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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제일귀 1권(25화)
10장 천아문(天娥門)(3)


촤악! 촤악!
자연히 흘러가는 팔을 따라 허공을 양단시켜 버리는 하운천의 검. 그가 내력을 끌어 올리자, 검이 진동했다.
어기충검.
촤촤악!
방금과는 비교도 안 되는 속도.
그의 검이 단번에 허공을 수십 조각으로 베어 버렸다.
그가 이번엔 중단전에서부터 내공을 끌어 올렸다. 주위에 공기가 반응하자, 절로 흙먼지가 일고 이곳저곳 떨어져 있던 나뭇잎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동시에 검 위로 흑빛 기운이 둘러쳐진다.
검기(劍氣).
기운을 머금은 검이 휘둘러짐에도, 소리 하나 없다.
“하앗!”
한참 검무를 추던 하운천이 기합성을 토해 내며 전면으로 검을 그어 냈다. 그러자 터져 나오는 반월 모양의 검기!
순식간에 전방에 서 있던 열 그루의 소나무들이 허리에서부터 잘려 나가 지면으로 떨어져 내렸다.
쿠구구궁.
화산이 폭발이라도 한 듯 대지가 울렸다.
하운천은 아랑곳하지 않고 대주천한 기운을 상단전으로 끌어 올렸다.
피잉―
그의 두 눈동자가 새하얀 백광(白光)을 머금었다. 그 빛은 찰나도 안 되어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어느새 하운천의 검에는 타오르는 불처럼 너울거리는 기운이 맺혀 있었다.
기나긴 무림 역사를 통틀어 채 열 명도 못 되는 무인들에게만 허락되었던, 검강(劍|).
하운천이 자세를 잡았다.
뒤에 서 있던 단귀륭이 날이 선 음성으로 말했다.
[제마진극검(制魔眞極劍)의 다섯 초식을 전부 시전해라.]
하운천이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일초를 펼치려 할 때였다.
[잠깐.]
단귀륭이 제지하며 뒤쪽을 돌아봤다. 이에 하운천도 검을 흔들어 서려 있던 기운을 흩날린 뒤, 검을 집어넣었다.
삼 분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수풀을 헤치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다름 아닌 유화. 그리고 그를 호위하는 세 명의 무사.
하운천이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오 일까진 아직 하루가 더 남았을 텐데.”
유화가 싱긋 웃었다.
“빠르면 좋은 거 아닌가요?”
“그건 그렇군.”
“그보다, 왜 하필 이런 숲 속에서 지내고 있는 거죠? 괜히 저희 아이들만 이곳 주변 객잔을 찾아다녔네요.”
하운천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유화의 무사들이 들고 있는 양피지와 책들에 관심을 보였다.
무뚝뚝하긴.
유화는 속으로만 투덜거리며 뒤쪽으로 손을 뻗었다. 무사들이 양피지와 책들을 건넸다.
“당신이 원하는 정보들을 정리해 놨어요.”
“고맙군.”
“그보다, 당신 정말 취황을 죽일 작정이었군요.”
짐짓 놀라는 표정으로 말을 이은 그녀, 하운천은 그녀가 이제 자신에 대한 모든 것을 알아차렸음을 깨달았다.
“그럼 농담인 줄 알았나?”
“처음엔 그랬죠. 그보다, 당신은 잡혀 간 어머니의 행방을 찾고 있었던 거죠? 그래서 그중 그녀를 데리고 있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취황을 쫓던 거고.”
묻는 말에 대답도 않고 책만을 들여다보는 하운천에게 유화는 날카로운 시선을 뿌렸다.
자꾸 자신을 무시하는 것만 같아 약이 오른 것이다. 그러나 이번엔 반응을 보일 것 같았다.
“당신의 부탁대로 유경연곡에 대해 조사했어요. 유경연곡은 십오 년 전 청령맹에 의해 멸문당했더군요. 하지만 생존자가 있었어요. 견소소라는 여인. 당신의 어머니라는 사람 말이죠. 이건 아마 개방도 지금쯤 알고 있을 걸요.”
