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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애고검기 1권
고검출사(孤劍出師)
천애고검기 1권(1화)
序章
작가서문
오랫동안 고절한 무협 작가님들의 작품들을 읽으며 꿈을 꾸고 즐거워해 왔습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나도 그러한 작품 하나를 써 보고 싶은 간절한 소망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이제 나이 서른 중반을 넘어서야 부끄러운 붓을 들어 마음속에 간직했던 이야기 중 하나를 글줄로 풀어내 봅니다.
젊은 영웅들의 이야기를 쓰고 싶습니다.
젊기에 미숙하고, 그러면서도 패기와 의협으로 어려움을 헤쳐 나가는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펼쳐 보고 싶습니다.
가슴에 뜨거운 협기를 품고서 흔들리지 않는 정의를 간직한, 영웅이라 불리울 만한 자격이 있는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싶습니다.
인간적인 면모를 간직하여 외로워하기도 하고 힘겨워하기도 하지만, 오직 굳건한 의지와 올곧은 믿음으로 목숨을 걸고 자신의 길을 가는 영웅들의 이야기를 여러분께 들려 드리고 싶습니다.
그렇게 바람만으로 끝났을지도 모를 제 마음속의 이야기를 책으로 만들어 세상에 내어 놓을 수 있도록 도와주신 뿔 미디어 가족 모두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부끄러운 솜씨이나마 정성을 다해 써 나간 이 글은, 젊은 시절 저에게 꿈과 즐거움을 벅차도록 선사해 주었던 모든 작가님들께 바치는 오마쥬입니다.
장협(長鋏) 배상
序章
짹짹…….
새소리가 아름답게 들리는 이른 아침이었다.
허름한 초옥(草屋),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문을 열고 한 청년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갓 약관(弱冠)을 넘긴 듯한, 이제 청년티가 나기 시작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 눈은 맑고 깊었고, 허름한 백의를 걸친 자태는 단정했다.
청년은 천천히 심호흡을 하더니 사립문을 열고 집을 벗어났다.
천천히 산길을 오르는 청년의 모습은 마치 달관의 경지에 이른 학자 같은 침착함과 진중함을 풍기고 있었다.
아직 해가 다 떠오르지 않은 어스름한 산길을 천천히 올라가던 청년은 이내 나지막한 구릉에 올라섰다.
그저 평범한 구릉, 하지만 그곳은 주변에 큰 나무가 없어 햇살이 잘 비쳐 드는 아늑한 공간이었고 작은 꽃만이 여기저기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 구릉의 한쪽 구석에 조그마한 봉분(封墳)이 만들어져 있었다.
이 봉분은 며칠 전 청년이 직접 만든 것이었다.
비석 하나 없이, 떼를 입히지도 않은 초라한 봉분 앞에서 청년은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
그리고 그 자세로 눈을 감더니 명상에 빠져 들었다.
짹짹…….
휘스스…….
새소리와 바람소리만이 들려오는 조용한 공간, 해는 점점 떠올라 중천을 지나가고 있었지만 청년은 오랜 시간 동안 그저 눈을 감고 있을 뿐이었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시간부터 정좌한 청년이 눈을 떴을 때는 한낮을 넘어 오후로 향해 가고 있을 시간이었다.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랜 시간 동안 미동 없이 앉아 있던 덕분에 잠시 다리를 휘청였지만 곧 자세를 가다듬었다.
그는 무덤에 큰절을 올렸다.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따스함과 아픔을 담은 눈빛으로, 청년은 무덤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그동안 정말 고마웠습니다…….”
그의 눈에 한 방울 눈물이 고였다.
“당신을 묻고서 만 하루 동안, 깊이 생각했습니다…….”
청년의 눈에 고였던 눈물은 방울져 떨어지지 않고 다시 그의 눈 속으로 스며들어 갔다.
하지만 담담한 청년의 목소리에서는 깊은 슬픔이 묻어나고 있었다.
“이제 마음을 정했습니다. 심산(深山) 초부(樵夫)의 삶이 나쁜 것은 아니나, 어르신의 말씀대로 세상에 내 인연이 끝난 것이 아니라면 다시 세상에 나가는 것도 괜찮겠지요.”
