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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제일귀 1권(19화)
8장 각성(3)
하운천의 눈동자가 조금씩 흔들거리다 이내 크게 요동쳤다.
견소소, 자신의 어머니의 모습.
그녀는 이번에도 슬픈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을 향해 가녀린 손을 뻗어 온다.
그때, 여섯 마리의 호랑이들 중 한 마리가 그녀가 서 있는 곳을 지나쳤고, 그녀의 모습이 허깨비처럼 사라져 버렸다.
“어머니―!!”
하운천의 몸이 들썩거렸다.
그 모습을 본 호랑이들의 눈에서 섬뜩한 안광이 폭사됐다.
크와아악!
아가리를 쩍 벌리고 순식간에 들이닥치는 놈들!
푸욱, 푸확!
차가운 땅바닥 위로 핏물과 살점이 튀었다.
나무 위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단귀륭의 눈이 더없이 커졌다. 털끝이 곤두서고 몸 전체에 전율이 흘렀다.
[큭큭 이제야 가르칠 맛이 좀 나겠구나, 애송이.]
단귀륭의 눈에, 벌렸던 호랑이의 아가리 깊숙이 틀어박혀 있는 하운천의 오른팔이 비춰졌다.
그의 손은 호랑이의 뒷목을 뚫고나와 있었다.
하나 미처 피하지 못했는지, 양 허벅지와 허리 그리고 왼쪽 어깨에 다른 호랑이들의 송곳니가 깊숙이 박혀 있다. 그럼에도 하운천의 기도는 활화산처럼 타오른다.
형상화된 묵빛 마기가 그의 몸을 타고 흘렀다.
그것을 느꼈는지 그를 물어뜯고 있던 놈들이 연신 움찔거렸다. 하운천은 쑤셔 박았던 오른팔을 뽑아내며 마귀와도 같은 기합성을 토해 냈다.
그러자 광풍이 치솟았다.
쾅쾅! 콰앙!
호랑이들이 사방팔방으로 튕겨져 나가 고목과 바위 위로 처박혔다.
하운천이 중심을 잡고 머리를 흔들어 대는 놈들을 무심한 눈길로 훑어보았다. 그리고 그가 천마제운보를 펼쳐 신형을 감추자, 놈들이 기척을 쫓아 두리번거렸다.
퍼억!
파륙음과 함께 호랑이의 머리가 형체도 남기지 못하고 터져 나갔다. 그리고 또 한 놈, 두 놈, 세 놈…….
퍼억! 퍼억!
모습은 보이지 않으나, 분명 하운천의 짓이었다.
그렇게 마지막 호랑이의 육편과 뇌수들이 허공으로 비산함과 동시에 하운천이 나타났다.
피를 흠뻑 마신 그의 두 손이 붉게 빛났다.
가진 힘을 모두 쏟아 낸 것일까. 그는 고개를 들어 간신히 단귀륭을 바라본 뒤, 정신의 끈을 놓아 버렸다.
털썩.
하운천의 신형이 허물어졌다. 잠시 뒤, 단귀륭이 모습을 드러내자 하운천의 몸이 두둥실 떠올랐다.
단귀륭이 흡족하다는 듯 말했다.
[잘했다, 애송이. 그리고 네놈의 살고자 하는 의지도 잘 보았다. 본좌가 장담건대, 네 녀석을 일 년 안에 극경의 경지로 들여보내 주마.]
그는 히죽 웃으며 쓰러진 하운천을 데리고 숲 속을 벗어났다.
죽은 늑대와 호랑이의 시체들이 줄줄이 단귀륭을 뒤따랐다.
그날로부터 세 달이라는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
하운천의 일상은 변한 게 없었다. 눈뜨고 나서부터 잠들기 전까진 온통 수련. 일주일의 한 번은 사냥을 나갔다.
무공을 익히면 뱃가죽도 늘어나는 것일까? 처음 잡아 왔던 호랑이와 늑대들을 손질하여 얻은 고기는 십 일도 채 안 되어 하운천의 입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때문에 산속에 맹수란 맹수들은 일주일마다 찾아오는 두려움에 시달려야 했다.
단귀륭은 하운천에게 실전 경험을 쌓는답시고, 사냥을 나설 때마다 수십 마리의 맹수들을 끌고 왔다.
늑대에서부터 호랑이는 물론이고 곰과 뱀, 어떨 때는 독수리까지. 맹수들은 단귀륭이 주입시키는 귀기(鬼氣)의 영향으로 보통 때에 비할 바가 못 되는 움직임을 보였다.
뱀의 공격은 무림 살수들의 그것과 같고, 늑대와 독수리의 움직임은 무림인들의 표표한 신법보다 뛰어났다. 곰의 앞발은 나무기둥도 수수깡처럼 부러뜨렸고 호랑이의 선천적인 기도는 실로 몸을 움츠리게 만들었다.
그리고 하운천은 그것들을 발판삼아 하루가 다르게 강해져만 갔다.
“후우.”
어느 때와 다름없이 아침 수련으로 천마대력신공의 운기를 마친 하운천.
아니, 평소 때와 다르다.
단전으로부터 느껴지는 강맹하면서도 어두운 기운.
