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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제일귀 1권(18화)
8장 각성(2)
동굴 밖으로 나오자 아침 햇살이 둘을 비추었다. 적응이 덜 된 눈을 찌푸리며, 하운천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온 사방이 숲이며, 나무다. 어디로 들어가든 사냥감이 있을 것만 같다.
하운천이 전면의 숲 속으로 들어갔다. 그는 목검을 휘둘러 진로를 막는 나뭇가지와 수풀들을 쳐 냈다.
한참을 걸어 도착한 숲 속 깊은 곳, 폐부 깊숙이까지 스며드는 상쾌한 공기가 그를 반겼다.
그런데, 너무 조용하다. 불안한 기류가 감도는 고요함……. 새소리와 바람 소리, 심지어는 나뭇잎 바스락거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뭐, 사냥하기엔 안성맞춤이군.”
만족하는 표정을 지으며, 하운천은 내공을 끌어 올렸다.
파앙! 팡, 팡!
순식간에 허공으로 솟구쳐 올라 커다란 나무의 나뭇가지를 밟고 꼭대기까지 올랐다. 한 마리 새와도 같은 몸놀림.
물론, 아직은 서투른 경공이나, 이십 일 동안 수련한 것 치고는 꽤 놀라운 움직임이었다.
하운천은 발아래를 굽어보았다.
그의 눈에 희끗희끗한 검은 그림자가 잡혔다.
‘늑대?’
그것도 다자란, 검은 털을 가진 늑대.
여간 사납고 포악하게 생긴 것이 아니다. 하운천의 목구멍으로 침이 한가득 흘러 들어갔다.
꿀꺽.
긴장한 그에게 단귀륭이 물었다.
[눈앞에 사냥감이 나타났는데 뭘 하고 있는 것이냐?]
“단 사부, 지금 저 늑대를 잡으라는 것이오?”
[그럼 네놈 눈에는 저게 망아지로 보이느냐? 어물거리지 말고 냉큼 가서 잡아오너라.]
단귀륭의 불만 가득한 음성에 하운천은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해 왔던 수련을 떠올리자니 못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운천은 경공을 펼쳐, 늑대 근처의 나무 위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기다렸다.
늑대는 어슬렁거리며 하운천이 있는 나무 바로 아래로 걸어 들어왔다.
‘조금만 더…… 조금만, 조금만…… 지금!’
쐐에엑!
하운천은 단숨에 뛰어내려 머리 위로 쳐들었던 목검을 휘둘렀다.
퍼억!
정확히 늑대의 목을 가격한 그는 땅을 짚고 뒤로 물러났다. 늑대는 숨이 막혔는지 연신 ‘컹컹’거렸다.
하운천이 재차 몸을 날렸다.
화살처럼 찔러 들어가는 검. 위력을 한곳의 집중한 찌르기!
푸확!
생살을 꿰뚫는 진득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목검은 늑대의 미간에 틀어박혀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진검과도 같다.
하운천이 검을 뽑아내며 묻은 피를 털어 내자, 늑대는 몸을 부르르 떨어대다 축 늘어져 버렸다.
의외로 수월했다. 아니, 쉬웠다.
하운천은 새삼 자신이 강해지고 있다는 걸 느꼈다.
사삭, 사삭!
그때, 수풀이 진동했다. 그리고 나타나는 한 무리의 늑대들.
크르릉, 크릉!
살기 짙은 울음소리가 하운천의 맥박을 자극했다. 가슴이 쿵쾅댔다.
위험하다.
지금 상황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머릿속으로 경종이 울렸지만 몸이 따라 주지 않았다.
다리가 얼어붙었다. 늑대들의 살기가 그의 다리를 옭아맨 것이리라.
덜덜 떨려 오기 시작하는 손과 다리. 그 순간, 단귀륭의 가르침이 떠올랐다.
‘검을 들었다면, 그 어떤 상황에서도 동요하지 마라. 자신만을 생각하고 검만을 생각하며, 적을 죽일 수 있는 최상의 경로만을 생각해라. 그리고 잊어라. 두려움도 잊고, 그 모든 것도 잊어라.’
하운천의 눈빛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그와 함께 몸도 마음도 잔잔한 호수와 같다.
크와앙!
십여 마리의 늑대들 중에서 한 놈이 튀어 올랐다. 그리고 묵직하나 기겁할 빠르기로 앞발을 후려쳤다.
그러나 촤악― 하는 파공음과 함께 빗나갔다.
어느새 안개처럼 스르륵 하고 한 걸음 옆으로 물러나 있는 하운천, 그가 펼친 보법은 천마제운보의 그것이다.
이어 하운천이 내력을 끌어 올리자, 목검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번쩍!
한줄기 섬광과 함께 공격했던 늑대의 목이 반쯤 잘려 나갔다. 그리고 곧 동료의 죽음에 분노한 다른 늑대들이 하운천을 덮쳤다.
좌우에서 동시에 날아드는 놈들!
“큭!”
하운천이 다시금 천마제운보를 밟아 갔으나 늑대의 앞 발톱이 그의 등을 훑었다.