“상관없어.”
“……그렇겠죠. 아무튼 그래서 취황은 그녀를 죽이려고 했어요. 하지만 그러지 않았죠. 청령맹이 마령혈단의 제조법을 원했기 때문이에요.”
하운천이 움찔했다. 들여다보던 책자를 탁 덮은 그가 유화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마령혈단? 청령맹?”
예상대로 반응을 보이는 하운천에게 유화가 만족감이 어린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네, 마령혈단. 늙은 사람도 마령혈단을 먹으면 전성기 때의 시절로 돌아간다는, 반로의 영약 그리고 마약.”
“그걸 청령맹이 원했다고? 애초에 마령혈단 때문에 유경연곡을 멸문시킨 게 아니었나?”
“어, 어떻게 알았죠?”
“이 책에 쓰여 있더군.”
유화가 경악했다.
말 몇 마디 나눈 짧은 시간이었다. 그 찰나의 시간에 그 많은 정보를 다 읽었다니.
“책을 덮은 것이 그럼, 그걸 전부 다 읽었기 때문에 덮었단 말이에요? 촌음도 안 되는 시간에?”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그의 진지한 목소리에 유화는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그, 그렇죠. 아무튼 청령맹은 마령혈단을 원하고 있어요.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 제조법을 얻어 마령혈단이 아닌 자신들만의 새로운 영약을 만들려고 하는 거겠죠.”
하운천은 머릿속을 가득 메웠던 어둠이 서서히 걷혀 가는 것을 느꼈다.
“그럼 어머니는 지금 청령맹에?”
“그건 몰라요. 청령맹에 있을 확률이 높지만 확인은 못했어요. 아니, 어쩌면 청령맹에 없을 수도 있겠어.”
일순 유화의 얼굴에 의혹감이 서렸다.
“힘들게 알아낸 건데, 청령맹의 맹주는 지금 당신의 어머니가 죽은 걸로 알고 있어요. 누군가가 그렇게 보고를 올리고, 그녀를 빼돌린 거예요. 그렇다면 청령맹에 있을 리가 없을 텐데…….”
“후, 결국은 어차피 취황을 찾아가게 되는 거였군.”
청령맹이라는 확신만 있었다면 하운천은 망설임도 없이 그곳으로 갔을 것이다.
오황의 수좌이자 청령맹의 맹주직을 맡고 있는 검황이 있는 그곳으로, 정도무림의 수많은 고수들이 집결해 있는 그곳으로.
한숨을 내쉬는 하운천에게 유화가 다시금 말을 걸었다.
“그리고 연유란이라는 아이, 그 아이는 안휘성 육안의 뒷골목을 지배하고 있는 궐랑파(獗郞派)가 납치해 간 걸로 확인됐어요.”
“궐랑파?”
“뒷골목을 지배한다고 하지만 한낱 삼류 무사들이에요.”
“궐랑파라. 그곳으로 먼저 가야겠군.”
자신의 어머니를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쩌면 시간이 지체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상대는 취황, 거기다 청령맹을 상대해야 될지도 모르는 상황.
차라리 연유란을 찾아 황산에 데려다 주고 다시금 취황을 찾아 나서는 게 나을 것이다.
“그런데 또 이상한 게 있어요.”
“무슨?”
“궐랑파에, 그곳의 파락호들과 수준이 맞지 않는, 그러니까 엄청난 고수들이 그곳에 있단 말이에요.”
“찔리는 게 있으니 무인이라도 고용했나 보지. 정보는 고마워. 부탁이란 것은 내일이 전부 끝나면 들어주도록 하지.”
하운천은 지체하지 않고 천마제운공을 펼쳐 숲 속을 벗어났다.
빛살 같은 빠르기.
유화가 그를 말릴 새도 없었다.
“아직 전부 다 말하지 못한 게 있는데……!”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옅어지며 이내 모습조차 보이지 않는다. 하운천은 품속으로 책과 양피지들을 갈무리하며 허리춤에 검을 찼다.
