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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쥐 1권 (23화)


얼마만에 보는 자신의 이름인가 하는 감정 따윈 없었다.
단지, 드디어 첫 번째 접선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왕오를 흥분시켰다.
비로소 무림맹 간자로서 첫 임무가 시작된 것이다.

대체 술병을 전한 자가 어떻게 왕오의 위치를 알고 감쪽같이 기다리고 있었는지 신기한 일이었다.
아무래도 마교에는 생각보다 많은 수의 간자들이 활동하고 있는 듯했다.
술병을 들고 숙소로 돌아온 왕오는 뚜껑을 열었다.
술병 안은 예상대로 비어 있었다.
비어 있는 술병 속에는 작은 쪽지가 들어 있었다. 왕오는 조심스럽게 접혀 있는 쪽지를 폈다.

쪽지를 들고 성화촌(聖火村) 취향루(醉香樓)의 앵화(櫻花)를 찾아라.

쪽지에 적힌 암표의 내용은 이러했다.
성화촌은 천마신교의 입구에 자리잡은 마을로 천마신교의 식솔들이나 교도들(교도라고 해봐야 결국 천마신교의 식솔들이 대부분이었다.)이 사는 곳이었다.
여러 가지 상점과 술집들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들이 그곳에 존재했다.
성화촌에는 마교도들뿐 아니라 여기저기서 몰려온 상인이나 중원에서 죄를 짓고 도망쳐 온 죄수 등 다양한 인간 군상(群像)들이 모여서 도시를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천마신교의 직접적인 영향권에 위치하다 보니 감히 함부로 날뛰는 자가 없었다.
그로 인해 오히려 살기 좋은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천마신교에서 나오는 돈이 주민들의 배를 불려주고 치안이 안정되어 있으니, 맘 편히 자신들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마인들만 조심하면 말이다.
천마신교 또한 이들이 자신들의 근간임을 잘 알기에 마인들이 함부로 날뛰지 못하도록 엄중히 관리하고 있었다.
어차피 그들의 가족과 교인들이 사는 곳이며 천마신교에 필요한 여러 물자를 공급하는 곳이 바로 성화촌이었기 때문이다.
성화촌에서 수입을 얻지 못해도 천마신교는 돈이 넘쳐 났다.
바로 신강을 지나 서역으로 향하는 상인들에게 통행세를 받기 때문이었다.
물론 반대의 경로(서역에서 중원)도 마찬가지였다.
사주지로(絲綢之路)를 통한 교역은 많은 이윤이 남는 장사였다.
신강은 천마신교의 땅이다.
그들이 어차피 천마신교의 영토를 지나려면 약간의 상납으로 안전한 상행을 보장받는 것이 오히려 이익이었다.
보통 서역과의 교역에 임하는 상단은 대상단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니 천마신교의 제정이 풍족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쨌든, 성화촌은 그런 이유로 외부인 출입이 비교적 자유로왔다.
개방이나 무림맹의 첩자들도 성화촌에 상당수 존재했다.
주로 주루나 객잔 등 사람들이 많아 모이는 곳에 접선책을 두곤 했는데, 그것은 이런 곳들이 많은 정보가 모이는 곳이기도 했고, 워낙 사람이 많이 오가다 보니 그 모두를 감시하기가 불가능해 정체가 들킬 위험이 가장 적은 곳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정기적으로 천마신교의 감찰단에서 기루나 주루 객잔 등을 조사하지만, 수 많은 기루와 객잔을 일일이 다 조사하기란 힘든 일이었다.
임의로 몇 개의 객잔을 선택하여 돌아가며 기습 감찰을 하는 것이 그들로서는 최선이었다.
‘취향루의 앵화라…….’
어쩐지 주루의 이름 같았다. 앵화는 그곳에서 일하는 여인의 이름일 것이다.
사실 취향루는 주루가 아닌 기루였으나, 바깥세상과는 단절된 채 살아온 왕오로서는 그런 것에 대해 잘 알지 못할 수밖에 없었다. 왕오는 머릿속에 이름을 기억한 후 숙소를 나섰다.
숙소 앞에는 조원들이 집합해 있었다. 조원들의 눈빛엔 왕오에 대한 두려움이 가득했다.
공연히 말 한마디 잘못하면 목숨을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왕오가 대원들을 쓰윽 훑어보았다.
상당히 만족스러운 결과다. 이제 이들은 왕오의 말에 절대 복종할 것이다.
아마도 홍탁의 기분이 이러했으리라 생각하니, 한편으론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이들 중 자신에게 진심으로 충성하는 자는 한 명도 없을 것이다. 어차피 마인들의 충성 따위는 기대하지도 않았다.
단지, 놈들에게 조금의 틈도 주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왕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내 성질이 원채 거칠고 더럽다. 화가 나면 바로바로 행동으로 옮기는 성격이다. 너희가 나를 건드리지만 않으면 편안한 생활을 하게 될 테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는 내 스스로도 장담치 못한다. 알아서 기어라. 난 튀는 놈을 가장 싫어한다. 난 너희를 내 손발이라 생각한다. 손발이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고 썩어 들어간다면, 잘라내 버려야 하지 않겠나.”
왕오의 눈에서 한 줄기 한광이 뻗어 나왔다. 조원들이 오싹한 살기에 진저리를 쳤다.
“부조장!”
“예! 조장!”
복태가 얼른 고개를 숙이며 왕오 앞에 나섰다.
“내일 아침 간부회의 때까지는 특별한 임무가 없으니, 자유로이 쉬도록! 간부회의 후 임무가 하달될 것이다. 그때, 다시 집합한다! 이상!”
“존명! 모두 해산!”
복태가 조원들을 해산시키고 왕오는 호위대를 빠져나와 성화촌으로 향했다.