세 가닥의 붉은 상처에서 핏물이 튀었다. 하운천은 이를 악물고 검을 올려쳤다.
빠각!
턱뼈가 함몰되며 저만치로 튕겨져 나가는 늑대! 그 방향에 서 있던 다른 두 마리의 늑대들과 함께 나무 기둥으로 처박혀 버렸다.
그사이, 한 마리의 늑대를 더 해치운 하운천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의 발목에 생긴 깊은 이빨 자국에서 피가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검을 휘두르는 순간 다른 놈에게 물어뜯긴 것이다. 피할 수 없는 공격이었다.
싱싱한 살점을 쩝쩝 씹어 대는 놈, 그 주위로 남은 여섯 마리의 늑대가 둘러섰다.
하운천은 검을 지팡이삼아 몸을 일으켜 세웠다.
몸을 활처럼 굽혔다 쏘아져 오는 두 마리의 늑대들.
하운천이 눈을 부릅뜨며 그중 한 마리의 아가리에 검을 쑤셔 박았다. 그 후 검을 놓아 버린 그는 좌장을 뻗어 다른 늑대의 배 위로 꽂아 넣었다.
퍼억!
경력이 실린 듯, 가죽 터지는 소리와 함께 피와 내장들이 흘러내렸다.
“후욱, 후욱.”
하운천이 잠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이십 일 동안 순화된 내공들은 영약의 기운 중 극히 일부분.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음에도 거의 소진되었다시피 했다.
남은 늑대는 아직도 다섯 마리.
단귀륭은 하운천을 시험이라도 하는 양, 나무 위에서 가만히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하운천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사냥감에게 죽을 수는 없지!”
동시에 그의 신형이 흐릿해졌다.
다시금 펼쳐지는 천마제운보!
사라졌던 하운천이 맨 뒤쪽에 서 있던 늑대의 바로 위에서 나타났다. 그는 내공을 끌어 올리며 허공에서 떨어져 내리는 힘을 더해 오른발을 내리찍었다.
콰직!
늑대의 대가리가 바닥에 부딪쳐 짓이겨졌다.
하운천이 시선을 옮겨 남은 늑대들을 쫓았다. 놈들은 이미 몸을 쏘아 자신에게 짓쳐들어오고 있었다.
수도(手刀).
하운천이 수도의 자세를 취했다. 그가 오른손을 수직으로 내리긋자, 그 궤적에 걸린 늑대가 각혈을 토해 내며 쓰러졌다.
이번엔 수평으로 베어 냈다.
스팟!
진검 못지않은 예기가 늑대의 급소를 갈랐다. 멈추지 않고 휘둘러지는 수도. 그간 수련해 왔던 베기의 모든 자세가 무의식적으로 쏟아져 나왔다. 파죽지세인 검격.
일검이 휘둘러질 때마다 늑대의 목이 허공으로 치솟았다.
털썩.
진이 빠진 듯, 주저앉아 버리는 하운천, 그의 주위로 십여 마리의 늑대 시체가 산을 이뤘다.
하운천은 눈을 꾸욱 감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가슴속에서 피어오르는 감정. 그것은 살았다는 안도감도, 살아 있는 생명을 죽였다는 찝찝함도 아닌, 왠지 모를 희열이었다.
그는 머리를 흔들며 마음을 비웠다. 이윽고,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단귀륭을 바라봤다.
“단 사부!”
자신은 사냥감을 손질하는 법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단귀륭은 분명 알 것이라 생각하고 그를 불렀으나, 그는 그저 묵묵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
한데 자세히 보니 단귀륭의 시선은 하운천을 향하고 있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의 뒤쪽.
하운천이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무, 무슨!”
그는 너무 놀라 황급히 몸을 뒤로 물렸다. 지금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
턱, 턱, 턱.
놈이 수풀을 지르밟고 걸어 나와 모습을 드러냈다.
찬란한 광채를 머금은 눈동자와 석쇠도 순식간에 찢어발길 것만 같은 송곳니, 통나무보다 굵고 강건한 다리, 황금빛 털 위에 그려진 검은 무늬.
맹수의 왕 호랑이였다.
문제는 그것이 한 마리가 아니라는 점. 먹이를 눈앞에 둔 호랑이는 총 여덟 마리였다.
크르르.
놈들은 입맛을 다시는 듯 낮은 목울음과 함께 끈적끈적한 액체를 흘렸다.
하운천은 살며시 늑대 아가리의 박혀 있던 목검을 뽑아 들었다. ‘촤악’ 하며 뽑힌 검 뒤로 진득한 핏물이 쓸려 나왔다.
이번엔 정말로 위험하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숨이 가빠 왔다. 하운천은 급박한 표정으로 단귀륭을 바라봤으나, 돌아오는 건 무심한 눈길.
문득 이 상황이 그에 의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단 사부, 궁금한 것이 있소.”
[말해 보거라.]
“지금 이렇게 수련해서, 단 사부처럼 강해지려면 얼마만큼의 시간이 필요한 거요?”
[본좌처럼?]
