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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제일귀 1권(17화)
7장 수련(3)


고작해야 일 장 정도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어느새 삼 장 정도의 높이까지 올라가 있는 하운천.
두 팔과 다리가 덜덜 떨리고, 입은 악 다물린 채 전신 근육이 경련을 일으킨다.
내공을 사용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는 그러지 않았다. 물론 단귀륭이 말렸을 테지만.
‘이 수련의 취지를 정확히 짚었군, 애송이.’
그때, 더 이상은 무리였는지 하운천의 팔에 힘이 빠지며 붙잡고 있던 손을 놓아 버리고 말았다.
“끄, 끄아아악!”
꽤 높은, 삼 장이라는 높이에서 밑으로 곤두박질치는 하운천! 단귀륭이 귀기를 일으키며 팔을 뻗었다.
막 땅바닥과 부딪쳐, 박살 난 수박 꼴이 될 뻔한 하운천의 몸이 둥실 하고 떠오르며 허공에서 멈춰 섰다.
하운천은 곧 털썩 하고 내려앉아 바닥에 주저앉았다.
“후우, 후우. 이번엔 정말…… 죽는 줄 알았군.”
심호흡을 하며 벌렁벌렁 뛰어 대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하지만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일어나거라.]
단귀륭의 부름에 하운천이 몸을 일으켰다.
“윽!”
전신의 근육이 움직일 때마다 찌릿하다. 그러나 묵묵히, 다시금 절벽 앞으로 다가가 손을 뻗는다.
온 힘을 다해 올랐지만, 방금보다 낮은 이 장 하고도 약 반장 가량의 높이.
드륵, 드르르르륵!
그의 열 손가락이 딱딱한 절벽의 손톱 자국을 내며 신형과 함께 미끄러져 내렸다. 뚝뚝 흘러내리는 핏물…….
절로 인상이 써지는 그런 아픔이었다. 그랬건만, 단귀륭은 인정사정 봐주지 않았다.
[애송이, 꾸물거리지 마라. 올라가.]
하운천은 이를 악물었다. 그렇게 세 번, 네 번…… 어느새 열 번도 넘게 절벽을 오르고 나서야 수련이 끝났다.
반쯤 부러져 너덜거리는 손톱과 허물 벗듯 찢겨져 나간 손가락의 살점들.
[이걸로 오전 수련은 끝이다. 좀 쉬도록.]
오전 수련. 그렇구나, 아직 따사한 햇살은 중천에서부터 비춰지고 있으니.
그러나 상태가 말이 아니다. 하운천은 몸을 대(大)자로 뉘인 채 꿈쩍하지 못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없다.
단귀륭이 혀를 찼다.
[그렇게 자빠져 있을 시간에 운기라도 조금 해 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알겠소.”
힘겹게 일어나 피가 철철 흐르는 손을 옷자락에 아무렇게나 닦아 낸 하운천은 가부좌를 틀었다.
진기가 내부를 휘돌자 차츰 몸이 회복되어 갔다. 물론 체력과 전신 근육의 통증만이 나아질 뿐, 손가락의 상처는 그대로다.
운기를 끝마친 하운천.
허기가 느껴지니 품속에서 연한 붉은 빛이 감도는 주머니를 꺼낸다. 미처 행낭에 공간이 없어 넣어 두지 못한 이십 알의 벽곡단.
그것이 지금 상황에 와서는 다행이 아닐 수 없다.
“하루의 한 알이면 충분하다고 했으니, 이십 일인가.”
벽곡단에 대해선 단귀륭이 알려 주었다. 산속에서 먹을 음식으로 한참 동안 고민하던 그에게 한심하다며 말해 준 것.
‘망할, 이 녀석 품속에 있는 건 미처 생각도 못했구나.’
하운천의 뒤에 있던 단귀륭은 자신의 무지함을 자책했다. 오후에는 사냥을 보낼 참이었다.
어젯밤 자신이 둘러본 바로는, 이곳은 맹수들의 먹이사슬 중에서도 꽤 높은 곳에 위치한 맹수들만이 살고 있는, 깊은 산속의 수림이었다.
초봄이라 과일이나 약초도 찾아보기 힘들다. 살려면 어쩔 수 없이 사나운 맹수들을 사냥해야 하는 곳. 하지만 지금 그 계획이 무산됐다.
‘상관없으려나.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해 미리 보법과 신법을 가르쳐두는 것도 좋겠지.’
무산되었던 계획의 변경.
이십 일 동안 자신의 보법과 신법을 가르치고, 그 뒤에 사냥을 하면서 그것들을 갈고 닦는다.
‘기대해라, 애송이. 산속에 맹수란 맹수들은 죄다 끌어모아 주마.’
단귀륭이 눈을 빛냈다.
