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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제일귀 1권(3화)
2장 청성교(2)


선우세가.
정파 무림의 기둥이라 불리는 오파일방과 육대세가 중 하나이자, 안휘성의 남궁세가와 함께 패자로 군림하고 있다. 아니, 패자라기보다는 군자(君子)라고 해야 할까.
그들은 다른 육대세가와는 달리 무공이 강하지 않다. 그런 그들이 정파의 중심에 우뚝 서 있을 수 있게 된 것은 의술과 선술 때문.
의술(醫術)은 다친 사람을 치료하는 것. 그렇다면 선술(仙術)은?
흔히들 선술이라 함은 도사들의 도술과 비슷하게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선우세가의 가주, 선황(仙皇) 선우정후는 ‘선술은 인술이요, 사람의 마음을 치료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선술로 주화입마나 심마에 빠진 무인들은 물론이거니와 큰 충격으로 실어증, 혹은 마음의 병을 얻은 일반 서민들까지 치유해 왔다. 물론 선우세가의 모든 가솔들도 환자들의 신분의 상관없이 의술과 선술을 행해 왔고 그런 그들의 높은 인망과 덕망 덕에 선우세가는 오대세가와 같은 반열에 올라 지금의 육대세가로 불리게 된 것이다.
무력. 무력이 약하다 했으나 그것은 다른 세가들의 기준에서 일 뿐, 한낱 침을 날려 상대방을 제압하는 그들의 격침공과 섭선만으로 검과 도를 제압하는 선법(扇法)은 천하의 명성이 자자하다.
그런 선우세가의 연화선녀(蓮花仙女), 선황의 둘째 딸인 선우초설은 백주 대낮에 으슥한 골목길을 걷고 있었다.
별호에 걸맞게 그 모습은 단아하고 수려했다. 걸음걸이도 단정하면서 나긋나긋했고 성정 또한 맑고 순수해 보였다.
마치 밤하늘 외롭게 빛나는 달처럼, 그녀는 어둑어둑한 골목길을 홀로 가로질렀다.
한참을 걸었을까. 어느 순간부턴가 그녀의 뒤를 따르는 검은 그림자가 있었다. 은밀하게.
은밀했지만 빨랐다. 그림자는 조금씩 그녀와 거리를 좁혀 가고 있었다.
선우초설도 그것을 눈치챘는지 가끔씩 곁눈질을 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하지만 서로간의 거리는 가까워져만 갔다.
그림자는 금세 선우초설의 그림자를 에워쌌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그녀의 몸을 뒤덮었다.
그 순간, 선우초설이 잽싸게 몸을 돌렸다.
“어흥!”
“흐엇!”
그녀의 앞에는 ‘어라?’ 하는 표정과 함께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는 하운천이 있었고 선우초설은 혀를 살짝 내밀며 그를 놀렸다.
“바보, 내가 또 속을 줄 알았어요? 하 공자의 발소리가 쿵쾅쿵쾅 골목길 전체에 울려 퍼지던데.”
“하하, 그렇소?”
둘은 마주보며 웃었다.
가끔, 아주 가끔이지만 하운천은 이렇게 미소를 지었다. 선우초설과 함께 있을 때, 그리고 고아였던 그를 어려서부터 길러 준 유모와 함께 있을 때.
“오늘은 학당에 안 갔군요? 천하의 하 공자가 웬일이지?”
선우초설은 짐짓 놀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소생도 가끔은 피곤할 때가 있소.”
“그러니까 밥을 좀 많이 먹고 살을 좀 찌우란 말이에요! 선우세가의 제일가는…… 아니, 이제 곧 그렇게 될 의원의 말을 안 들어서야 되겠어요?”
“하하, 많이 먹어도 안 찌는 것을 어떻게 하오? 체질 탓인 것을.”
하운천이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선우초설이 그의 뒤를 따르며 입술을 삐쭉 내민다.
“내가 처방해 준 약은 입에도 안 댔잖아요?”
“너무 쓰오.”
“그럼 약이 쓰지, 달아요?!”
“선우세가의 제일가는 의원이 될 소저께서 한 번 단맛이 나는 약을 만들어 보는 건 어떻소?”
“날 놀리는 건가요?”
선우초설이 그를 째려봤다. 그러고는 몸을 획하고 돌려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간다.
“흥, 난 마음씨 좋고 내 말도 잘 들어주시는 유모한테나 가 봐야겠다.”
“하하하, 유모가 이 말을 들으면 좋아하겠군.”
하운천이 여전히 보기 좋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뒤따랐다. 그리고 그의 뒤로 또 한 사람이 따라붙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귀신.
[입이 귀에 걸렸구나, 애송아.]
하운천의 미소가 순식간에 걷혔다.
“하아, 또 나타났소. 또? 도대체 언제까지 쫓아다닐 셈이요?”
[언제까지? 네놈이 죽을 때까지다, 크하하하.]
머리가 아픈 듯, 하운천은 뒷골을 매만지며 멈췄던 걸음을 다시금 나섰다. 문득 품속으로 책 한 권의 무게가 느껴진다. 지난번 실수로 만져 버린, 단귀륭과의 만남을 주선(?)해 준 책이다.
