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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쥐 1권 (22화)
“어, 어떻게 조원들을 별다른 경고도 없이 죽일 수 있습니까!”
간신히 정신을 차린 한 조원이 왕오에게 따졌다.
위지무현이 잘못한 것은 사실이나, 단 한 번의 주의나 경고도 없이 그냥 목을 잘라 버린 왕오의 행동은 상식을 벗어난 것이었다.
왕오의 입꼬리가 더욱 위로 올라갔다.
마치 이 상황이 너무 즐거워서 주체할 수 없다는 듯 왕오의 미소는 더욱더 짙어졌다.
서슬 퍼런 안광을 뿜어내던 왕오의 입이 열렸다.
“어차피 친구도 잡아먹은 난데, 너희 놈들쯤이야 간식거리도 안 되지 않겠느냐! 따질려면 지옥에서 방금 죽은 놈에게 따져라!”
퍽!
말이 끝남과 동시에 왕오에게 항의했던 조원의 머리가 마치 수박처럼 터져 나갔다.
검을 든 왕오의 오른손이 죽은 조원을 향하고 있었다. 뇌전검이 시전된 것이다.
조원 모두가 꿀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자신들의 조장은 상식이 통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인간이 아니라 악귀였다.
“지금부터 네 녀석이 일호다.”
왕오가 위지무현의 시체 뒤에서 손발을 덜덜거리며 서 있는 조원에게 말했다.
조원이 얼어붙은 채 아무 대답도 못하자 왕오의 눈빛에서 다시 살광이 일었다.
“어서 대답하지 못하나!”
그때, 복태가 재빨리 나서서 조원들을 다그쳤다.
노회한 그답게 왕오의 성격을 파악한 것이다.
“조, 존명!”
일호라 불린 조원이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자세를 잡았다.
“본인의 번호를 순서대로 크게 외쳐라!”
왕오가 눈에서 살광을 지우지 않은 채 명했다.
“일!”
“이!”
…….
숙소 앞에서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아이들이나 할 법한 번호 매기기를 겁에 질린 열여덟 정예 마인들이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공포의 힘이다. 공포 앞에선 자부심과 자존심 모두 무의미해진다.
왕오는 홍탁을 통해 이것을 깨달았다.
그는 공포로 지옥곡을 지배했다.
숨이 넘어갈 듯한 고통도, 정신을 잃을 정도의 혹독한 구타도 극한의 공포를 주지는 못했다.
바로, 단호하고 거리낌없는 죽음만이 극한의 공포를 불러오는 것이다.
“앞으로 지금의 번호가 너희의 이름이다. 불만이 있는 자들은 언제든지 말하라. 단, 그 입을 더 이상 놀리기 싫다면!”
왕오가 이를 드러낸 채 웃었다.
이마의 흉터가 일그러져 더욱 악귀처럼 보였다.
어느새 주변엔 다른 조의 조원들이 창백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도 숙소에서 쉬고 있다가 소란스러움에 나와 본 모양이었다.
왕오가 주변으로 고개를 돌리자 모두 썰물처럼 숙소로 돌아갔다.
그들에게도 왕오는 공포스러운 존재로 머리에 새겨졌다.
이 소문은 곧 수신호위대 전체로 퍼졌다.
이제 모두들 왕오를 ‘악귀’라 부르기 시작했다.
다음 날 왕오는 어제의 일을 보고하기 위하여 도침을 찾았다. 일단, 두 명의 조원이 죽은 큰 사건이었다.
그것도 조장의 손으로 직접. 추가 인원도 배정받아야 했고, 사건의 당위성도 설명해야 했다.
아무리 마교라도 조직인 이상 이유도 없이 서로 죽인다면 통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또한, 도침에 대해서도 좀 더 파악해야 했다.
오늘 왕오에게 어떤 조치를 취하는지 확인하면 어느 정도 도침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부대주님. 십삼조장 왕오입니다!”
집무실 밖에서 왕오가 자신이 왔음을 알렸다.
“들어오라.”
문을 열고 들어서니 도침이 싸늘한 표정으로 왕오를 노려보았다.
