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천하제일귀 1권(21화)
9장 일 년이란 시간에 반년을 더(3)


안휘성은 청령맹의 영해라, 객잔 안에 있는 무인들은 전부 정파무인들이었다. 협(俠)을 아는 자들.
사내들은 탁자 위에 찻잔을 한꺼번에 들이킨 뒤 아이에게 물었다.
“꼬마 아가씨가 사는 곳이 이 근처인가? 언니가 간다던 시장은 이곳이고? 언니의 대해 조금 더 자세히 말해 주려무나.”
“도와주시는 건가요? 네?”
“물론이다.”
울먹이던 아이의 얼굴에 환한 빛이 물들었다.
“저희 언니 이름은 연유란이에요. 나이는 이제 열일곱이고…….”
순간 열일곱이란 말에 두 사내가 움찔했다. 둘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더니 입술을 들썩거렸다.
전음.
아이가 듣지 못하는 대화가 둘 사이에서 오고갔다.
―혹시 그것 아닌가?
―그런 것 같네. 지금까지 실종된 소녀들도 전부 열여섯에서 열일곱 정도라 했으니.
―그 일 때문에 개방에서 직접 나선다고 하지 않았던가? 처음에 실종된 소녀들을 찾으러 가겠다고 나선 무인들이 전부 초주검이 되어 돌아와서 말일세.
사내들은 잠깐을 더 전음을 주고받더니 곧 겸연한 표정을 지었다.
두 달 전부터 이곳 안휘성 육안(六安)과 주변 시, 현을 중심으로 실종 사건이 번번이 일어나고 있었다.
대상은 열여섯, 열일곱 정도의 동녀(童女).
처음 사건이 터졌을 때, 명망 높은 정도의 무인들이 발 벗고 나섰으나…… 나선이들 중 그 누구도 죽지 않은 자가 없었다. 흉수가 누구인지도 알아내지 못했다. 아무 흔적도 없이 살해된 일류에서 절정급 사이의 무인들.
그 때문에 며칠 전부터 청령맹의 지시로 하여금 개방이 나섰다.
그런 일에 자신들이 끼어들 틈은 없다.
“꼬마 아가씨 미안한데, 도와줄 수 없게 되었다. 우리도 사정이라는 게 있…….”
사내들은 말을 하다가 멈칫했다.
어느 샌가 아이가 자그마한 손바닥에 옥구슬 하나를 올려 두고 있는 게 아닌가. 도와주는 것에 대한 보답으로 주려고 했었던 것인 듯…….
사내들은 왠지 모를 비참함에 침묵했다. 자신들이 강했다면…….
두 사내는 입술을 깨물었다. 협보다 자기 목숨을 더욱 중요시하는 자신들의 본능에 실망하며, 그들은 살며시 아이를 지나쳐 객잔을 빠져나갔다.
남겨진 아이.
아이의 큰 눈에는 놀람과 실의가 동시에 깃들어 이내 축축한 눈물로 화했다.
아이는 눈물을 닦고 객잔을 둘러보았다. 아직 주인이 있는 탁자는 열 개가 넘었다. 그중 반수가 무인.
그러나…….
“흠, 흠.”
“우리도 이만 나가세.”
아이의 시선을 받을 때면 헛기침을 하며 애써 무시하거나, 아예 객잔을 나가 버리는 사람들.
전부 그 사건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인가.
“아아…….”
마침내 아이의 입에서 암담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러다 문뜩 눈에 비친 사내.
세상모르고 음식 먹기에 바쁜 그 사내는 하운천이었다.
아이는 작은 희망을 품고 그에게 다가갔다.
“응?”
아이가 탁자에 붙을 정도로 가까이 와서야 하운천이 고개를 들었다. 그가 입가를 쓰윽 닦으며 물었다.
“배고프니?”
“네? 그게 아니라…….”
하운천이 반이 넘게 남은 만두 접시를 앞으로 밀었다. 자신이 앉아 있는 반대쪽에 앉아 먹으라는 듯. 그리고 다시 식사에 집중한다.
