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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애고검기 1권(2화)
一章 주루풍운(酒樓風雲)(2)


열 냥짜리 은표 다섯 장을 받아 든 금비가 여전히 웃는 얼굴로 소녀에게 산삼을 건넸다.
처음 점원에게 방값으로 산삼을 건네주려 할 때처럼 그가 소녀에게 산삼을 건네는 것은 자연스러웠고, 소녀 역시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그것을 받아 들었다.
계산을 마치자 금비가 점원을 바라보며 그 중 한 장을 건넸다.
“자, 다행히 방값을 지불할 수 있게 되었군요. 이제 제게 방을 안내해 주시겠습니까?”
“아이구, 그러문입쇼. 어서, 저를 따라오십시오. 이쪽입니다.”
금비는 앞장서는 점원의 뒤를 따르려다, 다시 소녀를 향해 포권하며 허리를 숙였다.
“소저께서 도와주신 덕분에 이렇게 무사히 일을 처리하게 되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저야말로 좋은 약재를 제값에 살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금비는 부드러운 미소를 남긴 채 점원의 뒤를 따라 계단을 올라갔다.
그런 금비의 등을 잠시 바라보던 소녀도 곧 몸을 돌려 자신의 동행들이 앉아 있는 탁자로 향했다.

점원이 안내한 방은 작지만 깨끗하게 치워져 있는 아늑한 별실이었다.
그는 이제 금비에게 사기를 치거나 바가지를 씌울 생각은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침상을 정돈해 주며 허리를 숙일 뿐이었다.
“저어, 식사를 하시겠습니까? 방으로 차려 올까요?”
“아닙니다, 잠시 쉰 후 식사는 내려가서 하도록 하지요. 고맙습니다.”
“그, 그럼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곧 거스름을 가져오도록 하겠습니다.”
말과 함께 점원이 사라지자, 금비는 어깨에 진 보따리를 풀어 한쪽 책상 위에 올려놓고 침상에 누웠다.
편하게 다리를 뻗고 누운 그는 천천히 눈을 감고 휴식을 취했다.
이는 평소 금비가 자주 하던 휴식의 한 방법이었다.
남다른 자제력과 맑은 마음을 가진 그는 언제나 휴식을 취하기 위해 눈을 감으면 즉시 편안한 명상 속으로 빠져 들어가곤 했다.
오늘따라 그의 머릿속에는 방금 점 객점에서 만난 소녀의 얼굴이 아른아른 떠오르고 있었다.
아직 소녀티를 채 벗지 못했지만 마치 꽃봉오리를 틔우기 직전의 목련처럼 아름다운 여인.
금비는 굳이 그녀를 머릿속에서 지우려 애쓰지 않았다.
그를 거두고 돌봐 주었던, 그에게 가족이자 친구이며 스승이었던 돌아가신 노인은 언제나 자연스러움을 중요시했다.
노인은 금비에게 무엇도 가르친 것이 없었지만, 금비는 노인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금비는 자연스럽게 소녀에 대한 생각이 자신의 마음속에 노닐도록 놓아둔 채 휴식에 빠져 들었다.

잠시 후,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금비는 눈을 떴다.
점원이 쟁반에 은자를 담아 방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여기 있습니다, 공자님. 방값을 제한 나머지 잔돈입니다요. 식대는 나중에 식사를 하신 후 계산하시면 될 겁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이건 수고해 주신 데 대한 작은 표시니 부담 없이 받아 주십시요.”
말과 함께 내민 금비의 손에는 반 냥짜리 은화가 들려 있었다.
금세 점원의 입에 함박웃음이 떠올랐다. 그가 허리 숙여 감사를 표했다.
이미 자신의 사기행각이 들통 난 상황에 자신에게 불만을 품으면 품었지, 이렇게 방값의 몇 배에 해당하는 수고비를 줄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기에 점원은 뛸 듯이 기뻐했다.
“가, 감사합니다. 혹시 더 필요하신 것은 없으신지요? 무엇이든지 말씀만 하시면…….”
