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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쥐 1권 (25화)


공평한 조건에서 겨루기 위해 각 가문의 호위무사들은 함께할 수 없었기 때문에 수신호위대만이 그들을 도울 수 있었다.
만일 가문의 고수들이 참여한다면, 그들이 대신 마물을 때려잡아 성적을 올릴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수신호위대에도 각 가문의 사람들이 많이 포진하고 있어 몇몇 후기지수들은 자신 가문의 사람이 소속된 조와 함께 사냥을 나서기도 했다.
아무래도 호흡이 잘 맞고, 더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누구를 호위하게 될지는 임의로 정해 사흘 후에 알려주겠다.”
상태복이 말을 마치고 자리에 앉으려 할 때였다.
“잠깐, 다른 건 모르겠고, 그 말썽꾸러기 호위는 어느 쪽에서 맡을 건지 이 자리에서 정합시다!”
도침이 일어서서 대주를 보았다.
“작년엔 우리가 맡았으니 다른 두 곳 중 한 곳에서 맡아야지!”
제삼부대주 양척승이 핏대를 올리며 소리쳤다.
“우린 재작년에 맡았으니 결국 도침 자네가 맡을 차례군.”
상태복이 미소 지으며 도침을 바라보았다.
도침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괜히 말을 꺼낸 것이다. 가만 있었으면 다른 곳에서 맡았을 수도 있었다.
“도침 그대가 맡아야겠군그래, 그럼 오늘 회의는 이걸로 끝내고, 자세한 사항은 사흘 뒤에 공표하도록 하겠다. 이상!”
도침이 뭐라 반론을 제기할 사이도 없이 축융이 회의를 끝내 버렸다.
도침은 똥 씹은 표정이 되었다.
말썽꾸러기는 다름 아닌 교주 북궁천의 딸인 북궁혜였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그녀는 호위하는 입장에서는 무척 골칫거리였다.
작년에도 그 말썽꾸러기를 맡았던 양척승의 조원들이 십수 명이 죽어 나갔다.
독각화룡의 알을 가져오기 위해 두 마리의 독각화룡이 지키는 둥지를 겁도 없이 들어갔다가 이십이조장 포함 호위대원 열다섯이 목숨을 잃은 것이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이십이조만 움직였다면 피해가 그렇게까지 크지 않았겠지만, 문제는 북궁혜를 보호하며 움직여야 했다는 것이었다.
북궁혜를 들고 뛸 수도 없으니 그녀를 향하는 화룡의 공격을 대신 막아야 하는 것이다.
독각화룡의 화염에 많은 호위대원이 재가 되어 사라졌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그 일로 인해 대주 축융의 강력한 항의로 평상시 북궁혜의 호위는 가문 사람들이 알아서 맡도록 되었지만, 수렵대회에서는 가문의 호위가 함께할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이번엔 또 어떤 사고를 칠 것인지 벌써부터 걱정되었다.
그저, 이제 나이도 열여섯이 되었으니, 조금은 더 어른스러워졌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회의장을 나서며 이런저런 궁리를 하고 있던 도침의 눈에 왕오가 보였다.
‘그래! 저놈이 있었지!’
제멋대로 조원을 죽인 것도 모자라 위지가의 식솔을 함부로 죽여 자신을 곤란하게 만든 녀석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얼마 전 위지가의 항의를 무마하느라 상당한 돈을 써야 했다.
아신이 비록 부조장을 죽였으나, 그는 일반무사였기에 하극상으로 넘어가면 그만이었다.
헌데, 왕오는 사건을 너무 크게 벌인 것이다.
‘어디 한 번 네놈도 당해봐라!’
도침은 왕오를 북궁혜의 호위대로 배정하기로 마음먹었다.
“왕오!”
도침이 왕오를 불러세었다.
“네! 부대주님!”
왕오가 재빨리 도침 앞에 고개를 숙였다.
“이번 하계수렵대회에서 너희 조는 전원 교주님의 따님이신 북궁혜 소저의 호위를 맡는다!”
왕오는 아마도 북궁혜가 회의 때 이야기하던 말썽꾸러기일 것이라 짐작했다.
모두 피하려는 것을 보면, 그녀의 행동이 단지 말썽의 수준이 아닐 것임이 분명했다.
지난번 조원을 죽인 일로 도침이 자신에게 화풀이하는 것이리라.
“알겠습니다! 부대주님!”
명령은 명령.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왕오는 도침에게 대답한 후 찝찝한 마음을 안고 숙소로 돌아왔다.

드디어 하계수렵대회날이 되었다. 왕오가 죽인 두 명의 조원은 이틀 전 새로 충원되었다.
