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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제일귀 1권(4화)
2장 청성교(3)
유모가 집을 나서고, 선우초설은 그제야 밥상에 똑바로 앉아 허겁지겁 밥을 먹기 시작했다. 단아한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게 게걸스러웠다.
하나, 무척 정감이 가는 모습이어서 하운천은 무의식적으로 웃어 버렸다. 그러면서 자신도 수저를 집어든다.
그렇게 둘이서 한참 식사를 하고 있을 때, 문뜩 하운천의 눈에 단귀륭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는 한참 동안이나 집의 정문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운천은 그가 유모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왜 저러지?’
그러고 보니 요 며칠 사이 단귀륭은 유모가 보이기만 하면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곤 했다. 처음엔 그저 그러려니 했으나, 그런 행동이 몇 번씩이나 반복되자 궁금해지는 건 사실이다.
“선우 소저, 소생 옷 좀 갈아입고 나오겠소.”
“벌써 다 드셨어요? 밥은 많이 드시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하하, 그럼 실례하겠소.”
하운천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향했다. 단귀륭에게 따라 들어오라고 눈짓을 보내면서.
단귀륭은 하운천을 바라보다가 다시 한 번 고개를 돌려 정문 쪽을 쳐다보고는 이내 그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무슨 일이냐?]
“왜 요 며칠간 유모를 이상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겁니까? 설마 소생이 거절하니까 유모에게 무공을 가르치려고 하는 것이오?”
[그건 또 무슨 황당한 소리냐?]
“그럼 단 선생은 왜 아까 유모를 쳐다보고 있었소?”
단귀륭은 선뜻 대답을 못했다.
지금 이놈에게 말해도 되는 건가? 이놈을 어릴 때부터 길러 왔다고 들었는데, 이 녀석이 모르는 것을 보면 일부러 말을 안 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몇 번을 머뭇거리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네 녀석은 저 노파의 과거에 대해 알고 있느냐?]
“…….”
[역시…….]
하운천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자신은 유모에 대해 알고 있는 게 별로 없었다.
어릴 때부터 그녀는 자신의 곁에 있었다. 지금처럼 자신을 도련님으로 불렀고 자신도 그녀를 유모라 불렀다. 부모님에 대해서 물어볼 때면 항상 그분들은 좋은 분이셨다며 대답하곤 했다. 자신은 오래전부터 그분들을 모셨고 어떠한 사고로 인해 그분들이 돌아가시자 홀로 자신을 키워 왔다고. 사고에 대해선 자세히 말해 주지 않아, 하운천도 알고 있는 것은 없었다.
그때, 한참 상념에 잠겨 있는 그의 귓가로 충격적인 말이 들려왔다.
[저 노파는 무공을 익히고 있더군.]
“무, 무슨 소리요!”
하운천은 깜짝 놀랐다. 너무 놀라 하마터면 단귀륭이 귀신이란 것도 까먹고 그의 옷자락을 움켜쥘 뻔했다.
“유모가 무공이라니?”
[그것도 꽤 높은 수준의…….]
단귀륭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하려 할 때 하운천이 또 속을 뻔했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의 말을 끊었다.
“하하, 단 선생의 장난엔 이제 안 속겠소.”
[뭐?]
“유모는 내가 어릴 때부터 봐 왔소. 무공은커녕 무거운 짐도 혼자 못 드는 게 유모요. 장작도 못 패지. 물론 나도 힘이 없어서 결국 항상 사다 쓰긴 하오만…….”
[무슨 소릴 하는 거냐? 분명…….]
“그만하시오. 선우 소저도 그렇고 단 선생도 그렇고, 날 너무 바보 취급 하는 것 같소.”
하운천은 더 들을 필요도 없다는 것처럼 말했다. 그는 며칠 사이 더러워진 의복을 벗어 놓고 전보다 훨씬 단정한 차림의 의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러고는 단귀륭을 바라봤다. 그의 표정에는 이젠 절대 안 속겠다는 단호한 결의가 새겨져 있었다.
