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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13. 삭월의 밤(2)
큰 충격에 한동안 일어설 수가 없었다. 내장이 터져 나가는 고통과 뼈가 파열되어 부서지는 고통들…… 하지만 고통은 잠시뿐이다.
어둠은 나에게 한없는 힘을 불어넣어 주며 몸을 재생하였다. 하인츠를 살릴 수 있다는 기쁨에 나는 고통마저 달게 느껴졌다.
* * *
추적은 집요하였고 적들의 숫자는 많았다. 하인츠를 살리기 위해서는 신전으로 가야 했다. 포션을 만들어 파는 작자가 포션이나 회복 마법을 배우지 않았다니 정말로 아이러니하다.
“자비와 자애의 브리지트(Beurijiteu) 님의 신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환자의…… 치료를…… 헉헉!”
“상태가 매우 중하군요. 적어도 5골드 이상은 받아야 하겠습니다.”
뭐? 신전에서 돈을 받았나? 하지만 지금 나에게는…….
“나중에, 나중에 주겠어. 그러니 일단은 회복부터…….”
“이런, 하급 용병처럼 보였는데 역시나 그랬었나? 그나마 상급 용병이라면 의뢰비를 써서라도 동료를 살리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상처를 입었으면 곱게 죽을 것이지 천한 것들이 여기가 어디라고 기어들어 와!”
“제발… 시간이 없어.”
“이런 미친… 퉤! 성기사들을 부르기 전에 좋은 말로 할 때 꺼져!”
“자, 자비를…….”
“흥, 자비는 돈이 있는 사람이나 받을 수 있는 거야. 꺼져!”
“이게…… 신의 뜻인가?”
눈앞이 핑 돌았다. 자비와 자애의 신전이라고? 크크큭, 웃음만 나왔다. 신은 저런 타락한 자들에게도 신성력을 허락하는 것인가?
하인츠의 상처는 더욱 위독해졌다. 4서클의 정신력으로 그동안 버텨 왔지만, 더 이상은 무리였다. 이제 한계에 다다랐다.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
일단 어디라도 들어가서 차가운 몸을 녹이고 약초나 포션, 그래 포션이라도 구매를 하던지 훔쳐서라도 살리겠어. 조금만 버텨 줘 하인츠.
나는 미친 듯이 보이는 집들의 문을 두들겼다. 하지만 그 누구도 우리를 위해서 문을 열어 주는 곳은 없었다.
“으…….”
“하인츠, 정신 차려. 여관이든 어디든 들어가서 내가 고쳐 줄게. 그러니 정신 차려!”
“주…… 님.”
“크흑, 이 어리석은 친구야. 주인님이라니. 마법을 이제 그만 가르쳐도 좋아. 죽지만 말아. 내가 말했지. 단 한 번 목숨을 구해 주겠다고…….”
“죄…… 송…… 다.”
“하, 하인츠? 하인츠, 하인츠, 하…….”
털썩! 고개를 숙인 그에게는 더 이상 산 자의 숨결을 느낄 수 없었다.
신이시여. 제발…… 제발…… 그의 목숨만은…….
“여기까지인가?”
신전에서 연락이라도 취한 것인가? 아니면 인근에 있는 사람들이 고발을 하여 불러온 것일까? 상당수의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몰려왔다. 근처의 사람들은 이제야 무슨 일인지 고개를 내밀며 이 상황을 즐기며 구경하고 있다.
“이제, 어리석은 반항은 그만하시게. 이럴수록 자네만 추해지네. 자, 우리와 함께 가세나.”
“…….”
“자네가 포션과 다른 물품의 제조법을 우리에게 공개한다면 자네를 놔 주겠네. 아니, 자네에게 온갖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게 도와주겠네. 어떤가?”
“……다.”
“뭐? 무슨 소린가?”
“이미 늦었다.”
두근.
믿을 수 없다. 하인츠 그가 죽다니.
두근. 두근.
잊어서는 안 된다. 그의 죽음을…….
두근. 두근. 두근.
힘겹게 감정의 일부분을 지탱하던 무엇인가가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없어져야 마땅하다.
“괴, 괴물이야!”
신은 너희를 버렸다.
“으악! 사, 살려 줘!”
