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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쥐 1



박쥐 1권 (1화)
서(序)


“인간이…… 살아가는데 가장 필요한 게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쿨럭!”
사내는 이 물음과 함께 한 주먹이나 되는 피를 토해냈다. 왕오는 무표정하게 사내를 응시했다. 그의 손끝에 들린 한 자루 검이 사내의 가슴을 꿰뚫고 있었다.
사내가 말을 이었다.
“돈? 명예? 여자? 크크크……. 다 좋지, 암 좋구 말구…… 커억! 후욱, 후욱!”
사내가 말을 잇기 힘든 듯 바튼 숨을 몰아쉬었다.
“하지만…… 사람이 살아가는데…… 진정 필요한 것은 나(我)라는 존재(存在)의 실존(實存)이라네…… 자넨…… 과연…… 존재(存在)하는가…….”
그르렁거리던 사내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는 듯하더니 끝내 숨을 멈추었다.
왕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오직 복수를 위해 모든 걸 견딘 그였지만, 아직도 스스로를 완전히 납득시키지 못하였다.
분명 원수를 자신의 손으로 처단했건만, 가슴은 답답하고, 머리는 더 복잡해졌다.
왕오는 자신이 걸어온 길을 하나하나 더듬어 처음 간자가 되어 마교로 파견되던 순간을 떠올렸다.



1. 왕오


창문 하나 없는 밀실에 열 살쯤으로 보이는 다섯 명의 아이들과 한 명의 중년인이 마주보고 있었다.
장식 하나 없는 투박한 책상에 앉아 두루마리를 펼친 중년인의 입술이 움직였다.