대회가 진행되는 장소는 천산 중턱 흑암림(黑暗林)이라는 음산한 이름을 가진 숲이었다.
초여름임에도 쌀쌀한 날씨가 귓볼을 얼렸다. 숲은 아름드리 나무들이 우거져 볕이 잘 들지 않는 음침한 곳으로, 무성하게 나무를 타고 오르는 가시덤불과 이곳저곳에 숨은 독물들로 인해 악명이 자자한 곳이었다.
숲 앞 커다란 공터에 참가자인 오세의 후기지수들이 모여 있었다.
각 가문에서 뽑힌 서른 살 밑의 젊은이들이 상기된 표정으로 대회의 시작을 기다렸다.
그동안 갈고닦은 자신들의 실력을 보일 기회이자, 신마단을 하사받아 공력이 일취월장할 수 있는 기회였다.
각자 열 명씩의 수신호위대가 호위하고 있었는데, 북궁혜만은 스무 명의 호위가 붙어 있었다. 바로 왕오의 십삼조 전부가 북궁혜와 함께하는 것이다.
유일한 여성 참가자이기도 했고, 교주의 딸이라는 특수한 신분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녀가 항상 주체 못할 문제들을 일으키기 때문인 이유가 가장 컸다.
그 외에도 각 가문에서 자신의 자식과 형제들을 응원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북궁혜는 상당한 미모를 가지고 있었다.
살짝 위로 올라간 동그랗고 커다란 두 눈에 오똑한 코, 작고 앙증맞은 입술이 그녀를 보는 사람들에게 귀여우면서도 관능적인 느낌이 동시에 들도록 했다.
‘저런 귀여운 소녀가 최악의 말썽꾼이라니.’
왕오는 속으로 혀를 찼다.
그간 알아본 바에 의하면 북궁혜는 그야말로 모든 아랫사람들이 꺼려 하는 존재였다.
시도 때도 없이 화내는 것은 예사인데다, 자신의 멋대로 행동하고, 그걸 막으면 자기 성질을 못 이겨 난동을 부리기 일쑤였다.
사실 북궁혜의 행동이 어느 정도 이해가 가기는 했다.
교주의 유일한 자식이자 딸이라는 이유로 수많은 이들의 표적이 되었기에, 어렸을 때부터 항상 곁에는 호위대가 지키고 있었으며, 거처 밖으로 함부로 움직일 수도 없었다.
그런 답답함이 북궁혜의 성격을 엉망으로 만드는데 일조했음은 틀림없었다.
그래서 무공 실력이 형편없음에도 아버지인 북궁천에게 졸라 반드시 하계수렵대회에 참석하는 것이다.
이때는 자신의 거처를 벗어나 마음껏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수신호위대가 함께하는 반쪽 자유였지만 말이다.
가문의 완고한 어른들이 자신 옆을 지키는 것보다는 백 배 나은 일이었다.
수신호위대는 자신의 말을 거역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후아…….”
북궁혜가 가슴을 편 채 즐거운 표정으로 산의 맑은 공기를 들이마셨다.
그 모습이 어찌나 시원해 보이는지 지켜보는 왕오의 마음속까지도 상쾌해지는 느낌이었다.
북궁혜는 칠흙처럼 검은 두 눈으로 숲을 빨아들일 듯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일 년 중 그녀가 유일하게 숨쉴 수 있는 하루가 바로 오늘, 그리고 저 숲속인 것이다.
왕오가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폈다.
아신이 북궁가의 참가자 중 한 명의 호위를 맡아 아홉의 조원들과 서 있었다.
그 뒤쪽을 보던 왕오의 표정이 굳었다. 아신의 뒤쪽으로 북궁호가 보였던 것이다.
아마도 북궁가의 대표로 대회에 참가한 듯했다.
참으로 질긴 인연이었다. 북궁호도 왕오를 발견했는지 마주 보며 인상을 썼다.
‘놈! 만일 엉뚱한 일을 벌인다면 이번엔 반드시 죽이리라!’
왕오가 속으로 다짐했다.
언젠가 반드시 없애야 할 놈이다. 안 그러면 계속 자신의 등 뒤를 노릴 것이다.
잠시 후 징이 울리며, 대회 주최자이자 천마신교의 교주인 북궁천이 등장했다.
북궁천은 아무것도 장식하지 않은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평범한 인상의 사내였다.
복장도 화려하지 않고 단촐한 것이 겉모양에 치중하지 않는 그의 성품을 반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에선 만인을 압도하는 위엄(威嚴)이 흘러나왔다. 그가 바로 현재 무림의 십대고수 중 가장 윗줄의 이황(二皇) 중 한 명인 멸황(滅皇) 북궁천인 것이다.
