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천하제일귀 1권(2화)
1장 생원(生員) 하운천(2)
탁.
문을 열자 규각고를 가득 메운, 질서 정연하게 세워진 서가들이 눈에 들어왔다. 물론 빈 곳 없이 전부 서책들로 빽빽하게 채워져 있다.
“중용, 중용, 중용…….”
하운천이 찬찬히 책들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수천 여 가지의 책들이 모여 있는 곳. 그런 책들과 함께 그의 모습이 한데 어우러진다. 누가 봐도 그는 문인이 되고자 태어난 운명인 듯 보였다.
“중용, 중용…… 아!”
그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누런빛을 띤 꽤 낡은 서책에 떡하니 중용(中庸)이라고 써져 있다.
하운천이 손을 뻗어 책을 꺼냈다.
탁, 펄럭.
꽤 빽빽하게 꽂혀 있던 책이었기에 옆에 있던 다른 서책까지 따라 꺼내졌고 결국 바닥으로 떨어져 버렸다.
“이런, 책이…….”
하운천이 왼손에 중용을 들고 오른손으로 떨어진 책을 집어 들었다. 규각고에 모여 있는 보통의 서책들과는 다르게 거무튀튀한, 처음 보는 재질의 것이었다.
“이런 재질로 만들어진 책은 처음 보는구나.”
그는 흥미로운 듯 책자들을 한 장 한 장 넘겨보았다. 무척이나 부드러워 넘기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것은 온통 요상한 그림들과 문장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는데, 무언가 중요한 내용을 함축하고 있는 듯했다.
“수(水), 토(土), 목(木), 화(火), 금(金)의 순으로 순회하고 순회하니 이것이 쌓이고 쌓여 정이 되고 원정에 이르러 화후에 닿으면 하늘로 승천할 준비를 하니 이를 위하여 정성을 다한다. 천마…… 대력신공 일층(一層)?”
하운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행의 순으로 순회한다? 무엇이? 그리고 그것이 쌓여 화후에 닿으면 하늘로 승천을 해?
도통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안 갔다. 무슨 대력신공 운운하는 것을 보니 무술이나 무공의 한 종류인 듯한데. 이런 게 왜 규각고에 있단 말인가? 거기다.
“도대체 무슨 의미야?”
애매모호한 개념을 내포하고 있다.
하운천은 인상을 썼다. 그는 무엇이든지 궁금한 것이 생기면 절대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좋다면 좋은 점이겠지만…….
“무엇이 쌓여 원정에 이른단 말인가?”
그가 아예 바닥에 자리를 깔고 앉았다. 중용은 바닥에 내려놓은 지 오래다.
그랬다. 궁금한 것이 생기면 하던 일들을 모두 내팽개치면서까지 날을 새서라도 꼭 알아내야만 한다. 이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어디서 순회를 하여 어디로 쌓인다는 것인가?”
하운천이 고민의 고민을 거듭하며 혼잣말하듯 질문을 던졌다. 스스로에게.
그런데 어디서부턴가 대답이 들려온다.
[네놈 뱃속에서 순회를 하여 단전에 쌓이는 것이지.]
“단전이라, 그렇군. 응? 누, 누구시오!”
하운천이 깜짝 놀라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분명 자신 혼자 규각고에 들어왔건만, 어느 샌가 자신의 앞에 윤기 있는 흑발과 핏빛보다 짙은 홍안을 가진 중년인이 서 있었다.
[내 목소리가……들리는가?]
웅후하면서도 스산한 음성에 하운천이 침을 꿀꺽 삼켰다.
“그, 그렇소.”
[내 모습이……보이는가?]
“그 또한 그렇소.”
[……네놈은 도대체 무얼 하는 놈이냐?]
하운천은 당황했다. 자신이 해야 할 질문을 빼앗긴 거나 마찬가지인 상황.
[네 녀석은 어떻게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있고 내 모습을 볼 수 있단 말이냐?]
“사람이 사람을 듣고 사람이 사람을 보는데 뭐가 문제란 말이요?”
[그러니까 문제다.]
“……?”
중년인의 신형이 허공에서 스윽 움직여 하운천의 코앞까지 다다랐다.
[사람이 사람 아닌 것을 보는데, 이게 문제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이냐?]
이것은 또 무슨 얼토당토않은 얘긴가?
일순간에 이해 안 되는 일들이 한꺼번에 일어나자 하운천은 속이 터져 죽을 지경이었다.
중년인은 그런 그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지금 상황이 이해가 안 되지?]
“그렇소.”