현오문 소일도.
나이 열 살
정마대전 당시 마교에 가문이 멸문
생존자 소일도, 소일향
새로운 신분 왕오

백양문 반회종
나이 열 살
정마대전 당시 마교에 가문이 멸문
생존자 반회종, 구노, 반석호
새로운 신분 장팔

양일문 낙인백
나이 열한 살
정마대전 당시 마교에 가문이 멸문
생존자 낙인백
새로운 신분 아신

용화문 성유설
나이 열 살
정마대전 당시 마교에 가문이 멸문
생존자 성유설
새로운 신분 소소

와룡문 형만호
나이 열 살
정마대전 당시 마교에 가문이 멸문
생존자 형만호, 형설호
새로운 신분 두삼

두루마리를 다 읽은 중년인이 무표정한 얼굴로 잠시 아이들을 둘러봤다.
“지난 이 년간의 지옥 같은 훈련을 견뎌내고 너희 다섯이 이 자리까지 온 이유는 한가지, 복수를 위해서다. 부모와 형제의 원수들에게 똑같은 공포와 좌절을 느끼게 해주기 위해서다.”
조용히 시작하던 중년인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원수들의 심장에 너희 손으로 비수를 박아넣기 위해서다! 놈들의 피눈물을 마시고 놈들의 살을 발라 씹어먹기 위해서다!”
밀실을 쩌렁쩌렁 울리던 중년인의 목소리가 멈추고 정적이 흘렀다.
아이들의 눈에서 불꽃이 일었다. 지난 이 년간 오로지 복수의 일념으로 힘든 훈련과 이백여 명의 경쟁자를 물리치고 기회를 얻은 그들이기에, 표정에 아이답지 않은 비장함이 가득했다.
“지금부터 너희는 존재하지 않는 자들이다. 너희의 이름과 너희의 모든 것을 잊어라. 이제 너희는 마교에 침투할 것이다. 마교의 심장을 겨누는 무림맹의 날카로운 검이 될 것이다. 내부에서부터 마교의 피를 빨고 어둠에 숨어 움직이는, 너희는 박쥐가 될 것이다!”
무림맹 정보각주 공야월의 선언이 밀실 안의 어둠을 타고 다섯 아이의 가슴에 화살처럼 박혔다.
말을 마친 공야월은 아이들에게 한 개의 환단을 나눠줬다.
“이것은 산공단이다. 일시적인 산공이 아니라 지금까지 너희가 연마한 내공을 모두 흩어버리고 단전마저 없애는 약이다. 마교(魔敎)의 마동(魔童)이 되기 위해서는 그것을 복용해 너희의 흔적을 지워야 한다. 지금 바로 삼키거라.”
다섯 아이는 공야월이 준 환단을 씹어서 삼켰다. 마동(魔童)! 마교에서 오 년에 한 번씩 무사로 양성하기 위하여 모집하는 아이들을 말한다.
주로 고아나 가난한 집의 아이들을 사들이는 경우가 많았는데, 정마대전의 여파로 적지 않은 무사들을 잃은 마교에서 이번에는 대대적으로 마동을 모집하고 있었다.
“끄으으!”
환단이 뱃속에 들어가자 내장을 찢어발기는 듯한 고통이 몰아쳤다.
다섯 아이는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아냈다. 꽉 쥔 손바닥에 손톱이 파고들어 피가 흘렀다. 하지만 누구 하나 비명을 지르거나, 쓰러지지 않고 버텨냈다.
일다경 동안 온몸을 들쑤시던 고통이 사라지자 공허함이 몰려왔다. 그동안 그들이 연마해 온 내공이 모두 사라진 것이다.
많지 않은 공력이었으나 비어 버린 아랫배의 허전함에 무거운 상실감이 뇌리를 흔들었다.
앞으로 걸어야 할 길이 얼마나 위험하고도 험난한 길인지 다섯 아이는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처음 칠 년의 수련 기간 동안은 살아남는데 모든 걸 걸어라. 그 외에 어떠한 임무도 없을 것이다. 수련이 끝나고 각 조직에 배치받은 후부터 너희는 임무를 부여받게 될 것이다.”
그때, 문이 열리며 한 사내가 들어왔다. 허름한 옷에 마르고 키가 큰 사내였는데, 날카로운 눈매가 인상적이었다.
“준비됐습니다.”
사내가 살짝 고개를 숙이며 공야월에게 말했다.
“너희는 그를 따라가거라.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제부터 모든 걸 잊어라. 오직 살아남아 마교의 중심에 이르는데 최선을 다해라! 너희에겐 친구도 동료도 없다! 독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 인간이 되려 하지 말고 박쥐가 되어라!”
공야월의 마지막 말을 끝으로 다섯 아이와 사내는 밀실을 나섰다.
사내는 아무런 말없이 아이들을 이끌고 좁은 지하도를 지나 밖으로 나왔다.
시간은 이미 한밤중이어서 칠흑 같은 어둠이 사방을 채우고 있었다.
미리 준비한 듯 입구 바로 앞에 허름한 한 대의 마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타라.”
사내가 무뚝뚝하게 아이들에게 명령했다.
다섯 아이가 마차에 오르자 두 필의 늙은 말이 끄는 마차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섯 아이는 굳은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앞으로 마교로 들어가게 되면 어떤 일들을 겪게 될지, 어떻게 복수를 할 수 있을지, 무림맹에서는 어떤 임무를 줄지 여러 생각들이 복잡하게 머릿속을 멤돌았다.
가문의 복수라는 동변상련의 감정이 서로에게 어느 정도 동료 의식을 느끼게 해주고 있었다.
이마에 십자로 가로지른 흉터가 있는 소일도―왕오는 입을 굳게 다문 채 가문이 마교에 멸문당하던 날을 떠올렸다.

현오문(賢澳門) 곳곳에 지옥도가 펼쳐져 있었다.
복면인들이 사방을 뒤지며 살아 있는 생명은 모두 참살(斬殺)했다.
여인들은 겁간당한 후 살해되었고, 남자들은 아이와 어른 할 것 없이 잔인하게 도륙당했다. 사방에 비명이 난무하고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여동생 소일향과 자신은 침대 밑 비밀 석실에서 웅크린 채 떨고 있었다. 숨소리라도 새어 나갈까 두 아이는 꼭 안고 울음을 참았다.
아버지가 자신을 재우며 불러주던 노래가 생각났다.

