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5화
2. 여행(3)
“세르핀 마을에서 루팡 남작령까지는 금방이니 이제 한시름 놨네.”
“다행입니다. 안 그래도 로세 님의 부상이 더 심해질까 걱정이 많았는데.”
“다, 자네 덕분이라네. 루팡 남작도 아마 자네에게 큰 상을 내리실걸세.”
“보답을 바라고 한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저는 임무 때문에 이만 떠나야 할 것 같습니다.”
“아니, 이보게. 이렇게 떠나다니?”
“죄송합니다. 하지만 크라델 산맥에서 너무 오랜 시간 길을 헤매는 바람에 일정에 크나큰 차질이 생겼습니다. 지금이라도 일정을 맞추기 위해 강행군을 해야 할 판입니다.”
“끙…….”
굼벵이 같은 이들을 재촉하여 강행군을 시킨 나였기에 내가 말하는 강행군이 얼마나 험난하고 고단할지 상상하기도 싫은 이들이었다. 이들은 몇 번이나 함께하기를 원했지만, 그들에게 일을 끝마친 후 찾아간다는 약속을 하고 밖으로 나와 식량과 의복을 사기 위해 번화가로 향하였다.
저 멀리에서 은은한 푸른빛을 내뿜는 마탑이 보였다. 마탑의 주변은 특히 번화가였는데 정말 많은 사람이 물건을 사고팔았다.
나는 일단 옷을 사기 위해 의복점에 들러 오크 가죽으로 만든 장화와 리넨으로 만들어진 셔츠와 튜닉, 그리고 겉옷을 샀다. 의복을 새로 맞추고 무기점에 들러 가죽 갑옷과 철로 만든 장검도 구매했다.
앙리가 준 돈이 제법 되었기에 흥정 없이 그냥 원하는 물건을 바로 샀고 잡화점에서 식량과 각종 약초 등을 구매했다. 이제 마탑에서 포션과 마법 스크롤을 구매하고 혹시 구할 수 있다면 마법 서적을 구해 볼 예정이다.
청색의 마탑은 주로 동물을 조정하거나 날씨 등을 알아맞히는 생활에 유용한 마법을 주로 사용하는 마법사들이 머무는 곳으로 이곳에 있는 마탑이 42번째 설립된 청탑이라고 하니 그 위세가 대단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신분증을 요구하는 청탑의 문지기에게 조금의 뇌물을 찔러 주었다. 동화 5개로 출입이 가능하니 생각보다 싸게 먹힌 셈이다. 청탑 안은 공기 청정 마법이라도 걸려 있는 것인지 숲 속에 들어온 것처럼 맑은 공기를 느낄 수 있었다.
긴 테이블에 앉아 있는 여자 마법사는 나의 머리카락 색에 놀랐는지 눈썹을 치켜세웠지만 침착하게 나에게 용무를 물어보았다.
“환영합니다. 동쪽에서 온 손님이시군요. 무슨 일로 이곳에 오셨는지요?”
“포션과 마법 스크롤, 마법 서적을 사고 싶은데…….”
“얼마나 구매하기를 원하시나요?”
“가격과 수량을 알 수 있나?”
“회복 포션은 하나에 50골드로 5개까지 판매할 수 있습니다. 마법 스크롤은 1서클이 10골드로 10장, 2서클이 25골드로 5장, 3서클이 50골드로 3장까지 판매할 수 있으며 본래 마법 서적은 판매가 금지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원하신다면 마도학에 관련된 서적을 500골드에 판매하고 있습니다.”
“모두 구매한다면?”
“네? 잠깐만요, 모두 구매하신다고요? 그럼 총 1,125골드 중 25골드를 깎아 드려 1,100골드에 드릴 수 있는데…….”
여자 마법사는 보아하니 ‘여행객 같은데 그만한 돈이 있을까?’라는 눈초리로 나의 행색을 살폈다. 나는 품에서 전 재산에 해당하는 금화와 보석을 꺼내 주었고 그녀는 놀란 표정으로 그 가치를 따지더니 나에게 금화 열 개를 건네주었다.
10골드 8실버 20실링. 그것이 남은 전 재산이다.
너무 쉽게 생각했다. 몬스터의 가죽과 뿔 등을 팔고 앙리가 뿌리다시피 준 돈이면 충분히 마법을 배우고 제법 고위의 마법서까지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현실은 냉정하였다.
당장 ‘튤립의 노래’로 달려가서 보상을 받고 싶은 심정이었다. 내가 이런저런 상념들로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네, 여행객치고는 제법 많은 돈을 지니고 있더군.”
“…….”
“허허허, 일부로 훔쳐본 것은 아니었네. 마탑에서 볼일을 보던 도중에 우연히 자네를 보게 되었네.”
