 의지라는 불꽃이 타올랐다.
“그럼 오늘은 사서 중에서도 제일 먼저 중용에 대해…….”
윤괴춘이 말을 끊고 스스로에게 혀를 찼다.
“쯧쯧, 국자감의 조교가 되어서도 이놈의 기억력은.”
그는 고개를 두리번거리다 하운천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운천아, 규각고(閨閣庫)에 가서 중용을 가지고 오너라.”
“예, 스승님.”
하운천이 일어서자 문생들의 눈길이 집중됐다. 그중에서도 한 명은 악심 가득한 눈초리다.
후에 분명히 다시 시비를 걸어올 터인데…….
문을 열고 나가면서 하운천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국자감의 총장을 맡고 있는 종사품 제주(祭州) 한관지의 둘째아들. 그런 사내, 한수광과 시비를 틀어 버렸다.
두려워서 그런 것이 아니다. 자신은 지금 촌음의 시간도 허투루 소비해서는 안 된다.
그의 목표. 황제의 측근 중에서도 제일 뛰어난 문인들만 들어갈 수 있다는 한림원의 학사가 되기 위해서는 말이다.
상념에 잠긴 채 걸어간 터라 어느덧 하운천은 규각고에 도착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