“하 공자, 아직도 멀었어요?”
밖에서 들려오는 선우초설의 외침 소리. 어느 새 밥을 전부 먹어 치우고 하운천이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그녀였다.
잠시 뒤, 하운천이 밖으로 나왔다.
“소생 준비 다 끝마쳤나이다.”
“풉, 그건 또 무슨 말투예요? 아무튼 빨리 가요!”
“하하, 알겠소.”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둘은 청성교로 떠났다.
집에는 단귀륭만이 남아 점점 멀어져가는 하운천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긴, 저 노파가 무공을 안다고 해서 그게 무슨 상관이야? 그것보다, 도대체 저 자식은 왜 본좌의 무공을 전수받길 거부하는 거야!]
신경질이나 괜스레 대문짝을 후려친다.
휙.
그러나 부서질 리가 만무했다.
[망할.]
씁쓸한 한마디를 툭 뱉어 놓고 촛불 꺼지듯, 그가 모습을 감췄다.
***
노을 진 하늘. 그 위에 수놓아진 새하얀, 아니 이제는 주홍 빛깔을 뽐내는 뭉게구름들. 그 밑엔 살랑살랑 나뭇가지를 흔들며 굳건하게 대지를 지키고 있는 노목(老木)들과 잔잔한 호수. 그리고 호수 앞, 집채만 한 바위 위에 걸터앉아 낚싯대를 붙잡고 있는 초로의 노인.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이 완벽한 조화였다.
노인은 낡은 죽립과 너덜너덜해진 무명옷을 입고 있었지만 그것이 오히려 초연한 분위기를 풍겼다.
퐁당.
잔잔하던 호수에 자그마한 물결이 일었다. 그 순간, 낚싯줄이 팽팽해졌다.
“옳지!”
노인이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확연히 느껴지는 입질. 제법 큰 놈 같았다.
노인은 낚싯대의 힘을 주어 당기다 말다를 반복했다. 한차례 실랑이 끝에 노인의 팔에 굵은 핏대가 섰다.
촤아악!
보통 손 크기의 두 배는 될 법한 물고기가 햇빛에 반짝이는 물보라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다.
노인이 씨익 웃으며 낚싯대를 살짝 튕기자 물고기가 허공에서 팔딱거리며 그에게로 날아왔다. 그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파바바밧! 툭.
물고기가 허공에서 찰나 동안 멈칫했다가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순식간에 머리와 몸통, 뼈와 살로 반듯하게 분리됐다.
“이걸 그냥 먹어, 구워 먹어?”
깊은 고민에 빠진 노인.
그렇게 한참 동안 쭈그려 앉아 가슴팍을 긁어 대던 그가 갑자기 질문을 던졌다.
“자네는 구워 먹는 걸 좋아하나? 아니면 생으로?”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노인은 대답을 기다리는 표정이다.
팔랑.
너풀거리는 나뭇잎과 함께 한 신형이 나무 위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저는 괜찮습니다, 장로님.”
“클클, 그래? 하긴, 이건 혼자 먹기에도 적은 양이긴 해.”
노인은 다행이라며 살코기를 집어 들어 단숨에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그러면서 새하얀 가면을 뒤집어 쓴 사내를 바라봤다.
“쩝쩝, 한데 무슨 일로 맹주의 직속 호위대가 움직였지?”
맹주.
현 무림의 맹주라고 불리는 사람은 정파 무림의 연합, 청령맹의 맹주 검황(劍皇) 모용단휘뿐이었다.
가면의 사내는 그 모용단휘의 직속 호위대 중에서도 수좌를 맡고 있는 사내였다.
“특급 제거 대상, 흑(黑).”
사내의 말에 노인의 인상이 대변에 바뀌었다.
특급. 그중 청, 홍, 백, 흑 순으로 높아지는 수위 중에서도 최상.