“괜찮습니다. 이렇게 신경 써 주시니 제가 오히려 고맙군요. 아, 잠시…… 목욕을 할 수 있을까요? 며칠 산길을 걸었더니 몸이 많이 더러워졌군요.”
“네, 걱정 마십시오. 지금 곧 목욕물을 대령하겠습니다.”
그렇게 나가고 잠시 후, 점원은 커다란 물통에 뜨거운 물을 가득 채워 와 방 한쪽에 놓여 있는 욕조에 가득 부어 주었다. 금비는 즉시 옷을 벗고 그 속에 들어가 목욕을 했다.
잠시 후, 욕조에서 나온 그는 몸을 깨끗이 닦은 후 옷을 다시 차려입고서, 아직 물기가 마르지 않은 머리에 문사건을 단정히 두른 후, 식사를 하기 위해 방을 나섰다.

금비는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가 식사를 위해 자리를 찾았다.
이미 제법 밤늦은 시각이라 여기저기 삼삼오오 모여 앉은 사람들은 다들 술병을 앞에 놓고 취기 어린 얼굴로 서로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금비와 같이 단지 식사를 위해 앉아 있는 사람은 보기 드물었다.
금비는 마음에 드는 자리를 찾으려 했지만 찾기 힘들어 잠시 머뭇거렸다.
빈자리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원래 번잡스러운 것을 싫어하는 그로서는 바로 옆 자리에서 술에 취한 사람들이 떠드는 자리에는 앉기 싫었고, 그래서 조용한 빈자리를 찾으려니 마땅한 곳이 없었던 것이다.
잠시 두리번거리고 있는 그의 귀에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씨! 실례하오만 자리를 찾고 계시오? 괜찮다면 우리와 합석하지 않으시겠소?”
금비는 천천히 목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식당의 한쪽 구석에, 네 명의 남녀가 앉아 있는 곳이었다.
금비는 누가 자신에게 이렇게 친절한 제의를 하는가 싶어 그들을 바라보다가, 그 이남 이녀(二男二女) 중 조금 전 자신에게서 산삼을 산 소녀가 끼어 있는 것을 알아보고서 웃으며 그쪽으로 걸어갔다.
“그럼 잠시 실례해도 괜찮겠습니까?”
금비가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앞에 앉은 이남 이녀는 누가 보아도 그 영준함이 눈에 띄는, 재기 넘쳐 보이는 일행이었다.
조금 전 금비에게서 산삼을 산 청의 소녀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황의 소녀 하나, 흑의를 입은 청년과 아직 어린 청의 소년 하나가 그 일행이었다.
금비가 웃으며 자리에 앉자, 청의 소년이 호기심 어린 눈을 빛내며 그에게 말을 걸어 왔다.
“그런데, 그쪽은 어디에서 오신 누구신지요? 저는 이곳 일대를 기반으로 하는 금검파(金劍派)에서 온 단일비(丹一飛)라고 합니다. 이쪽, 아까 소협께 산삼을 산 분이 제 누님이신 단청하(丹靑河)구요.”
소년의 말에, 소녀가 가볍게 눈살을 찌푸리며 말을 잘랐다.
“일비! 처음 뵙는 분께 너무 무례하구나. 그렇게 막무가내로 물어보는 법이 어디 있니? 게다가…….”
단청하가 전음으로 말했다.
“우리는 지금 매우 위험한 상황이란 걸 모르니? 아직까지 아무에게도 들키진 않은 것 같다만, 이런 때 낯선 사람에게 아무 의심 없이 말을 걸고 우리의 정체를 알리다니……. 심(沈) 언니나 제갈 오빠가 무어라 생각하시겠어?”
“하하. 걱정 마세요, 누님. 이제 우리 금검파에 하루거리까지 당도했지 않습니까? 이곳 역시 우리의 세력권 안이고 내일 아침이면 무황성(武皇城)의 어르신들과 본가(本家) 고수님들 역시 도착할 텐데, 너무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그리고 저 사람을 부른 건 제갈 형님이고, 저 사람에게 먼저 관심을 보인 건 누님 아니었어요?”
