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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제일귀 1권(24화)
10장 천아문(天娥門)(2)


하운천이 ‘천궁(天宮)’이라는 간판을 단 기루에 입구로 다가섰다. 그러자 두 명의 무사들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범상치 않은 기운을 품은 무사들.
“천허패(天許牌)를 보여 주시오.”
하늘이 허락한다는 뜻을 가진 패.
천궁에 출입하기 위해 필요한 것인 듯했다.
하운천이 두 무사를 훑어보며 말했다.
“천허패는 없다.”
“뭐?”
순간 무사들이 당황했다. 이곳이 어딘 줄 알고 이런 말장난을 친단 말인가.
무사들은 망설이지 않고 검을 뽑으려 했다. 그때 다시금 들려오는 하운천의 음성이 그들을 움찔하게 만들었다.
“천외천(天外天) 친봉영(親奉迎) 불즉살(不卽殺).”
반쯤 뽑아 든 검을 냉큼 집어넣는 무사들.
“따라오시지요.”
그들 중 한 명이 하운천에게 고개를 숙이고는 앞장섰다.
하운천은 말 한마디에 급변하는 무사들의 행동을 보고는 내심 놀랐다.
‘단 사부가 말하는 천마신교란 정말 대단한 곳인가 보구나.’
말로만 들었을 땐 실감이 나지 않았다. 하나, 이리 직접 무림에 나오니 몸소 느낄 수 있었다. 천마신교의 절대적인 힘과 명성.
그리 감탄하며 무사를 따라간 하운천은 어느새 천궁의 맨 꼭대기 층인 사 층에 올라와 있었다.
그러자 보이는 또 다른 무사들. 입구에 서 있는 무사들도 대단하지만, 이곳에 있는 네 명의 무사들은 차원이 다르다. 당장 무림에 나가도 절정고수라 칭송받을 정도의 고수들이었다.
하운천을 데려온 무사는 그들에게 뭐라고 속삭이더니 다시금 입구 쪽으로 내려갔다.
“천마신교에서 오신 분이십니까.”
중후한 음성의 턱밑에만 수염을 기른 무사가 물었다. 그에 하운천은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
“한데 저희로서는 처음 뵙는 분. 실례를 무릅쓰고 천마신교에게 드린 천외지패(天外持牌)를 볼 수 있겠습니까.”
“천외지패라…….”
하운천이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잠시 뒤적거리다 이내 씨익 웃는 하운천, 그가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런 건 없는데?”
“훗.”
무사들이 헛웃음을 쳤다.
이럴 줄 알았다는 뜻이다. 한낱 애송이로 보이는 이제 채 약관도 안 되는 놈이다. 어떻게 천아문과 천마신교 사이에서만 오고가는 전언을 알았는지는 모르지만.
“네놈의 그 장난질에 목숨은 걸었느냐?”
챙!
검을 뽑아 드는 무사는 촌각에 망설임도 없이 하운천의 목을 벨 기세로 검을 긋는다. 이에 하운천이 빠르게 한 걸음 물러서 검을 피했다.
촤악!
가공할 빠르기에 공기가 찢겨져 나갔다.
무사는 멈추지 않았다. 방심도 하지 않는 듯, 건물 안이라 동작이 큰 무공을 사용하지 못할 텐데도 그는 내공을 끌어 올렸다.
검이 진동했다.
어기충검.
한층 더 예리하고 견고해진 검식이 하운천을 덮쳤다.
그러나 발을 놀리며 아슬아슬하게 피해 내는 하운천. 표정은 무척이나 여유로워 검을 휘두르는 무사로 하여금 이를 악물게 했다.
“하앗!”
무사가 기합성을 내질렀다. 동시에 그의 검이 수많은 원을 그렸다.
그대로 몸을 내준다면 갈기갈기 조각나 버리리라.
그러나…….
탁.
순간 장내에 정적이 흘렀다.
“미안한데, 이렇게 당신들을 상대해 줄 시간이 없거든, 나는.”
하운천이 자신의 얼굴 가까이 드리워져 있는 검날을 맨손으로 잡은 채 말했다.
무사가 검을 빼내려 안간힘을 썼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하운천이 손을 놓았다.
당기는 힘에, 그가 갑자기 손을 놓으니 무사가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번쩍! 퍼억!
섬전같이 뻗은 하운천의 주먹이 무사의 복부에 꽂혔다.
그대로 고꾸라지는 무사는 정신을 잃은 듯 다시 일어서지 못한다.
뒤에서 지켜보던 세 명의 무사들이 검을 뽑아 들며 하운천에게 날아들었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뭐, 뭐야!”