청년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세상의 인연을 다 매듭짓고 나면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그때까지 적적하시더라도 참아 주시길…….”
청년은 그 말을 끝으로 산을 내려가 중턱의 집으로 돌아갔다.
곧장 방으로 들어간 그는 자그마한 보따리를 꺼내 몇 가지 물건을 챙겨 어깨에 둘러멘 후,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고서 다시 사립문을 열고 나섰다.
그 길로 청년은 산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후세에 강호의 이야기꾼들이 언제나,
“그분의 강호출도(江湖出道)는 이렇게 옆집 나들이 하듯이 이루어졌던 것이오…….”
라고 운을 떼곤 하는 고검(孤劍) 백의후(白衣候) 금비(金備)의 신화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一章 주루풍운(酒樓風雲)(1)
삐이걱∼
문소리와 함께 주루에 한 청년이 들어섰다.
허름한 백의에 문사건(文士巾), 자그마한 보따리를 등에 진 청년은 바로 금비(金備)였다.
“어서 옵쇼!”
점소이가 빠르게 다가왔다.
만면에 웃음을 띠고 다가온 그는 금비의 허름한 옷차림을 보자 절로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빌어먹을, 첫눈에 비렁뱅이로 알아볼 꼬락서니로구나. 그냥 쫓아 보내는 게 좋지 않을까?’
“방이 있습니까?”
부드럽게 묻는 금비의 목소리에 점소이는 자신도 모르게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네, 물론입니다. 방이야 있지요…….”
‘아니, 내가 왜 이런 비렁뱅이 같은 자식에게 허리 굽히며 존대를 하는 거지? 당장 쫓아 버려야 당연할 텐데…….’
점소이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면서 다시 허리를 펴고 금비를 바라보았다.
금비는 얼굴에 옅은 미소를 띤 채 그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지만, 점소이는 자신도 모르게 다시 허리가 숙여지고 있었다.
남루한 옷차림에 가냘픈 몸집을 한 이 젊은 서생 차림의 손님에게는, 자신도 모르게 허리를 숙이고 공손하게 대하게 하는 위엄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점소이는 한때 대학사로 이름난 집에서 잔심부름꾼으로 지낸 경험이 있었다.
그 학사의 집에서 그가 주인으로 모시던 가족들처럼, 거만하진 않지만 사람으로 하여금 경외심을 품게 만드는 자연스러운 위엄이 이 청년에게서 느껴진다는 것을 알게 된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작은 방을 얻어서 쉬어 가고 싶습니다. 아무리 작은 방이라도 괜찮습니다. 그저 하룻밤 묵을 수만 있다면 상관없겠습니다.”
“아아, 알겠습니다요. 작은 방이라면 아직 남아 있는 것이 몇 개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을 마지막에 꺼낼 수 있었던 것은 오랜 점소이 경력에서 비롯된 직업의식이었으리라.
“저어…… 방값은…….”
“아아, 그렇지요……. 죄송하지만 저는 오랫동안 산에서 살아온지라 은자(銀子)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순식간에 점소이의 인상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위엄이고 뭐고, 돈이 없는 사람을 공짜로 재워 줄 수는 없다.
그가 입을 열어 말하려는 순간, 금비가 품에서 조그마한 물건을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그래서, 이걸로 방값을 대신하면 어떨까요? 제가 캔 약초입니다.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하룻밤 방값은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금비의 손바닥을 바라보던 점소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가 내민 것은 족히 수령이 이십 년은 되어 보이는 산삼이었다.
마을 한약재상에 판다면 은 열 냥은 바로 받을 수 있을 듯 보였다.
하루 방값이 은자 열 푼이니, 이거야말로 엄청난 장사가 아닐 수 없다.
순식간에 점소이의 눈에 교활한 빛이 떠돌았다.
그는 비굴한 웃음을 지으며 손바닥을 비비며 말했다.
“아아, 이거라면…… 흠흠, 이 정도의 약초라면 방값과 오늘 저녁, 내일 아침 식사비까지는 될 것 같군요……. 뭐, 제가 약간 손해를 볼 듯도 하지만 공자님 얼굴을 봐서 그렇게 해 드리도록 하지요.”