“그 말을 믿으라는 건가?”
“믿기 어렵다면 마나에 걸고 맹세를 하겠네. 마법사의 맹세가 얼마나 중한지 자네도 알고 있겠지? 그나저나 쓰레기 같은 마도학의 서적을 사다니 자네 정말 잘도 미친 짓을 하더군.”
“그게, 무슨 소리지?”
“마도학이란 마법의 역사서나 마찬가지야. 마법이 왜, 어떻게 생기게 됐으며 어떻게 전해졌고 어떤 학파가 무슨 마법을 주로 쓰는 둥 그냥 쓸모없는 이야기만을 모아 놓은 잡서라네. 그 역사적 가치야 헤아릴 수 없겠지만, 실전에서 전혀 도움도 안 되는 이야기들 뿐이니 어떤 마법사가 그것을 찾겠나? 그냥 줘도 버릴 판국에 그런 거금을 주고 샀으니…….”
“되판다면?”
“산다는 마법사가 있을까? 산다고 하여도 과연 1골드나 받을 수 있을까?”
“사기당한 셈인가?”
“허허, 자네 보기보다 경험이 미흡하고만. 분명히 마탑에서 마법 서적은 판매가 금지 되고 있다고 말해 줬다네. 그럼 그것은 마법 서적이 아니라는 소리가 되지. 자네가 아무리 우겨도 1골드는 커녕 1브론즈도 받기 어려울 거야.”
“당했군.”
“모든 마탑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본질이 변해도 너무 변했다네. 예전에 순수하게 마법이란 학문을 탐구하고 연구하던 마법사들은 이제 찾아보기도 어렵고 저렇게 마법을 이용하여 돈을 벌려는 돈벌레들만 가득하지.”
“밸트류, 그곳도 그런가?”
“마법제국 밸트류? 그곳은 조금 다르지.”
“그나마 다행이군. 그곳에서 마법을 배우려면 얼마 정도가 들지?”
“흠, 1서클이라면 500골드. 2서클이면 1,000골드는 줘야 할 걸세. 하지만 3서클부터는 비정상적으로 가격이 올라가서 3,000골드 이상은 줘야 할 거야.”
“비싸군. 마법이라는 것이 모두 이렇게 비싼가?”
“물론이네. 마법이 괜히 귀족들의 학문이며 신이 내린 학문이겠는가.”
“좋아. 당신의 말을 믿지. 하지만 내가 사기를 당했다는 말을 하려고 나를 찾은 것은 아닐 테고? 무슨 볼일이지?”
“혹시, 자네. 자금이 남는다면 나에게 투자하지 않겠는가?”
“투자라?”
“지금 개발 중인 시약이 있다네. 자금만 충분하다면 조만간 완성할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지금 다른 마탑과 귀족들이 손을 잡고 빚을 핑계로 그것을 헐값에 사들이려고 하고 있다네. 눈 뜨고 실험의 결과물을 빼앗기게 생겼네. 제발 도와주게.”
마법사의 간절한 눈동자가 나의 마음을 움직였을까? 보이지 않는 인연의 끌림이 나를 움직였을까? 나는 그에게 물었다.
“얼마나 필요하지?”
“그게…….”
“얼마?”
“재료비로 달마다 10골드 정도… 개발비로는 1,000골드가 든다네. 적어도 5개월. 5개월 안에 완성해 보이겠네.”
“세 가지 조건을 들어준다는 조건에 3개월.”
“켁, 세 가지나?”
“무리한 조건은 아닐 거야. 첫 번째, 나에 대해서 알려고 하지 말 것.”
“좋네. 그 정도야.”
“두 번째, 나를 속일 생각을 하지 말 것.”
“물론이네.”
“마지막 세 번째, 나에게 당신이 알고 있는 모든 마법적 지식을 전수해 달라는 거야.”
“그, 그건…….”
“재료비 10골드와 개발비 1,000골드 이외에 추가로 발생하는 비용들이 있겠지? 그것들 일체를 모두 지원하지.”
“5개월, 그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네.”
“좋아. 대신 마나의 이름으로 약속을 해야 해.”
“허허허, 좋네. 좋아. 나 하인츠 디 바이트(Hainz Di Vite)는 마나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겠네. 내가 자네를 속이거나 약속을 이행하지 못한다면 평생 자네의 종이 되겠네.”
“좋아. 내 이름은 로스트(Lost:잃어버린)야.”
“무슨 이름이 ‘잃어버린’이라니. 정말 괴상한 이름이로다.”
“남의 이름 가지고 왈가왈부할 생각하지 말고, 일단은 현금이 별로 없어. 보다시피 말도 안 되는 가격에 이 책을 구매해서 말이야. 대신 이것들을 주지.”