“어떻게 이럴 수가!”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표정. 그도 그럴 것이, 방금 막 뽑아 든 자신의 검들이 하운천의 손에 들려 있었다. 어느새 움직였단 말인가.
세 자루의 검을 양손에 쥔 하운천.
“그만하고 천아문의 문주를 만나게 해 줘.”
나직이 경고하며 그가 검들을 가볍게 던졌다.
턱, 턱턱.
검들은 각기 주인의 허리춤에 메여 있는 검집으로 빨려 들어갔다.
무사들의 몸이 순식간에 얼어 버렸다.
어떻게 이런 말도 안 되는 무력을 가진 자가 존재한단 말인가!
머릿속엔 온통 그 생각뿐이다.
그들이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아, 하운천이 다시금 입을 열려고 할 때였다.
“들어오세요.”
사 층 전체에 잔잔히 울려 퍼지는 목소리. 남자가 아닌, 여인의 것이었다.
무사들의 뒤쪽에 있던 문이 드르륵하며 저절로 열렸다.
하운천이 발걸음을 옮겼다.
주춤거리며 길을 내주는 무사들. 그들을 지나쳐 휘장을 걷고 방 안으로 들어가자, 수려한 외모의 여인이 차를 홀짝이고 있었다.
그녀의 뒤에는 두 명의 시녀들이 허리를 숙인 채 석상처럼 서 있다.
“당신이 천아문의 문주인가?”
“그래요. 제가 천아문의 문주 유화입니다.”
요요(姚姚)히 빛나는 눈동자를 들어 올리며 일어서는 그녀.
하운천은 그녀를 바라보다 문득 탁자 위에 찻잔이 두 개 인 것을 알아차렸다.
그가 자연스럽게 착석했다.
유화가 가지런한 이를 내보이며 살포시 웃었다. 옅은 미소임에도 풍겨져 나오는 매력은 가히 장미가 만개하는 듯하다.
“그런데, 저로서도 처음 보는 분이시군요. 천아문에서도 모르는 천마신교의 숨은 인물이라. 호기심이 생기는 걸요?”
하운천도 찻잔을 잡으며 마주 웃어 보였다.
“나로서도 천아문의 문주가 여인일 줄은 몰랐군.”
“무슨?”
천마신교의 인물이라면서 자신을 모른다? 유화의 얼굴에 수상한 빛이 스쳐 지나갔다.
“당신, 천마신교의 인물이 아니군요!”
후룩하며 차를 한 모금 들이켠 하운천.
“아니기는 한데, 아니라고 하기도 좀 뭐하군.”
“그건 또 무슨 말이죠?”
천마신교의 인물이 아니면서도 그곳과 관계가 있다니. 점점 더 수상해져만 간다.
“아무튼, 나는 알고 싶은 정보가 있어. 문제는 천아문의 정보는 꽤 비싸다고 하던데, 나에겐 그만한 돈이 없어. 있다면…….”
하운천이 허리춤에 메여진 검을 들어 탁자 위로 올려놓았다.
“무력뿐.”
“광오하군요.”
유화가 코웃음을 쳤다.
“천아문과 제가 그리 우습게 보였나요? 제가 부탁만 한다면 천마신교에서도 그리고 심지어는 육대세가나 구파에서도 힘을 빌려 줄 곳이 있을 거예요. 그런 천아문에게 무력을 빌려 주는 대가로 정보를 얻겠다? 당신이 무슨 정파의 오황팔존이나 천마신교 쪽에 일마육성쯤 된단 말인가요?”
소나기처럼 퍼붓는 그녀.
하운천은 머리를 긁적였다. 당황은 했지만 별로 신경은 쓰이지 않는 듯.
그는 유화의 질문엔 대답하지 않고 제 할 말만 이어 나갔다.
“내가 알고 싶은 정보는 세 가지야. 하나는 안휘성에서 일어나고 있는 실종 사건에 대한 것과 그 사건과 연루되어 있을지도 모르는, 며칠 전에 실종된 연유란이란 사람에 대한 정보. 또 하나는 유경연곡이란 십오 년 전 멸문한 문파에 대한 정보.”
비단결처럼 고운 유화의 얼굴이 일순 구겨졌다.
“광오한 데다 무례하기까지! 도대체 당신이 누군데…….”
“그리고.”
화를 내려던 유화가 순간적으로 사방을 옥죄는 살기에 움찔하고 말았다.
“취황, 홍야개가 있는 곳.”
“당신이 어째서 취황을…… 서, 설마!”
유화가 찻잔을 든 손에 힘을 주며 눈을 치켜떴다.
