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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제일귀 1권(22화)
9장 일 년이란 시간에 반년을 더(4)
하운천은 시체를 무심히 바라보다 다시금 운오에게 시선을 돌렸다. 운오는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채 입에 허연 거품을 물고 있었다. 하운천은 그런 운오를 바닥으로 던져 버렸다.
“컥, 커억! 켁켁!”
갑작스레 숨통이 트여 연신 기침을 해 대는 운오. 가까이 다가간 하운천의 그림자가 그를 뒤덮었다.
“내가 이곳에 찾아온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연유란이라는 아이의 대한 정보. 또 하나는 취황이 있는 곳.”
“바, 방주님을……?”
고개를 끄덕이는 하운천.
운오는 긴장한 표정을 지은 채 하운천을 바라보았다.
방주님을 찾는 목적은 무어란 말인가?
운오는 그 생각을 냉큼 지워 버렸다. 지금은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개방의 제자 넷이 목숨을 잃었다. 몇 년을 이곳에서 함께한 그들이 죽은 것이다.
“죽어라!!”
운오가 굽혔던 몸을 펴 화살처럼 쏘았다. 곧 그의 쌍장에 푸른 기운이 맺히며 단숨에 하운천에게 짓쳐들어왔다.
쩌엉! 쩌엉!
하운천도 내력을 끌어 올리며 쌍장을 뻗어 운오와 마주 부딪쳤다.
둘 사이에서 돌풍이 일었다.
괴로워하는 운오, 그에 반해 여유로운 표정인 하운천이 내력을 하체로 돌려 천마각을 펼쳤다.
퍼억!
원을 그린 발끝이 운오의 턱에 틀어박혔다.
하운천은 뒤로 넘어가는 운오의 상체를 붙잡아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었다.
“네놈이 말해 주는 게 좋을 거야. 만약 네가 끝까지 입을 열지 않는다면 넌 죽는다. 그리고 지금 여기로 오는 거지들도 전부 죽어.”
진심 어린 충고와 살기가 깃든 눈빛.
운오는 절로 몸을 떨었다.
오결제자라면 무림에서는 절정고수로 인정받는다. 그런 자신이 손도 못쓰고 당해 버렸다. 아니, 하운천이 마음만 먹었다면 자신도 눈 깜짝할 새에 시체가 되었으리라.
거기다 지금 그에게서 풍겨져 나오는 익숙한 기운…… 마기.
운오는 입가에서부터 흘러내리는 선혈과 함께 풀린 눈초리로 하운천을 살피며 물었다.
“그대는 마교의 인물……인가? 마교에 그대와 같은 자가 있다고는 듣지 못했는데…….”
하운천의 입가가 씰룩였다.
“헛소리를 하는 걸 보니 네놈도 죽고 싶은 모양이군.”
하운천이 오른팔을 들어 올렸다.
운오는 체념한 듯 눈을 감았다. 죽는다 한들, 마교의 무인이 시키는 대로 하면서까지 목숨을 부지하고 싶지 않았다.
‘미안하다…….’
이미 죽은 제자들에게, 그리고 이제 곧 죽을 제자들에게 향한 사죄였다.
하운천의 손에 시뻘건 기운이 맺혔다.
그때.
누군가 털썩하고 쓰러지는 소리가 하운천의 귓전을 울렸다. 뒤이어 단귀륭의 목소리도 들렸다.
[애송이!]
하운천이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파래진 안색에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아 버린 연유소가 눈에 들어왔다.
아직은 어린 나이. 여덟 살의 어린 소녀가 감당키엔 지금의 상황이 참혹했다.
하운천은 용암처럼 뜨겁게 타오르던 살심을 억누르며 운오의 귓가에 대고 나직이 속삭였다.
“취황, 그자에게 전해. 하운천이 왔다고.”
“큭!”
하운천이 잡았던 손을 거칠게 풀자 운오의 신형이 중심을 잃었다. 그런 그를 일별한 뒤 하운천은 연유소를 데리고 장원을 벗어났다.
하운천의 품속에 안겨 있던 연유소가 고개를 들어 그를 부른 것은 약 일 다경 정도가 지났을 때였다.
“천 오라버니…….”
“응.”
“그 사람들. 왜 죽인 거야?”
여타 아이들과 같은 맑고 순수한, 그러나 조금은 조숙해 보이는 눈망울로 하운천에게 질문하는 연유소.
경공을 펼치던 하운천의 발이 멈췄다.
순식간에 휙휙 지나가던 주변의 풍경이 멈추자 그들이 서 있는 곳은 깊지 않은 숲 속이었다.
“그 사람들이 지은 죄가 있어, 나에게.”
짧은 대답.
그러나 연유소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 사람들은 나쁜 사람들이네?”
“적어도 나한텐 그래.”
하운천이 애써 웃음을 지어 보이며 답했다. 연유소는 그의 품속에 얼굴마저 파묻으며 속삭였다.