“그렇습니까? 정말 고맙군요.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예예, 그럼 이리…….”
점소이가 황급히 손을 내밀어 금비에게서 산삼을 받아 들려 했다.
그 순간, 희고 매끄러운 손 하나가 불쑥 나타나더니 점소이의 손을 가로막았다.
“잠깐! 그 거래는 조금 이상한데요?”
금비와 점소이의 시선이 동시에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쏠렸다.
푸른 경장(輕裝) 차림에 화려한 귀걸이를 한, 눈부시게 하얀 피부에 아직 다 피어나지 않은 꽃봉오리 같은 미모의 한 소녀가 거기에 서 있었다.
점소이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지더니 이내 그 입에서 욕설이 튀어 나가려는 듯했다.
하지만 그의 눈은 곧 소녀가 비껴 멘 장검에 고정되었고, 파란 수실이 달린 장검의 손잡이를 본 순간 그 얼굴은 긴장을 띠는 것이었다.
오랫동안 객점의 점소이 노릇을 해 온 덕분에 눈치 하나만큼은 백전노장이라 할 수 있는 그는 경험상 이 소녀가 아직 어리긴 하지만 강호의 여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옷차림이나 행동거지로 봐서 상당한 명문가의 사람이며, 잘못 건드렸다가는 소녀 본인에게나 그녀의 배경 세력에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챈 것이다.
“흐음…… 이건 최소한 수령이 삼사십 년은 되어 보이는 산삼인데요? 보존 상태도 좋고…… 한약재상에 가져간다면 아마 은자 오십 냥은 받을 수 있을 거예요. 여기 방값은 기껏해야 은자 열 푼 정도…… 그 돈이라면 이 산삼의 한쪽 잔뿌리만 떼어 줘도 충분할 금액이지요.”
‘빌어먹을, 네년은 이 사람과 대체 무슨 관계기에 남 좋은 장사를 망치려 드는 것이냐?’
점원은 마음속으로 욕지거리를 해 대면서도, 겉으로는 공손한 자세로 말을 꺼냈다.
“아아, 그렇군요. 용서하십시오, 제가 이런 물건을 보는 안목이 없어서…… 저는 그저 조금 오래된 도라지 뿌리인 줄 알았습니다. 헤헤.”
소녀는 약간 미심쩍은 눈초리로 점원을 쏘아보더니 말을 이었다.
“그럼 정당한 가격을 받도록 해요. 그리고…….”
소녀가 시선을 돌려 금비를 바라보았다.
금비는 여전히 입가에 담담한 웃음을 띤 채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마치 두 사람의 이야기가 자신과 상관없는 이야기라도 된다는 듯, 아까부터 그저 부드러운 웃음을 띤 얼굴로 서 있는 것이었다.
소녀의 얼굴에 살짝 홍조가 어리는 듯했으나 이내 처음의 표정을 짓고는 금비에게 사뭇 질책하듯 말을 이었다.
“당신도 좀 더 정신을 차려야 할 거예요. 무슨 말인지 알겠나요?”
“그렇군요. 정말 고맙습니다.”
“필부는 죄가 없으나 보물을 지닌 것이 죄라는 말을 모르나요? 보아하니 강호에 처음 나온 듯한데, 이런 물건을 아무렇게나 보이고 다닌다면 필시 일신에 좋지 못한 일이 생길 거예요.”
금비가 정중하게 포권하며 소녀에게 답례했다.
“소저의 진심 어린 충고, 정말 고맙습니다. 앞으로 마음에 새기도록 하지요.”
소녀는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아직까지도 담담한 미소를 띠고 있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조금씩 울렁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소녀는 그런 스스로에게 놀라며 중얼거렸다.
‘아니, 내가 왜 이러지? 고작 백면서생(白面書生)에 불과한 이런 남자에게 가슴이 두근거리다니……. 내가 어떻게 된 게 아닐까?’
그녀는 일행과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는 중에 이곳 객잔에 여장을 푼 후 식사를 하러 내려온 차에 우연히 금비와 점원의 이야기를 엿듣게 된 것이었다.
