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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사의 인장 1권
1화
삭월의 밤
Prologue
회색 음영으로 자욱한 도시.
검은 달그림자.
울부짖는 까마귀들.
“그만, 이제 그만.”
잿빛으로 물든 공허한 눈빛의 ‘그’가 외친다. 하지만 세계는 그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언제까지 계속할 생각이지? 나 하나로는 부족한 것인가? 아니, 우리 일족과 우리의 세상을 집어삼키고도 아직 부족한 것인가?”
두근.
“싫어. 깨어나기 싫어.”
두근. 두근.
타락한 달이여. 저주받은 인과(因果)의 고리여…….
두근. 두근. 두근.
“나를 깨우지 마.”
어둠에 찢긴 영혼이여…….
절망과 고통에 울부짖는 자여…….
멈춰 버린 심장에 약속한 천 년의 시간이 다가온다.
메말라 버린 목소리로 외치거라. 헛된 희망을…….
영혼으로 새겨지는 절망과 고독만이 함께하니.
행복을 빼앗기고 상실과 상심 속에서 허무를 읽으며 하늘을 향해 울부짖어라.
“싫어. 더 이상…….”
증오라는 이름의 검을 들고 광기라는 이름의 갑옷을 입고 외치거라.
네가 선 곳은 절망의 정점, 죄를 짊어지고 울부짖어라.
파멸이라는 관을 쓰고 공포라는 망토를 휘날리며 절망의 날개를 펼치거라.
대지를 희롱하고 천지를 뒤흔들지니. 네가 갈 곳은 파멸의 길, 죄를 짊어지고 걸어가는 자여…….
그 길은 멀지 않았도다.
1. 절망(1)
그때, 깨달았어야 했어. 악마란 마음의 약한 부분을 집어삼키며 고통과 원망을 양식으로 삼는다는 것을…….
모든 것을 잃은 후에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아직도 나의 손끝자락에는 그녀의 온기가 남아 있건만…….
머리카락 끝에서 떨어지는 땀방울. 며칠째 반복되는 이 지독한 악몽. 초점 없이 공허한 눈동자로 시계를 바라본다.
A.M. 4:44.
죽을 사(死)가 하나도 아니고 세 개나 된다.
며칠째, 같은 시간 알 수 없는 악몽 때문에 깨어난다. 꿈의 내용이란 별거 없다. 하염없이 어둠에 쫓기는 그런 꿈이다. 꿈속에서 어둠은 나에게 항상 무슨 말을 전하지만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말뿐이다.
아무튼, 이 지독한 악몽 때문에 나는 며칠째 수면 부족이다. 회사에서 눈치를 봐 가며 선잠을 자며 체력을 보충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는 법. 결국, 나는 병원을 찾았고 그곳에서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뭐라고요?”
“암입니다.”
“네? 설마요? 장난이시죠?”
“심장암입니다. 흔히 심장에는 암이 생기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아주 드물게 심장에 암이 발생할 수도 있으며 다른 곳에 생긴 암이 심장으로 전이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심장암은 특별한 증상이 없어서 조기에 발견하는 것이 매우 어려울 뿐더러 수술에 대한 위험부담이 매우 커서 치료가 쉽지 않습니다.”
“아, 악화된다면 얼마나 더 살 수 있을까요?”
“지금으로는 정확히 알 수가 없습니다.”
“그 알 수 없다는 말은 빼고 얼마나 더 살 수 있겠느냐고요?”
“6개월 그 이상은…….”
쾅!
더 이상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내 생명이 고작 6개월밖에 남지 않았다고? 믿기 어려웠다.
“이런, 돌팔이 새끼가, 어디서 뻥카야!”
나는 그 길로 다른 병원들을 돌아다니며 정밀 검사를 받아 보았다. 하지만 결과는 모두 한결같았다. 모든 병원에서 암 판정을 받은 나는 실의에 빠졌고 사람들의 불쌍하다는 시선과 태도들이 나를 자극하였다.
이미 죽은 사람 취급하는 것인가? 착하게 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나쁘게 살지도 않았는데 눈물이 흘러나왔다. 억울했다.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이렇게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건지.