그가 대답하자 중년인이 팔을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그의 머리 위에 올려놓는다. 그러나…….
“헉!”
팔이 그의 머리를 뚫고 지나갔다! 마치 아무것도 없는 곳에 팔을 내두른 것처럼.
중년인이 음산한 미소를 짓자 하운천이 기겁을 했다.
“끄아아아악!”
[크하하하!]
그 모습에 중년인은 재미있다는 듯 웃어 재꼈다.
쿵.
하운천이 뒷걸음질을 치다 규각고의 문에 부딪쳤다. 그는 황급히 몸을 돌려 문을 열고 밖으로 뛰쳐나가려 했다. 하지만…….
[어딜 도망가려 하느냐?]
중년인의 질문과 함께 하운천의 몸이 허공으로 떠오르더니 중년인의 앞으로 날아와 쿵하고 떨어진다.
“악!”
하운천이 엉덩이를 문지르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곳엔 시뻘건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중년인의 얼굴이.
“뜨아아악! 도, 도대체 원하는 게 무, 무엇이오!”
[원하는 것? 그런 것 없다.]
“그렇다면…….”
하운천이 앉은 채로 천천히 뒷걸음질을 쳤다. 그만 자신을 보내달라는 무언의 의사 표현.
[그런데 궁금한 것은 있지.]
좌절. 하운천은 온몸에 힘이 쭉 빠지는 것을 느꼈다.
중년인이 몸을 굽히고 앉아 하운천과 눈높이를 맞췄다.
[네놈은 도사냐?]
“아니오.”
[그럼 네놈은 무당이냐?]
하운천이 그도 아니라며 고개를 휙휙 저었다.
[그럼 서, 설마!]
순간 중년인의 얼굴에 경악성이 물든다.
[네놈이 원정, 원기, 원신의 혼원일체를 이루었단 말이냐!]
하운천이 이제는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쳤다.
“그건 또 무슨 소리요. 나는 그저 이 학당의 한낱 문생이란 말입니다.”
중년인이 멋쩍은 듯 웃는다.
[하, 하긴. 그 나이에 혼원일체는 개뿔. 그럼 필시 네놈은 무당이나 도사 나부랭이들의 핏줄이겠군.]
“난 평범하오!”
[그럼 도대체 네놈은 뭐냔 말이다!]
중년인의 외침을 끝으로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서로 시선만 마주친 채로.
잠시 뒤 하운천이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안 되는데…… 내가 지금 귀신을 보고 있다 이 말이오?”
[귀신? 날 그런 잡귀들과 비교하지 말거라.]
자존심 상한 듯, 중년인의 싸늘한 눈빛에 하운천이 움찔했다.
“그, 그럼 대인은 도대체 뭐란…… 아니 누구시란 말이오?”
[본좌?]
중년인이 한쪽 눈을 게슴츠레하게 뜬다. 자신의 존재를 말해 주면 필시 이놈은 놀라 까무러칠 테지.
[본좌는 천마신교의 전전 대 교주였던 삼대 천마(三代天魔) 단귀륭이다.]
단귀륭은 ‘자, 마음껏 놀라라.’ 하는 표정이다. 하지만 기대는 어긋나고 말았다.
“그렇소? 그런데 어쩌다 이리 되셨소? 소생은 귀신의 대해 잘은 모르나 품은 원한이 깊어 넋을 달래지 못한 혼이 후에 귀신이 된다고 알고 있는데…….”
놀라는 기색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단귀륭은 고개를 획하고 돌렸다.
‘쳇’이라는 작은 소리가 들려온 건 착각이었을까. 하운천은 당황하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뭘 해야 되는지 책에는 나와 있지 않았다. 그가 십오 년 한평생 해 온 것은 책을 파고든 게 전부였기에.
옆에선 단귀륭도 상념에 잠겨 있었다.
‘제기랄, 백여 성상 만에 드디어 나타났나 했더니만 이런 애송이라니……. 하지만 더 이상은 시간이 없다. 태황(太皇), 그 늙은이가 말한 시간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을 텐데…….’
그가 곁눈질로 하운천을 힐끔 쳐다봤다. 뒤이어 따라오는 암울함. 얼굴만 제법 준수하게 생겼다 뿐이지 이건 그냥 걸어 다니는 뼈다귀다. 검은커녕 붓이나 제대로 쥐려는지.
이도저도 할 수 없다면…….
‘하늘에 맡기는 수밖에,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이지 않는가.’
단귀륭이 하운천을 불러 세웠다.
[애송아.]
