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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제일귀 1권(23화)
9장 일 년이란 시간에 반년을 더(5)


그녀를 뒤로하고 탁자 위에 앉은 노인과 하운천.
노인의 표정은 한없이 침중했다.
연유소의 눈물에서 한줄기 불안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말해 보게, 무슨 일이기에 유소를 데리고 이곳까지 왔는지. 그리고 그런 자네가 누구인지.”
“……유소의 언니라는 사람, 어르신의 손녀 분께서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요 근래 육안과 주변을 기점으로 번번한 실종 사건이 일어나고 있고요.”
콰당!
“뭐, 뭐라고!!”
노인이 벌떡 일어서자 그의 뒤로 의자가 튕기듯 쓰러졌다.
“유소가 혼자서 언니를 찾겠다고 시장 바닥을 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제가 유소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하운천이 그동안의 일들을 이야기해 주었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노인은 답답하면서도 먹먹한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몇 달만 더 있었으면, 그래서 이곳에 확실히 자리를 잡았다면 곧 연유소와 연유란을 데리고 오려고 했었다.
그 때문에 한 달에 한 번씩 가던 육안도 요즘에는 가지 못했었다. 걱정은 됐지만, 보통 여자아이들과는 다르게 듬직하면서도 씩씩한 연유란을 믿고 대장장이 일에 몰두했다.
“어떻게, 어떻게 유란이가…….”
힘이 빠져 스르륵 무너져 내리는 노인.
하운천이 노인을 부축하며 입을 열었다.
“걱정 마십시오. 유소와 약속했습니다. 꼭 언니를 찾아 주겠다고.”
“자네가?”
하운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은 그런 그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심해처럼 깊어 속내를 알 수 없는 눈동자, 그러나 왠지 신뢰가 가는 그런 눈이다.
노인의 시선이 왜 도와주는 것인가라고 묻는다. 단지 의협심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를 바라고 있음인지.
“소중한 사람을 잃는 것보다 더한 슬픔은…… 없으니까요. 저도 찾아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저에겐 정말 소중한 사람이거든요. 그래서인지 유소에게 동질감을 느꼈습니다. 그게 제가 유소를 도와주는 이유입니다.”
동질감.
그 때문인가.
노인은 이해했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침상 위에 곤히 잠든 연유소에게 시선을 옮겼다.
“유소는 언니를 정말 좋아했네. 어릴 적 부모를 잃고 살아온 유소에게 유란이는 엄마와도 같은 존재였지. 내가 있다지만, 부모의 빈자리를 채우기엔 역부족이었어.”
하운천이 움찔했다.
엄마와도 같은 존재, 그런 사람이 사라진 채로 돌아오지 않았다. 연유소가 어떤 기분이었을지. 자신과 같았을까.
“난 자네가 누군지 모르네. 이야기를 들어 보니 유소와도 만난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남을 잘 따르지 않는 아이가 자네를 따라 여기까지 온 것을 보니 안심이 되는구먼.”
노인은 말을 하면서, 방 한구석에 자리 잡은 낡은 목재 상자를 열어젖혔다. 그 안에는 일 척 정도 되는 길이의 무언가가 검은 천으로 싸여 있었다.
노인이 그것을 하운천에게 내밀었다.
“부탁하네. 우리 유란이…… 꼭 좀 부탁해.”
하운천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건을 받아 들었다.
검은 천을 벗겨 내자 모습을 드러낸 것은 한 자루의 검(劍).
“이것은……?”
의아한 듯 묻자.
“자네는 무공을 익힌 무인인가?”
“……예.”
놀란 눈빛으로 대답하는 하운천, 그리고 그의 뒤에 서 있던 단귀륭도 놀라는 기색.
반박귀진.
경지를 이룬 고수는 오히려 일반인과 구분이 안 된다. 누가 봐도 평범한 사람으로 보이기 마련. 한낱 지렁이가 속에는 커다란 호랑이도 단숨에 죽일 수 있는 독을 품고 있다. 그래서 무서운 법이다. 최소한 구경의 경지를 뚫은 자만이 반박귀진의 경지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다.
한데 그 경지에 오른 하운천을, 대장간의 노인이 알아보았다.
“놀란 표정이군. 그리 놀랄 것 없네. 대장간에서 일한 지 이제 오십 년이 다 되어 가네. 무공을 익힌 무인과 그렇지 않은 자들을 구별하는 데에는 도가 튼 사람이네, 나는.”
노인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장인(匠人).
장인의 눈이라 가능한 일이었나.
하운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십 년 동안 대장간 일에 종사한 장인, 그런 장인이 만든 검이다.
“대가를 바라고 유소를 도와주는 것이 아닙…….”
“부탁하는 사람이 주는 감사의 표시일세.”
단호한 음성.
하운천이 할 수 없다는 듯, 살짝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손녀분은 꼭 안전하게 데리고 오도록 하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시고, 유소를 부탁드립니다.”
친할아버지인 자신에게 유소를 부탁한다? 그만큼 유소를 걱정하고 생각한다는 뜻인가.
“기다리겠네. 그리고 자네가 찾고자 하는 사람도 꼭 찾길 바라네.”