‘내일 지구가 멸망할지라도 나는 오늘 사과나무를 심겠다.’라고 네덜란드의 한 철학자 스피노자가 말했다고? 흥, 웃기는 소리 하지 말라고 해라. 아니, 역시 철학자다운 발상이랄까?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면 당신은 어쩔 것 같아? 앙?
죽기 직전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은 세 가지뿐이었다.
첫 번째 방법은? 살려고 미친 듯이 발버둥을 치는 것이었다.
나는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병원들을 찾아가 입원 수속을 마치고 약물 치료와 각종 X―ray검사, 초음파, 심전도 검사 등을 거쳐 심장이식수술을 받게 되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검사를 받고 수술 날짜도 잡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수술은 대실패였다. 이식하려는 심장과 내 심장이 갑작스러운 이상(Trouble)을 일으키며 수술 도중에 죽을 뻔한 경험을 뒤로한 채 병원을 퇴원할 수밖에 없었다.
“크큭, 인생 정말로 허망하군.”
나는 점점 지쳐 갔고 죽음의 시간은 다가왔다. 결국, 수술이나 치료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
삶을 포기한 내가 선택한 두 번째 방법은? 그냥 남은 삶을 즐기는 것이었다.
‘무한한 쾌락을 누리며 남은 인생을 즐기다가 언젠가 안식에 들겠지.’
나는 남은 재산을 모두 처분하기 시작하였다. 암으로 나온 보험금과 부모님께서 물려주신 유산이 제법 남아 있었고 직장도 성실히 다니며 결혼을 위해 모아 놓은 자금도 상당수였기에 제법 큰 목돈이 모였다.
최고급 스포츠카를 몰고 초호화 호텔에 투숙하며 밤마다 클럽을 돌아다녔다. 아가씨들을 양옆에 끼고 수백만 원이 넘는 양주에 웨이터들에게 수표로 팁을 꼽아 주며 정말로 돈을 물 쓰듯이 하며 살았다.
“어차피, 몇 달 후면 죽을 인생.”
폐인 같은 삶.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그 덕분인지 아니면 심장병이 점점 악화되어 가는 것인지 나의 안색은 하루가 다르게 새하얗게 질려 갔고 온몸의 근육들은 빠르게 빠져나가며 야위기 시작하였다.
하루, 이틀… 다시 무의미한 시간이 흘러갔다.
시간이 지나갈수록 나의 몸에 기생하고 있는 더러운 그것이 심장을 갉아먹는 기분이 들었다.
고통이 나의 몸을 지배하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다시 며칠이 지났다. 고통으로 잠도 잘 수 없으며 더 이상 음식을 소화할 능력도 먹을 힘도 없었다. 먹는 족족 토해 내는 음식물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
무력한 내가 싫었다. 몸속 구석구석을 장악하고 모든 것을 빼앗아 가는 암이라 불리는 그것을 나는 그냥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발버둥은 무의미했다.
이제는 눈에 초점도 흐릿흐릿한 것이 앞도 잘 보이지 않았다. 머리카락은 뭉텅이로 빠지며 체중은 웬만한 여자들보다 가벼울 정도였고 거울 속에 비친 나의 모습은 정말이지 죽기 직전의 투병 중인 환자의 모습이었다. 언제 죽을 것인가?
예정일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은데? 나의 눈이 점점 죽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여기서 이만 끝내자.”
더 이상, 이 비참한 삶을 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아니, 빨리 끝내고 싶었다. 그래서 결국 내가 선택한 마지막 세 번째 방법은? 그것은 죽음이었다.
지금 이 순간도 누구보다 평온한 죽음을 갈망한다.
* * *
갈망은 ‘그’를 불러왔다.
그는 소리 소문 없이 내 앞에 나타나 타락한 나에게 평온을 불어넣어 주겠다고 속삭이며 웃음 지었다. 그 당시에 ‘그’가 악마이든 신이든 나에게는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병을 낫게 해 주고 죽음에서 벗어나게 해 주겠다고 속삭이던 그 달콤한 한마디에 나는 고개를 계속해서 끄덕이며 피로써 계약을 맺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는 악마임이 틀림없다. 악마답게 교활하고 탐욕스러우며 자만심에 가득한 그가 내민 것은 한 장의 양피지였다.