하운천이 직접 답하지는 않았지만, 그에게서 치솟는 살기가 대신 말해 주고 있었다.
취황을 죽인다.
자신이 모르는 무슨 사연이 있을지 모르지만, 결국은 그것이다. 이자는 지금 취황을 죽이려고 하는 것이다.
오황.
별호에 황(皇)이라는 호를 얻고, 정과 마를 통틀어 현 무림에서 가장 강하다고 칭송받는 이십 명의 무인들 중 다섯.
그리고 그 다섯 명 중 한 명인 취황.
“취황을 죽일 만할 무력을 당신이 지니고 있다는 말인가요?”
“적어도 그 정도는 된다고 생각하는데.”
덤덤한 음성.
지금 자신이 한 말이 무슨 뜻인지나 알고 하는 소리일까.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문제가 있군요.”
“문제라니?”
“천아문이 취황의 위치를 당신에게 알려 줬는데, 만일 취황이 그걸 알면 가만히 있을까요?”
“그게 무슨 문제야?”
“무슨 문제라니, 취황은 개방의 용두방주라구요! 그가 나서면 어쩌면 다른 구파나 육대세가, 즉 청령맹에서…….”
“취황은 죽어. 만일 개방이 막는다면 개방도 죽어. 다른 구파나 육대세가가 나서서 막는다면 그들도 죽는다. 그러니 문제될 건 없다고 보는데.”
유화는 정말 광오(狂傲)라는 말에 걸맞은 하운천의 언사에 맥이 풀려 버렸다.
그녀는 한동안 말없이 차를 마시는 하운천을 바라보았다. 무언가를 신중히 생각하던 그녀의 앵두 같은 입술이 이내 들썩거렸다.
“좋아요. 당신이 원하는 정보는 오 일 뒤에 알려 드리죠.”
“오 일이라. 그럼 난 뭘 하면 되지?”
“후에 제 부탁을 들어주시면 돼요.”
하운천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 그를 유화가 불러 세웠다.
“그보다 당신에 대해서 알려 주시지 않을 생각인가요? 저희가 뒷조사를 하는 것보단 그게 더 나을 텐데.”
“내 이름은 하운천이야. 나머진 유경연곡에 대해 알아보면 자연히 알게 될 거고.”
검을 집어 들며 말하는 하운천.
유화는 문득 그가 하대를 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단지, 그것이 자연스러워 느끼지 못하고 있었을 뿐.
‘이자는 어쩌면 정말로 취황을…….’
그녀는 하운천이라는 이름을 머리 깊숙이 새겨 넣었다.
“그럼 오 일 뒤에 사람을 보내죠.”
그녀의 말과 함께 하운천은 방을 나섰다.
오 일.
일 년 반이란 시간에 비하면 정말 짧은 시간.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어머니…….’
탁.
문이 닫히고, 유화는 여전히 탁자 위에 앉아 있었다.
잘한 것일까?
스스로에게 질문했지만 모르겠다. 그녀가 이마를 손으로 짚으며 뒤쪽에 있던 시녀들을 바라봤다.
“잘한 걸까요? 저자를 믿어 보려 했던 건데.”
“글쎄요. 뭐가 어찌 됐든 천아문에게 해가 될 건 없다고 봅니다.”
“뭐, 장로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는 걸 보니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고 보이네요.”
자리에서 일어서는 그녀.
“취황과 안휘성에서 실종된 연유란이란 사람에 대한 정보, 그리고 유경연곡. 전부 이틀 내로 알아봐 줘요. 그중 제일 중요한 건 유경연곡에 대해서예요. 저자가 누구인지, 마교와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인지 확실히 해 둬야겠어요.”
“천녀의 말을 받듭니다.”
두 시녀가 고개를 숙이고 잠시 뒤, 천아문의 장로라 불린 그녀들은 촛불 꺼지듯 자리에서 모습을 감췄다.
유화만이 방에 홀로남아 창가를 내다본다.
“도대체 누굴까? 취황을 죽이겠다니. 하지만 그 살기 안에 감춰진 지독한 복수심은…….”
가히 천신조차도 죽일 기세라.
평소라면 세상모르는 애송이의 객기라고 치부하고 싶지만, 얼굴을 반쯤 가려 버린 치렁치렁한 머리 사이로 비춰지는 심안 같은 눈과 눈 깜짝 할 새에 자신을 지키는 무사들을 무력하게 만드는 무공, 그리고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세상 전부를 아우를 것만 같이 자연스럽게 새어 나오던 기도.
처음 들어 보는 하운천이라는 이름.
“믿어 보겠어요.”
유화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 가슴 깊은 곳에서의 울림을 느끼며 나직이 읊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