사실 중원에서는 여인의 이름을 남에게 알려 주는 것을 금기시 하고 있기 때문에, 단청하가 단일비에게 제지를 가한 것은 자신의 이름을 경솔하게 알려 준 것을 책망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 역시 강호의 여인인지라 곧 대범하게 마음을 가다듬고는 웃으며 금비에게 말을 건넸다.
“어쨌거나, 이렇게 된 이상 통성명이라도 하는 게 어떤가요? 방금 들으셨듯이 제 이름은 단청하예요. 이쪽의 소협께서는 제갈세가(諸葛勢家)의 차남이신 제갈운학(諸葛雲鶴) 님이고, 이쪽 분은…… 음, 그저 심(沈) 낭자라고만 말씀드려야겠네요.”
그녀, 단청하는 왠지 심 낭자라는 여인을 조금 어려워하는 듯했다.
그런 생각에 금비는 잠시 심 낭자라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호리호리한 몸매에 가녀린 팔다리, 눈에 확 띄는 미모는 아니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바라볼수록 아름답게 느껴지는 외모의 소녀였다.
그녀, 심 낭자 역시 자신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다는 걸 느낀 금비가 쑥스러움에 고개를 돌릴 때 제갈운학이 허리를 펴며 포권했다.
“제갈세가의 제갈운학입니다.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오히려 제가 영광입니다. 저는 금비라고 합니다.”
그 말을 끝으로 금비는 자리에 앉았다.
둘러앉은 좌중은 약간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
무릇, 강호의 밥을 먹는 자라면 남에게 자기소개를 할 때에는 출신내력을 말하는 법이다.
사문은 어디고, 스승은 누구며, 어디의 어느 집안 출신인지를 밝히는 것이 당연한 예의인 것이다.
물론 금비가 강호인이 아닐 수도, 한갓 촌부일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그들이 느끼기에 이 사람은 도저히 그런 신분의 사람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미묘한 기품을 지니고 있었다.
처음에 단청하가 굳이 그에게 산삼을 사며 충고한 것이나 제갈운학이 자리를 찾는 그를 불렀던 것, 단일비가 굳이 자기소개를 한 것 역시 모두 그의 분위기에 끌렸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금비가 단지 이름만 밝히고 마니, 어쩐지 무언가 숨기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면서 불쾌감까지 치솟는 것이었다.
그런 마음을 헤아린 듯 금비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보시다시피 저는 할 일이 생겨 강호에 나온 촌무지렁이라, 사문도 스승도 없는 몸이기에 더 말씀드릴 것이 없군요. 이해해 주십시오.”
일동이 다시 보니 과연 금비의 일신에서는 내공의 기운이나 무예를 익힌 듯한 몸가짐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담담히 웃으며 말하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자 다들 언짢음이 풀려 웃음 지어 보였다.
그가 인사를 끝내고 자리에 앉았을 때, 그를 고요히 바라보는 심 낭자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소녀는 반짝이는 눈빛으로 금비의 눈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은 맑고 고요해서, 그 시선을 마주하는 누구라도 그 시선을 오랫동안 아무렇지 않게 받아 내기는 힘들 듯했다.
처음 보았을 때 그저 아름다운 여인이구나 하고 느낄 정도의 미모가 그 눈을 바라보는 동안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은은한 기품을 느끼며 압도당할 정도가 되는 것, 그것이 소녀가 풍기는 고고한 아름다움이었다.
금비는 그런 그녀의 시선을 차분한 얼굴로 미소를 띤 채 받아 내고 있었다.
가인(佳人)의 깊은 시선을 마치 봄날의 꽃을 바라보듯, 아무런 동요 없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두 사람의 시선 교환은 수십 마디의 언어를 주고받는 듯도 하고 말없이 싸움을 벌이는 듯도 해서, 이제 주변 사람들은 조금씩 긴장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때, 소녀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만나서 반가워요. 저는 심은(沈恩)이라고 해요.”