성화촌은 생각보다 상당히 넓었다.
수 많은 상점, 주루, 객잔 중에 취향루를 찾기가 만만치 않아 보였다.
왕오는 일단 근처 상인들에게 물어보기로 마음을 정했다.
“혹시 취향루가 어디에 있는 줄 아시오?”
왕오가 옷감과 여러 가지 옷들을 파는 가게의 젊은 점원에게 물었다.
옷들을 정리하던 점원이 깜짝 놀라 왕오를 바라보았다.
왕오의 인상에 두려움을 느낀 것이다. 점원이 약간은 의아한 표정으로 조심스레 물었다.
“저…… 성화촌엔 처음이신지오?”
이리 묻는 걸 보면 아마도 취향루가 제법 유명한 곳인 모양이었다.
“그렇소.”
점원이 슬쩍 왕오를 훑어보았다.
어린 용모지만 허리에 검을 찬 것을 보니 천마신교의 무사인 듯했다. 함부로 건드려서 좋을 것이 없었다.
“헤헤, 사내대장부라면 역시 나이에 관계없이…… 헤헤…….”
점원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왕오에게 아양을 떨었다. 왕오는 갑작스런 점원의 행동에 의구심이 들었다.
“이 길로 쭉 가시다 보면 소마객잔이란 곳이 나오는데, 그곳을 끼고 우측으로 걸어가시면 기루가 밀집한 만화로(萬花路)란 거리가 있습니다요. 그곳에 가면 바로 보이실 겁니다요.”
점원이 침을 튀겨 가며 취향루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그제야 왕오는 점원이 왜 이상하게 행동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취향루가 기루였던 것이다.
이제 겨우 나이 열일곱인 왕오가 기루의 위치를 물으니, 호색한 애송이 마인쯤으로 생각한 것이리라.
조금은 억울한 일이었으나 점원이 자신을 어찌 보는가는 현재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일단은 취향루에서 첫 접선을 해야 하는 것이다.
아마도 앵화는 기녀의 이름일 것이다.
그녀가 왕오의 접선책인 것이다. 하기야, 마인이 기녀를 만나 즐기는 것이야 다반사이니 특별히 의심을 받을 일이 없을 것이다.
거기다 따로 방에 들어가 둘만 있을 수 있으니 비밀스러운 이야기가 새어 나갈 염려도 없는 것이다.
왕오가 가게를 나서자 점원이 연신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점원이 알려준 대로 움직여 도착한 만화로는 길 양쪽으로 홍등이 걸린 건물들이 죽 늘어서 있었다.
어림잡아도 크고 작은 기루가 오십여 개가 넘게 밀집해 있는 곳이 만화로였다.
아무래도 마인들의 특성상 색을 밝히는 것은 당연하다 보니 수요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한편으로는 이 거리가 성화촌의 치안에 도움을 주고 있다고도 볼 수 있었다.
만일 그 많은 마인들이 욕구를 풀 곳이 없다면 성화촌은 순식간에 무법지대로 변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점원의 말대로 취향루는 바로 찾을 수 있었다.
거리에서 제법 큰 건물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장식이라던가 건물 외견도 상당히 깔끔하고 고급스러워서 기루라기 보단 고급 주루같은 느낌을 주고 있었다.
왕오가 입구에 다가가자 스물 중반쯤 보이는 점원이 허리를 굽히며 반갑게 인사했다.
“어서 옵쇼!”
점원이 왕오를 안쪽으로 안내하자, 대기하고 있던 다른 점원이 왕오를 맞이했다.
밖의 점원과는 달리 안쪽의 점원은 제대로 교육을 받은 자 같아 보였다.
말이나 행동이 절제되어 있고, 의복도 상당히 고급스러워 보이는 것이 일반 점소이들과는 달라 보였다.
