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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1. 절망(2)


생각보다 검의 무게가 무거웠지만, 그럭저럭 들 수는 있었다. 나는 무작정 걸음을 옮겼다. 갑옷을 벗겨서 입을까도 생각했지만, 피가 묻은 갑옷을 벗기는 일이 꺼림칙하고 무엇보다 벗기는 방법을 몰랐다.
통짜로 만든 쇠붙이라니… 이곳은 중세의 시대인 것인가? 아니면 더 오래된 시대인가? 나는 과거로 온 것일까?
얼마를 걸었을까? 더 이상 시체는 보이지 않는다.
근처에 마을이라도 있었으면 좋으련만 나의 기대가 너무 큰 모양이었다. 마을은 커녕 보이는 것은 황무지처럼 메말라 버린 척박한 대지뿐이었다.
“다시 살아난 곳이 전쟁터라니. 이거 언제 다시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잖아.”
말이 씨가 된다고 했던가? 멀리서 날아온 화살이 나의 머리통을 관통하였고 나는 그대로 자리에 쓰러졌다.
멀리서 다가오는 얍삽한 사내의 얼굴이 보였다. 얼굴에 기다란 상처를 지닌 남자는 무엇이 그렇게 좋은지 ‘히죽히죽’ 웃으며 나의 품을 뒤졌고 그것을 끝으로 나는 의식을 잃어버렸다.

“병에서 벗어나고 죽음에서 벗어나는 길을 열어 주겠습니다. 당신은 나에게 재미를 주십시오. 영원한 삶 속에서 발버둥치는 인생을 보여 달라는 말이지요. 당신이 쌓는 업보(業報. Karma)는 내가 원하는 길을 열어 줄 것입니다. 그것이 대가입니다. 어떠신가요?”

그것은 의식의 저편 너머로 아련하게 떠오르는 기억의 한 조각이었다.

* * *

저 빌어먹을 하늘, 저 찌는 듯이 타오르는 태양이 꼴 보기 싫어 고개를 돌린다.
이것은 저주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영원한 삶이란 지독한 저주이다.