그런 인물은 청령맹이 세워진 후, 삼백 년 동안 몇 명 없었다. 그중에서 제일 유명한 인물을 꼽아 보자면 마교의 교주 정도.
“그래서 자네들, 영천무하대(影天武?隊)가 나서기로 한 것인가?”
“그렇습니다. 그리고 맹주님께서 장로님을 뵙길 원하십니다.”
“가지. 도대체 어떤 인물인지 궁금해지는군.”
노인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모습을 본 사내가 허깨비 사라지듯 신형을 감추자 노인도 몸을 띄웠다.
한 걸음에 십여 장씩 쭉쭉 뻗어 나가는 노인의 허리춤엔 아홉 개의 매듭이 매어져 있었다.
개방 방주라는 표식의 매듭이.
***
“하하하.”
“호호호.”
“놀고들 있네.”
연신 웃음꽃이 끊이지 않는 하운천과 선우초설. 그리고 그 뒤에 못마땅한 표정의 단귀륭.
그들은 한 시진 전에 청성교에 도착해 그 주위를 걸어 다니며 만산홍엽을 구경하기 바빴다. 단귀륭은 제외하고.
그는 무공 배울 시간도 없는데 이딴 곳엔 뭐하러 오냐며 구시렁거렸다.
하긴, 어차피 배우려고도 안 했다.
하운천의 고집은 그가 여태껏 만나 본 사람들 중 최고봉이었다. 고집도 그런 황소고집이 없었다. 어지간하면 배우는 시늉이라도 해 줄 텐데 하운천의 대답은 확고했다.
“문인의 손은 사람을 해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랄.
절로 육두문자가 읊어지는 단귀륭이었다.
몸통에 바람구멍이라도 뚫려 봐야 생각이 바뀔는지.
‘제발 누가 저 애송이 녀석을 죽기 직전까지만 패 달라고.’
하운천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속으로 애원까지 하는 그였다. 그리고 그 기도가 하늘에 닿았음인가?
웃고 떠들며 걷다 보니 어느새 막다른길에 서 있는 하운천과 선우초설이다.
“이런, 너무 정신없이 걸었나 보오.”
“그러게요. 산책도 충분히 한 것 같은데 이만 돌아갈까요, 하 공자?”
하운천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몸을 돌려 왔던 길로 빠져나가려 할 때였다.
스윽, 스윽.
한 명씩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 길을 가로막는 다섯 명의 사내들. 검은 복면을 쓰고 적대감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것을 보니 좋은 뜻을 품고 찾아온 것은 아닌 게 확실했다.
“실례가 안 된다면 길을 좀 터 주셨으면 합니다.”
하운천의 정중한 부탁에 사내들은 콧방귀를 끼며 몽둥이를 꽉 잡아 쥐었다.
“길을 터? 미쳤구나! 이런 인적 드문 곳이 흔한 줄 아느냐? 하루 종일 네놈 뒤꽁무니를 따라다닌 걸 생각하면…….”
“그만.”
맨 앞에 있던 사내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불필요한 대화는 삼가자는 뜻.
“볼일만 처리하고 이곳에서 빨리 자리를 뜨는 거다.”
“예.”
“알겠습니다.”
사내들은 입을 굳게 닫았다. 대신 몽둥이를 곧추세워 하운천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지금 무슨 짓들이오!”
“하, 하 공자…….”
하운천이 선우초설의 앞을 가로막으며 호통을 쳤다. 그러나 사내들에겐 어린놈의 발악으로밖에 안 보였다.
“네놈의 버릇을 고쳐 주려는 것뿐이니 곱게 쳐 맞고 뻗어라!”
부우웅!
몽둥이가 공기를 가르며 날아들었다.
“위험하오!”
하운천은 곧바로 선우초설을 뒤쪽으로 밀치며 허리를 숙였다.
아슬아슬하게 그의 위를 스쳐 지나가는 사내의 일격.
“흥, 멍청한 놈!”
빠악!
그러나 사내는 곧바로 하운천의 턱 끝을 걷어찼다.