가문이 의원과 관련 있는 곳인지라 청년이 대화 중에 내놓은 산삼을 힐끗 보고 그것이 제법 영약 소리를 들을 만한 물건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는데, 아직 세상을 모르는 듯한 어수룩한 청년이 사기를 당하는 것이 안타까워 자신도 모르게 두 사람의 일에 나서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평소 남의 사소한 일에 나서지 않는 자신의 성격인 데다가 현재 맡은 일의 중요함을 생각할 때 튀는 행동은 절대 삼가야 할 상황에 이런 일에 끼어든 모습이 스스로도 이상하다고 생각하던 판국이었으니, 자신이 이 초라한 행색의 청년에게 마음의 안정을 잃어버린 이유를 알 수가 없어서 자신도 모르게 제법 오랫동안 청년의 얼굴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잠시 흐른 후 먼저 입을 연 쪽은 금비였다.
“소저의 충고는 마음속 깊이 새기고 행동하도록 하겠습니다. 혹시 제게 좀 더 알려 주실 말씀이 있으신지…….”
그제야, 소녀는 자신이 여인으로서는 거의 뻔뻔하다시피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녀는 부끄러워하지 않고 도리어 얼굴에 살짝 웃음을 보이며 말하는 것이었다.
“그래요. 그건 그렇고…… 자, 이제 두 분은 어떻게 하실 건가요?”
“아무래도 제겐 은자가 없으니…… 이 물건으로 비용을 지불할 수밖에 없군요. 이 시간에 약포(藥鋪)를 찾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그럼 이렇게 하죠. 마침 제 집이 의원 노릇을 겸하는 곳인데, 이러한 영약이 많이 필요한 형편이에요. 그러니 그 산삼을 제게 파시는 것은 어떨까요?”
“그래 주신다면 제게는 더없이 고마운 일이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해요. 여기, 값을 받도록 하세요.”
말과 함께, 소녀가 품속에서 은표(銀票) 한 뭉치를 꺼내 그 중 다섯 장을 셈하여 금비에게 건네주었다.
고검출사(孤劍出師)
천애고검기 1권(1화)
序章
작가서문
오랫동안 고절한 무협 작가님들의 작품들을 읽으며 꿈을 꾸고 즐거워해 왔습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나도 그러한 작품 하나를 써 보고 싶은 간절한 소망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이제 나이 서른 중반을 넘어서야 부끄러운 붓을 들어 마음속에 간직했던 이야기 중 하나를 글줄로 풀어내 봅니다.
젊은 영웅들의 이야기를 쓰고 싶습니다.
젊기에 미숙하고, 그러면서도 패기와 의협으로 어려움을 헤쳐 나가는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펼쳐 보고 싶습니다.
가슴에 뜨거운 협기를 품고서 흔들리지 않는 정의를 간직한, 영웅이라 불리울 만한 자격이 있는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싶습니다.
인간적인 면모를 간직하여 외로워하기도 하고 힘겨워하기도 하지만, 오직 굳건한 의지와 올곧은 믿음으로 목숨을 걸고 자신의 길을 가는 영웅들의 이야기를 여러분께 들려 드리고 싶습니다.
그렇게 바람만으로 끝났을지도 모를 제 마음속의 이야기를 책으로 만들어 세상에 내어 놓을 수 있도록 도와주신 뿔 미디어 가족 모두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부끄러운 솜씨이나마 정성을 다해 써 나간 이 글은, 젊은 시절 저에게 꿈과 즐거움을 벅차도록 선사해 주었던 모든 작가님들께 바치는 오마쥬입니다.
장협(長鋏) 배상
序章
짹짹…….
새소리가 아름답게 들리는 이른 아침이었다.
허름한 초옥(草屋),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문을 열고 한 청년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갓 약관(弱冠)을 넘긴 듯한, 이제 청년티가 나기 시작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 눈은 맑고 깊었고, 허름한 백의를 걸친 자태는 단정했다.
청년은 천천히 심호흡을 하더니 사립문을 열고 집을 벗어났다.