‘궐랑파라, 궐랑파…….’
한걸음에 오 장여를 나아가던 그가 점차 빨라져 이제 보통 사람들의 안력으로는 쫓지 못할 정도의 속도가 되었다.
촤아아악!
허공을 격하는 그의 신형.
그가 지나친 길 위로는 뒤늦게나마 흙먼지가 치솟았다.

***

궐랑파, 내부.
우락부락한 근육질에 민둥 머리. 이곳의 문주인 탁정이었다.
양옆에 계집들을 낀 채로 술을 들이켜고 있는 그에게 눈이 쭉 째진 사내 하나가 달려와 물었다.
“두목, 궐랑파 입구에서 웬 낯선 놈이 소란을 피우고 있다는데요?”
술병을 내려놓고 오른쪽 옆구리에 안긴 여인의 가슴을 주무르던 탁정이 인상을 팍 썼다.
“야 이 새꺄. 그런 건 알아서 처리하라고, 알아서.”
그러고는 다시금 손을 놀리기에 바빴다.
부두목 왕정연이 머리를 긁적였다.
자칫 그분들의 심려에 누가 갈까 조심해야 하는 상황이라 말한 것인데…….
그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탁정을 뒤로하고 방 안에서 나온 왕정연은 궐랑파 애들 몇 명을 추려서 입구 쪽으로 향했다.
“대충 처리해서 뒷산에 묻어라.”
살벌한 말을 대수롭지도 않게 내뱉은 왕정연. 궐랑파 무사들이 ‘예’라고 대답하며 각자 검, 도끼들을 꺼내 들었다.
그때.
콰지직! 우지끈, 우당탕!
“커헉!”
“커, 커억!”
대문이 부서지며 그 잔해들과 함께 널브러지는 사내들은 궐랑파의 입구를 지키던 무사들이였다.
그들은 입속에서 각혈을 토해 내며 비틀거렸다. 그러다가 한 사내가 부서진 나뭇조각들을 짓밟고 안으로 들어오자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들의 눈에 왕정연이 들어왔다.
“부, 부두목! 큰, 큰일 났어요!! 저 새끼 저거 완전 고수라니까요!”
뻐억!
왕정연이 말하던 무사의 턱을 후려갈겼다.
“호들갑 떨지 마라.”
턱을 움켜쥐며 고개를 끄덕이는 무사.
왕정연이 이번엔 시선을 하운천에게 고정시켰다.
“뭘 하는 새낀데 겁도 없이 쳐들어와서 우리 애들을 건드리는 거지?”
삼류 무사라고 해도, 뒷골목에서 몇 십 년 동안 칼밥 먹으며 살아온 인생이다. 왕정연에게서 무서운 기세가 피어올랐다.
하운천이 그와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며칠 전에 네놈들이 납치해 간 아이 있지? 연유란이라고. 그 아이를 찾으러 왔다.”
“납……치?”
왕정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저 자식이 그걸 어떻게 알고 있지? 거기다 이름까지 대는 걸 보니 확실하게 알고 있다.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꼬리가 밟혔나? 개방인가?
별의별 생각이 머릿속을 휘저어 놓았다. 하지만 입에서 튀어나온 건 간단한 한마디.
“죽여.”
그 한마디에 왕정연의 뒤에 서 있던 무사들이 한꺼번에 하운천을 향해 돌진했다.
하운천도 주먹을 말아 쥐며 기수식을 취했다.
그때 단귀륭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검을 들어라.]
움찔하는 하운천.
[네놈이 아직 사람을 죽이는 데에 익숙하지 않은 건 본좌도 안다. 그런데, 이런 무식한 놈들은 한 번 짓밟을 때 확실하게 밟아 줘야 해. 그래야 다시금 덤빌 생각을 못하지.]
하운천은 고개를 끄덕이며 검을 쥐었다.
발검(拔劍)의 자세.