“예.”
이제는 적응이 되었는지 제법 침착한 어조. 그러나 단귀륭은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이다.
[네 녀석은 지금 이 순간을 앞으로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본좌가 이제부터 친히 네놈에게 무공을 전수해 줄 것이니 이 얼마나 크나큰 기연이 아니겠느냐?]
삼대 천마의 무공! 역대 교주 중에서도 단연 발군의 무력을 발휘하던 단귀륭이었다. 그 당시 강호의 피바람을 몰고 올지도 모른다는, 그만큼 모든 이들이 두려워하던 존재.
그러나 어느 날인가 그는 정파 무림의 지존이자 태양이었던 태황 남궁천웅과 함께 홀연히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세간에선 그 두 명의 절대자가 서로 생사결을 펼쳐 양패구상을 했다고 추측, 그 일을 정마이존살혼전. 줄여서 정마혼전(政魔魂戰)이라 불렀다.
그런 절대자의 무공을 친히 전수받을 수 있다는 건 정말 기연 중에 기연이 아닐 수 없다. 그가 비록 산 자는 아닐지라도.
단귀륭은 하운천이 감격에 북받쳐 당장에라도 구배지례를 올리며 눈물을 펑펑 쏟아 낼 줄 알았다. 아니, 적어도 눈알 튀어나올 만큼의 반응 정도는.
“괜찮습니다.”
[……뭐?]
“저는 이미 학문에 뜻을 품은 몸. 단 선생과는 인연이 아닌 듯합니다. 부디 저보다 더 좋은 제자를 만나 뵙길 마음으로나마 빌겠습니다.”
하운천은 정중하게, 아주 정중하게 허리를 굽혀 예를 올린 뒤 중용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차분하게 규각고를 빠져나왔다. 얼빠진 표정의 단귀륭을 뒤로 한 채.
“흐아!”
따스한 햇살에 절로 기지개가 펴진다. 그러다 순간 하운천은 피식 웃고 말았다.
‘도대체 방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훗, 얼마나 피곤했으면…….’
하루 정도는 학문이고 뭐고 충분히 푹 쉬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 윤 스승님이 기다리시겠구나!”
그는 자신이 처음 왔던 방향으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아무리 급하더라도 성스러운 학당에선 뛰어서는 안 된다.
하운천이 모습을 감추고 잠시 뒤, 그가 있던 자리에 한차례 바람이 불자 어느샌가 그곳에 단귀륭이 서 있다.
[괜찮다고?]
그의 입가가 씰룩거렸다.
[본좌가 안 괜찮다, 애송이놈아.]
2장 청성교(1)
“제길, 제길, 제길.”
한수광이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 댄다. 얼굴은 붉으락푸르락 한 것이 꼭 성난 망아지 같았다.
그의 옆에선 두 명의 문생들이 킥킥 웃고 있었다. 팅팅 부은 한수광의 두 종아리를 보면서.
“뭐가 웃겨 이놈들아!”
“그럼 웃기지, 큭큭. 천하의 한수광 도련님께서 회초리질을 당하다니.”
“그러게 말이다, 풉.”
“제길, 어떻게 윤 스승님께서 나한테 이러실 수가 있지?”
자신의 아버지는 국자감의 총장이다. 윤괴춘은 국자감의 조교. 그리고 자신은 총장의 아들.
자신의 머리로는 윤괴춘의 행동이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한수광이 인상을 팍 썼다.
“이게 다 하운천 그 자식 때문이야.”
“그놈, 가만히 놔둘 거야?”
“우리가 너 대신 골탕 한 번 먹여 줄까? 그 녀석 종아리도 매질 좀 맞도록 말이야.”
“음…….”
한수광의 미간이 좁혀졌다. 고민하는 모습.
“아냐, 그 정도로는 부족해. 이번엔 아예 확실하게 본때를 보여 줘야겠어.”
“좋은 생각이라도 있으신가, 한 공자?”
“그렇게 부르지 말랬잖아! 공자 소리만 들으면 하운천 그자식의 재수 없는 얼굴이 생각난다고.”
“크크, 알았다구.”
“아무튼 그 녀석도 몽둥이질 좀 당해 봐야 정신을 차리겠지. 그것도…….”
한수광은 얼굴과 어울리지 않게 악독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 자식이 좋아하는 계집, 선우초설이 보는 앞에서라면 말이야. 후후후.”
“너도 가끔은 잔인해진단 말이야.”
“무슨 소리야? 그냥 버릇만 고쳐 주려는 것뿐이다. 버릇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