완전한 마기.
영약의 기운들을 전부 순화시킨 것이다.
그동안 몰랐었는데, 기운들이 전부 마기로 변하고서부터는 느낄 수 있었다.
하단전이 가득 차고도 남아 넘쳐흐를 정도의 양이다.
단귀륭은 때가 왔음을 알아차렸다.
[애송이.]
“예, 단 사부.”
어딘지 모를 위엄이 하운천의 목소리에 담겼다.
[저번에 네 녀석에게 말해 두었던 것, 잊지 않았겠지?]
“영약의 기운을 전부 흡수하게 되면, 바로 중단전을 개방시킨다는 것 말이오?”
단귀륭이 고개를 끄덕이고, 하운천이 다소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에 대한 위험성을 들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그저 중단전만 개방시키면 되는 줄 알았다. 한데, 생각해 보니 그게 아니었어. 하단전의 기운이 중단전으로 치솟아 그곳을 개방시키면, 기운은 곧 전신의 혈맥과 세맥으로 퍼져 나가 그것들을 타통시킨다. 그리고 중단전으로 돌아가 안착한다. 그것이 정상이다.]
하지만 하운천의 몸은 정상이 아니었다.
상단전이 애초에 열려 있었다. 그 이유를 모른다. 그렇기에 어떻게 될지도 몰랐다.
[그러나 네놈의 기운은 중단전을 개방시킨 후 전신을 대주천하여 세맥들을 타통시킨 뒤, 곧바로 상단전으로 진입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분명 몸에 무리가 올 것이다.]
단귀륭이 경고 어린 어조로 말했다. 무리라는 것이, 어쩌면 죽음이라는 것과 직결되어 있다는 뜻이므로.
그런데 하운천의 긴장했던 표정이 이내 덤덤하게 변한다. 이내 싱긋 웃어 보이기까지 하니…….
“단 사부처럼 강해지려면 그 정도 역경쯤은 있어야겠지. 그 정도도 이겨 내지 못한데서야 애초에 ‘그 정도’밖에 안 되는 놈이라는 거니 말이오.”
[훗, 그동안 혓바닥 굴리는 솜씨만 늘었구나.]
“이것도 전부 사부가 가르쳐 준 거잖소?”
하운천이 멀건 웃음을 지어 보이자 단귀륭도 그를 따라 피식 웃어 버렸다.
잠시 뒤, 둘은 함께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동굴 중앙에 멈춰 선 그들, 단귀륭은 지켜보겠다는 듯 팔짱을 꼈다. 하운천은 그의 시선하에 가부좌를 틀고 천마대력신공 이층(二層)을 펼쳤다.
순식간에 주변을 장악하는 마기는 동굴 밖까지 뻗어 나간다.
푸득, 푸드득!
마기가 점차 영역을 넓혀 가자 숲 속에 있던 새들이 도망치듯 하늘로 솟아올랐다.
반경 십 장을 가득 채운 마기가 순간, 채 촌각도 안 되는 시간에 하운천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쿠웅!
묵직한 울림과 함께 하운천의 몸이 한차례 붕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하단전에서 소주천하며 맹렬하게 소용돌이치던 내력들이 잠잠해졌다. 폭발하기 직전의 화산처럼, 곧 단전의 기운들이 한순간에 솟구쳐 올랐다.
파―앙!
찻잔이 산산조각 나는 소리가 길게 울려 퍼졌다. 하운천의 고개가 뒤로 꺾이고, ‘퍽’ 하고 북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수백 번이나 이어졌다.
단귀륭은 그것이 중단전을 개방하고 나서 처음 대주천하는 진기들이 세맥들을 타통시키는 소리임을 알고 있었다.
강호의 무인들이라면 누구라도 염원하는 경지, 구경의 경지에 들어선 것이다.
단귀륭은 안도하면서도 가슴 한편에서는 노심초사하는 마음이 떠나질 않았다.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지금부터가…….’
대주천한 진기들이 이대로 중단전에 자리 잡느냐, 아니면 제멋대로 상단전으로 올라가느냐.
그리고 세상일은 종종 바라지 않는 쪽으로 움직이기 마련이다.
쿠오오오!
태산의 폭포가 역류하듯, 지독히도 극마의 기운을 띤 내력들이 승천(昇天)할 준비를 했다.
그 기세가 너무나도 굳건해서 하운천은 자신의 내력을 의지대로 다스릴 수 없는 상황이었다.
‘원하는 대로 날뛰어라, 그 어떤 지독한 고통이 찾아와도 버텨 내 주겠다.’
하운천이 그 말을 되새이며 다짐했다.
그것이 가소로운 듯, 몸속에 내력들은 수차례 요동치더니 번개처럼 상단전의 중심부로 파고들었다.
‘크아아아악!!’
소리 없는 비명.
전신에 핏줄이 툭툭 불거져 나오며, 몸에서 풍겨져 나오는 가공할 기운에 입고 있던 옷이 재처럼 화했다.
그 과정에서 찾아오는 고통은 말로 형용할 수 없었다. 전신이 칼끝으로 난도질당하는, 눈동자가 날카로운 종이에 수십 번 베이는, 온몸이 불속에 달궈지는.