천천히 산길을 오르는 청년의 모습은 마치 달관의 경지에 이른 학자 같은 침착함과 진중함을 풍기고 있었다.
아직 해가 다 떠오르지 않은 어스름한 산길을 천천히 올라가던 청년은 이내 나지막한 구릉에 올라섰다.
그저 평범한 구릉, 하지만 그곳은 주변에 큰 나무가 없어 햇살이 잘 비쳐 드는 아늑한 공간이었고 작은 꽃만이 여기저기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 구릉의 한쪽 구석에 조그마한 봉분(封墳)이 만들어져 있었다.
이 봉분은 며칠 전 청년이 직접 만든 것이었다.
비석 하나 없이, 떼를 입히지도 않은 초라한 봉분 앞에서 청년은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
그리고 그 자세로 눈을 감더니 명상에 빠져 들었다.
짹짹…….
휘스스…….
새소리와 바람소리만이 들려오는 조용한 공간, 해는 점점 떠올라 중천을 지나가고 있었지만 청년은 오랜 시간 동안 그저 눈을 감고 있을 뿐이었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시간부터 정좌한 청년이 눈을 떴을 때는 한낮을 넘어 오후로 향해 가고 있을 시간이었다.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랜 시간 동안 미동 없이 앉아 있던 덕분에 잠시 다리를 휘청였지만 곧 자세를 가다듬었다.
그는 무덤에 큰절을 올렸다.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따스함과 아픔을 담은 눈빛으로, 청년은 무덤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그동안 정말 고마웠습니다…….”
그의 눈에 한 방울 눈물이 고였다.
“당신을 묻고서 만 하루 동안, 깊이 생각했습니다…….”
청년의 눈에 고였던 눈물은 방울져 떨어지지 않고 다시 그의 눈 속으로 스며들어 갔다.
하지만 담담한 청년의 목소리에서는 깊은 슬픔이 묻어나고 있었다.
“이제 마음을 정했습니다. 심산(深山) 초부(樵夫)의 삶이 나쁜 것은 아니나, 어르신의 말씀대로 세상에 내 인연이 끝난 것이 아니라면 다시 세상에 나가는 것도 괜찮겠지요.”
청년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세상의 인연을 다 매듭짓고 나면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그때까지 적적하시더라도 참아 주시길…….”
청년은 그 말을 끝으로 산을 내려가 중턱의 집으로 돌아갔다.
곧장 방으로 들어간 그는 자그마한 보따리를 꺼내 몇 가지 물건을 챙겨 어깨에 둘러멘 후,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고서 다시 사립문을 열고 나섰다.
그 길로 청년은 산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후세에 강호의 이야기꾼들이 언제나,
“그분의 강호출도(江湖出道)는 이렇게 옆집 나들이 하듯이 이루어졌던 것이오…….”
라고 운을 떼곤 하는 고검(孤劍) 백의후(白衣候) 금비(金備)의 신화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一章 주루풍운(酒樓風雲)(1)
삐이걱∼
문소리와 함께 주루에 한 청년이 들어섰다.
허름한 백의에 문사건(文士巾), 자그마한 보따리를 등에 진 청년은 바로 금비(金備)였다.
“어서 옵쇼!”
점소이가 빠르게 다가왔다.
만면에 웃음을 띠고 다가온 그는 금비의 허름한 옷차림을 보자 절로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빌어먹을, 첫눈에 비렁뱅이로 알아볼 꼬락서니로구나. 그냥 쫓아 보내는 게 좋지 않을까?’
“방이 있습니까?”
부드럽게 묻는 금비의 목소리에 점소이는 자신도 모르게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네, 물론입니다. 방이야 있지요…….”
‘아니, 내가 왜 이런 비렁뱅이 같은 자식에게 허리 굽히며 존대를 하는 거지? 당장 쫓아 버려야 당연할 텐데…….’
점소이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면서 다시 허리를 펴고 금비를 바라보았다.
금비는 얼굴에 옅은 미소를 띤 채 그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지만, 점소이는 자신도 모르게 다시 허리가 숙여지고 있었다.
