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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2. 여행(1)


동굴 안에는 커다란 통나무를 베어서 만든 탁자에 앉아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칡차를 들이켜는 노인과 검은 머리카락이 인상 깊은 사내가 가벼운 담화를 나누고 있었다.
“정말, 떠날 계획인가?”
“네, 그동안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허허허, 처음 이곳에 끌려왔을 때만 하여도 삶을 포기했다네.”
“죄송합니다. 그때는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알고 있네. 자네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그래, 이제 어디로 갈 생각인가?”
“일단은 마법이라는 것을 배우기 위해 마법제국으로 가 볼 계획입니다.”
“그 늦은 나이에 마법을?”
“늦었지만 이 세상의 근간을 이루는 힘이 마법이라고 하니 앞날을 생각하면 꼭 익혀 둬야 한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허허허, 늦었지만 배우겠다는 열정이 있으니 말리지는 않겠네. 나는 처음 자네를 마족으로 오인했다네.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은 그리 흔하지 않거든. 려제국의 사람들이 검은 머리카락을 지녔다는 소문을 들었지만 직접 본 적이 없으니 마족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지.”
“아,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저를 공격한 것이었군요.”
“공격을 받았었나? 허허허, 아마도 착각을 했을 거야. 마족의 눈은 보랏빛이라고들 하지만 그것을 확인할 간 큰 사람은 없을 걸세. 일단 검은 머리카락을 보면 창부터 내지르고 보는 게 이곳 사람들의 습성이니까.”
“이것은 그동안 저에게 여러 가지 지식을 전해 주신 보답입니다.”
나는 그동안 모았던 짐승 가죽과 몬스터들의 뼈, 껍질 등의 반을 찰스 영감에게 건네주었다. 찰스 영감은 그 많은 수에 화들짝 놀라며 대단한 사냥꾼이라 칭찬을 했지만, 그냥 입에 바른 소리 같았다.
일단 언어를 익혔으니 다음은 힘을 키울 차례였다. 마법은 귀족들이나 배우는 수준 높은 지식이었기에 아무 곳에서나 배울 수가 없었다.
밸트류는 마법제국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일반인에게도 3서클에 해당하는 마법을 배울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하급 정령사의 길도 열려 있어서 하루에도 수백 명의 사람이 마법과 정령술을 배우기 위해 밸트류로 몰려들었다.

마법은 기나긴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극악의 학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나에게 남는 것은 시간뿐이다. 죽지도 않고 늙지도 않는 몸이 이럴 때는 도움이 된다. 만약 마법을 배울 수 없고 정령과 계약을 맺지 못한다면 자유왕국 에스페란트로 갈 생각이다.
4대 제국들의 틈바구니 속에 끼인 왕국이지만 누구나 자유롭게 들어와 무역을 할 수 있으며 그곳에서는 정말 무엇이든 구할 수 있다고 한다. 그곳에서 금지된 마법인 흑마법서라도 구해 익혀 힘을 키우고 정 안 되면 현대적인 지식을 이용하여 장사라도 할 생각이다.

찰스 영감에게 건네준 가죽을 제외한 나머지 가죽을 모아 의복과 가방을 만들었다. 바늘과 실, 역시 마을에 몰래 잠입하여 가져왔으며 그밖에 밀가루나 소금도 약간 얻을 수 있었다.
물론 공짜로 얻은 것은 아니었다. 몇 장의 짐승 가죽을 놓고 왔으니 그리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닐 것이다.
이곳의 화폐는 모두 다섯 개의 동전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1의 단위를 나타내는 곰이 그려진 석재로 만들어진 동전 [덴]
10의 단위를 나타내는 사자가 그려진 철재로 만들어진 동전 [실링]
100의 단위를 나타내는 독수리가 그려진 동으로 만들어진 [브론즈]
1,000의 단위를 나타내는 그리폰이 그려진 은으로 만들어진 [실버]
10,000의 단위를 나타내는 드래곤이 그려진 금으로 만들어진 [골드]

마도시대라 불리던 과학과 마법이 공존하던 시대에 만들어진 제국 통화인 이 동전들에는 마법이 걸려 있어서 복제할 수 없으며 무게 역시 매우 가벼운 편이었다.
대충 4인의 가족이 5~10브론즈 정도의 금액이면 한 달을 먹고 살며 사과 하나에 1실링이고 밀 한 포대가 1~2브론즈였다.
나는 남은 짐승 가죽들 중 제법 상태가 양호한 가죽을 찰스 영감에게 팔고 5브론즈 40실링을 받았다. 거의 가죽의 10분의 1의 가격으로 팔았지만, 후회는 없었다. 영감에게 그만한 거금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놀라웠으니까.
나는 여행을 위해 많은 것을 준비하였다. 일단은 불을 피우는 데 사용할 부싯돌과 음식물을 담을 식기, 바늘과 실, 잘 말린 육포와 과일, 밀가루와 치즈, 소금, 넉넉한 식수 등. 대부분의 음식 재료를 가방에 챙겨 넣었다.
침낭과 담요는 둘둘 말아 가방의 위쪽에 얹었으며 무기로는 돌을 갈아서 앞을 뾰족이 세운 후 나뭇가지에 엮은 나무창과 몇 가지 지독한 독을 담은 둥근 나무통, 짧은 단검을 챙겼다.
밧줄은 옆구리에 감았으며 여벌의 옷과 신발을 배낭의 뒤에 매달았다. 드디어 머나먼 여정의 시작이었다.