“혼자 오셨는지요?”
점원은 왕오의 나이가 어려 보임에도 깎듯이 대우해 주었다. 왕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면 이쪽으로 오시지요.”
점원이 왕오를 이층으로 데리고 올라갔다.
이층은 모두 방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그중 한 곳으로 왕오를 안내한 점원이 왕오가 자리에 앉자 물었다.
“일단 기본 상을 차려드리겠습니다. 혹시, 찾으시는 기녀가 있으신지요?”
보통 소문을 듣고 찾아온 이들도 있기 마련이기 때문에 특정 기녀를 지명하는 경우도 제법 많았다.
“앵화를 불러주시오.”
왕오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종업원이 나간 뒤 얼마 되지 않아 방문이 열리며 술상과 한 명의 기녀가 들어왔다.
나이는 스물 초반에서 중반쯤 되어 보이는 여인으로 화려한 미색이 있는 것은 아니었고, 조금은 평범하다 싶을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단, 얼굴이 작고 눈빛이 매우 맑아서 청초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소녀 앵화라 하옵니다.”
여인이 고개를 숙이며 왕오에게 인사했다.
몸가짐 하나하나가 깃털처럼 가볍고, 그녀로부터 비롯된 알 수 없는 꽃향기가 온 방 안을 은은하게 채웠다.
‘기녀란 이런 것인가?’
왕오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바로 자신의 접선책인 것이다.
언제 바뀔지 알 수는 없지만 무림맹과의 유일한 끈이 그녀가 될 것이다.
앵화가 인사를 하고 상을 가져온 하녀들이 나가고 나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왕오가 품에서 쪽지를 꺼내어 상 위로 올려놓았다.
“일단, 한잔 받으시지요.”
앵화가 쪽지를 내버려 둔 채 왕오에게 술을 청했다.
“난 일 때문에 왔소, 임무 외에 다른 것은 필요없소!”
왕오가 무표정하게 앵화의 술을 거절했다.
“호호, 물론이지요, 단, 우선은 자연스럽게 보여야 하지 않겠는지요. 기루에 와서 술도 마시지 않고 간다면 누구나 의심할 것입니다.”
앵화가 왕오에게 부드럽게 설명해 주었다.
아무래도 경험이 많은 그녀이기에 처음 임무에 임한 왕오의 긴장을 이해하고 풀어주려는 것이다.
적당한 긴장은 좋으나 지나치면 몸과 머리가 굳고, 생각이 좁아지게 된다.
생각이 좁아지면 허점을 만들기 마련인 것이다.
왕오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어쨌든 앵화는 자신보다 한참 선배였다.
아직은 자신이 배울 것이 많은 것이다.
애송이 주제에 선배에게 충고한 셈이니 부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처음엔 다 그런 법이랍니다. 저도 처음엔 모든 것이 두렵고, 한 치의 틈이라도 있을까 마음 조리며 이 일을 시작했지요. 하지만 그대도 저처럼 차차 익숙해지게 될 겁니다.”
그녀의 미소가 왠지 어머니의 그것을 생각나게 했다.
왕오가 잔을 들어 앵화가 주는 술을 한 잔 받았다.
처음엔 아무래도 기녀라는 선입견이 조금은 있었던지, 그녀를 마음 한켠에서는 무시를 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제 그녀가 자신의 접선책이며, 같은 동료라는 인식이 왕오의 머리속에 확실히 자리잡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