아이는 쭈뼛거리다 밀려오는 만두의 향기에 저도 모르게 탁자에 앉아 버렸다.
언니를 찾아 하루 종일 시장 바닥을 돌아다닌 아이였다. 그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한 것은 당연지사. 아이가 허겁지겁 만두를 베어 물었다. 만두 하나가 사라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여전히 자기 음식 먹기에 바쁜 하운천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가는 것은 착각이었을까.
일 다경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탁자 위에 있던 접시들이 전부 깨끗이 비워졌다.
하운천의 입가엔 포만감으로 인한 기분 좋은 웃음이, 아이의 얼굴에는 어쩔 줄 몰라 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고맙다.”
“예……?”
뜬금없는 하운천의 말에 아이가 당황했다.
“네가 아니었음, 여기 있는 음식들을 나 혼자서 다 먹지 못했을 거야. 자고로 자기 눈앞에 있는 음식은 남기면 안 되는 법이거든.”
무슨 소리지?
아이가 여전히 이해 못하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자, 하운천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도와줘서 고맙다는 뜻이다. 그러니 보답을 해야겠지?”
“보답이요?”
“그래. 네가 날 도와줬으니, 나도 널 도와줄게. 아까 보니 도와줄 사람을 찾고 있었던 것 같은데?”
“아……!”
아이의 큰 눈이 더욱 동그래졌다.
하운천의 뒤에선 단귀륭이 인상을 썼다.
[애송이, 무슨 짓이냐? 지금 네가 남 도와줄 처지라 생각하는 것이냐?]
하운천은 나직이 읊조렸다. 아이는 듣지 못할 만큼의 작은 목소리로.
“어차피 내가 가려 하는 곳도 개방이라는 거지 소굴이잖소. 정보를 취급하는 문파는 개방이 최고라고 하지 않았던가?”
[네놈이 거길 좋은 의도로 가는 건 아니잖느냐? 거지들 쳐 죽이러 가는 것인데…….]
“죽이기 전에 물어보면 되겠지.”
희미하나, 분명 섬뜩함이 느껴지는 미소를 지으며 하운천이 대답했다.
단귀륭도 그가 알아서 할 것이라 생각하고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꼬마야, 나랑 같이 갈래? 아니면…….”
“같이 갈게요!”
아이는 두 손을 꼭 쥐며 당차게 외쳤다.
하운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은?”
“저희 언니 이름은…….”
“꼬마, 네 이름말이다.”
하운천이 씩 웃자, 아이도 활짝 웃으며 말했다.
“제 이름은 유소예요, 연유소.”

거지, 쉽게 말해서 남에게 빌어먹고 사는 자들.
천하에 거지 없는 곳이 없으니, 그들은 곧 눈이요 귀다. 그들로부터 모인 정보란 정보는 거지들의 문파인 개방으로 모이게 되어 개방은 가히 천하제일 정보 단체라 할 수 있었다.
그런 개방의 수백 개가 넘는 분타 중 한곳인 안휘성 육안의 개방 분타의 정문에서 소란이 일고 있었다.
소란의 주인은 하운천이었다.
“실종된 사람을 찾느라, 그 사람의 대한 정보를 알고 싶어 찾아왔다고 몇 번을 말해?”
거지는 거듭되는 설명으로 인해 짜증나는 기색을 보였다.
“개방에선 일급 이하의 정보는 대가를 받고 제공하지만 그 이상은 불가라고 말씀드렸잖습니까.”
“사람이 실종됐다고. 그런데도 꼭 그런 걸 따져야 하나?”
“……안타깝지만, 우리로써도 어쩔 수 없는 일이요.”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실종 사건이 현재 개방에서 조사 중인 사건과 관련된 것이라면, 그것은 분명 특급 이상의 정보일 테니까.
하운천은 실망하는 표정을 짓는 연유소의 눈을 감겨 주었다.
“유소야, 눈 감고 있어.”
연유소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운천은 정문을 지키는 거지에게 한걸음 다가섰다.