남루한 옷차림에 가냘픈 몸집을 한 이 젊은 서생 차림의 손님에게는, 자신도 모르게 허리를 숙이고 공손하게 대하게 하는 위엄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점소이는 한때 대학사로 이름난 집에서 잔심부름꾼으로 지낸 경험이 있었다.
그 학사의 집에서 그가 주인으로 모시던 가족들처럼, 거만하진 않지만 사람으로 하여금 경외심을 품게 만드는 자연스러운 위엄이 이 청년에게서 느껴진다는 것을 알게 된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작은 방을 얻어서 쉬어 가고 싶습니다. 아무리 작은 방이라도 괜찮습니다. 그저 하룻밤 묵을 수만 있다면 상관없겠습니다.”
“아아, 알겠습니다요. 작은 방이라면 아직 남아 있는 것이 몇 개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을 마지막에 꺼낼 수 있었던 것은 오랜 점소이 경력에서 비롯된 직업의식이었으리라.
“저어…… 방값은…….”
“아아, 그렇지요……. 죄송하지만 저는 오랫동안 산에서 살아온지라 은자(銀子)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순식간에 점소이의 인상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위엄이고 뭐고, 돈이 없는 사람을 공짜로 재워 줄 수는 없다.
그가 입을 열어 말하려는 순간, 금비가 품에서 조그마한 물건을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그래서, 이걸로 방값을 대신하면 어떨까요? 제가 캔 약초입니다.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하룻밤 방값은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금비의 손바닥을 바라보던 점소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가 내민 것은 족히 수령이 이십 년은 되어 보이는 산삼이었다.
마을 한약재상에 판다면 은 열 냥은 바로 받을 수 있을 듯 보였다.
하루 방값이 은자 열 푼이니, 이거야말로 엄청난 장사가 아닐 수 없다.
순식간에 점소이의 눈에 교활한 빛이 떠돌았다.
그는 비굴한 웃음을 지으며 손바닥을 비비며 말했다.
“아아, 이거라면…… 흠흠, 이 정도의 약초라면 방값과 오늘 저녁, 내일 아침 식사비까지는 될 것 같군요……. 뭐, 제가 약간 손해를 볼 듯도 하지만 공자님 얼굴을 봐서 그렇게 해 드리도록 하지요.”
“그렇습니까? 정말 고맙군요.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예예, 그럼 이리…….”
점소이가 황급히 손을 내밀어 금비에게서 산삼을 받아 들려 했다.
그 순간, 희고 매끄러운 손 하나가 불쑥 나타나더니 점소이의 손을 가로막았다.
“잠깐! 그 거래는 조금 이상한데요?”
금비와 점소이의 시선이 동시에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쏠렸다.
푸른 경장(輕裝) 차림에 화려한 귀걸이를 한, 눈부시게 하얀 피부에 아직 다 피어나지 않은 꽃봉오리 같은 미모의 한 소녀가 거기에 서 있었다.
점소이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지더니 이내 그 입에서 욕설이 튀어 나가려는 듯했다.
하지만 그의 눈은 곧 소녀가 비껴 멘 장검에 고정되었고, 파란 수실이 달린 장검의 손잡이를 본 순간 그 얼굴은 긴장을 띠는 것이었다.
오랫동안 객점의 점소이 노릇을 해 온 덕분에 눈치 하나만큼은 백전노장이라 할 수 있는 그는 경험상 이 소녀가 아직 어리긴 하지만 강호의 여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옷차림이나 행동거지로 봐서 상당한 명문가의 사람이며, 잘못 건드렸다가는 소녀 본인에게나 그녀의 배경 세력에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챈 것이다.
“흐음…… 이건 최소한 수령이 삼사십 년은 되어 보이는 산삼인데요? 보존 상태도 좋고…… 한약재상에 가져간다면 아마 은자 오십 냥은 받을 수 있을 거예요. 여기 방값은 기껏해야 은자 열 푼 정도…… 그 돈이라면 이 산삼의 한쪽 잔뿌리만 떼어 줘도 충분할 금액이지요.”
‘빌어먹을, 네년은 이 사람과 대체 무슨 관계기에 남 좋은 장사를 망치려 드는 것이냐?’