하운천이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버려도 버려도, 심지어 강물에 던져 버리기까지 했는데도 다음 날 아침이 되면 항상 내 품속에 있다.’
그렇다고 찢어 버리자니.
‘책이 찢겨 나가기 전에 네 몸부터 갈기갈기 찢어 주마.’라는 단귀륭의 경고에 그럴 엄두조차 못 냈다. 물론 엄두를 낸다 한들, 찢어질지조차 의문이다. 질기긴 얼마나 질긴지.
“도대체 왜 나요? 난 무공의 무자도 모르고, 거기다 체질 탓인지 남들보다 힘도 약한데.”
이번엔 단귀륭이 한숨을 내쉰다.
[하아, 나도 그게 궁금하다. 왜 하필 네놈 같이 약해 빠진 서생 놈이…….]
“그럼 다른 사람을 찾아 가면 되는 것이 아니오?”
[그게 안 되니까 이러는 거 아니냐! 이놈아! 그러니까 그만 포기하고 무공을 배우래도? 본좌의 무공 하나면 천하를 호령할 수 있다. 저런 계집보다 훨씬 뛰어난 계집 여럿을 품에 놓고 마음껏 주무를 수 있단 말이지.]
하운천이 그를 무시했다. 물론 한마디 쏘아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고.
“무공을 배우면 단 선생처럼 자칫 심성이 악(惡)해질까 두렵군. 사양하겠소.”
[이익! 이놈이…… 좋다,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 보자.]
단귀륭은 씩씩 입김을 뿜어 대며 선우초설의 옆으로 바짝 다가섰다.
‘뭘 하려는 거지?’
하운천은 의심 반 걱정 반 섞인 눈초리로 그를 바라봤다. 설마 뭘 할 수 있겠어라는 마음으로.
하운천과 다르게 단귀륭의 모습을 볼 수 없어서인지, 그녀는 묵묵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때 단귀륭은 사악한 웃음을 지으며 주먹을 말아 쥐었다. 방향은 선우초설을 향해.
“서, 설마!”
아무리 그래도!
하운천은 손을 내뻗으며 몸을 날렸다. 그러나 단귀륭의 주먹이 훨씬 더 빨랐다.
촤아악!
공기를 가르는 무지막지한 파공성과 함께 어마어마한 돌풍이 선우초설에게로 쏘아졌다. 그것을 뒤따르는 단귀륭의 일권(一拳)!
“안 돼!”
하운천의 다급한 외침에 거짓말처럼 단귀륭의 주먹이 멈췄다. 그러나 바람은 여전했다.
“꺄아악!”
그리고 드러나는 선우초설의 새하얀 속살.
돌풍은 그녀의 옷을 반쯤 벗겨 놓았다. 그 때문에 매끈한 다리가 허벅지까지 모습을 드러냈다. 윗옷 또한 아슬아슬하게 어깨춤에 걸쳐져, 앳되지만 선명한 가슴 선을 내보였다.
하운천은 황급히 그녀에게 뛰어갔다.
“소, 소저! 괜찮…….”
“꺄악! 뭘 보는 거예요!”
“아, 미, 미안하오!”
그는 허둥지둥하다 몸을 돌렸다. 얼굴은 이미 붉게 달아올라 있다.
그의 앞에선 단귀륭이 허리를 젖힌 채 미친 듯이 웃어 댔다.
[크하하하, 어떠냐? 무공만 배우면 여자 옷 벗기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다, 큭큭!]
어때? 꽤 쓸모 있지? 하는 표정.
“…….”
하운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눈은 노기로 가득 차 있었다.
그 눈빛에 단귀륭은 내심 뜨끔하며 턱을 긁적였다.
“……장난이다, 장난. 네놈도 알지 않느냐? 내 몸은 사람을 만질 수 없다. 그 말은 격할 수도, 죽일 수도 없다는 뜻과 같다. 단지 귀기(鬼氣)를 일으켜 바람을 일으키거나 사물을 끌어당기거나 하는 수준밖에 안 되지.”
그 말에 하운천의 분노가 약간은 가라앉는 듯했지만 눈빛은 여전히 싸늘했다.
‘조금 심했나?’
단귀륭의 신형이 흐릿해진다 싶더니 이내 모습을 감췄다. 자기가 불리할 땐 이렇게 사라지곤 했다.
하운천은 눈을 감으며 속으로 화를 달랬다.
사악, 사악.
뒤에서는 선우초설의 옷매를 바로잡는 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다 되었소?”
그가 물어보고 나서 잠시 뒤에야 그녀가 대답했다.
“휴, 이제 돌아봐도 돼요!”
“까, 깜짝 놀랐겠구려.”
“당연하죠! 골목길에서 갑자기 바람이 부는데. 그것보다…….”
그녀가 의심 가득한 눈빛으로 하운천을 응시했다. 하운천은 처음엔 왜 그러냐는 듯 그녀를 마주 바라보았다. 그러다 시뻘겋게 달아오르는 얼굴.
“어, 어? 왜 빨개지는 거예요? 수상한데!”