그는 날카롭게 휘어진 단검으로 나의 손가락 끝을 베어 흐르는 피를 양피지에 떨어뜨렸다. 붉은빛이 양피지에 가득 맴돌며 그 위로 기묘한 문양이 새겨졌다.
기묘한 문양은 놀랍게도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처럼 꿈틀거리더니 나의 팔목으로 올라와 눈이 부신 빛을 내뿜으며 손등에 새겨졌고 나는 온몸이 타들어 가는 고통과 함께 몸부림치기 시작하였다.
잠시 후, 검붉은빛의 문양이 손목에 각인되었고 그대로 의식의 나락 속으로 빠져들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나는 죽은 것인가? 이런저런 생각들이 떠올랐다. 그때 머릿속을 울리는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것으로 우리의 계약은 이루어졌습니다.
계약? 나는 힘겹게 감은 눈을 떴다. 온 세상이 피처럼 붉었다. 아니, 온 세상이 피바다였다.
“도대체, 이곳은 어디야?”
나는 고개를 돌려 이리저리 살펴보았지만, 그 어디에도 사람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천장의 한복판인지 아니면 학살의 흔적인지 알 수는 없지만, 사방이 시체 천지였다.
팔이 잘린 시체들이나 온몸이 갈기갈기 찢겨 나간 시체들을 보고 나는 토악질을 하였다. 하지만 먹은 것이 없어서인지 토는 나오지 않았고 계속 헛구역질을 하다가 언덕 너머 유난히 빛이 나는 것을 발견하였다. 나는 고목처럼 야윈 몸을 일으켜 빛을 향해 자리를 옮겼다.
빛의 정체는 온몸을 뒤덮은 갑옷을 입고 죽은 사내였다. 갑옷이 햇빛에 비쳐 유난히 빛을 발한 모양이었다. 이곳은 내가 살던 곳이 아니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것이 계약의 대가인가?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였다. 어쨌든 일단은 살아야만 했다. 어떻게 얻은 삶이던가? 나는 은빛 갑옷의 기사가 떨어뜨린 것으로 보이는 철검을 들고 기사의 품을 뒤져 금색의 동전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1화
삭월의 밤
Prologue
회색 음영으로 자욱한 도시.
검은 달그림자.
울부짖는 까마귀들.
“그만, 이제 그만.”
잿빛으로 물든 공허한 눈빛의 ‘그’가 외친다. 하지만 세계는 그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언제까지 계속할 생각이지? 나 하나로는 부족한 것인가? 아니, 우리 일족과 우리의 세상을 집어삼키고도 아직 부족한 것인가?”
두근.
“싫어. 깨어나기 싫어.”
두근. 두근.
타락한 달이여. 저주받은 인과(因果)의 고리여…….
두근. 두근. 두근.
“나를 깨우지 마.”
어둠에 찢긴 영혼이여…….
절망과 고통에 울부짖는 자여…….
멈춰 버린 심장에 약속한 천 년의 시간이 다가온다.
메말라 버린 목소리로 외치거라. 헛된 희망을…….
영혼으로 새겨지는 절망과 고독만이 함께하니.
행복을 빼앗기고 상실과 상심 속에서 허무를 읽으며 하늘을 향해 울부짖어라.
“싫어. 더 이상…….”
증오라는 이름의 검을 들고 광기라는 이름의 갑옷을 입고 외치거라.
네가 선 곳은 절망의 정점, 죄를 짊어지고 울부짖어라.
파멸이라는 관을 쓰고 공포라는 망토를 휘날리며 절망의 날개를 펼치거라.
대지를 희롱하고 천지를 뒤흔들지니. 네가 갈 곳은 파멸의 길, 죄를 짊어지고 걸어가는 자여…….
그 길은 멀지 않았도다.
1. 절망(1)
그때, 깨달았어야 했어. 악마란 마음의 약한 부분을 집어삼키며 고통과 원망을 양식으로 삼는다는 것을…….
모든 것을 잃은 후에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아직도 나의 손끝자락에는 그녀의 온기가 남아 있건만…….
머리카락 끝에서 떨어지는 땀방울. 며칠째 반복되는 이 지독한 악몽. 초점 없이 공허한 눈동자로 시계를 바라본다.