순간, 오한이 든 하운천이 주위를 둘러보지만 끝내 이유는 찾지 못했다. 왠지 모를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렇게 벽곡단 한 알과 함께한 꿀같이 달콤한 휴식이 끝났다. 하운천은 다시금 단귀륭 앞에서 무릎을 꿇고 앉았다.
손가락의 상처에서부터 기어 나오는 고통이 신경 쓰였지만 다행히도 이번엔 하체 위주의 수련이란다.
쿵.
설명을 시작하기 전에 자기 몸뚱이만 한 바위를 내려놓는 단귀륭.
[일단 이것을 들어 보거라.]
하운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끄응차!”
무겁다. 그러나 불안하긴 해도 하운천은 바위를 들어 보였다. 내공의 영향인가? 힘이 없어 장작도 못 패던 자신이 바위를 들어 올렸다.
[그것을 든 채로 마보를 취해라.]
“마보?”
되물음에 단귀륭이 인상을 썼다.
[마보도 몰라? 그럼, 말 탄 놈들은 본 적 있느냐?]
“본 적은 있소.”
[그럼 그 말 탄 놈들의 자세를 한 번 따라 해 보거라.]
하운천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이내 어설픈 마보 자세를 취했다. 단귀륭이 이곳저곳을 지적하자, 자세가 교정되어 안정적인 마보 자세가 완성되었다.
뒤이어 내뱉어지는 단귀륭의 음성, 그것이 하운천을 절망 속으로 빠트렸다.
[두 시진.]
“예?”
[두 시진.]
“……예―에?!”
너무 놀라 비틀거리면서도 간신히 자세를 유지하는 하운천. 벌써부터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운기 덕에 괜찮았던 근육통이 다시 몰아쳐 온다.
[말했잖느냐? 하체가 중요하다고. 공격의 시작도, 방어의 시작도, 회피의 시작도 전부 하체에서부터 비롯된다.]
몇 번이나 들었던 말.
하운천은 입을 꾹 다물었다. 어차피 해야 한다면, 해내면 되는 것이다.
그 결연한 기세에 단귀륭도 조용해졌다.
보통 마보 자세도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그런데 거기다 바위까지 들었으니, 죽을 맛이겠지. 하지만 그 정도는 되어야 자신의 경신법을 익힐 수 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단귀륭은 하운천의 자세가 흐트러질 때마다 고함을 쳐 댔다.
움찔움찔하는 하운천. 허벅지가 끊어질 것만 같고 허리는 누가 망치로 두들기는 듯 아파 왔다. 어금니는 너무 세게 악물어 턱 전체가 아려 왔고 눈에는 핏발이 서며 땀은 폭포수에 몸을 맡긴 듯 흘러내렸다.
마침내 인고(忍苦)의 시간이 끝났다.
쿵하고 떨어진 바위는 데굴데굴 굴러가 버렸다. 동시에 또다시 땅바닥에 대자로 뻗어 버리는 하운천.
“하아, 하아.”
거친 숨이 연거푸 터져 나왔다.
그러다가 반사적으로 몸을 튕겨 단숨에 가부좌를 트는 그다. 운기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도 만능은 아닌 듯. 나아지긴 했으나, 만신창이인 몸에서 벗어난 정도.
그때 하운천의 앞으로 통나무 하나가 떨어졌다. 어느새 단귀륭이 구해 온 것이다.
하운천의 팔뚝보다 훨씬 굵은 둘레, 길이는 그의 신장보다 조금 작은 정도. 여간 무거운 것이 아닐진대, 단귀륭의 말이 가관이다.
[당분간 네놈이 들고 수련할 검이다. 거기 검병(劍柄, 검의 손잡이) 보이지?]
하운천이 황당한 눈초리로 통나무를 살피자, 분명 검병같이 길쭉하게 깎아 낸 부분이 있지 않은가.
[본좌의 진신무공은 검법이다. 물론 본좌가 알고 있는 모든 무공을 네놈에게 전수해 주겠지만, 그중 본좌가 제일 자신 있어 하는 것이 검법이라는 말이다.]
하운천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토록 강한데, 검을 들면 더 강해진다는 뜻이 아닌가?
그보다 더욱 궁금한 것은.
“그럼 검법 말고 다른 무공들은 왜 익힌 것이오? 제일 강한 검법만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니요?”
[검이 없으면 어쩔 거냐? 지난번 본좌가 네놈 몸에 빙의했을 때도 검이 없었다. 자신의 무기가 없는 상황에서도 싸움을 해야 할 때가 수도 없이 많을 것이다. 무림에서는.]
하운천이 침을 꿀꺽 삼키며,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외에도, 본좌는 한 단체의 수장이었다. 아랫것들의 무공쯤은 훤히 꿰뚫고 있어야 하는 게 수장이라는 자리다.]
