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4화
2. 여행(2)
쿵!
작은 코끼리만 한 팡고가 쓰러지며 죽음을 알려 왔다. 주변에 사람들은 모두 환호성을 질렀고 잠시 후 기사들 중 제일 실력이 좋았던 젊은 기사가 다가오며 감사의 인사를 해 왔다.
“고맙네. 나는 루시딘 드 란테우스(Rusidin De Rantewoos)라네.”
나는 귓가에 흐르던 땀을 닦으며 조심스럽게 말하였다.
“다행입니다. 팡고는 중형 몬스터 중 제법 강한 축에 속하는데 요행으로 잡을 수 있었습니다.”
“자네, 혹시. 려제국 사람인가?”
“네? 아? 물론입니다. 여기 눈동자 색을 보십시오.”
나는 눈가를 뒤덮고 있는 길게 자란 머리카락을 들어 올려 눈동자를 보여 주었다. 마족이 마법이란 것을 알고 있다면 눈동자 색을 바꾸는 것은 식은 죽 먹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은 이들을 안심시키는 게 우선이었다.
그들은 경험이 적은 기사들답게 너무 쉽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노예 코볼트는 언제 팡고의 껍질을 발라냈는지 가죽과 살을 가르고 마정석을 꺼내 들었다. 마정석의 크기는 새끼손가락 손톱만큼 작았는데 저 정도면 최하급 중 하급일 것이다.
“저, 저건? 코볼트가 아닌가?”
루시딘은 옆에 검을 바짝 당기며 긴장한 표정으로 코볼트를 응시한다.
“맞습니다. 하지만 위험이 되지 않습니다.”
“몬스터라네, 어찌 위험이 되지 않는다는 말인가?”
“코볼트는 소형 몬스터 중에서 지능이 상당히 뛰어난 편입니다. 제가 데리고 다니는 노예 용병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 그렇다면 다행이군. 그런데 자네 복장이?”
긴장이 풀려서인지 이제야 다른 것들이 눈에 들어오는 모양이었다. 루시딘은 인상을 쓰며 넝마나 다름없는 옷을 입고 있는 나를 바라보았다.
“몇 달 전에 조난을 당했습니다. 같이 산맥에 들어온 일행은 모두 죽고 저만 살아남았습니다. 크라델 산맥이 워낙 크고 넓어서 길을 잃고 한참을 헤매는 중에 요란한 소리를 듣고 이곳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저기 코볼트도 산맥을 헤매던 도중에 얻은 전리품이지요. 아참, 이곳이 어디쯤인지 알 수 있을까요?”
“아, 그것은 우리도 잘 알지 못하네. 우리는 검과 기사들의 왕국인 아반크로스에서 왔다네. 저기 상처를 입은 기사들 중 푸른 갑옷을 입은 사람이 루팡 남작가의 장남인 로세 드 루팡(Rose De Lupang)이고 우리를 이곳까지 데리고 온 장본인이기도 하다네.”
“아, 보아하니 부상이 심해 보이시는데 마침 저에게 몸에 좋은 약이 있습니다.”
“그런가? 얼른 줘 보게나.”
나는 진실과 거짓을 적당히 섞어서 그들의 의심을 거두고 그동안 산맥을 돌면서 모았던 희귀한 약초들로 만든 약을 꺼내 들었다.
기사 루시딘은 거의 빼앗는 수준으로 내미는 약을 가져가 로세에게 먹였다. 나는 그 틈을 타서 노예 코볼트에게 다가가 조용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가죽과 뿔을 잘 챙겨 둬라. 그리고 마정석은?”
“크륵, 저기 주인.”
“왜?”
“크륵, 마정석 나 주라?”
“마정석은 왜?”
“크륵, 힘 키운다.”
“마정석으로 힘을 키운다고? 족장만이 마법을 쓸 수 있다고 하지 않았나? 마법을 안 쓰는 네 녀석이 마정석을 어디에다 쓰려고?”
“크륵, 먹는다. 힘 세진다.”
“흠, 좋아. 어차피 팔아도 얼마 안 할 거 같은데. 대신, 이곳에서 얼마 동안 숨어 있어라.”
“크륵, 왜? 싫다. 이곳에 몬스터 있다.”
“너도 몬스터거든.”
“크륵, 싫다.”
“투정은 받지 않는다. 노예는 노예답게 행동해. 대신 이곳에 머무는 동안 자유롭게 지내도 좋다.”
나는 노예 코볼트에게 간단한 지시를 내리고 가죽과 뿔을 모아 놓은 배낭을 들고 기사들에게 다가갔다.
기사들은 경계 어린 눈빛을 보내 왔지만 루시딘이 나서서 그들을 도운 은인이라 소개해 주었다.