A.M. 4:44.
죽을 사(死)가 하나도 아니고 세 개나 된다.
며칠째, 같은 시간 알 수 없는 악몽 때문에 깨어난다. 꿈의 내용이란 별거 없다. 하염없이 어둠에 쫓기는 그런 꿈이다. 꿈속에서 어둠은 나에게 항상 무슨 말을 전하지만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말뿐이다.
아무튼, 이 지독한 악몽 때문에 나는 며칠째 수면 부족이다. 회사에서 눈치를 봐 가며 선잠을 자며 체력을 보충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는 법. 결국, 나는 병원을 찾았고 그곳에서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뭐라고요?”
“암입니다.”
“네? 설마요? 장난이시죠?”
“심장암입니다. 흔히 심장에는 암이 생기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아주 드물게 심장에 암이 발생할 수도 있으며 다른 곳에 생긴 암이 심장으로 전이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심장암은 특별한 증상이 없어서 조기에 발견하는 것이 매우 어려울 뿐더러 수술에 대한 위험부담이 매우 커서 치료가 쉽지 않습니다.”
“아, 악화된다면 얼마나 더 살 수 있을까요?”
“지금으로는 정확히 알 수가 없습니다.”
“그 알 수 없다는 말은 빼고 얼마나 더 살 수 있겠느냐고요?”
“6개월 그 이상은…….”
쾅!
더 이상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내 생명이 고작 6개월밖에 남지 않았다고? 믿기 어려웠다.
“이런, 돌팔이 새끼가, 어디서 뻥카야!”
나는 그 길로 다른 병원들을 돌아다니며 정밀 검사를 받아 보았다. 하지만 결과는 모두 한결같았다. 모든 병원에서 암 판정을 받은 나는 실의에 빠졌고 사람들의 불쌍하다는 시선과 태도들이 나를 자극하였다.
이미 죽은 사람 취급하는 것인가? 착하게 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나쁘게 살지도 않았는데 눈물이 흘러나왔다. 억울했다.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이렇게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건지.
‘내일 지구가 멸망할지라도 나는 오늘 사과나무를 심겠다.’라고 네덜란드의 한 철학자 스피노자가 말했다고? 흥, 웃기는 소리 하지 말라고 해라. 아니, 역시 철학자다운 발상이랄까?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면 당신은 어쩔 것 같아? 앙?
죽기 직전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은 세 가지뿐이었다.
첫 번째 방법은? 살려고 미친 듯이 발버둥을 치는 것이었다.
나는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병원들을 찾아가 입원 수속을 마치고 약물 치료와 각종 X―ray검사, 초음파, 심전도 검사 등을 거쳐 심장이식수술을 받게 되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검사를 받고 수술 날짜도 잡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수술은 대실패였다. 이식하려는 심장과 내 심장이 갑작스러운 이상(Trouble)을 일으키며 수술 도중에 죽을 뻔한 경험을 뒤로한 채 병원을 퇴원할 수밖에 없었다.
“크큭, 인생 정말로 허망하군.”
나는 점점 지쳐 갔고 죽음의 시간은 다가왔다. 결국, 수술이나 치료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
삶을 포기한 내가 선택한 두 번째 방법은? 그냥 남은 삶을 즐기는 것이었다.
‘무한한 쾌락을 누리며 남은 인생을 즐기다가 언젠가 안식에 들겠지.’
나는 남은 재산을 모두 처분하기 시작하였다. 암으로 나온 보험금과 부모님께서 물려주신 유산이 제법 남아 있었고 직장도 성실히 다니며 결혼을 위해 모아 놓은 자금도 상당수였기에 제법 큰 목돈이 모였다.
최고급 스포츠카를 몰고 초호화 호텔에 투숙하며 밤마다 클럽을 돌아다녔다. 아가씨들을 양옆에 끼고 수백만 원이 넘는 양주에 웨이터들에게 수표로 팁을 꼽아 주며 정말로 돈을 물 쓰듯이 하며 살았다.
“어차피, 몇 달 후면 죽을 인생.”
폐인 같은 삶.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그 덕분인지 아니면 심장병이 점점 악화되어 가는 것인지 나의 안색은 하루가 다르게 새하얗게 질려 갔고 온몸의 근육들은 빠르게 빠져나가며 야위기 시작하였다.