“오라버니한테 나쁜 사람이면 나한테도 그 사람들은 나쁜 사람들이야.”
“……그래.”
하운천은 가만히 연유소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의 뒤에서 단귀륭이 물었다.
[애송이, 이제 어쩔 셈이냐?]
하운천은 대답대신 단귀륭을 쳐다보며 눈짓으로 답했다.
대답했다면 연유소에게는 단귀륭이 보이지 않아 마치 혼잣말을 하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유소야.”
“응?”
“너희 할아버지께 가자. 사실을 말씀드리고, 넌 그곳에서 할아버지와 함께 기다리고 있어. 내가 꼭 네 언니를 찾아 데리고 가도록 할게.”
연유소는 하운천과 눈을 맞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부터 할아버지에게 가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 혼자 가기엔 너무나 먼 거리. 안휘성 황산(黃山).
자신이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온 시장을 누비며 언니를 찾아다니는 것이었다.
도움을 청했지만, 도와주는 자는 없었다.
그러다 만나게 된 하운천.
가엾은 자신의 상황을 안타깝게 여긴 하늘이 내려 준 사람이라 연유소는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은 벌써 해가 지고 있는데?”
연유소가 시무룩한 목소리로 말했다.
곧 밤이 깊을 것이다. 결국 내일 출발해야 한다는 소리, 거기다 황산까지 며칠은 걸린다.
하운천은 연유소가 뭘 걱정하는지를 깨달았다.
“걱정 마. 오늘 안에 도착할 수 있어.”
“오늘?!”
연유소가 두 손으로 입을 가리곤 깜짝 놀라 외쳤다. 그 먼 거리를 하루도 아니고 오늘 안에 도착한다고?
믿기진 않지만,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는 눈빛.
하운천은 믿음직스러운 웃음과 함께 내력을 끌어 올렸다. 하단전이 아닌, 중단전에서부터 쏟아져 나와 대주천하는 기운.
“꽉 잡아!”
하운천이 연유소를 감싸 안은 팔에 힘을 주며 외쳤다.
파앙!
빛살 같은 빠르기로 숲 속을 가로지르는 하운천.
“꺄아악!”
연유소의 머리카락이 비명 소리와 함께 허공으로 비산했다. 얼굴에 맞부딪치는 바람이 너무 세, 연유소는 하운천의 품속 깊이 파고들었다.
한 손은 흩날리는 자신의 머리를 붙잡고 나머지 손으론 하운천의 옷자락을 움켜쥔다.
그에 반해 무척 여유로운 표정인 하운천.
가공할 속도의 경공임에도 그의 모습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뒤따르는 단귀륭.
차 한 잔 마실 시간도 안 되어 그들은 숲 속을 벗어났다.
“황산이 어느 방향이오?”
단귀륭에게 질문하는 하운천.
별 시답잖은 걸 물어본다며 투덜거린 단귀륭은 눈앞에 펼쳐진 산맥 중 가장 높아 보이는 흑태봉을 가리켰다.
[험하지만 황산으로 바로 이어지는 곳이다.]
하운천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흑태봉으로 향했다.
그런 그를 설마 하는 표정으로 바라보던 연유소.
산길이 너무 가파르고 험해 아무도 오르지 않는 곳. 아니, 오르지 못하는 곳, 그런 곳이 바로 흑태봉이다. 하운천은 그걸 알고도 흑태봉으로 향하는 것일까?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연유소는 그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왠지 하운천이라면 이런 산쯤은 가볍게 오를 수 있을 것 같았다.
신뢰감(信賴感).
비록 같이 있었던 건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연유소는 하운천을 의지하고 신뢰하게 되었다. 자신에게 오라버니가 있었다면 이런 느낌이었을까.
흑태봉 초입의 들어서자 옅고 축축한 안개가 그들을 반겼다. 서늘한 기운에 연유소가 살짝 몸을 떨자, 하운천이 내력을 북돋아 주었다.
순식간에 따스한 기운이 온몸을 감싸자 연유소가 기분 좋은 웃음을 지어 보인다.
“헤, 고마워.”
그 기운이 하운천으로 의한 것임을 알아차린 연유소의 인사에 하운천도 마주 웃어 보이며 내력을 끌어 올렸다.
천마제운보의 묘리를 경공에 담아 펼치는 천마제운공.
다시금 번개처럼 쏘아지는 하운천의 신형이 산자락의 안개를 반으로 갈랐다.
분명 산새가 험하다. 그러나 산속에서의 수련 덕분일까. 거기다 극강의 무력까지 갖췄으니 이런 산골짜기 건너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였다.
하운천은 마치 산악을 휩쓰는 질풍이라도 된 듯한 움직임으로 황산이 있는 남동(南東) 방향으로 곧장 뻗어 나갔다.
***
까앙! 까앙!