네 번이다. 무려 네 번이나 이곳을 벗어나기 위해 죽임을 당했다. 척박한 대지만이 위험이 아니었다. 모든 것이 위험이었다.
화살이 머리를 뚫고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나는 되살아났다. 재생에 가까울 정도로 살이 화살을 밀어내며 몸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다시 살아나는 기분이란… 정말이지 최악이었다.
머리를 뚫고 지나간 화살의 느낌이나 화살을 밀어내는 살의 감촉까지 모두가 생생하게 전해졌다.
지독한 고통이 밀려왔다. 미칠 것 같았다. 아니, 미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정신은 점점 또렷해지며, 이곳을 벗어나 안전한 곳으로 가야 된다는 생각이 온몸을 지배하였다. 정신을 차린 후 쉴 새 없이 달려서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근처에 몸을 숨길 곳을 찾은 후에야 나는 겨우 안심할 수 있었다. 죽다 살아난 것 치고는 몸 상태가 너무도 정상이었다. 이렇게 마른 몸으로 그런 움직임이 나오다니 신기할 뿐이었다.
위험의 시작은 아주 가까운 곳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척박한 대지를 벗어나 처음 보이는 마을. 나는 반가운 마음에 마을로 들어섰고 그곳에서 죽음을 겪으며 이곳 사람들은 무척이나 배타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조금의 양식을 얻기 위해 마을에 들어간 것이 잘못일까?’
사람들은 창으로 나의 배를 쑤시고 검으로 목을 베어 나무에 매달았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가 없었다. 일단은 말이 통하지 않으니 그냥 방심하다가 한 번에 당한 셈이다.
목이 잘려서 그런지 부활은 더디기만 했다.
감각은 살아 있는데 몸은 죽었다. 그것은 참으로 신기한 경험이자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온몸이 썩기 시작하였고 그렇게 몇 년이 지나갔다. 부활 후 잘린 머리로부터 본 기억들이 떠올랐다.
“머리가 잘려도 기억한다는 것인가?”
되살아난 곳은 처음 보는 장소였다. 몸을 버린 장소인가? 아니면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아무 데나 살아나는 것인가?
그 후로 나의 행보는 무척이나 조심스러워졌다. 밤이 되면 움직였고 나뭇가지로 창을 만들고 날카로운 돌멩이들을 모아 호주머니에 넣었다.
일단은 이곳이 어디인지 알아야 했으며 언어도 익혀야만 했다. 말이 통해야 살 수 있으며 안식처를 만드는 것은 그 무엇보다 최우선으로 해야 할 일이었다.
며칠을 돌아다니며 주변의 지도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근처 마을의 위치와 야산을 찾았고 강도 찾아냈다.
며칠 동안 미친 듯이 들판을 헤매다가 결국 아사(餓死:굶어 죽음)를 겪은 후 숲에서 열매를 따 먹었다. 하지만 불행의 신이 나를 따라다니는 것인지 열매에는 독이 들어 있었고 나는 또 한 번의 죽음을 맞이하였다.
몸 안에 독 기운이 빠져나가는 시간은 대략 하루쯤, 재생과 비슷하지만, 또 다른 기분이었다. 어차피 죽음에서 벗어난 몸이기에 ‘당장 배고픔을 면하고 한 번 더 죽자.’라는 심정으로 배가 고프면 아무 열매나 따 먹었다.
죽고 살아나고를 한 스무 번쯤 반복했을 무렵 근처의 모든 독 열매의 종류를 알게 되었고 독을 무기에 발라 위협이 되는 짐승들을 잡는 현명함도 보이게 되었다.
그렇지만 나의 고난은 끝나지 않았다. 짐승들은 한두 마리가 아니었으며 주변은 위험투성이였다.
초록 괴물에게 죽고 난쟁이들의 독침에 찔려 죽고 쉬지 않고 죽음을 겪어야만 했다. 고통도 고통이지만 죽음을 겪은 후 감정들이 마모(磨耗:마찰 부분이 닳아서 없어짐)되어 사라지는 기분은 참을 수가 없었다. 점점 인간에서 멀어지는 기분이랄까? 인간성을 잃어 가는 것인가?
사람은 혼자서 살 수 없다.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감정이 메말라 가는 것은 정해진 순서였다.
“히, 힘이 필요해.”
첫 번째, 깨달음. 그것이 언어의 필요성이라면 두 번째, 깨달음. 그것은 힘의 필요성이었다.

삶과 죽음은 나에게 많은 것을 알려 주었다.
일단 밤은 나에게 이로운 시간이라는 것이었다.
웬만한 상처는 밤이 되면 회복되었고 근력과 민첩성 등 전반적인 모든 능력이 올라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어둠 속에서도 모든 사물을 인식하고 볼 수가 있었다.
죽음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죽은 후, 근처에 위험이 있을 경우는 전혀 모르는 안전한 곳에서 되살아나며, 죽음에 가까운 상처나 독에 중독되는 경우는 경상이며 목이 잘리거나 온몸이 찢기는 부상은 중상이라는 것. 아직 몸이 가루가 되거나 ‘활활’ 불타는 경우가 없어서 그 경우 부활이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부활할 수 있을 거란 예감이 들었다.
‘뭐 그런 경우에는 몇 백 년 후에야 되살아날지도 모르는 일이지.’
나는 문득 그런 경우를 떠올리며 혼자 실소를 지은 후 나를 죽인 마을의 동태를 살폈다.
복수? 그런 것은 아니다. 복수를 원하는 것보다 이 세계의 언어를 원한다. 게다가 이미 그때 나를 죽인 사람들은 대부분 노인이 되어 버렸다. 벌써 마흔 번이 넘도록 죽음을 겪었기에 대략, 삼사십 년 이상의 세월이 흘러갔다. 복수는 무의미하였다.