하루, 이틀… 다시 무의미한 시간이 흘러갔다.
시간이 지나갈수록 나의 몸에 기생하고 있는 더러운 그것이 심장을 갉아먹는 기분이 들었다.
고통이 나의 몸을 지배하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다시 며칠이 지났다. 고통으로 잠도 잘 수 없으며 더 이상 음식을 소화할 능력도 먹을 힘도 없었다. 먹는 족족 토해 내는 음식물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
무력한 내가 싫었다. 몸속 구석구석을 장악하고 모든 것을 빼앗아 가는 암이라 불리는 그것을 나는 그냥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발버둥은 무의미했다.
이제는 눈에 초점도 흐릿흐릿한 것이 앞도 잘 보이지 않았다. 머리카락은 뭉텅이로 빠지며 체중은 웬만한 여자들보다 가벼울 정도였고 거울 속에 비친 나의 모습은 정말이지 죽기 직전의 투병 중인 환자의 모습이었다. 언제 죽을 것인가?
예정일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은데? 나의 눈이 점점 죽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여기서 이만 끝내자.”
더 이상, 이 비참한 삶을 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아니, 빨리 끝내고 싶었다. 그래서 결국 내가 선택한 마지막 세 번째 방법은? 그것은 죽음이었다.
지금 이 순간도 누구보다 평온한 죽음을 갈망한다.
* * *
갈망은 ‘그’를 불러왔다.
그는 소리 소문 없이 내 앞에 나타나 타락한 나에게 평온을 불어넣어 주겠다고 속삭이며 웃음 지었다. 그 당시에 ‘그’가 악마이든 신이든 나에게는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병을 낫게 해 주고 죽음에서 벗어나게 해 주겠다고 속삭이던 그 달콤한 한마디에 나는 고개를 계속해서 끄덕이며 피로써 계약을 맺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는 악마임이 틀림없다. 악마답게 교활하고 탐욕스러우며 자만심에 가득한 그가 내민 것은 한 장의 양피지였다.
그는 날카롭게 휘어진 단검으로 나의 손가락 끝을 베어 흐르는 피를 양피지에 떨어뜨렸다. 붉은빛이 양피지에 가득 맴돌며 그 위로 기묘한 문양이 새겨졌다.
기묘한 문양은 놀랍게도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처럼 꿈틀거리더니 나의 팔목으로 올라와 눈이 부신 빛을 내뿜으며 손등에 새겨졌고 나는 온몸이 타들어 가는 고통과 함께 몸부림치기 시작하였다.
잠시 후, 검붉은빛의 문양이 손목에 각인되었고 그대로 의식의 나락 속으로 빠져들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나는 죽은 것인가? 이런저런 생각들이 떠올랐다. 그때 머릿속을 울리는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것으로 우리의 계약은 이루어졌습니다.
계약? 나는 힘겹게 감은 눈을 떴다. 온 세상이 피처럼 붉었다. 아니, 온 세상이 피바다였다.
“도대체, 이곳은 어디야?”
나는 고개를 돌려 이리저리 살펴보았지만, 그 어디에도 사람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천장의 한복판인지 아니면 학살의 흔적인지 알 수는 없지만, 사방이 시체 천지였다.
팔이 잘린 시체들이나 온몸이 갈기갈기 찢겨 나간 시체들을 보고 나는 토악질을 하였다. 하지만 먹은 것이 없어서인지 토는 나오지 않았고 계속 헛구역질을 하다가 언덕 너머 유난히 빛이 나는 것을 발견하였다. 나는 고목처럼 야윈 몸을 일으켜 빛을 향해 자리를 옮겼다.
빛의 정체는 온몸을 뒤덮은 갑옷을 입고 죽은 사내였다. 갑옷이 햇빛에 비쳐 유난히 빛을 발한 모양이었다. 이곳은 내가 살던 곳이 아니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것이 계약의 대가인가?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였다. 어쨌든 일단은 살아야만 했다. 어떻게 얻은 삶이던가? 나는 은빛 갑옷의 기사가 떨어뜨린 것으로 보이는 철검을 들고 기사의 품을 뒤져 금색의 동전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