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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제일귀 1권(20화)
9장 일 년이란 시간에 반년을 더(2)
선우초설이 방문을 열고 나오자 서늘한 저녁 바람과 함께 붉게 물든 하늘이 그녀를 반겼다.
“예쁘다.”
항상 보는 하늘이지만, 오늘은 유달리 아름다워 보였다. 그녀는 한참을 더 그렇게 하늘을 바라보다 발걸음을 옮겼다.
“어?”
막 자리를 뜨려던 그녀가 멈칫했다.
저 멀리 지붕 위, 그곳에 한 인영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 건물 주변을 지나다니는 세가의 무사들이나 시녀들은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듯 보였다.
그렇다면 발견한 자신이 나서야 하는 일.
“이봐요!”
선우초설이 크게 외치며 빠른 걸음으로 나아갔다. 이윽고 건물 앞에 도착한 그녀는 인영을 자세히 살폈지만 낡아 빠진 옷과 덥수룩한 머리가 얼굴을 가리고 있어 얻은 것은 없었다. 남자라는 것뿐.
“누군데 그곳에 함부로 올라가 있는 거죠?”
사내는 묵묵부답.
고개가 향한 방향을 보니 시선은 선우초설을 향해 있다. 사내는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사람이 물으면 대답을 해야 하는 게 예의 아닌가요? 정체를 밝히지 않으면 무사를 부르겠어요.”
“…….”
그녀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사내는 여전히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선우초설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때마침 근처를 지나가는 무사 두 명이 보였다.
“정호! 천유! 여기 수상한 사람이 있어!”
“초설 아가씨?”
“수상한 자요?”
정호와 천유라 불린 무사들이 그녀에게 빠르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녀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을 바라보자.
“어!”
“응?”
…….
아무도 없다.
“이런, 저희가 또 아가씨에게 당했군요.”
정호와 천유는 이런 일이 자주 있는 일이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항상 장난치는 것을 좋아하는 그녀였다.
“뭐야! 그 사람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거지?”
“하하, 아가씨의 연기 실력은 갈수록 늘어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저희가 매번 당하지요.”
천유가 환하게 웃었다. 옆에서 정호가 말했다.
“그럼 저희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이 장로님의 부름을 받고 가는 길이었었거든요.”
둘은 선우초설에게 예를 올리고 가던 길로 되돌아갔다.
그녀는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했다. 어안이 벙벙했다.
“분명히 있었는데……. 도대체 누구지?”
한참을 고민하던 그녀는 이내, 사내가 위험해 보이지는 않았던 것인지 그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아차, 환자가 기다리고 있는데!”
***
[이제 되었느냐?]
방금 전까지 지붕 위에 서 있던 사내. 그의 뒤쪽에서 팔짱을 끼고 있던 중년인이 물었다. 중년인은 다름 아닌 단귀륭.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군.”
대답대신 혼잣말을 하는 사내는 하운천이었다. 그는 어느새 선우세가에서 벗어나 사람들 많은 시장 길을 걷고 있었다.
길을 가던 사람들은 그의 주위를 지나치게 되자 인상을 찌푸렸다. 오래된 옷에서 묻어 나오는 쾌쾌한 냄새와 누추한 차림새, 영락없는 거지라 생각한 것이다.
단귀륭이 못 봐주겠다는 듯 외쳤다.
[이놈아, 새 옷도 좀 사서 갈아입고 객잔에 며칠 묵으면서 그동안 묵었던 때도 좀 벗겨 내고 하거라! 네놈이 그 무너진 동굴에서 있었던 것이 자그마치 일 년이 넘는다, 일 년이!]
하운천이 슬쩍 웃었다.
“그러게 누가 제대로 확인도 안 하고 무너뜨리라 그랬소?”
[뭐? 이놈이!]
단귀륭이 발끈하면서 달려들었다. 그러나 마구 휘두르는 주먹질은 하운천을 투과하여 허공만 가를 뿐이었다.
단귀륭이 화가 나서 콧김을 뿜어 대자, 하운천은 쿡쿡 웃어 버렸다.
그 모습이 가히 남중일색(男中一色)이며 옥골선풍(玉骨仙風)이라. 지나가던 여인들은 무슨 거지가 저리 잘생겼나 하며 힐끔 뒤돌아보기까지 했다.
“그나저나, 씻기는 해야겠지? 옷도 사야 하고, 오랜만에 제대로 된 밥도 좀 먹어야겠지.”
그러려면 돈이 있어야 했다.
잠시 뒤 하운천이 모습을 드러낸 곳은 정육점이었다. 주인이 환하게 웃으며 그를 맞이했다.
“어서 옵쇼! 찾으시는 게 있으신지요?”