점원은 마음속으로 욕지거리를 해 대면서도, 겉으로는 공손한 자세로 말을 꺼냈다.
“아아, 그렇군요. 용서하십시오, 제가 이런 물건을 보는 안목이 없어서…… 저는 그저 조금 오래된 도라지 뿌리인 줄 알았습니다. 헤헤.”
소녀는 약간 미심쩍은 눈초리로 점원을 쏘아보더니 말을 이었다.
“그럼 정당한 가격을 받도록 해요. 그리고…….”
소녀가 시선을 돌려 금비를 바라보았다.
금비는 여전히 입가에 담담한 웃음을 띤 채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마치 두 사람의 이야기가 자신과 상관없는 이야기라도 된다는 듯, 아까부터 그저 부드러운 웃음을 띤 얼굴로 서 있는 것이었다.
소녀의 얼굴에 살짝 홍조가 어리는 듯했으나 이내 처음의 표정을 짓고는 금비에게 사뭇 질책하듯 말을 이었다.
“당신도 좀 더 정신을 차려야 할 거예요. 무슨 말인지 알겠나요?”
“그렇군요. 정말 고맙습니다.”
“필부는 죄가 없으나 보물을 지닌 것이 죄라는 말을 모르나요? 보아하니 강호에 처음 나온 듯한데, 이런 물건을 아무렇게나 보이고 다닌다면 필시 일신에 좋지 못한 일이 생길 거예요.”
금비가 정중하게 포권하며 소녀에게 답례했다.
“소저의 진심 어린 충고, 정말 고맙습니다. 앞으로 마음에 새기도록 하지요.”
소녀는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아직까지도 담담한 미소를 띠고 있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조금씩 울렁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소녀는 그런 스스로에게 놀라며 중얼거렸다.
‘아니, 내가 왜 이러지? 고작 백면서생(白面書生)에 불과한 이런 남자에게 가슴이 두근거리다니……. 내가 어떻게 된 게 아닐까?’
그녀는 일행과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는 중에 이곳 객잔에 여장을 푼 후 식사를 하러 내려온 차에 우연히 금비와 점원의 이야기를 엿듣게 된 것이었다.
가문이 의원과 관련 있는 곳인지라 청년이 대화 중에 내놓은 산삼을 힐끗 보고 그것이 제법 영약 소리를 들을 만한 물건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는데, 아직 세상을 모르는 듯한 어수룩한 청년이 사기를 당하는 것이 안타까워 자신도 모르게 두 사람의 일에 나서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평소 남의 사소한 일에 나서지 않는 자신의 성격인 데다가 현재 맡은 일의 중요함을 생각할 때 튀는 행동은 절대 삼가야 할 상황에 이런 일에 끼어든 모습이 스스로도 이상하다고 생각하던 판국이었으니, 자신이 이 초라한 행색의 청년에게 마음의 안정을 잃어버린 이유를 알 수가 없어서 자신도 모르게 제법 오랫동안 청년의 얼굴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잠시 흐른 후 먼저 입을 연 쪽은 금비였다.
“소저의 충고는 마음속 깊이 새기고 행동하도록 하겠습니다. 혹시 제게 좀 더 알려 주실 말씀이 있으신지…….”
그제야, 소녀는 자신이 여인으로서는 거의 뻔뻔하다시피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녀는 부끄러워하지 않고 도리어 얼굴에 살짝 웃음을 보이며 말하는 것이었다.
“그래요. 그건 그렇고…… 자, 이제 두 분은 어떻게 하실 건가요?”
“아무래도 제겐 은자가 없으니…… 이 물건으로 비용을 지불할 수밖에 없군요. 이 시간에 약포(藥鋪)를 찾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그럼 이렇게 하죠. 마침 제 집이 의원 노릇을 겸하는 곳인데, 이러한 영약이 많이 필요한 형편이에요. 그러니 그 산삼을 제게 파시는 것은 어떨까요?”
“그래 주신다면 제게는 더없이 고마운 일이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해요. 여기, 값을 받도록 하세요.”
말과 함께, 소녀가 품속에서 은표(銀票) 한 뭉치를 꺼내 그 중 다섯 장을 셈하여 금비에게 건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