“사람 된 예의로써 마지막으로 묻는 거다. 실종된 연유란이란 사람, 그녀의 대한 정보를 얻고 싶다. 말로 할 때 협조하는 게 좋을 거야.”
“말로 할 때? 하! 어린놈이라고 기껏 봐줬더니 뭐?!”
거지는 기가 찼다. 이제 채 약관도 안 된 애새끼가 이리도 힘을 주고 다니다니. 귀한 가문의 자제라면 이해를 하겠다만, 꼴을 보아하니 그것도 아니었다.
“세상 물정 모르는 놈이라 그런가? 감히 개방 분타 앞에서 이리도 오만방자한 모습을 보이다니. 그 태도를 내 친히 고쳐 주마.”
거지가 이를 갈며 하운천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한데.
“이거 놓지?”
싸늘한 음성.
이 정도면 겁을 먹을 줄 알았는데 오산이었다. 결국 매운맛을 보여 줘야 하는 것인가 생각하며 거지는 팔의 힘을 주어 하운천을 그대로 매쳐 버렸다. 아니, 매치려고 했으나 꿈쩍도 하지 않는다.
“어……?”
거지는 당황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들리지가 않았다.
하운천은 피식 웃으며 자신의 멱살을 쥐고 있는 거지의 손목을 잡아 비틀어 버렸다.
“끄흑!”
꺾여 버린 팔에서 올라오는 고통에 거지의 얼굴이 구겨졌다.
하운천은 꺾은 팔을 한 손으로 잡은 채, 나머지 한 손으로 거지의 머리를 잡아 정문 중앙에 있는 힘껏 내리찍었다.
꽝! 꽈직!
오랜 세월을 풍파 속에 지내면서도 흠집 하나 없던 정문에 단숨에 금이 갔다. 그 위로 거지의 입에서 터져 나온 이빨들과 핏물들이 한데 뒤엉켰다.
신형이 허물어진 채 정신을 잃은 거지를 뒤로하고, 하운천은 권력이 담긴 주먹을 내뻗었다.
꽈앙!
산산조각이 난 정문.
하운천은 수십 개의 잔해들을 지나쳐 안으로 들어갔다.
뒤에선 실눈을 빠끔히 뜬 연유소가 쓰러진 거지를 보고 움찔하더니 냉큼 하운천에게 따라붙었다.
“뭐야?”
“네놈은 누구냐! 누군데 감히 이곳의 정문을 부수고 그 더러운 발을 들이미느냐?”
입구에 서 있던 네댓 명의 거지들이 소리쳤다. 낡아 빠진 옷에 땟국물이 좔좔 흐르는 얼굴.
하운천은 턱을 치켜세우며 말했다.
“더러운 건 네놈들 꼬라지가 더 더러운데?”
“저 새끼가!”
거지들 중 한 명이 냉큼 달려들었다.
허리춤의 세 개의 매듭, 삼결제자였다. 그런 그를 말려 세우는 다섯 개의 매듭을 가진 거지.
오결제자, 곧 이곳 개방 분타의 분타주다. 안휘성에서도 꽤 유명한 벽견(劈犬) 운오.
“마침 내가 이곳에 있어서 다행이군.”
자신이 있으니 큰 소란은 없을 거라는 뜻인 듯.
하운천이 운오를 가리키며 단귀륭에게 눈짓을 하자 그가 입을 열었다.
[매듭을 보니 이곳의 분타주인 것 같군. 여기 책임자라는 말이다.]
“그래? 복잡하게 갈 필요 없어서 좋군.”
하운천은 어느새 자신의 바지자락을 늘어 쥐고 있는 연유소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가 운오를 바라봤다.
“당신이 이곳의 분타주인가?”
“그……렇네만.”
대뜸 튀어나오는 반말에 눈썹이 꿈틀거리는 운오.
“찾을 사람이 있어서 이곳에 왔더니 입구에 있던 거지가 들여보내 주질 않아서 말이지. 문을 부셔 놓은 건 미안하게 됐군.”