다음 날.
잠에서 깨어난 연유소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무도 없다.
그녀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 건물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다. 한데, 아무도 없다.
연유소는 재빨리 대장간으로 뛰어갔다.
“할아버지!”
문이 채 열리기도 전에 외치는 그녀. 당연하다는 듯 대장간 안에는 노인이 있었다. 그럼에도 연유소의 눈빛에는 누군가를 찾는 기색이 역력하다.
“천 오라버니는? 오라버니 어디 갔어?”
“유소야, 일어났느냐?”
“응, 그런데 천 오라버니는?”
“그 아이는 아침 일찍 떠났지.”
떠났다는 말에 울상이 되는 연유소.
“말도 안 하고 가는 게 어디 있어!”
큰 눈에 곧 눈물이 맺힌다.
어릴 적에 부모를 여의고, 할아버지와 언니는 그녀와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밖에서 일할 때가 훨씬 많았다. 어린 연유소의 가슴 한편에 떡하니 자리 잡은 외로움이라는 감정.
그래서인가, 하운천을 무척 따르고 의지하게 된 연유소다.
노인은 그녀를 달래며 대장간 구석에 있는 선반 위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 아이가 유소, 네가 일어나면 건네주라고 하더구나. 인사도 못하고 가서 미안하다고, 금방 돌아오겠다고 하면서 말이다.”
울상이던 연유소가 이내 피― 하고 웃어 버렸다.
만두.
그것은 접시 위에 한 가득 담겨져 있는 만두였다.
연유소는 만두 하나를 집어 들고 오물거렸다. 그녀의 시선은 대장간 창가 너머로 비추는 맑은 햇살 위에 걸렸다.
“고마워, 오라버니. 그리고 언니랑 함께 빨리 돌아와…….”



10장 천아문(天娥門)(1)


