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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쥐 1권 (24화)
상하 관계는 없다. 왕오와 그녀는 하는 일이 달랐다.
앵화는 간자와 무림맹을 연결해 주는 접선책. 즉, 연락책이다. 그에 반해 마교에 침투한 왕오는 현장 요원이라 할 수 있었다.
앵화에게 받은 잔을 들이키자 독한 술이 목을 타고 내려가며 짜릿한 쾌감을 주었다.
지옥곡에서도 관문을 통과한 후나 특별한 날 가끔 술을 마시긴 했기에, 술에 대한 거부감은 없었다.
단지, 지옥곡에서 먹던 질 낮은 정체 모를 술과는 천양지차의 향과 맛에 왕오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멀리 산서에서 직접 가져온 분주랍니다. 워낙 운반 거리가 멀다보니 이곳에서는 금값하고 맞먹는 술이지요.”
앵화가 눈웃음을 치며 술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왕오가 한참 동안 주향을 음미했다.
왕오도 술병을 들어 그녀에게 한 잔 따라주었다.
이것은 동료로서 주는 잔이었다. 앵화가 기꺼이 왕오의 잔을 받아 비워냈다.
석 잔쯤을 주거니 받거니 하니 술기운이 제법 올라왔다.
“이곳 취향루는 무림맹의 신강 거점 중 하나입니다. 총관님부터 기녀와 점원들까지 무림맹의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단, 문 앞이나 일층의 하급 점원들과 몇몇 기녀들은 이곳 성화촌에서 고용한 인물들입니다. 그래야 천마신교의 눈을 피할 수 있으니까요.”
왕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원 무림맹의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천마신교의 의심을 받게 될 것이다.
“이곳 외에도 몇 개의 거점이 더 존재합니다만, 그 위치는 저도 다 알지 못하지요. 일단, 당분간은 앞으로 한 달에 두 번 이상 이곳을 들러 저에게 마교의 동향을 보고하면 됩니다. 하지만 항상 저만 찾으면 의심하게 되니 가끔은 제가 피할 수도 있을 거예요. 그럴 땐 다른 기녀를 찾으세요. 물론 그들도 대부분 무림맹의 사람이지요.”
앵화가 말을 잠시 멈추고는 왕오의 잔을 채워주었다.
“단, 특이 동향이 있을시에는 즉시 저를 찾아주세요. 입구의 지배인에게 이야기하면, 바로 저와 연결이 될 거예요.”
왕오가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무림맹에서 임무가 내려오면 저 또는 저번에 만났던 염숙을 통해 전달받게 될 것이에요.”
염숙이라는 자는 일전에 왕오에게 술병을 전달한 사내를 말하는 것 같았다.
“어지간히 급한 임무가 아니면 암표를 남겨 그대가 이곳에 올 때 전달받게 될 것이에요. 단, 아까와 마찬가지로 특별히 중요하거나 급히 처리해야 할 임무가 발생하면 제가 직접 찾아가던지, 염숙이 직접 전해줄 거예요.”
왕오는 차근차근 앵화의 설명을 머릿속에 세겼다.
“이것은 당신과 나만이 사용할 암표책이에요 이 자리에서 다 외우세요.”
앵화가 왕오에게 감찰단 엽승방에게서 받았던 것과 비슷한 얇은 책자를 건넸다.
간단한 단어들을 암호화한 암표책이었다.
왕오가 암표를 외우는 동안 앵화는 노래를 하거나 갑자기 호호 웃기도 하면서, 술을 마셨다.
아마도 밖에서 듣는 것을 의식한 행동 같았다.
반 시진쯤 지나 왕오는 몇 번의 확인을 거쳐 암표를 모두 외우는데 성공했다.
“이리 주세요.”
왕오가 앵화에게 책자를 넘기자 앵화가 손을 씻는 대야에 책을 집어넣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책이 녹아서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호호, 이것은 고구마 전분을 특수 처리해서 만든 종이에요. 물에 들어가면 녹아 없어지게 되어 있죠.”
놀란 왕오의 모습을 재밌다는 듯 앵화가 입을 가리며 웃음 지었다.
살벌한 인상의 왕오에게 저런 아이 같은 표정이 있을 것이라 생각도 못한 것이다.
“험, 험.”
왕오가 겸연쩍은지 헛기침을 해댔다.
앵화의 얼굴도 이젠 홍조를 띠우고 있었다.
왕오와 처음 대면하는 자리이기에 분주 중에서도 최상품을 가져온지라 취기가 금방 올라온 것이다.