“무, 무슨 소릴…….”
“엉큼해!”
“맹세코 소생은 보지 못했소!”
그의 진지한 표정에 선우초설은 배시시 웃고 말았다.
“푸웁, 장난도 못 쳐요? 빨리 가요, 유모가 기다리겠어요.”
그녀가 하운천의 소맷자락을 잡아당겼다.
장난? 장난이 장난을 부르는구나. 선우초설에게 끌려가면서 하운천은 속으로 생각했다.
한편, 저 멀리서 그 둘을 바라보는 다섯 쌍의 눈이 있었다. 하나같이 검은 복면을 해서 얼굴을 볼 수 없게끔 하고 손에는 각자 돌같이 단단한 몽둥이를 들고 있다.
그들은 하운천과 선우초설을 지켜보다 모습을 감췄다.

“유모! 저 왔어요!”
허리가 조금 구부러진 노파가 고개를 들었다. 얼굴에 연륜이 느껴지는 주름 가득한 푸근한 인상.
“초설 소저 왔구먼.”
“헤헤, 예. 잘 지내셨죠?”
선우초설은 다소 낡은 초가에 도착하자마자 유모의 옆에 붙어 앉아 도란도란 얘기를 나눴다.
그녀를 바라보며 하운천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며칠마다 한 번씩 찾아와 유모를 돌봐 주곤 했다. 아픈 곳은 없는지 그리고 끼니는 거르지 않는지 말이다. 물론 자신도 예외는 아니고.
그것이 그녀의 일상이었다. 이 마을 저 마을, 이 집 저 집 돌아다니면서 서민들을 돌봐줬다.
그녀 나이 아직 열다섯. 이제 막 의술을 배우고 있는 단계지만 그녀는 그것으로나마 다른 사람들을 돕고자 했다.
그 정성이 기특해 안휘성은 그녀를 선녀라 부른다.
“둘 다 식사 안 했지?”
유모가 묻자 선우초설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오늘은 유모가 주는 밥 먹으려고 아침도 안 먹었어요.”
유모가 대청바닥을 탁탁 쳤다.
“그럼 여기 앉아서 기다리고 있어 봐.”
그녀가 부엌으로 들어가고, 선우초설은 하운천과 함께 대청에 앉아 맑은 하늘을 바라봤다.
“날씨 참 좋네요. 바람도 선선하고.”
“그러게 말이오. 오늘 같은 날은 청성교(淸省橋)에서 산책하면 참 좋을 것 같소.”
청성교.
안휘성 육안에 있는 청성강이 가로지른 대지를 이어 주는 다리다. 근처의 매화나무와 단풍나무 그리고 푸른 풀밭이 진풍경을 이뤄 연인 또는 친우들과 자주 산책을 나가는 곳.
“흐음, 청성교는 너무 많이 가 봐서 질리는데.”
선우초설이 슬쩍 하운천을 쳐다봤다. 그가 헛기침을 했다.
“크흠, 그렇소? 나도 청성교는 좀…….”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내뱉으며 당황하는 모습에 선우초설은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농담이에요, 농담! 하 공자는 너무 쉽게 당한다니깐. 밥 먹고 유모랑 함께 청성교에 갈까요?”
“……됐소.”
“어? 설마 삐친 거예요?
“…….”
“에이, 하 공자는 그럼 집에서 쉬어요. 전 밥 먹고 유모랑 산책이나 해야겠네요.”
선우초설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하며 머리를 쓸어내렸다. 아무 말도 없던 하운천은 그녀를 힐끔 쳐다보며 말했다.
“흠흠, 그래도 여자 두 명이서는 조금 위험할 것 같으니 내가 같이 가야겠군.”
“풉, 푸하하하! 하 공자, 그냥 가고 싶다고 그래요!”
“흠흠.”
연신 헛기침을 해 대며 시선을 피하는 하운천, 그런 그를 쳐다보며 환한 웃음을 짓는 선우초설. 누가 봐도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잠시 뒤, 둘 사이에 유모가 끼어들었다.
“자, 얼른 들어.”
그녀는 대청 중앙에 푸짐한 식탁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선우초설은 물 만난 물고기처럼 밥상 앞으로 다가가 앉았다.
“우와, 역시 유모예요.”
유모를 바라보며 싱긋 웃는 그녀다. 그러고는 수저를 집어 들며 말했다.
“유모, 식사 다 끝나면 저희랑 같이 청성교에 가요. 날씨도 좋은데 산책해요, 산책.”
“아냐, 아냐.”
유모가 고개를 내저었다.
“난 지금 시내에 가 봐야 혀. 하 도련님이랑 같이 갔다 와.”
그렇게 말하면서 유모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선우초설이 못 보게끔 하고 한쪽 눈을 깜빡하며 눈짓을 보냈다.
‘유, 유모?’
하운천은 내심 당황했다.
눈치 빠른 유모가 일부러 자리를 피해 주는 것.
하운천은 피식 웃으며 유모에게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난 먼저 나가 볼게. 하 도련님도 잘 다녀오시구요.”
“알겠어, 유모.”
“다녀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