푸르른 숲 속, 나무 그늘 아래.
살랑대는 봄바람이 얼굴을 간질였다.
하운천은 나무에 기댄 채 연유소의 할아버지에게 받은 검을 만지작거리며 깊은 상념에 잠겨 있었다.
그가 한참 동안 입을 열지 않자, 단귀륭이 물었다.
[어떻게 하려고 그러느냐? 어제 갔었던 그곳으로 가려는 건가?]
그곳, 벽견 운오가 분타주로 있던 곳을 말함이라.
하운천은 고개를 저었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을 보니 쉽게 말해 주지 않을 것 같았소. 괜한 살생만 하게 될 것 같으니 그곳은 아니요.”
만약 그곳에 간다면, 어제처럼 복수심에 휩쓸려 자신도 모르게 살수를 펼칠 것 같았다.
[그럼?]
하운천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검집을 톡톡 건드리며 무언가를 생각하던 그는 이내 입을 열었다.
“유소의 언니에 대한 정보는 물론이고, 어머니의 과거 그리고 어머니의 문파에 대해서도 알고 싶은데.”
[과거?]
“예, 분명 그때 취황은 어머니를 죽이려고 했었던 것 같은데, 후에 나타난 자들은 그렇지 않았소. 오히려 어머니를 살리려고 했었지. 취황이 어디 있는지만 알면 상관없을 텐데, 단 사부가 그러지 않았소? 개방의 본타 위치는 그 누구도 모른다고.”
[그랬지, 그건 본교에서도 알아내지 못했을 정도다.]
“개방 본타의 위치는 필요 없으니, 취황이 어디 있는지 정도의 정보를 알 수 있는 문파나 단체는 없는 거요?”
[없을 리가.]
넓고도 험한 약육강식의 세계인 무림, 그 안에서 살아가려면 정보는 필수다. 약자는 강자에게 눌리지 않기 위해, 강자는 약자 위에 군림하기 위해.
[정보 단체가 하나 있지, 천아문(天娥門)이라고 하는. 그들의 정보력은 개방의 필적할 정도라고 할 만하다.]
“……!”
하운천의 눈이 커졌다. 개방의 필적할 정도면 자신이 원하는 정보는 모두 알고 있을지도.
[세인들은 천아문을 개방보다 높게 쳐 준다. 개방이야 자신들이나 정파에 영향을 끼칠 만한 정보는 내주지 않지만, 천아문은 돈만 있다면 무엇이든 알려 주니까 말이다.]
“그 말은…….”
[그래, 천아문의 정보는 비싸다. 일개 무인이 감당할 수준이 못 되지.]
하운천이 인상을 썼다. 그만큼의 돈이 자신에게 있을 리가 없다.
천아문도 안 된다면…….
그가 단귀륭에게 다른 곳은 없냐고 물으려 할 때, 단귀륭이 씨익 웃어 보였다.
[하지만 일개 무인이 아닌 무림에 이름을 날리는 고수 정도면 또 달라진다.]
고수는 다르다. 강하니까 다른 것이다.
천아문이 고수에게 원하는 건…….
“천아문은 그들이 가진 무력, 힘을 대가로 정보를 내주는 겁니까?”
[그래, 본교에서도 천아문에게 꽤 많은 힘을 빌려 주었다. 그것이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이다. 강한 무공이 없어도 이 강호에서 살아갈 수 있는 방식.]
하운천이 고개를 끄덕이며 검집을 움켜쥐었다.
“단 사부. 천아문이 어디 있는지 알려 주시오.”

***

많은 사람들의 시작은 아침 이고 끝은 밤이다. 그것이 보통 사람들의 생활.
그러나 그와 반대인 곳.
붉은 빛이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을 매혹시키는 홍등가가 그곳이다.
거리는 그곳을 밝히는 등불과 달빛이 한데 섞여 미혹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거기다 줄줄이 늘어져 있는 기루에서 풍겨져 나오는 향긋한 술 내음. 입구에는 가슴선이 드러나도록 풀어헤쳐진 옷을 입고 있는 기녀들.
하운천이 난감해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가 단귀륭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이곳이 맞는 거요? 이런 곳에 천아문이 있다고?”
[물론이다. 아마 이곳 전체 중 반은 이미 천아문의 영역일 걸? 확실하진 않지만. 계집년들 치마폭에 빠진 사내들은 일급 정보도 술술 풀어내기 마련이니까, 큭큭.]
하운천이 주위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수많은 고급 기루들, 술에 취해 기녀들 품에 안겨 그 안으로 들어가는 사내들. 옷을 보아하니 결코 범상치 않은 사내들이다. 그중에는 무림에 이름 있는 가문의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꽤 명성을 떨치는 무인들도 있을 것이다.
천아문은 이런 식으로 정보를 얻는 것인가. 아니, 어쩌면 자신이 모르는 또 다른 곳에서 정보 수집이 이뤄지고 있을지도.
[이쪽이다.]
단귀륭이 말했다.
하운천이 단귀륭을 따라 오른쪽으로 길을 꺾었다. 그러고는 눈이 휘둥그레진다.
“……!”
걸어오면서 봐 왔던 기루들과는 차원이 다른, 마치 황궁의 건물인 양 고귀한 기품을 내보이는 사층의 건물.
건물을 받치고 있는 각 층의 기둥에는 옥으로 깎아 만든 용을 장식해 놓았고, 거리를 비추는 오색(五色) 불빛은 휘황찬란하여 눈이 부실 정도였다.
입구에는 기녀들이 아닌, 검을 찬 일류 무사들이 그곳을 지키고 있었다.
기루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누런빛을 띠는 패를 보여 주는 것을 보니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뜻.
“단 사부.”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해 달라는 듯 하운천이 그를 쳐다보았다.
[내가 하는 말을 그대로 따라 하기만 하면 된다.]
“알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