어제보다도 차가운 한기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아마도 이미 소식이 전해진 듯했다.
왕오가 정중히 군례를 올렸으나 도침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어제 저희 조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있어 부대주께 보고드리러 왔습니다.”
“말해보라!”
도침이 낮은 목소리로 왕오에게 명했다.
약간 갈라지는 음성이 ‘지금 얼마나 참고 있는지 아느냐’ 라고 왕오에게 묻는 듯했다.
“어제 십삼조에서 조원들의 하극상이 일어나 그중 두 명을 참하였습니다.”
왕오가 흔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도침에게 어제 사건을 보고했다.
도침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퍽! 쨍그랑!
탁자 위에 있던 찻잔이 왕오의 이마에 부딪히며 깨어졌다.
왕오의 이마가 피범벅이 되었다.
왕오는 미동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인 채 서 있었다.
“네놈의 시건방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감히! 네 멋대로 조원을 죽여?”
도침이 눈썹을 부들부들 떨며 소리쳤다.
“하필 그것도 위지가의 식솔을! 그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하는 것이냐! 네놈 하나 뒈지는 것이야 문제없지만, 그 불똥이 나한테까지 튀게 생기지 않았느냐! 대체 생각이라는 것은 하고 다니는 것이냐!”
왕오의 이마에서 흘러내린 피가 바닥을 흥건히 적셨다.
도침이 한참을 분을 삭이지 못하고 씩씩거렸다.
위지가의 분노를 감당해야 할 일이 암담한 것이다.
“젠장! 이래서 마동 놈들은 모두 광혼단이나 보내 버렸어야 하는데. 마동 출신 놈들이 돌아가며 사고 치는구나! 하필, 두 놈이나 내 밑으로 들어온단 말이냐!”
아마도 아신 역시 문제를 일으킨 듯했다.
아신의 성격상 왕오와 같은 일을 겪었다면 더하면 더했지 가만있을 녀석은 아니었다.
후에 들은 이야기지만, 아신은 부조장의 목을 베었다 한다.
이후 조원들이 복종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아직 경험이 미천하여 깊이 생각하지 못하고 큰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왕오는 고개를 숙인 채 도침에게 용서를 청했다.
도침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의외의 행동이었다.
자신의 정당함을 주장하던지, 당당하게 죄를 받던지 할 고지식한 녀석이라 예상했다.
도침으로서는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었다.
죄를 청하는 것도 아니고 용서해 달라니 헛웃음이 나왔다.
사실 도침이 왕오를 탐탁지 않게 생각한 것은, 절정이 넘는 뛰어난 무위와 독하고 잔인한 성정 때문이었다.
왕오에게 자신의 부대주의 자리가 위협받을까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헌데, 자기만 알고 자존심 강한 독불장군인 줄 알았더니 그도 아닌 것 같다.
도침이 왕오를 말없이 노려보았다.
정말 치기 어린 실수라면 그릇이 그것밖에 안 되는 놈이다.
지 성질 하나 제대로 못 다스리는 녀석이니 그다지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조금은 비굴하기까지 보이는 왕오의 행동은 도침의 경계심을 약간은 누그러뜨렸다.
“내 이 자리에서 당장 네놈을 처죽여야 마땅하나! 난 너희 마동 놈들과 다르게 이성이 온전히 박힌 사람이다! 하여!”
도침이 잠시 말을 멈추고 왕오를 노려보았다.
“이번만은 네놈을 용서해 주마! 다시 말해, 한번 더 기회를 주겠다는 말이다!”
도침이 조금은 흥분을 가라앉힌 얼굴로 왕오에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왕오가 깊숙이 고개를 숙여 도침에게 감사했다.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녀석이군. 내가 잘못 본 것인가?’
왕오의 모습에 도침이 고민에 빠졌다.
‘독종’에 ‘악귀’. 놈이 달고 다니는 별명이다.
까다롭고 위험한 놈이라 생각했다.
헌데, 실제로 상대해 보니 너무도 어수룩하고 아직 애송이에 불과하지 않은가?
‘혹시 저것이 놈이 일부로 의도한 것이라면?’