“찾는 게 아니라, 뭐 좀 팔러 왔는데.”
그리 말하며 하운천은 등 뒤에 메고 있던 행낭을 뒤졌다.
곧 정육점 주인의 눈이 뒤집혔다.
궁궐의 잔치가 있는 날이면, 천하 곳곳에서 개발된 수만 가지 요리들 중 가장 훌륭하다 칭송받는 요리를 고르고 골라 황제의 상위에 올린다. 그것이 곧 만한전석(滿漢全席).
그 만한전석에서 꽤 유명하다고 알려진 요리들 중 하나가 바로 곰의 앞발바닥으로 만든 요리다.
그리고 눈앞의 사내는 지금 곰의 앞발을 들고 있다. 그것도 다섯 개나.
“이, 이걸 팔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저한테요?”
“예, 이런 건 안 삽니까?”
정육점 주인이 깜짝 놀라 고개를 마구 저었다.
“안 사다니요! 삽니다, 당연히 사요!”
그는 하운천이 생각을 바꿀까 순식간에 그것들을 챙겼다. 그리고 은자 닷 냥을 내민다.
“헤헤, 이 정도면 후하게 쳐 드리는 겁니다.”
하운천은 은자들을 받지 않고 고개를 돌려 단귀륭을 바라봤다. 그가 고개를 가로로 저었다.
하운천은 다시금 정육점 주인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후하게 쳐 주신 거란 말씀이죠?”
“무, 물론입니다.”
하운천은 오른손을 뻗었다. 은자대신 정육점 주인이 쓰던 칼이 손에 잡혔다.
“부지런하시군요. 날이 잘 서 있는 걸 보니.”
그의 말대로 칼은 무척이나 예리하게 갈려 있었다. 주인은 무슨 소릴 하나 싶어 그저 하운천을 바라만 보았다.
순간 하운천의 손이 원을 그렸다.
툭! 툭툭툭! 데구르르.
“허억!”
정육점 주인이 경악하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계산대 뒤쪽에 걸려 있던 죽은 돼지 네 마리, 그것들의 머리가 한순간에 잘려 나가 바닥을 굴렀다. 죽은 지 얼마 안 된 놈들인데, 잘린 목에서는 피한 방울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하운천은 하얗고 가지런한 이를 내보이며 웃었다. 웃는 얼굴로 칼을 집어던졌다.
퍼억!
칼끝이 바닥을 굴러다니는 돼지머리 눈깔 위로 틀어박혔다.
섬전 같은 빠르기라 정육점 주인의 눈에는 칼이 날아가는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아니, 칼을 던진 줄도 몰랐다.
“베는 맛이 좋네요.”
“히이익!”
주인은 등골이 오싹해지며 왠지 자신의 목 언저리가 서늘해진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은자 닷 냥이 순식간에 오십 냥이 되었다.
그 정도면 한 가족을 일 년 넘게 부양할 수 있을 정도의 양이다. 그리고 곰 앞발 다섯 개의 가치도 정확히 그 정도였다.
단귀륭의 만족 어린 웃음에 하운천은 은자를 받아 품속으로 갈무리했다.
그러고는 눈빛으로나마 벌벌 떨고 있는 정육점 주인에게 사죄하며 그곳을 떠났다.
“꼭 그렇게 협박을 해야 했소?”
어딘가에 있을 객잔을 찾아 시장 길을 돌아다니며, 하운천이 물었다.
단귀륭이 당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다 수련의 일환이라 생각하거라. 네놈의 말투는 무인들의 그것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그리고 그놈이 먼저 사기를 치려 했잖아?]
“그건 그렇지만.”
하운천은 자신의 말투를 고치려고 노력하는 중이었다.
단귀륭의 말을 빌어 보자면 깔보이기 쉬운 말투고, 그러면 별 같잖은 날파리들이 달라붙어 귀찮아질 것이라나 뭐라나.
자신도 남의 이목을 끌기는 싫으니 그러겠다고 했다.
둘은 곧 시장의 중심에 들어섰다. 그러자 이쪽을 봐도, 저쪽을 봐도 객잔이라.
하운천은 그중에서 가장 깔끔해 보이는 신웅객잔이 마음에 들었다. 그가 입구의 휘장을 걷고 안으로 들어가자, 순백색의 점소이가 그를 맞이했다.
“어서 옵쇼!”
점소이가 후다닥 다가와 그를 맞았다.
거지같은 차림에도 점소이는 하운천을 홀대하지 않았다. 겉모습이 중요한 게 아니다.
“불편하게 생각지 마십시오. 저희 객잔은 모두 계산을 선불로 치러 드리고 있습니다.”
“그래?”