* * *

어두운 밤.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담을 넘어 인가의 아이들이 보는 낡은 책을 챙기고 혼자 사는 노인을 납치하였다. 노인은 나를 보고는 화들짝 놀라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나는 복부에 주먹을 꽂아 기절시킨 후 간단히 어깨에 들쳐 메어 내가 사는 동굴로 데리고 왔다.
동굴은 생각보다 크고 넓다. 본래 큰 흑곰이 살던 동굴이었는데 내가 독을 풀어 곰을 죽인 후 차지한 동굴이다. 동굴 주변에 간단한 함정을 설치하였고 독을 풀어서 그런지 주변의 몬스터들이나 짐승들은 이곳, 주변에 오는 것도 꺼린다.
나는 노인을 깨운 후 책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어차피 말해도 알아듣지 못하겠지만 나는 이 세계의 언어를 꼭 배워야 합니다. 노인장께서 글을 가리켜 준다면 내가 크게 보상하겠소.”
노인은 몸을 사시나무 떨듯이 떨었지만 계속 내가 책을 가리키자 마지못해 책을 펼치며 정말 이상한 언어를 말하였다.
누런 양피지를 말아서 만든 책에는 정말 기묘한 글자들이 많이 적혀 있었고 나는 노인이 가리키는 언어들을 바닥에 적고 한국어로 번역하며 나름대로 언어들을 비교하여 뜻을 풀어 갔다. 그렇게 노인과의 기묘한 동거가 시작되었다.

일 년이란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 시간은 많은 것을 변하게 하였다. 일단 야윈 나의 몸은 구릿빛에 살이 적당히 붙은 몸으로 탈바꿈하였고 능숙하지는 못하지만, 이곳의 언어를 말하고 쓸 수 있게 되었다.

이곳의 세계는 중간계 또는 가르드(Gard)라 불리는 세상으로 주신 가이아(Gaia)가 다스리는 세계란다. 신을 믿지 않는 나에게 조금은 황당한 이야기였다.
노인의 이름은 찰스였다. 찰스 영감은 어릴 때부터 약초나 식물 등을 채취하며 생을 근근이 살아가는 그리 별 볼일 없는 제조사였다.
이곳에는 과학 대신 마법이 널리 퍼져 있으며 신들의 간섭과 마족의 침략이 번번이 일어나는 세상이라고 한다. 역시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이곳에는 달력이 존재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한 달이라는 개념이 명확하게 구분 지을 수가 없었다. 보통 28일에서 30일을 기준으로 하지만 그것도 달라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 이유는 이 세상을 관장하는 신 때문이라고 하는데 이 세상을 관장하는 10명의 신이 세상에 영향력을 발휘하면 달의 색이 바뀌게 된다.

탄생의 가이아(Gaia):하얀색
질서의 세라프(Seraph):붉은색
불꽃의 길버트(Gilbert):주황색
대지의 토듐(Todyum):갈색
회복의 브리지트(Beurijiteu):노랑색
자연의 예지스(Yejis):초록색
생명의 마나(Mana):파란색
바람의 콘라드(Cone lard):회색
마족의 데이몬(Daemon):보라색
혼돈의 카오스(Chaos):검은색

오늘은 아르곤 성왕력 2739년 대지의 토듐(Todyum)의 서른 번째 날이다.
아르곤은 주신 가이아(Gaia)를 믿는 신성제국으로 4개의 제국 중 가장 크고 비옥한 땅덩어리를 차지한 나라 중 하나였다.
4대 제국은 동쪽의 려(黎), 서쪽의 마법제국 밸트류(BellTeuryu), 남쪽의 신성제국 아르곤(Argon), 북쪽의 이종족의 제국인 리프(Reap)가 있다.
주신 가이아는 깊은 잠에 빠지기 직전에 10명의 신들을 불러 세상을 다스리라는 명령을 내렸고 그들은 돌아가며 세상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였다. 탄생의 달에는 생명이 깃들며, 질서의 달에는 강력한 규칙과 제약을, 불꽃의 달에는 대장간에 축복을, 대지의 달에는 곡식의 풍성함을, 회복의 달에는 생명의 포션(Potion)을 내리어 세상을 이롭게 하였고 바람의 달에는 태풍과 비바람을, 마족의 달에는 몬스터들의 준동을 알리며, 혼돈의 달에는 마족을 소환하여 세상에 파괴를 내렸다.
과학을 믿는 나로서는 정말 믿기 어려운 말뿐이었지만 내가 아는 지식 중에 저렇게 색이 마음대로 바뀌는 달을 설명할 방법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