“고맙네. 나는 자랑스러운 검의 왕국의 기사인 케로스 드 페리온이(Keroseu De Perion)라네.”
반쯤 찌그러진 방패를 지닌 기사가 정중하고 단호한 말투로 인사를 해 왔다.
“별일 아니었습니다. 그나저나 로세 님의 상태는 어떠신지요?”
“무리하였네. 팡고의 돌진을 혼자서 무리하게 몸으로 막아 내다니. 자네가 준 약 덕분에 위기는 넘겼지만, 족히 몇 달은 요양을 해야 할 걸세.”
루시딘은 심각한 표정으로 로세의 병세를 살피며 대꾸했다.
“천만다행이군요. 마침 저에게 몸에 좋은 약이 몇 가지 더 있으니 그것도 마저 복용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아, 그런가? 고맙네. 내가 추후에 꼭 보답하도록 하겠네.”
처음부터 보답을 바라고 한 일은 아니었다. 나는 이들이 알고 있는 정보를 원할 뿐이었다. 애초 계획과 너무 달라진 상태라 밸트류로 향하는 여정에 많은 문제가 생겼다.
식량이나 식수도 거의 바닥이 난 상태이고 이곳은 북쪽에 위치한 검의 왕국 아반크로스. 밸트류 제국이 서쪽 끝인 것을 생각하면 산맥에서 길을 잘못 들어도 한참 잘못 든 모양이다.
‘결국, 이들과 함께할 수밖에 없는 건가.’
* * *
며칠이 지났다. 마차가 고장 난 일행의 행보는 굼벵이마냥 느리기만 했다.
마부는 팡고의 일격에 죽임을 당하였고 마차는 반쯤 파괴되었다. 다행히 귀족들의 마차에 새겨진 보호 마법으로 말미암아 전원 사망에서는 벗어났지만 그래도 다들 제법 큰 상처를 입었고 특히 무리해서 팡고의 돌진을 막은 마차의 주인이자 이들의 리더였던 로세는 고통으로 하루에도 수십 번씩 기절하고 깨어나기를 반복했다.
이들은 나에게 의지한다. 철없는 귀족들은 ‘이곳에 경치가 좋고 신비롭고 아름다운 꽃이 많다.’라는 소문을 듣고 찾아왔다가 길을 잃고 한나절이 넘는 시간 동안 산맥 안으로 들어왔다고 했다.
운이 좋은 건지 아니면 재수가 없는 건지 여태껏 제대로 된 몬스터를 만난 적이 없으며 기껏 만난 몬스터가 고작 아메바(Amoeba)라고 한다.
의기양양해진 초급 기사들은 산맥을 너무 우습게 알았고 마부 역시 기사들을 너무 믿었다가 이런 봉변을 당한 셈이다.
앞으로 이들을 데리고 안전하게 숲을 벗어나는 것이 관건이었다. 하루에도 수십 차례 습격하는 몬스터들에 의해 일행들은 바짝 긴장한 상태였다.
나에게 비록 코볼트 같은 뛰어난 후각이나 적을 파악하는 능력은 없지만 수십 번의 죽음을 통해 얻은 감각과 경험으로 몬스터들을 피하거나 상대하며 이들의 안내자가 되어 주었다.
“이 약초는 벨가못트(Bergamot)라 불리는 약초입니다. 어디에서나 잘 자라며 재배가 쉬운 식물로서 진정제 또는 피로 회복에 탁월한 효과를 지니고 있지요.”
나는 찰스 영감에게서 배운 제조술로 약을 만들어 기사들이나 귀족 영애들의 호감을 사고 밀가루와 풀, 잎사귀 등을 모아서 간단한 수프(Soup)를 끓여 주었다.
처음 귀족 영애들은 이런 음식들은 못 먹겠다고 소리를 질렀지만, 그들도 이 위험한 숲에서 고급 음식을 구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지 결국 수프를 맛보았고 기막힌 맛에 반한 지금은 한 그릇을 더 달라고 요구할 정도로 수프의 매력에 푹 빠져 버렸다.
“……그래서 화가 난 귀족들은 회의에 늦은 문제의 귀족에게 말했습니다.”
‘아니, 이렇게 늦장을 부려서 어떻게 국가의 중대사를 볼 수 있겠소?’
“그러자 문제의 귀족은 아무렇지 않게 응수했지요.”
‘여러분도 저처럼 예쁜 마누라를 데리고 산다면 아침에 절대 일찍 일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문제의 귀족의 재치 넘치는 말에 연설장은 폭소로 가득 찼고 그렇게 그는 지각에 대한 벌을 받지 않고 무사히 회의를 진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떠신지요? 이야기가 맘에 드셨는지 모르겠군요? 그럼 식겠습니다. 어서 드시지요.”