하운천은 은자 한 냥을 내밀며 말했다.
“일단 몸을 씻을 거니까 방 좀 내 줘.”
“예!”
점소이는 ‘역시,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해선 안 되는구나.’라고 생각하며 하운천을 이 층의 객실로 모셨다.
“목욕 후에 식사도 준비해 놓을까요?”
점소이가 손을 비비며 물어오자 하운천이 고개를 끄덕이며 객실의 문을 닫았다.
항상 준비를 갖추고 있는 듯, 객실 안에는 이미 뜨거운 물이 마련되어 있었다.
하운천이 옷을 벗었다. 그러자 그의 탄탄한 상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우락부락한 것이 아닌, 자연스러운 근육과 몸매. 그에게서는 더 이상 과거의 모습을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그는 일 년 반 동안 묵은 때를 말끔히 씻어 낸 뒤, 객잔을 찾아오면서 구입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잘생긴 거지가 말끔한 모습으로 변했다. 그 모습은 객잔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단귀륭만 불만이다.
[쯧쯧, 환골탈태를 경험하면 피부도 탱탱해지고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인데. 이런 놈이 뭐 그리 미남이라고.]
하운천은 황급히 머리를 털어 부스스하게 만들었다. 그러자 원래의 덥수룩한 머리가 되어 얼굴을 반쯤이나 가려 버렸다.
그 상태로 점소이의 안내를 받아 자신의 식사가 차려진 식탁에 앉았다. 상에서 풍겨 오는 향취의 절로 군침이 돌았다.
머릿속으로 지난 일 년 동안의 고생이 스쳐 지나갔다. 무너진 동굴 속에서의 생활.
천운이었던가. 무너진 동굴의 바닥이 허물어지며 지하 깊숙한 곳으로 삼켜진 하운천. 눈을 뜨고 나니 반경 이십 장에 이르는 공허한 공간이었다. 출구는 머리 위로 뻗어 있는 까마득한 동혈, 먹을 거라고는 축축한 이끼뿐.
단귀륭은 수련하기에는 딱 좋은 환경이라며 기꺼워하니 하운천으로서는 그저 그의 말을 따를 뿐이었다.
‘처음엔 막막했지만 막상 지내고 나니 딱히 불편한 점은 못 느꼈었지.’
하운천은 짧은 회상 속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재빨리 시저를 들어 탕초리척 하나를 입속에 물었다.
우물우물.
일 년 만에 육식이라.
담백한 육질이 입안에서 사르르 녹았다.
맛있다. 정말 맛있다.
하운천은 나머지 음식들도 한 개씩 맛을 본 뒤 게걸스럽게 이것저것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그가 한참 식도락을 즐길 무렵, 객잔 안으로 한 여자아이가 쪼르르 들어왔다. 대략 여덟 살 정도나 되었을까?
사슴 같은 눈망울에 눈같이 하얗고 고운 피부, 단정하게 양 갈래로 땋은 뒷머리와 일자로 반듯하게 잘린 앞머리는 아이의 귀여운 얼굴을 더욱이 사랑스럽게 만들어 주었다.
한데 아이는 혼자였다. 조그마한 두 손은 주먹을 쥐듯 무언가를 쥐고 있었다.
“저기요.”
아이는 객잔 안을 두리번거리다 한 탁자로 다가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탁자에선 두 사내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가 갑작스레 다가온 아이에게 시선을 주었다.
사내들의 등에는 각기 검과 도가 한 자루씩 메어져 있었다. 무인인 듯.
아이도 그 때문에 다가간 것이리라.
“혹, 소녀를 도와주실 수 있으신가요?”
고개를 빠끔히 올려 묻는 아이의 모습이 여간 귀여운 게 아니라, 사내들의 얼굴엔 옅은 미소가 번졌다.
“그래, 꼬마 아가씨께서 무슨 도움이 필요하신가?”
“그게…….”
망설임 끝에 뒷말을 잇는다.
“저희 언니가 시장에 볼일이 있다며 나갔는데, 벌써 오 일째 돌아오지 않고 있어요.”
불안한 기색이 역력한 아이의 얼굴, 사내들의 얼굴도 살짝 굳는다.
“오 일째? 무슨 일이 있어도 있는 것이 확실하구나. 부모님은 없는 것이냐?”
“저는 언니랑 할아버지랑 살아요. 그런데, 할아버지는 대장간 일을 하시는데 그게 이곳에서 좀 멀어요. 그래서 집에는 보통 한 달에 한 번씩 들르시곤 하는데…….”
말하면서 눈가가 조금씩 촉촉해져 가는 아이.
사내들은 그런 아이를 안타깝게 생각하며 당연히 도와주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