“일단, 오늘은 여기서 저와 함께 자고 가세요.”
왕오가 당황한 표정으로 앵화를 바라보았다.
여인이 아무 거리낌없이 이런 말을 하리라 예상도 못했기 때문이다.
“호호, 기루에 들른 사내가 밤도 되기 전에 나간다면 의심받을 거예요. 최소한 하룻밤 머물고 내일 아침에 이곳을 나서세요.”
왕오는 다시 한 번 자신이 착각했음을 알고, 창피함에 고개를 돌렸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복수를 위해 자신을 버린 지 십 년 가까이 됐지만, 오늘처럼 스스로를 통제 못하고 허점을 보이기는 처음이었다.
같은 동료를 만나 자신의 진실된 모습을 보일 수 있는 자리였기에 그러했을까. 아니면 아직도 자신의 한구석에 인간다움이 남아 있는 것일까. 왕오는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앵화라는 여인은 이상하게 편안한 느낌을 주었다.
어찌 보면 돌아가신 어머니 같고, 어찌 보면 무림맹의 보호를 받고 있을 자신의 여동생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결국 왕오와 앵화는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뜬눈으로 밤을 지샜다.
나중에는 인사불성이 된 왕오의 옷을 벗겨 이불을 덮어 재운 앵화가 자신도 옷을 벗은 채 그 옆에서 함께 잠들었다.
혹시라도, 상을 치우러 온 하인들이 보게 될 경우를 대비한 것이다.
하급 하인들은 이곳 성화촌에서 고용한 사람들이기 때문이었다.
다음 날 아침 일어난 왕오는 깜짝 놀랐다.
자신이 아무것도 입지 않은 채 앵화와 한 이불 안에 누워 있었던 것이다.
술상은 언제 치워갔는지 이미 없었다.
왕오는 당황해서 어제의 일을 곰곰이 되새겼다. 분명 술을 먹다 어느 순간부터 기억이 나지 않았다.
‘혹 술김에 이 여인과 몸을 섞은 것인가.’
왕오가 인상을 찡그렸다. 어제 마신 술과 복잡한 생각에 머리가 아파왔다.
자신답지 않은 실수였다. 정신을 잃을 정도로 술을 마시다니, 만일 앵화가 적이었다면, 왕오는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으음…….”
인기척을 느끼고 앵화가 몸을 일으켰다. 이불이 흘러내리며 상체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왕오가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크흠…….”
앵화가 눈을 몇 번 비비더니 왕오를 보곤 호호 웃었다.
“호호, 아무 일도 없었으니 걱정 마세요. 상을 치우는 하인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 함께 자는 척한 거랍니다.”
왕오는 앵화의 말에 한숨 놓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설정이었다 하나, 두 사람이 한 이불 속에서 맨살을 맞댄 채 잠을 잤다고 생각하니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벌개졌다.
“호호호, 잡아먹지 않을 테니 걱정 마세요.”
앵화가 몸을 일으켜 옷을 걸쳤다.
왕오도 허겁지겁 자신의 옷을 걸쳤다. 독종에 악귀인 왕오였지만, 아직은 열일곱 소년에 불과했다. 그런 왕오를 귀엽다는 듯 앵화가 미소를 지었다.
8. 수렵대회
어떻게 취향루를 빠져나왔는지 생각도 못할 정도로 왕오에게는 당황의 연속이었다.
골목을 빠져나와 천마신교의 입구에 이른 순간 왕오의 머릿속은 찬물을 끼얹은 듯 가라앉았다.
‘대체, 이게 무엇하는 짓이란 말인가!’
왕오는 자신을 질책했다. 이렇게 쉽게 빈틈을 보이다니 왕오에게 당황이라는 단어는 존재해서는 안 된다.
항상 냉철하게 판단하고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지금 왕오가 있는 곳은 칼날 위를 걷는 것과 같다. 잘못 디디면 죽음뿐이다.
왕오는 처음 겪는 일이기에 미리 방비를 못한 탓이라 생각했다. 앞으로는 절대 같은 상황이 없을 것이라 다짐했다.
왕오가 얼굴을 굳힌 채 마교 입구로 들어섰다.
오늘은 수신호위대 간부회의가 있는 날이었다.
왕오는 옷차림을 단정히 한 채 수신호위대 대회의실로 향했다. 간부라 해봐야 대주와 세 명의 부대주, 서른 명의 조장이 전부였다.