하운천은 고개가 뒤로 급격히 젖혀지며 바닥으로 쓰러지듯 처박혔다. 그의 입가에 작은 선혈이 흘러내렸다.
“하 공자!”
선우초설이 눈물을 글썽이며 다가가려 했지만 어느새 나타난 사내의 일행 중 한 명에게 가로막혀 그럴 수 없었다.
그녀는 속으로 후회했다. 세가를 나서면서 호위무사를 대동하지 않고 온 것을.
선우세가의 여인들은 무공을 배우지 않는다. 그녀들은 무공대신 의술과 선술에 더욱 깊이 파고들었다. 그녀 또한 마찬가지였다.
“죽기 직전까지만 밟아라!”
“옛!”
콰악, 콰악! 뻑, 뻐억! 퍽퍽!
“크, 큭…… 커억!”
안타까운 신음 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선우초설의 얼굴은 이미 눈물바다였다.
“고, 공자! 비켜요! 비키라구요! 그만해요, 제발!”
그녀가 자신을 제지하는 사내의 옆구리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며 외쳤다. 그러나 사내에게 팔목과 어깨가 잡혀 하운천에게는 다가갈 수 없었다.
사내는 선우초설의 몸에 상처라도 날까 봐 노심초사하며 붙잡고 있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무리 복면으로 얼굴을 가렸다지만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는 것. 그녀는 선우초설, 선황의 둘째 딸이기 때문이었다.
“크하하하!”
심각한 상황 속에서 단귀륭은 웃고 있었다. 지금 이 상황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이내 그가 하운천을 내려다봤다.
[애송아.]
“컥, 커억! 읍!”
사내들에게 온몸 여기저기를 구타당하고 있는 하운천은 대답은커녕 그의 목소리를 듣는 것조차 불가능해 보였다.
[고통스러우냐? 그래, 그렇겠지. 표정만 봐도 아파 죽겠다는 표정이군, 큭큭.]
단귀륭도 애초에 대답은 바라지 않는 듯했다.
[억울하지 않느냐? 네놈은 다른 사람들을 해하지 않는데 왜 이놈들은 네놈을 두들겨 패고 있는지 말이다. 거기다 죽도록 괴롭지?]
그의 눈에서 시뻘건 안광이 폭사했다.
[나의 혼을 받아들여라. 이놈들을 순식간에 죽여 주마. 네 녀석이 좋아하는 저 계집 앞에서 이런 볼썽사나운 모습을 보여서야 되겠느냐?]
단귀륭은 언뜻 하운천이 자신을 쳐다봤다는 느낌을 받았다. 선우초설을 언급했던 순간에.
‘먹힌다.’
단귀륭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지금 그는 하운천의 몸으로 빙의(憑依)하여 사내들을 쳐 죽일 생각이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무공 중에서 제일 강한, 그리고 가장 매력적인 무공으로 말이다.
물론 하운천은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선우초설은 기억할 것이다.
강호의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는 여인들은 강자를 좋아한다. 그렇지 않은 여인들도 있다지만, 하지만 단귀륭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무릇 무림에 몸을 담고 있다면 본능적으로 강한 사람을 따르기 마련이다. 남자든, 여자든. 그리고 그것은 무림인들뿐만이 아니다. 애초에 인간은 약한 사람보단 강한 사람에게 더 매력을 느낀다.
지금 하운천이 무공을 펼쳐 사내들을 단숨에 제압한다면, 그것은 좋으면 좋았지 해가 되진 않을 것이다.
‘원래 계집년들은 센 놈이라면 사족을 못 쓰지.’
자신의 생각이 맞다면 하운천을 향한 선우초설의 시선은 많이 바뀌게 될 것이고, 그렇게만 된다면 하운천도 그것이 무공 때문임을 깨닫고 어쩔 수 없이 자신에게 무릎을 꿇게 되겠지.
그 완벽한 계획에 단귀륭은 내심 속으로 흐뭇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