“푸하하하! 자네 요리 솜씨와 입담은 정말 일품이야. 우리 영지의 일류 요리사도 자네처럼 이렇게 맛있는 수프를 만들지 못할 거야.”
“과찬이십니다. 앙리 로 가즈온(Henry Ro Gajeuon)님. 다음에 음식 재료가 충분히 있다면 제가 맛있는 요리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하하하, 편히 앙리라고 부르게. 내가 그날을 손꼽아서 기다리겠네.”
앙리는 철광석이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는 여섯 개의 광산을 소유한 거부 가즈온가의 자제답게 성격이 화끈했다.
그는 별일 아닌 일에도 금화나 보석류를 건네주며 호의를 베풀었다. 그뿐만 아니라 귀족 영애들도 은근히 나의 요리와 입담에 빠져들어 은근슬쩍 눈길을 주며 추파를 던지는 모습 등이 종종 보였다. 그들은 저마다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안정을 되찾아 갔지만 정작 나에게는 커다란 문제가 생겼다.
‘이름이, 내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
언제부터였을까?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그’는 재미를 위해 나를 불사자(不死者)로 만들었다. 하지만 그가 말하기에 이름에 대한 이야기는 어디에도 언급한 적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이 부자연스러움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고 넘어갔다. 나는 단 한 번도 이름을 밝힌 적이 없지만, 그들은 자연스럽게 나를 대하고 조금의 불편도 느끼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가 이름 말고 다른 무엇을 더 가져간 것은 아닐까? 의심은 점점 커져 나갔다.
나는 지난 과거를 곰곰이 떠올렸다. 불사자가 되면서 육체의 능력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면도 함께 발전되었다. 특히 기억력이 비정상적으로 향상되었는데 아마도 죽음과 삶을 겪으며 정신적으로 성숙했다고 나름 생각했다.
하룻밤을 꼬박 새며 곰곰이 생각에 잠겨 본 결과 ‘그’는 나의 기억 일부분과 이름을 가져갔다. 무엇에 대한 아련한 기억. 기억의 일부분이 도려내진 것처럼 그 부분을 떠올리면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지만 그래도 나는 그 기억을 그리워하며 나의 이름을 되찾기를 바란다.
‘그래, 이름을 되찾는 것. 그것이 이 저주를 푸는 방법일지도 몰라.’
떠오르는 태양의 여명이 보였다. 희미하게 날이 밝아 오는 빛처럼 나에게도 조금의 희망이 생겼다. 작은 실마리를 풀어 나가다 보면 언젠가는 이 진실의 끝에 닿을 수 있을 것이다.
“기억과 이름을 되찾아 주겠어.”
그것은 다짐이요, 각인이었다. 나의 마음 한구석에 새겨진 낙인이며 나의 업(Karma)이리라.
“마, 마을이에요.”
도로시 영애의 환희에 가득한 음성이 들려왔다. 고작 며칠 밖에서 노숙을 한 것뿐인데도 곱게 자란 귀족들이라 그런지 다들 불만, 불평들이 가득하였는데 마을을 발견했으니 그 기쁨을 어찌 이루 말하겠는가.
마을 세르핀은 마탑이 설립될 정도로 커다란 규모를 자랑하는 마을이었다. 왕에게 소속된 이 영지는 상인 길드와 용병 지부가 있어서 몬스터들의 위협에서 벗어났고, 생활 수준도 상당한 편이었다. 일행은 마을에서 제일 큰 여관인 ‘튤립의 노래’라는 여관으로 들어섰다.
“어서 오세요.”
갈색 머리카락에 주근깨가 박혀 있는 앙증맞은 아이가 달려 나와 우리를 반겨 주었다. 제법 장사가 잘되는 모양인지 이른 아침인데도 사람들의 모습이 상당수 보였다.
“차가운 맥주와 음식, 며칠 묵을 방 3개.”
내가 짧게 주문을 하자 아이는 겁에 질린 목소리로 말하였다.
“저, 저기…….”
“선급인가?”
나는 품에서 은화 세 개를 꺼내서 아이의 손에 쥐여 주고 머리카락을 들춰 눈동자를 보여 주며 말했다.
“오해하지 말아라. 나는 려제국에서 온 사람이고 이분들은 위대한 검의 왕국의 귀족들이시니. 불편이 없도록 잘 모셔야 한다. 잘할 수 있겠니?”
“네…….”
아이는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하였고 나는 미소를 지으며 품에서 동화를 하나 꺼내 아이에게 팁으로 주고 일행들이 앉아 있는 테이블로 향하였다.
귀족 영애인 도로시와 에이미는 당장에라도 씻고 싶은지 목욕물을 데워 달라고 요청하였고 아이는 그녀들을 방으로 안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