밸트류로 향하는 길은 정말로 험난하였다. 일단은 가는 방향이 두 종류로 나뉘었는데 몬스터들의 천국이라 불리는 크라델 산맥을 넘어가는 방법과 사막왕국 데스타드의 경계인 시오라 사막을 건너가는 방법이었다.
나는 전자를 선택했다. 이왕이면 사막보다 먹을 것을 구하기 쉬운 산맥이 낫다는 게 이유 중 하나였다.
가는 길에 상단을 만나서 그들과 자연스럽게 합류하는 것이 최고의 시나리오였지만 검은 머리카락 때문에 쉽게 누구와 어울릴 수 없었고 상단의 모습은 커녕, 사람의 그림자조차 찾아보기 어려웠다.
이 험한 산맥을 혼자 넘을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존재할까? 하루하루가 고난의 연속이었다.
초록괴물 오크(Orc)는 투쟁심이 무척 강한 몬스터였다. 얼마의 지능을 가지고 있어 왕국까지 세웠으며 대화가 통한다고 전해지지만 ‘신은 그들에게 대화보다는 주먹을’이라는 생활 신조를 내려 주셨는지 보는 족족 선제공격을 해 왔다.
오크는 번식력도 뛰어나서 자고 일어나면 새끼들이 바글바글거린다고 하니 괜히 적으로 만들면 골치 아파질 것 같아 일부로 피해 다니며 고블린(Goblin)이나 그램린(Gremlin) 같은 소형 몬스터들을 노렸다.
랫트(Rat)라 불리는 개 크기의 쥐는 무리를 지어 다니지만, 겁이 많아 먼저 싸움을 거는 경우가 없고 싸움이 일어나도 동료를 버리고 도망가기 바빠 잡아 식재료로 쓰곤 하였다.
쥐 고기라니 생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지만 일단은 생존이 우선이었다.
죽는 것은 두렵지 않지만 그렇다고 일부로 죽음을 겪을 만큼 아직 미치지는 않았기에 쥐 고기도 불에 구워 먹기 시작하였다. 뭐 생각보다는 먹을 만했다.
몇 달이 지났다. 수십 번의 죽음이 있었지만 몬스터들의 습성과 패턴을 알게 되어 점점 생존 횟수는 늘어만 갔다. 몬스터들을 찾는 방법이나 피하는 방법, 그들이 좋아하는 먹이와 무엇을 싫어하는지 점점 산맥과 동화되며 살아가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광산 주변을 지나칠 때였다. 무리를 지어 다니는 코볼트(Kobold)를 발견하였다. 나는 뾰족하게 갈린 창 가지를 잡고 숨을 죽인 채 그들이 지나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코볼트들은 뛰어난 후각을 지니고 있었고 위협을 피해 가는 능력은 독보적이었다.
그들은 나를 위험 인물로 감지하고 근처에는 접근도 하지 않았다. 결국, 나는 며칠 동안 그곳에 머물면서 허탕을 쳐야 했고 그들은 그런 나를 비웃으며 유유히 작은 짐승들을 사냥하였다.
“쳇! 꼭 잡아 주지.”
나는 독한 마음을 먹고 지독한 냄새가 풍기는 코로나라는 나무에 열린 과즙을 발랐다. 민감한 코볼트의 후각을 속이기 위한 일이었지만 너무나 곤욕스럽고 힘든 일이었다.
며칠이 지났고 드디어 기다리던 때가 왔다. 광산 근처를 지나가는 코볼트들을 덮쳐 쓸 만한 무기와 노예를 얻을 수 있었다. 코볼트는 놀(Noll)과 닮았지만, 눈에 띄게 작으며 장비를 다루는 지능적인 몬스터이기에 노예로 길들이는데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말이 어눌하고 느리며 몬스터 특성상 ‘크륵’거리는 소리가 조금 거슬렸지만 그렇다고 말을 못 알아들을 정도는 아니었고 무거운 짐을 들게 하는데 제격이었다.
그들은 10마리의 동료 중 7마리를 죽이는 나의 실력을 보고는 감히 덤빌 엄두도 내지 못하였고, 그렇게 나는 노예 코볼트 3마리를 얻을 수 있었다.