부조장은 조장이 언제든지 임의로 임명할 수 있기에 간부라 여기지 않았다.
회의실에는 각 조장들이 이미 도착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아신의 모습도 보였다. 목의 화상 자국이 암동의 처절했던 사투를 생각나게 했다.
잠시 후 세 명의 부대주와 함께 수신호위대 대주 축융이 들어섰다.
거신패도(巨身覇刀)라는 별호처럼 무려 칠 척에 이르는 큰 키와 이백 근도 더 나갈 듯 보이는 어마어마한 덩치가 보는 사람을 압도했다.
턱에 가시처럼 돋아난 수염은 마치 돼지털처럼 뻣뻣했고, 부리부리한 눈과 굵은 눈썹은 마치 한 마리 대호(大虎)를 연상시켰다.
상석에 자리한 축융이 의자에 앉자 곧이어 세 명의 부대주도 착석했다.
“모두 편히 앉도록.”
굵은 목소리로 축융이 명했다.
공력이 상당한지 그리 크지 않은 소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제법 큰 회의실이 쩌렁쩌렁 울리는 듯 느껴졌다.
“새로 임명된 조장이 세 명 있다고?”
축융이 제일부대주 상태복에게 물었다.
“네! 대주님! 일단 새로온 조장들은 앞으로 나서서 대주님께 인사드리도록 하라!”
상태복이 새로이 임명된 조장들을 불러냈다. 아신과 왕오 그리고, 이십삼조장이 앞으로 나섰다.
“십삼조장 왕오 대주님께 인사드립니다!”
“십일조장 아신, 대주님께 인사드립니다!”
“이십삼조장 혁련후 대주님께 인사드립니다!”
세 명의 신임 조장들이 대주 축융을 향해 절도 있게 자신을 소개했다. 서른 초반으로 보이는 이십삼조장은 이름을 보아 아마도 혁련가의 사람인 듯했다.
“그래, 잘 왔다. 다들 실력이 출중하구나. 앞으로 호위대의 일원으로 많은 공을 세우기 바란다. 후후.”
축융이 세 조장을 살피고는 흡족한 듯 미소를 지었다.
두 명의 절정고수와 혁련가의 제법 단련이 잘된 녀석까지, 경험만 쌓는다면 상당한 전력이 될 둣했다.
“제일부대주 자네가 오늘의 안건에 대해 회의를 진행하도록 하게.”
축융의 명에 상태복이 일어서서 안건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오늘 회의는 칠 일 후에 있을 사냥대회를 논의하기 위해서다. 호위대에 온 지 얼마 되지 않는 조장들을 위해 간단히 설명하자면, 오세의 후기지수들이 모여 마물들을 사냥하는 행사이다. 정식 명칭은 하계수렵대회(夏季狩獵大會)로 후기지수들의 기량을 겨루고, 마물들을 없애 교인들과 신교 식솔들의 안전을 도모하는 행사이다.”
하계수렵대회는 천마신교에서 매년 초여름에 정기적으로 열리는 행사로 오세의 각 가문에서 열 명씩 총 오십 명의 후기지수들이 참석하여 마물 사냥에 나선다.
나이는 서른 살 아래로 제한되며, 열 살 이상이면 누구나 참석할 수 있다.
성체 상태의 마물은 사살하고, 알이나 새끼는 생포하여 암동으로 보낸다.
마물을 잡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운 후기지수들은 신마단(神魔團)을 하사받게 되는데, 이것은 순식간에 십 년의 공력을 상승시켜 주는 영단이었다.
이 효과는 처음 복용한 자에게만 적용되어서 두 알 세 알 더 복용해 봐야 큰 의미는 없지만, 무림인에게 십 년이 넘는 공력의 증가는 상당히 큰 선물이었다.
기본 심공을 수련해서 십 년을 연공해야 얻을 수 있는 공력을 한순간에 얻는 것이다.
이 때문에 후기지수들은 눈에 불을 켜고 행사에 적극적으로 임했다.
“예년처럼 이번 행사도 수신호위대에서 돕기로 했다. 혹시 모를 위험으로부터 후기지수들을 지키고. 대회에서 참가자들을 도와 마물을 사냥하는 것도 우리들 몫이다.”
어차피 후기지수들 혼자서 마물을 사냥하는 것은 만만치 않았다.
작은 마물들이야 상관없지만, 흑오공이나 설지주 같은 대형 마물들은 혼자 상대하다간 목숨을 잃기 십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