[압도적인 무력을 보여 줘라. 감히 고개를 들고 쳐다볼 수도 없을 만큼. 그게 빠른 길이고, 편한 길이다.]
막 단귀륭의 말이 끝났을 때, 궐랑파의 무사들은 하운천의 코앞까지 다다라 있었다.
“죽어랏!!”
“하압!”
허공을 박차고 솟아올라 도끼를 내려찍는 무사, 그에 맞춰 서슬 퍼런 박도로 하체를 베어 오는 무사와 검을 비껴 잡으며 옆구리를 찔러 오는 두 무사들. 수년간 함께해 온 그들만의 합격술이었다.
피할 틈조차 보이지 않았다. 혹시 피하더라도 뒤쪽에서 대기 중인 다른 무사들을 상대해야 한다.
하운천은 무사들의 공격이 자신의 몸을 아슬아슬하게 베어 가려고 할 때쯤 검을 뽑았다.
번쩍! 턱!
한줄기 섬광, 그리고…….
검을 집어넣는 소리.
그와 함께 어느새 뒤로 서너 걸음 물러나 있는 하운천이다.
왕정연이 소리쳤다.
“검을 뽑으려다 기회를 놓치고 물러난 거야! 멍하니 서 있지 말고 밀어붙여!”
그랬음인가.
무사들이 각자 무기들을 들어 올린 채 다시 한 번 하운천에게 신형을 쏘았다.
“어?”
“어, 어?”
그러나 그들은 꿈쩍도 하지 못했다. 입에서 의문 가득한 신음만 내뱉을 뿐.
하운천이 입꼬리를 늘어트리며 석상처럼 굳어 버린 무사들을 지나쳤다. 왕정연의 바로 앞까지 걸어온 하운천.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에 숨이 턱 막혀 버릴 것 같은 기분을 느낀 왕정연이 뒤로 물러나며 소리쳤다.
“이, 이 새끼들이 뭘 하고 있는 거야? 당장 이 자식 안 끝내!”
“못할 텐데.”
하운천은 왕정연이 물러나는 만큼 보폭을 맞춰 다가갔다.
“뭐?”
“죽었거든, 저 사람들.”
하운천이 칼집으로 무사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
사납게 쏘아붙이던 왕정연이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곧 그의 눈과 입이 더없이 커지기 시작했다.
“저, 저게 뭐야!”
굳어 있던 무사들의 몸에 가느다란 혈선이 생겼다. 그 선은 조금씩 뚜렷해지더니 이내 무사들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
푸슈슛! 촤아악!
허공으로 피 보라고 일고, 바닥으로 피와 내장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순식간에 혈향으로 가득 차게 된 궐랑파.
그리고 그걸 느꼈음인지, 어느새 자신의 몸집과 비슷한 길이의 대도를 든 탁정과 그를 필두로 궐랑파의 무사들이 속속히 모습을 드러냈다.
하운천의 눈동자를 가득 채울 만큼의 숫자.
그러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제 발로 모습을 드러내 주니 고맙다는 투로 쩌렁쩌렁하게 외친다.
“궐랑파가 납치해 간 사람을 찾으러 왔다. 더 이상의 살생은 하고 싶지도 않고,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그만…….”
“닥쳐어!!”
꽈앙!
어느새 대도를 내리찍으며 날아든 탁정.
하운천의 천마제운보에 빗나간 그의 일격이 땅바닥에 깊은 구덩이를 만들었다.
몸을 일으켜 자세를 바로잡은 탁정이 도를 들어 올렸다. 자연히 도신의 끝이 하운천의 목이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내 아이들을 죽여 놓고, 더 이상의 살생은 무의미하다고? 네놈 목까지는 내놓고 나서 그런 소릴 하거라!”
마치 집채만 한 멧돼지가 달려드는 모습이라.
푸르스름한 달빛 아래, 탁정의 도가 태산도 가를 기세로 하운천의 머리를 노리며 휘둘러졌다.


<『천하제일귀』 제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