쇳덩이의 충돌 소리가 허공을 가득 메웠다.
낡고 쇠한 망치가 모루 위, 붉게 달아올라 있는 묵철을 후려치고 있었다.
열기로 가득 찬 대장간의 모습.
그 중앙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희끗한 흰머리를 가진 노인이었다. 분명 노인이나, 그의 팔뚝을 보면 떠오르는 것은 젊은 청년의 그것이오, 맑은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정광은 어린아이의 순수한 열정 못지않았다.
끊이지 않고 일정한 간격으로 내려치는 망치질.
망치질은 수백 번도 더 쇳소리가 들려오고 나서야 끝이 났다.
노인은 이마 위로 흐르는 땀방울을 훔쳐 내고는 단련이 끝난 묵철을 집게로 집어 들어 물속으로 집어넣었다.
치이익!
후끈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곧 연기가 노인을 뒤덮었다. 뜨거울 만도 한데 노인은 무표정한 얼굴로 묵철을 자세히 살폈다.
“후, 이제 겨우 육련(六聯)인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는 뿌듯한 표정이다.
일련, 즉 일천타란 말이 있다.
일련은 곧 천 번의 망치질을 뜻한다는 말. 백련정강은 이러한 과정을 백 번, 총 십만 번의 망치질로 단련된 철을 말한다.
하지만 백련정강을 만들기란 쉽지 않다. 오랜 시간과 힘이 들어가는 일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십만 번의 망치질을 버텨 주는 철을 구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거기에 완벽한 대장장이의 기술이 더해져야만 인내란 시간 속에서 태어나는 백련정강이 완성되는 것이다.
노인이 죽기 전에 이루고 싶은 일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백련정강을 직접 단철하는 것.
백여 걸음 중 여섯 걸음을 내딛었다.
그 결과물을 한참 동안 내려다보던 노인은 문뜩 대장간의 입구에서 기척이 느껴져 고개를 돌렸다.
덥수룩한 머리의 젊은 남자, 그는 입구 쪽에 서서 가만히 노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시오?”
노인이 묻자, 사내는 대답 없이 옆으로 한걸음 물러난다. 그러자 나타나는 한 신형.
사내의 뒤에 서 있어서 가려져 있었던 듯, 신형은 사내의 허리춤까지 오는 체격의 여자아이였다.
“할아버지!”
“유소야!!”
연유소가 빠르게 달려가 노인에게 안겼다.
노인은 놀람 반, 반가움 반이 뒤섞인 눈빛과 함께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렸다.
“네가 여기엔 어떻게 온 것이야? 저 아이는 또 누구고?”
“흑, 흑…….”
그러나 갑자기 울음을 터트리는 연유소, 옥구슬 같은 눈물이 흘러 작고 여린 손등 위로 떨어져 내렸다.
노인이 당황하며 그녀를 달랬다.
“유소야, 왜 그러느냐! 이 할아비한테 말해 보거라, 왜 우는 것이야. 유소야!”
“흑흑, 언니. 언니가…….”
“유란이? 유란이가 왜? 그러고 보니 유란이는 어쩌고 너 혼자 온 것이냐?”
눈물이 그치지 않는 연유소 때문에 노인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제대로 말도 하지 못해 사연도 알 수 없다.
어느 정도 연유소를 달래던 노인은 결국 그의 시선이 입구에 서 있는 사내, 하운천에게로 향했다.
경계 어린 눈빛.
“누군데 우리 유소를 데리고 이곳에 온 것이지? 유란이의 친구인가? 아니면…….”
하운천은 대장간 안으로 들어와 허리를 숙였다.
“인사가 늦어 죄송합니다. 저는 하운천이라고 합니다.”
“음…….”
예를 올리는 하운천을 바라보는 노인의 눈이 진중해졌다. 분명 어린 나이, 연유란과 비슷한 나이대로 보이는 하운천이지만 그에게서 자연히 풍겨져 나오는 기도가 심상치 않다.
대장간에서 일을 하면 자연 무인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그들 중엔 무림에서 흔히 말하는 고수라 불리는 무인들도 있는데, 하운천의 기도는 그런 고수들의 기운을 뛰어넘는다.
그렇다고 무공을 익힌 무인으로 보이지가 않으니 노인으로서는 그저 속으로 감탄할 뿐이다.
“일단 안으로 들어오게. 들어야 할 이야기가 있는 것 같으이.”
“예.”
노인은 연유소를 안은 채 하운천을 데리고 대장간 안쪽으로 들어갔다.
뒷문을 열자 나오는 곳은 넓은 마당과 한 채의 건물. 대장간과 붙어 있는 노인의 집이었다.
이미 하늘은 어둑해져 휘영청 밝은 달빛이 대지를 비추고 있었다.
연유소는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쓰러지듯 침상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오래되어 삐걱거리는 침상. 그 익숙한 소리가 자장가가 되어, 연유소는 금방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