“입구에서 들여보내지 않았다면, 우리가 내주지 못할 등급의 정보라는 말인데. 섭칠, 그녀석이 설명해 주지 않던가?”
문 앞의 거지 이름이 섭칠이었나.
하운천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설명은 친절히 해 주더군.”
“그런데도 문을 부수고 들어왔다? 그 말은 섭칠도 무사하지 않다는 뜻이고.”
“꼭 알아야 하는 정보니까. 이 아이의 언니가 실종됐거든.”
하운천이 연유소를 가리키며 진지한 어조로 답하자, 운오도 조금은 이해한다는 듯 말했다.
연이은 실종 사건 때문에 안휘성에 있는 거지들이 난리가 난 상태다. 벌써 이십 명이 넘는 소녀들이 사라졌다. 그중에 연유소의 언니라는 아이가 끼어 있을 확률은 무척이나 높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된 것이로군.”
운오는 안쓰러운 눈빛으로 연유소를 바라봤다.
“너의 언니는 우리가 꼭 찾아 주도록 하마. 그러니 집으로 돌아가 소식을 기다려 주겠느냐?”
연유소는 대답하지 않고 하운천을 올려다본다. 그에 하운천이 대신 답해 주었다.
“이 아이는 홀로 자신의 언니를 찾기 위해 온 시장 바닥을 누비고 다녔어. 그런 아이에게 얌전히 집에 가서 기다리라고? 네놈들의 뭘 믿고?”
잠시나마 풀어졌던 운오의 표정이 급격히 굳었다.
“그 언사, 개방을 무시하는 말로 받아들여도 되는가?”
“개방?”
하운천의 목소리도 급격히 차가워졌다.
“그러고 보니 잠시 잊고 있었다.”
소름이 돋을 정도의 싸늘한 음성을 흘린 하운천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뭣이……!”
운오가 숨을 들이켰다. 사라진 하운천이 자신의 코앞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게 아닌가.
“커억!”
곧바로 목을 내준 운오.
하운천의 손아귀에 목이 잡혀 숨통이 막혔다. 틀어쥔 손의 악력은 철봉도 짓이겨 버릴 기세.
운오가 맥도 못 추고 바동거리자, 뒤에 서 있던 네 명의 거지들이 동시에 달려들었다.
하운천은 살기를 피워 올리며 그들을 쏘아봤다.
그 서슬에 주춤거리는 거지들.
“크윽…….”
그러나 운오의 다급한 신음에 재차 몸을 띄운다.
하운천은 운오의 목을 움켜쥔 채 남은 왼손으로 흑우여로장을 펼쳤다.
묵빛 기운이 순식간에 네 개의 장력으로 갈라져 거지들을 덮쳤다.
퍽퍽퍽! 퍼억!
각기 가슴과 복부에 장력을 얻어맞은 거지들이 바닥 위로 처박혀 데굴데굴 굴렀다.
그중 두 명은 쓰러진 채 간신히 고개만을 들어 올리다 이내 축 늘어졌다. 일격에 절명한 것이다.
나머지 두 거지는 겨우겨우 몸을 일으켜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곧 그중 한 명이 몸을 날려 장원을 빠져나가니, 조사 나간 다른 거지들을 부르러 가는 것이다.
남은 한 명은 이를 악물며 하운천을 바라봤다.
자신은 살지 못하리라, 그렇다면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거지는 죽봉을 움켜쥐며 몸 안의 모든 내공을 끌어 올렸다. 공격일변도인 동귀어진의 수법!
파앙!
거지가 몸을 허공으로 띄우며, 가공할 경력이 담긴 죽봉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단숨에 하운천의 머리를 박살 내 버릴 심산.
퍼억!
그러나 파륙음은 거지의 미간에서부터 터져 나왔다.
어느새 쏘아 낸 하운천의 지력(指力)이 그의 미간을 꿰뚫어 버린 것이다.
공격하려던 자세 그대로 떨어져 내리는 거지는 죽기 직전까지도 억울했는지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