꽃이 지니 님도 떠나네
산은 높고 강은 깊은데
이른 아침 홀로 정원에 나서니
햇볕 드는 곳에 님 향기만 가득하오
혈송 가지 흔드는 비가
소리 없이 만물을 적시네

소일도는 눈물을 흘리며 노래를 몇 번이고 웅얼거렸다.
소란스러운 발소리가 점차 가까워지더니 어느 순간 석실을 덮던 돌문이 열렸다.
그곳에는 이마에 십자 모양의 긴 흉터를 새긴 복면인이 살기 띤 눈으로 아이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두 아이는 필사적으로 살려달라 빌었다. 하지만, 참았던 울음이 터져 나와 말조차 제대로 할 수 없어 꺽꺽거릴 뿐이었다.
복면인이 무표정하게 검을 치켜들었다. 두 아이는 꼭 끌어안은 채 눈을 감았다.
찰나의 시간이 너무도 길게 느껴졌다. 비명 소리조차 이젠 들리지 않았다.
‘모두 죽었구나.’
소일도는 살고 싶었다. 여덟 살의 어린아이였으니 죽음이 두렵고, 고통이 두렵고, 눈앞의 복면인이 두려웠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제법 긴 시간이 흐른 듯했는데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소일도는 어떻게 된 일인지 확인해 보고 싶었으나. 눈을 뜨면 복면인이 시퍼런 칼날을 내려치고 있을 것 같아 몇 번이고 망설였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에 누군가가 소일도를 흔들었다.
귀가 웅웅거리며 무어라 하는지 알 수 없는 말들이 들려오고, 세상이 점점 흐려지더니 소일도는 정신을 잃었다.
‘이마에 십자 흉터…… 십자 흉터…… 십자 모양의 검상…….’
정신을 잃어가면서도 소일도는 복면인의 모습을 잊지 않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일도야. 이제 의지할 곳은 우리 다섯뿐이니, 서로 좀더 친해질 필요가 있을 것 같지 않아?”
다섯 중 덩치 큰 아이 형만호 위장신분명(僞裝身分名) 두삼의 목소리에 소일도가 상념에서 깨어났다.
두삼은 열 살 아이 같지 않은 큰 체구에 남자답게 생긴 외모를 하고 있었다.
이 년간의 훈련 동안 소일도와는 상당히 친해져 있었다. 서글서글한 눈매가 상대에게 호감을 주는 인상이었다.
이마의 흉터와 훈련 때 몸을 아끼지 않는 이유로 독종이란 별명이 붙은 소일도와 유일하게 말을 주고받는 아이였다.
슬쩍 고개를 들어 날카로운 눈으로 두삼을 바라보던 소일도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일도가 누구지?”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안 두삼이 급히 말을 이었다.
“아, 왕오 미안해. 습관이 되다 보니. 쩝.”
두삼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습관? 네 녀석의 바보 같은 습관 때문에 우리 모두가 목숨을 잃을 수 있어!”
한쪽에 앉아 있던 키가 크고 마른 냉막한 인상의 소년 낙인백 위장신분명(僞裝身分名) 아신이 차갑게 쏘아붙였다.
낙인백도 소일도 못지않은 독종이었다. 거기다 차갑고 냉정한 성격 때문에 주변에 다가가는 아이조차 없었다.
“정말 미안하다. 앞으로 절대 이런 일은 없을 거야!”
상황의 심각함을 인식한 두삼이 굳은 표정으로 모두에게 사과했다.
“까칠하기는, 그래, 앞으로는 이런 종류의 대화조차 조심해야 할 거야. 두삼 너도 잘 알겠지만 한 번의 실수는 곧 죽음과 같으니, 우리 모두 좀더 조심하도록 하지.”
비교적 통통한 얼굴을 한 반회종 위장신분명(僞裝身分名) 장팔이 싸늘해진 분위기를 추스렸다.
“두삼의 말이 맞기는 해. 앞으로 우린 서로를 도와 마교에서 살아남아야 해.”
열 살의 앳된 아이치고는 상당한 미모를 지닌 성유설 위장신분명(僞裝身分名) 소소가 두삼의 의견에 동조했다.
“흥! 간자에게 믿음과 타인에 대한 의지는 가장 경계해야 될 감정임을 다들 몰라? 서로 짐이나 되지 않으면 다행이야! 난 너희가 걸리적거릴 것 같으면 내 손으로 직접 죽여 버리겠다! 복수를 위해서라면 난 어떤 짓이든 할 거다. 내 목숨은 물론 너희를 모두 팔아넘겨서라도 반드시 복수할 거야!”
아신이 서슬이 퍼런 눈을 번득이며 독설을 뱉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