“예.”
[오 년.]
“…….”
[재능이 있다면 삼 년.]
“……더 빠르게는 무리…… 입니까?”
[미친놈. 극경의 경지가 애들 장난인 줄 아느냐? 삼 년도 그나마 네놈의 그 희한한 체질 탓에 가능한 것인 줄 알거라.]
“하지만 어머니가……!”
[그만, 지금은 잔말 말고 수련에 집중하거라. 이렇듯 시간 낭비하지 말고.]
십 일 전의 대화다.
대답은 아니라고 했지만, 그동안 봐 왔던 하운천의 재능이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속삭이고 있었다.
[네놈이 진정 양능(良能)이고 천골(天骨)이라면, 그 내면에 아직 발휘되지 않은 진정한 재능을 내보여 보거라.]
팔짱을 낀 채 홍채(紅彩)를 머금은 눈을 부릅뜨는 단귀륭, 보이지 않는 무형의 기운이 그에게서부터 쏘아져 나왔다.
그 기운들은 빛살처럼 호랑이들의 미간으로 빨려 들어갔다.
크오오오!
크아아앙!
동시에 여덟 마리의 호랑이들이 발작하듯 날뛰기 시작했다. 하운천은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 목검을 움켜쥐며 자세를 취했다.
순간, 태풍 같던 호랑이들의 움직임이 거짓말처럼 멈췄다. 그리고 천천히, 놈들의 시선이 하운천에게 집중됐다.
혈안(血眼).
말 그대로 피를 머금은 듯한 광기 어린 여덟 쌍의 눈동자.
하운천은 놈들의 살기가 자신의 목을 옥죄어 오는 기분을 느꼈다. 주춤주춤 물러나는 그.
턱.
작은 돌부리에 걸려 신형이 비틀거렸다.
그것이 신호가 되어 호랑이들이 허공을 날았다.
크왕!
천둥 같은 포효와 함께 놈의 앞발이 쇄도했다. 하운천이 목검을 휘둘러 맞부딪쳤으나.
콰앙!
육중한 충격에 뒤로 튕겨져 나갔다.
중심도 잡지 못한 그에게 다른 호랑이들이 짓쳐들어왔다.
“컥!”
놈들의 억센 발톱이 하운천의 어깨와 허벅지에 틀어박혔다. 그 고통에 하운천이 몸을 비틀자, 살점이 뜯겨져 나가며 핏물이 허공을 수놓았다.
그 와중에도 붙들고 있는 목검.
하운천이 메말라 버린 우물 같은 단전에서부터 남은 내력을 끌어 올렸다. 곧 목검이 진동하자, 사선으로 빠르게 베어낸다.
퍼억! 빠각!
파륙음과 나무 부러지는 소리가 동시에 터져 나왔다.
얼굴 반쪽이 떨어져 나간 호랑이와 두 동강 나 버린 목검.
하운천이 당혹감에 어금니를 악물었다. 그러나 정신을 수습할 틈도 없이 날아드는 호랑이들.
하운천은 허리를 숙여 낫처럼 휘둘러지는 호랑이의 앞발을 피해 내고는, 부러진 목검의 뾰족한 부분을 치켜세워 그대로 올려쳤다.
푸욱!
섬뜩한 소리와 함께 놈의 뱃속으로 틀어박히는 검에 공격했던 호랑이가 경련을 일으키며 쓰러졌다.
하운천은 늑대에게 했던 것처럼 수도의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무리였음인가, 뒤받쳐 주지 않는 내공과 보통 때보다도 뛰어난, 눈으로 쫓기 힘든 움직임을 보이는 호랑이들. 깊고 숱한 상처들.
모든 것이 최악의 상황이었다.
하운천은 천마제운보를 펼쳐 어떻게든 버텨 보려 안간힘을 썼지만…….
촤아악! 퍽!
가슴팍을 후려치는 충격과 함께 일 장여를 날아가 처박혀 버렸다. 그가 ‘쿨럭’ 하는 기침과 함께 피를 게워 냈다. 입뿐만 아니라, 쩍 벌어지고 찢겨져 나간 상처들 사이에서도 쉬지 않고 핏물이 새어 나왔다.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모습.
크르릉. 크릉.
죽지 않고 남은 여섯 마리의 호랑이들이 울음소리를 내며 그를 에워쌌다.
그 모습을 비추는 하운천의 동공이 심히 흔들렸다. 그리고 이내, 조금씩 흐릿해진다.
온몸의 힘이 없다. 죽는 것인가, 이대로. 이렇게 맥없이 죽는 것인가. 그래, 그것도 나름 편하리라. 포기하니까 마음도 한결 가벼워진 듯하다. 그만 쉬고 싶다. 이대로…….
그의 눈이 힘없이 스르륵 하고 감겨 버렸다.
‘……아.’
응?
‘……천아.’
누구지?
‘운천아.’
이 목소리는…….
하운천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동시에 그가 감겼던 눈을 반쯤 떠 보였다.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호랑이들 사이로, 아른거리는 아지랑이처럼 한 여인이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