위에 선자, 그리고 절대자의 기도.
하운천은 이제 확신했다. 자신의 눈앞에 있는 사람은, 정말 강한 사람이었다고.

부웅, 부웅!
공기를 가르며 울려 퍼지는 육중한 소리.
검이란 탈을 쓴 무식한 통나무를 휘두르고 있는 하운천이 소리의 주인이었다.
휘두를 때마다 무게가 쏠려 어깨가 빠질 것만 같다. 그때마다 이 악물고 버텨 내지 않으면 필시 탈골이다.
하운천이 그리는 검의 궤적에는 수순이 있었다.
내려베기는 수직으로 내리긋는 것부터 좌에서 베는 좌베기와 우에서 베는 우베기까지, 반대인 올려베기는 수직으로 올려 베는 것과 좌에서 올려치는 좌베기와 우에서 올려치는 우베기. 세로베기는 좌에서 우, 그리고 다시 우에서 좌로 오는 수평베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찌르기.
기본적인 검의 베는 동작을 통틀어 수련하는 것이다.
각 천 번씩, 구천 번을 휘두르자 수련의 끝을 보았다.
이제는 말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다. 이대로 누워서 쉬고 싶다는 생각뿐이다.
그러나 단귀륭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뭐하고 있는 것이냐? 일어나라. 밤이야말로 천마대력신공을 익힘에 있어 가장 좋은 시간이다. 앞으로 수련의 시작과 끝은 천마대력신공의 연마다.]
다행히 더 이상 몸을 혹사시키진 않는 모양인 듯, 하운천은 처음 아침에 운기를 했던 바위 위에 걸터앉아 가부좌를 틀었다. 그러다 문뜩 고개를 드니, 시원한 달빛이 그를 비춘다.
보름달이다.
견소소가 그렇게나 좋아하던.
보름달이 뜨는 날엔 항상 함께 산책을 나가곤 했었는데…….
으드득!
이가 갈렸다. 분노라는 감정이 업화가 되어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타올랐다. 그에 반응하여 치솟는 단전 속에 마기들.
그의 머릿속에 홍야개를 비롯해, 견소소와 관련되어 있는 인물들의 모습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마기의 영향인 듯, 성격이 변하고 있는 것인가. 하운천은 살심 어린 어조로 나직이 다짐했다.
“어머니를 구하고 네놈들도…… 죽여 주마.”
그는 눈을 감으며, 이를 내보인 채 히죽 웃어 보이는 단귀륭을 뒤로하고 천마대력신공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8장 각성(1)


스무 알의 벽곡단 중 마지막 하나가 하운천의 입속으로 들어갔다. 순식간에 이십 일이 흐른 것이다.
그 짧은 시간 중 제일 큰 변화는 하운천의 모습.
단정했던 모습은 어디 갔는지, 가지런히 묶어 넘겼던 머리는 봉두난발에 다듬어지지 않은 거뭇한 수염. 앞머리가 길어 얼굴을 반쯤 가렸지만 그사이로 여러 상처와 흉터들이 보인다. 비쩍 말랐던 몸은 조금 다부지게 변했다. 영약의 내공이 조금씩 순화되면서 생긴 변화. 거기다 은은히 풍겨져 나오는 마기의 기운까지.
정작 자신은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 무인들의 눈에 띈다면 마교의 인물로 오해받기 십상인 모습이다.
꿀꺽.
마지막 벽곡단을 삼킨 하운천, 그가 푹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이제는 어쩐다? 돈도 남은 것이 없고…….”
그런 그에게 단귀륭이 타개책을 알려 주었다.
[오늘부터 사냥을 해 보는 건 어떠냐?]
“사냥…… 말이오?”
생각지도 못했던 방법이었다.
단귀륭은 고개를 끄덕였다. 굶어 죽지 않으려면 네놈도 어쩔 수 없을 거다.
[그래, 산속이니 동물은 있겠지. 초봄이라 먹을 만한 과일이나 약초는 찾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렇군. 흠, 그게 좋겠소.”
사냥은 해 본 적도 없지만, 토끼나 사슴 정도는 가능할지도. 마침 오전 수련도 끝마친 참이다. 하운천은 수련용 통나무 대신 며칠 전에 만들어 둔 목검을 집어 들었다. 말이야 목검이지, 기다란 나무 막대기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머금는 단귀륭.
확실히 성격이 변했다. 원래의 그라면 아무리 동물이라지만 생명을 죽이는 데에 있어 망설임이 있었을 것이다.
마기의 영향인지, 복수심의 의해서인지 혹은 둘 다인지 모르나, 어쨌든 단귀륭의 마음에는 들었다. 아직 서생의 모습을 확실히 떨쳐 버리진 못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