그녀의 인사말에, 둘러앉은 좌중은 해연히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특히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 그나마 그녀를 잘 알고 있는 단청하의 놀라움은 더했다.
‘아니, 심 언니는 평소에 남자와 제대로 말도 섞지 않는 분인데, 어떻게 자신이 먼저 소개를 할 수 있지? 운학 오빠조차도 심 언니와 하루 종일 가야 한두 마디 나누는 정도고, 저 막무가내 일비 녀석도 심 언니는 어려워하는 판인데……. 이렇게 자신이 먼저 이름을 밝히는 언니의 모습을 난 본 적이 없어.’
주위의 다른 일행도 단청하만큼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제갈운학은 표시 내지 않으려 노력하는 듯했으나 얼굴에 아연한 기색이 떠올라 있었고, 단일비는 아예 입을 헤벌린 채 두 사람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그런 와중에서도 금비와 심은의 표정은 도리어 차분했다.
심은이 다시 입을 열었다.
“강호는 넓고 인재는 많다 하더니…… 오늘 또다시 새롭게 사람에 대해 감탄하게 되는군요. 제 술을 한잔 받으시겠어요, 소협?”
“하하, 주시는 술이야 감사히 받겠습니다만, 저는 전혀 감탄할 가치가 없는 촌부입니다. 어찌 저 같은 사람에게 그런 과분한 평가를 내리시는지…….”
“무엇 때문에 소협께서는 스스로 가치 없는 사람이라 말씀하시는 건가요?”
심은이 섬섬옥수를 들어 술병을 쥐며 말했다.
다시 바라보는 그윽한 눈빛에, 금비는 드디어 얼굴을 조금 붉히고 말았다.
“가인의 칭찬은 언제나 장부의 마음을 녹이는 법이지요. 제 어디를 보고 훌륭하다 판단하셨는지 모르겠으나 약관을 넘기도록 문재(文才)로나 무재(武才)로나 별달리 이룬 것 없이 지금에 이르렀으니, 아둔하다 야단을 맞을 수는 있을지언정 훌륭하다 칭찬받는 것은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사람의 가치는 그 마음의 수양이 중요할 뿐 겉으로 보이는 성취가 대단한 것은 아니라는 진리를, 어린 저이지만 근래에 깨우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소협을 뵈니 머리로 깨우친 일을 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어 매우 기뻐요.”
금비가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듯 웃으며 술잔을 들자, 심은이 술병을 들어 그 잔에 술을 채웠다.
술잔을 입가로 가져가는 금비에게, 심은이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무공은 전혀 배우지 않으셨나요?”
“그저 알게 된 어르신에게서 호흡법 정도를 배워 건강에 도움 삼고는 있으나, 무공이라 할 만한 것은 알지 못합니다.”
“그렇군요. 그러면 무공을 배우실 생각이 있나요?”
오가는 두 사람의 대화에, 둘러앉은 이들은 그저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잠시 후, 제갈운학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이거, 두 분이 마치 오랫동안 알고 사귀어 온 지기처럼 보여 저희가 쑥스럽군요. 저희에게도 대화를 나눌 기회를 좀 주지 않으시렵니까?”
“그래요, 언니께서 이렇게 많은 말씀을 한 것은 오늘이 처음인 것 같아요. 하지만 우리에게도 이분 소협을 좀 나누어 주셔야지요? 밤은 길고 술은 넉넉하니, 다 함께 이야기하며 노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단청하가 웃으며 말했다.
그녀가 금비의 잔에 술을 채우면서 살짝 웃음을 띠자, 금비는 또 달리 가슴이 두근거림을 느껴야 했다.
한편, 단청하 역시 마음속에 야릇한 동요가 일고 있었다.
조금 전 금비와 심은이 이야기를 나눌 때, 그녀의 마음속에는 까닭 모를 울화가 치밀어 오르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