도침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그렇게 생각이 깊은 놈이라면 위지가의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왕오를 바라보는 도침의 눈빛에 서렸던 살기가 사라졌다.
사실 어제의 사건을 핑계로 왕오를 죽여 버릴까도 생각했던 그였다.
앞으로 자신의 방해물이 될 싹은 애초에 제거하는 것이 안전했기 때문이다.
왕오가 한 번의 위기를 넘긴 것이다.
“한 번 더 이런 일이 있을시엔 내가 직접 네놈의 목을 치겠다. 당장 그 역겨운 얼굴을 내 앞에서 치워라!”
도침이 축객령을 내렸다.
왕오가 공손히 읍하고 도침의 집무실을 물러났다.
문을 나선 왕오의 뒤로 도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일 아침 대주님이 주재하시는 회의가 있으니 반드시 참석하도록 해라!”
왕오는 이마의 피를 닦아내고 대충 지혈시켰다.
이로써 도침이 왜 자신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지 알게 되었다.
다행히도 왕오의 정체가 들통난 것은 아니었다. 단지, 왕오를 경계할 뿐인 것이다.
위지가의 녀석을 죽인 것은 왕오의 상처를 건드렸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반쯤은 의도적인 행동이었다.
조원들에겐 뒷일을 생각하지 않고 즉흥적이며 단호하게 움직이는 듯 보임으로서 앞으로 그의 말에 반기를 들거나 의문을 갖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고, 상관들에겐 아직 생각이 모자란 애송이로 보이기 위해서다.
마교에서 너무 뛰어난 자들은 오히려 위로 올라가기가 힘들다. 그것은 수 많은 견제를 이겨내야 하기 때문이다.
마인들의 성격상 자신에게 위협이 되는 존재를 가만 놔둘 리가 없었다.
수장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들의 말을 의문 없이 따르고 손발이 되어 움직일 꼭두각시였다.
그렇다고 아주 멍청하고 실력이 없어도 쓸모가 없었기에 적당히 실력도 있고 너무 깊게 생각하지 않는, 이용해 먹기 좋은 녀석들을 최고의 심복감으로 여겼다.
지금 당장엔 위지가와 문제가 생기겠지만 미래를 보면 더 많은 것을 얻었다.
어차피 마교에서 적 하나 없이 산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위지가 하나를 적으로 두었다 해서 마교에서의 삶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는다.
이미 왕오는 혁련가와 끈이 닿아 있다.
오세 간 사이가 좋지 못함을 생각하면 나머지 네 가문과는 결국에 부딪혀야 하는 입장인 것이다.
오히려 이번 기회에 자신에게 집중된 견제를 풀어냄으로 도침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렸다는 것은 큰 성과였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숙소로 돌아가는데 누군가 왕오의 앞을 막아섰다.
처음 보는 인물인데 무사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허름한 복장과 그가 끌고 있는 물건이 잔뜩 실린 수레 때문이다.
“헤헤, 무사 나리. 실례지만 보급대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합니까?”
머리가 잔뜩 헝크러진 삼십대 중반의 사내가 왕오에게 굽신거리며 보급대의 위치를 물었다.
아무래도 마교에 물품을 납품하는 업자인 듯했다.
이제 마교로 온 지 며칠 되지 않은 왕오가 보급대의 위치를 알 리 만무했다.
“모…….”
막 모른다는 이야기를 하려 할 때였다.
“아이고, 나리. 감사합니다. 이렇게 자세히 가르쳐 주시다니. 헤헤, 이거 별거 아니지만 출출할 때 드십시요!”
사내가 왕오의 말을 가로채 재빨리 말을 이었다.
왕오의 눈이 빛났다. 사내가 준 것은 한 병의 술이었다.
아마도 마교에서 사용하는 술을 납품하는 자인 듯했다.
그런데 그 술병 입구에는 놀랍게도 무림맹에서 사용하는 암표가 적혀 있었다.
무림맹의 간자가 아니라면, 그저 술병에 새겨진 무늬라 여겨질 아주 평범한 표식이었다.
왕오는 암표를 해석했다. 암표의 뜻은 ‘소일도’ 였다.
바로 왕오의 진정한 이름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