나는 품에서 금화 10개를 건네주며 회복 포션 3개와 1서클 ‘매직 애로우(Magic Arrow)’와 2서클 ‘에너지 볼트(Energy Bolt)’가 걸려 있는 스크롤 15장을 모두 주었다.
“일단은 이걸로 급한 불을 끄고 있어. 조만간 돈을 벌어 오지. 아참, 지금은 어디에 머물고 있지?”
“세르핀 마을의 외곽에 위치한 ‘노아의 숨결’이라는 여관에 머물고 있다네. 그곳은 마법사들에게 약간의 숙박비를 깎아 주기로 유명한 곳이지.”
“좋아. 조만간 그곳으로 찾아가도록 하지.”
“고맙네.”
하인츠는 그동안 자금의 압박과 고심을 많이 한 모양인지 계속해서 고맙다고 고개를 숙였고 나는 기분 좋은 미소를 그리며 크라델 산맥을 타기 시작하였다.
계획을 전면적으로 수정하게 되었다. 일단 마법이라는 것을 배우기에는 상당한 거금이 필요하기에 돈을 벌어 볼 생각이다.
지금 남은 돈은 몇 푼 안 되지만 크라델 산맥에 남겨 둔 노예 코볼트가 가지고 있는 상당한 가죽과 몬스터들의 잔해들이 남았기에 아마도 그것으로 초기 자금을 마련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루팡가의 보상도 빼놓을 수 없다. 제법 영향력이 있는 남작가 자제의 목숨을 구해 줬으니 섭섭지 않은 돈을 줄 것이다. 게다가 앙리에게 투자금을 끌어내어 상단 하나를 차리거나 뭐 정 안 된다면 현대의 지식을 바탕으로 발명품이라도 만들어 낼 계획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강행군을 하자 귀족들이 며칠씩 걸리던 거리를 고작 이틀 만에 주파하였다.
“이 근처였던 것 같은데?”
나는 팡고와 격전의 흔적인 쓰러진 나무가 있는 자리를 살폈지만, 그 어디에도 노예 코볼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설마, 다른 몬스터에게 잡아먹혔나?”
불길한 상상을 하고 있을 때 멀리서 화살이 날아왔다.
“크륵, 그 인간인가?”
“크륵, 맞다. 대장이 말한 인간.”
“크륵, 먹자.”
대장? 설마?
* * *
인간은 마정석을 먹을 수 없다. 마정석에 담긴 마력을 견디지 못해 미치광이가 되거나 마력 반발로 인간 폭탄이 되기 십상이다.
하지만 몬스터들은 다르다. 태초부터 그들에게 마성이 존재하며 마정석에 담긴 마력을 흡수하여 더욱 강하고 흉악하게 변하게 된다. 상급의 마정석을 먹은 몬스터의 경우 마수(魔獸)라 불리게 되는데 상급의 마수의 경우는 기사단이 출동하여야 겨우 토벌이 가능하다고 알려졌다.
약 40마리의 코볼트가 활을 쏘고 10마리의 코볼트가 칼을 들고 나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제법 잘 짜인 배치에 훈련이라도 한 것인지 동작도 끊이질 않는다. 하지만 그 동안의 수많은 죽음과 몬스터들과의 격전이 나를 성장시켰다.
나는 칼을 휘두르는 코볼트 중 하나를 방패 삼아 활을 막아 내며 주변을 살펴보았다. 저 멀리서 찌그러진 갑옷을 입고 ‘크륵’ 소리를 내며 부하들을 독촉하는 코볼트가 보였다.
“네 이놈!”
분노에 이성이 날아갈 것 같았다. 다행히도 이 저주받은 불사의 권능으로 이성을 되찾을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화가 식은 것은 아니었다.
접근하는 코볼트 열 마리를 모두 베고 활을 쏘는 궁수 코볼트 여섯을 처리했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이쯤이면 겁이 많은 코볼트들은 도망가기 십상인데 신기하게 아직까지 무기를 들고 저항하는 모습이 나를 더욱더 자극하였고, 나의 분노는 마침내 나타난 거대한 양손도끼를 든 노예 코볼트에게 쏟아졌다.
“크륵, 주인 잘못했다.”
퍽!
“크륵, 나 부하 많아졌다.”
퍽! 퍽! 퍽!
갑옷을 입은 노예를 포함한 서른이 넘는 코볼트들이 일렬종대로 머리를 박고 있다. 나는 노예가 말을 걸 때마다 옆구리를 발로 차며 기강을 바로잡고 있었다.
순간의 방심이 위기를 불러왔다. 예전 실력을 생각하던 나는 단 한 방에 온몸이 갈라질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