북궁천을 따라 천마신교의 지도부가 함께 등장했다.
다들 쟁쟁한 인물들로 기세부터 달랐다.
왕오가 경험했던 인물 중 가장 강한 축융보다도 윗줄인 듯한 인물들이 수두룩했다.
“다들 이 날을 일 년 동안 기다려 왔으리라 생각한다! 천마신교의 젊은 마인들이여! 그동안 갈고닦은 너희의 기량을 맘껏 발휘하도록 하라! 지금부터 하계수렵대회를 시작한다!”
북궁천의 선언이 있고 징이 울리자 참가자들과 여러 마인들이 함께 환호했다.
“와아아아아!”
대회가 시작되고 각 참가자들과 그들을 수행하는 수신호위들이 숲을 향해 움직였다.
흑암림은 무턱대고 서두르면 목숨을 잃기 쉬운 곳이었다. 참가자들은 조심스럽게 숲으로 들어섰다.
왕오와 십삼조원들 역시 함께 숲으로 진입했다.
참가자들은 숲의 입구에서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다른 사람과 공을 나누기 싫은 까닭이다.
숲 안쪽은 밖에서 보던 것보다 더 어둡고 스산했다.
앞을 가로막는 가시덤불과 끝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나무들이 일행을 압도했다.
“와아! 이 신선한 공기, 으―음.”
북궁혜가 한껏 숨을 들이마시더니 이곳저곳 뛰어다녔다.
나무들이 햇빛을 가로막아 밑에 쪽엔 가시덤불과 이끼 외에는 다른 식물들이 자라지못해 움직일 공간은 충분했다.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기뻐하는 북궁혜의 모습을 보니 조금은 측은한 마음도 일었다.
“주위를 철저히 경계하도록!”
왕오가 조원들에게 명령했다.
갑자기 마물이라도 나타나면 큰일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절정의 경지를 넘어선 지금은 흑오공 정도는 혼자서도 상대할 수 있었지만, 조원들은 상당히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될 것이었다.
조원들을 특별히 신경 쓰지는 않지만, 자신이 맡은 조원들이 쓸데없이 목숨을 잃게 되는 것은 상관들이 왕오를 평가하는데 상당한 악영향을 줄 것이다.
제발 저 아가씨가 저렇게 뛰어놀기만 하다 그냥 돌아갔으면 하는 심정뿐이었다.
노란 경장을 입은 채 노래까지 불러가며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북궁혜의 모습은 마치 한 마리 나비와도 같았다.
왕오와 조원들은 그런 북궁혜를 놓치지 않고 따라다니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북궁혜는 그야말로 천방지축이라는 말이 모자랄 정도로 온 숲을 휘젖고 다녔다.
오른쪽으로 움직이는가 싶으면 어느새 왼쪽으로 움직였고, 잠시 쉬는가 싶으면 또 달려 나가곤 했다.
왕오와 조원들은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북궁혜야 그냥 아무 생각없이 뛰어다니면 그만이었으나, 왕오들은 북궁혜를 중심으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신중하게 움직여야 했기 때문이다.
일각 정도를 뛰어다니던 북궁혜가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와! 귀여워!”
북궁혜가 갑자기 왼쪽으로 달려갔다.
그곳엔 제법 큰 동굴이 하나 있었는데, 붉은 털을 가진 새끼 늑대들이 낑낑거리고 있었다.
“새끼 혈랑들이야! 너무 귀여워! 나 얘네들 데려다 키울 거야!”
북궁혜가 펄쩍펄쩍 뛰며 좋아했다.
혈랑은 붉은 털을 가진 늑대로 흑암림의 제일 흔한 마물들 중 하나였다.
마물 중에선 가장 약한 편에 속했는데, 그래도 일반 늑대들의 세 배가 넘는 큰 덩치에다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을 지닌 난폭하고 강력한 맹수였다.
지옥곡에서 상대한 늑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엄청난 놈인 것이다.
거기다 이놈들은 항상 열 마리 이상 무리를 지어 다닌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흑오공보다도 더 까다로운 놈들이었다.
왕오가 미간을 찡그렸다.
새끼를 그냥 두는 늑대는 없다. 분명 주위에서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모두 경계하라!”
왕오의 목소리에 조원들이 무기를 들고 사방을 경계했다.
크르르르르!
동굴 뒤쪽에서 짙은 누린내와 함께 놈들의 성난 울음 소리가 들렸다.


<『박쥐』 제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