수염은 덥수룩하게 자라나고 머리카락이 눈을 덮은 지 오래다. 옷은 넝마가 되어 찢어지고 거지꼴이나 다름없었다. 세 마리의 노예 코볼트 중 두 마리를 잃었다. 벌써 산맥에 들어온 지 몇 년이 지났다. 산맥이 ‘크다’라고는 생각했지만 몇 년이나 헤맬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하였고 가면 갈수록 몬스터들의 규모와 수에 기가 질려 버릴 정도였다.
소형 몬스터들은 언제부터인가 찾을 수 없었고 중형 몬스터들도 얼핏 보일 뿐 오로지 대형 몬스터만이 그 영역의 주인임을 알려 왔다.
“식량도 삼 일치밖에 안 남았고 식수도 모조리 떨어지고 이러다 죽겠군.”
“크륵, 주인 또 죽나?”
“왜? 네가 대신 죽어 주려고?”
“크륵, 아니다. 주인 죽어라.”
“…….”
정말 망할 노예였다. 상전은 죽어 나자빠지는 게 하루에도 수십 번이나 되건만 이놈은 도망치기 바쁘다. 그렇다고 그동안 죽은 몬스터들의 시체나 가죽 등을 옮겨 담은 저 많은 짐을 나 혼자 들고 다닐 방법은 없었기에 하는 수없이 내가 희생하곤 했다.
목이 잘리거나 찢겨져 죽지만 않는다면 몇 시간에서 며칠이면 살아날 수 있었기에 항상 몬스터를 유인하며 자살을 노렸다.
자살하면 인근에서 부활할 때도 있었고 제법 떨어진 곳에서 부활할 때도 있었지만 코볼트의 뛰어난 후각으로 금세 잘 찾아오곤 하였다. 그러고 보니 혼자서 이곳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영리한 녀석이긴 하였다.
“크륵, 주인. 인근에 사람 냄새가 난다. 먹자.”
저것은 내가 사람이라는 인식이 없는 모양이다. 안 그래도 동료가 대형 몬스터에게 잡아먹힌 후 내가 나서서 몬스터들을 유인하고 대신 죽어 주니까 사람이라는 개념을 잃어버린 것인가?
“시끄럽다. 규모는?”
“크륵, 여섯이다. 남자 넷에 여자 둘.”
“거리는?”
“크륵, 150피코 정도다.”
이곳에 거리의 단위는 피코이다. 1피코는 간단히 한 발자국을 지칭한다.
“150걸음이라… 좋아. 일단 숨어서 상황을 살펴보자.”
“크륵, 알았다. 주인. 먹을 때 나는 여자로 부탁한다.”
“안 먹어!”
나와 코볼트는 근처에 큰 나무에 기어 올라가 동태를 살폈다. 팡고라 불리는 멧돼지 모습의 중형 몬스터가 습격을 한 모양인지 마차는 반쯤 부서져 있었다. 남자들은 철갑옷을 입은 전형적인 기사의 모습이었고 여자들은 드레스를 입은 것이 귀족들의 영애들 같았다.
‘이런 숲 속에 드레스를 입고 오다니 미친 건가? 아니지, 드레스를 입고 이곳까지 들어올 수 있다면 산맥이 끝나 가는 건가?’
마차가 이곳을 다닐 정도라면 아마도 산맥의 끝자락이거나 인근에 사람이 사는 마을이 있는 모양이었다.
“크륵, 주인. 팡고 먹자.”
코볼트는 개의 얼굴을 지니고 있었는데 이놈은 개가 아니라 돼지가 아닐까? 심각하게 고민이 들 정도였다. 나는 살짝 인상을 쓰며 말했다.
“먹을 생각은 그만하고 저들을 돕는다. 화살로 주위를 끌도록 해.”
“크륵, 알았다.”
코볼트는 활에 화살을 잰 후 시위를 팽팽하게 당기며 활을 쐈다.
피용! 피용! 팅! 팅!
두 발의 화살이 팡고의 등에 맞았지만 두꺼운 가죽을 뚫지 못하고 튕겨져 나왔다.
기사 중 한 명은 큰 부상인지 자리에 누워 있었고 나머지 셋도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았다. 초급 기사들인 모양인지 얼굴에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다.
여자들의 표정은 더욱 가관이었다. 얼굴은 창백히 질려 있고 몸을 ‘덜덜’ 떠는 것이 보기 안쓰러울 정도였다.
팡고는 화살을 쏜 코볼트를 발견하고는 나무를 향해 달려들었다. 멧돼지의 특성을 그대로 지니고 있지만 몬스터로 분류되는 이유는 몸 안에 마정석을 지니고 있어서 마력을 내뿜기 때문이다.
팡고의 돌진에 나무는 간단히 부러졌고 코볼트는 나무에서 뛰어내리며 활을 세 발이나 더 쐈다. 평소보다 더욱 뛰어난 실력을 발휘하는 것이 아마도 목숨이 걸려 있어서 분발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나무에서 내려와 철검에 맹독을 묻히고 기회를 노렸다. 팡고는 코볼트를 잡으러 이리저리 날뛰었고 기회를 노리던 나는 순식간에 팡고의 뒷덜미에 일검을 날렸다. 아무리 질긴 가죽이라지만 생채기 정도의 작은 상처만 낸다면 독이 퍼져 나의 승리일 것이다.
팡고는 중형 몬스터답게 작은 상처를 입고도 십여 분을 넘게 날뛰었다. 나는 날렵하게 팡고를 피해 나무들 사이를 뛰어다니며 팡고를 약 올렸고 코볼트는 나와 팡고의 구분 없이 쉬지 않고 활을 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