그런 고통의 수십, 수백 배에 달하는 고통이 하운천을 덮쳤다. 단숨에 혀라도 깨물어 자살하고 싶은 심정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크윽…… 이까짓…… 고통쯤, 어머니가 참아 왔던…… 것에 비한다면……!’
하운천은 어금니가 부스러져라 악물며 고통을 참아 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는 단귀륭은 답답하기만 했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멈추지 않는 경련이 계속된다. 불거져 나온 핏줄은 건들기만 해도 터질 것 같았다. 거기다 상단전의 오른 마기들이 곧 폭주할 듯 날뛰니 이대로 있다간 죽거나 마기에 취해 이성을 잃을 것이다.
그로인해 남는 것은…….
시체, 혹은 마(魔)에 물든 살귀.
단귀륭이 무언가를 결심한 듯 손을 뻗자 화섭자(火攝子)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화섭자의 불씨가 치솟아 오를 입구가 향하는 방향.
그곳에 심지가 있었다.
동굴 전체에 규칙적으로 퍼져 있는 둥근 구체와 이어져 있는.
‘반 시진만 더 지켜보겠다, 애송아. 그 상태로 반 시진 이상이 소요된다면…….’
동굴 전체가 무너져 내릴 것이다.
애초에 살귀가 되느니 죽는 것을 택하겠다는 하운천과 단귀륭이 취해 놓은 조치였다.
단귀륭이 들어 올린 오른팔을 고정시킨 채 하운천을 지켜보았다.
동굴은 이미 마기로 가득 차 있었다. 고절한 경지의 무인도 지금 상태인 이 동굴에는 쉽사리 드나들기 힘들 것이다. 그만큼 지독한 마기였기에…….
또옥, 또옥.
동굴 천장에서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지는 물방울, 마치 시간을 재고 있는 듯.
이내 물방울들이 한데 모여 얕은 웅덩이를 만들 만큼의 시간이 흘러갔고, 단귀륭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목숨을 걸어도 안 되는 일은 안 되는 것이다. 냉정하지만 그것이 현실.
‘본좌와 네놈과의 운명은 여기까지인가 보구나.’
동굴이 무너지면 하운천은 죽을지 몰라도, 자신은 아니다.
다시금 천하를 누비며 또 다른 운명을 기다려야 하는 거겠지. 백 년을 기다렸기에 기다리는 것에는 익숙하다. 다만 늦지 않기를 바랄 뿐…….
단귀륭은 왠지 모를 비통한 마음에 눈가를 찌푸리며 천천히, 아주 천천히 바람을 일으켰다.
화아악!
화섭자의 덮개가 열리며 불씨가 쏟아져 나왔다. 불이 붙은 심지는 꽁무니 빼듯 타올랐다.
총 열 가닥의 심지가 모습을 감추고, 일순 정적과 함께 주위를 삼켜 버릴 정도의 폭발음이 일었다.
콰콰쾅! 콰콰콰앙!
어마어마한 진동과 함께 무너져 내리는 동굴. 그곳은 이제 삼 개월 전의 그곳처럼,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금 고요함에 잠겨 버렸다.
9장 일 년이란 시간에 반년을 더(1)
“끄아악!”
한 사내가 고통에 몸부림쳤다. 그는 엎드린 자세에서 엉덩이만을 삐쭉 내밀고 있었다.
“끄아아악!”
사내가 재차 비명을 지르며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끄, 끄아…….”
“아이 참!”
사내가 열 손가락을 잘근잘근 깨물며 다시 비명을 지르려고 하던 차에, 한 소녀가 기가 차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직 침은 놓지도 않았다구요! 무슨 나이 사십 먹은 아저씨가 이렇게 겁이 많아요?”
“하, 하하. 그렇소?”
사내가 멋쩍은 듯 턱을 긁적였다. 그러다가 소녀의 손에 들린 삐쭉한 침을 보자 황급히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한심해!
소녀는 속으로 생각하며 침을 있는 힘껏 내리꽂았다.
“끄오오!”
오른쪽 엉덩이의 침이 깊숙이 틀어박히자, 사내는 닭 못지않은 울음소리 비스무리 한 것을 내질렀다.
소녀는 망설이지 않고 반대쪽 엉덩이에도 침을 놓았다. 그러고는 손을 탁탁 털며 일어났다.
사내는 소녀를 향해 궁금한 점을 물었다.
“그런데 원래 엉덩이에 같은 곳에도 침을 놓소?”
소녀가 싱긋 웃었다.
“그럼요. 이게 바로 둔부이침혈이라는 것이에요. 선우세가에만 전해져 내려오는 침술이죠.”
꾀병에 즉효가 있는.
소녀는 뒷말을 삼켰다.
“하하, 그렇소? 아무렴, 연화선녀께서 놓아 주는 침인데 어딘들 무슨 상관이겠소.”
“그럼.”
소녀, 선우초설은 목례를 하고 자리를 떠났다. 다음 환자가 있는 곳으로 향하는 것이다. 그녀가 떠난 자리는 선우세가의 시녀들이 대신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