너희들의 왕은 현명함을 잃었고 귀족은 고귀함을 잃었다. 기사는 기사도를 잃었으며 신관은 신을 향한 믿음과 자비를 잃었다. 마법사는 진리를 탐구하는 통찰을 잃었으며 상인은 공정함을 잃었다.
“자네, 자네 왜 이러나? 우리…… 마, 말로 하세나.”
로세 드 루팡. 크크큭, 친절을 틈타 남의 것을 탐한 죄. 그대가 믿는 기사가 여기 있도다. 나는 가벼운 인형을 들어 올리듯이 한 손을 뻗어 목이 반쯤 잘린 허드센의 몸통을 들이밀었다.
손등에 새겨진 문양은 찢겨지듯 벌어지고 그 안에는 붉은 눈이 자리 잡고 있다. 온몸에는 검은 기류가 내뿜어져 나오며 분노와 증오, 파멸과 절망만이 나와 함께한다.
시간이 되었다. 어리석고 무지한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사라져야 마땅하다.
나의 바람은 한줄기의 파멸이 되어 세상에 내려왔다. 온몸을 뒤덮은 검은 어둠이 사방으로 퍼져 나가며 의지를 실현하는 힘이 되어 간다. 사방은 온통 비명과 절규만이 가득하다.
기사들과 마법사들의 거센 반항에 피식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살려고 바동거리는 그들의 모습이 가소로웠다. 죽! 어! 라!
묵직한 검은 파동이 기사들의 방어구와 마법사들의 보호 마법을 뒤흔들었다. 온몸을 감싸던 철제 방어구는 종잇조각 구겨지듯 구겨졌고 마법사들의 마나는 산산이 조각나서 대기로 빨려 들어갔다.
“아, 악마다! 마족이 소환된 거야!”
구경을 하다가 피해를 본 무지한 백성들의 입에서 악마란 이름이 튀어나왔다.
마나를 잃고 자리에 쓰러진 채 겁에 질린 목소리로 신을 부르짖는 마법사의 목소리가 나에게 더없는 기쁨을 주었다. 그래, 더욱 외치거라. 공포와 절망에 가득한 그 음성으로 더 소리치거라.
마법사들 무리 하나하나를 짓이겨 죽이며 천천히 기사들에게 다가갔다. 이미 철제 방어구가 구겨지고 찢겨지며 온몸에 찰과상과 크고 작은 부상들로 가득한 그들의 눈에 두려움이 차올랐다.
용맹함이라는 이름 아래 무모하게 덤벼들 것으로 예상했지만 이미 그들은 전의를 상실한 지 오래이며 기사다움을 잃은 지는 더욱 오래이다.
나의 몸에서 또 한 번의 죽음이 내려왔다. 검은 어둠은 기사들의 전신을 찢어발기며 다시 길을 열었다. 구경을 하던 평민들 사이에 낯익은 얼굴이 보인다.
크크크, 앙리 로 가즈온. 쉴 새 없이 떠드는 그대의 거짓 호의에 감사를 표한다. 그 답례로 평온한 죽음을 내려 주도록 하지.
검게 물든 파동이 나의 손아귀로 몰려들어 왔고 나는 단숨에 그의 심장을 취하려는 찰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스트!”
나는 목소리의 주인공을 알고 있다. 그녀이다. 순간 잠시나마 이성이 돌아왔다. 광기 어린 나의 이런 모습을 보일 순 없었다. 마음속에 외침이자 바람은 한순간에 이루어졌다.
검은 기운은 다시 손등으로 파고들어 가며 열렸던 눈이 닫히기 시작하였고 찢겨지고 벌어진 문양이 다시 원래 모습을 되찾아 가기 시작했다.
“엠마…….”
“로스트? 당신이 맞나요?”
“…….”
“당신? 지금, 그를 죽이시려는 건가요?”
“그건…… 그렇소. 저자는 하인츠를 죽인 원수요. 나는 하인츠의 복수를 해야 하오.”
“하인츠. 그가 그것을 원했나요?”
“그것은…….”
일순간 할 말을 잃었다. 하인츠가 복수를 바라던가? 그때 엠마가 천천히 나에게 다가와 차가운 손으로 나의 볼을 감싸 왔다.
“불쌍한 사람, 당신은 복수를 이룰 수 없어요.”
“아니요. 나는 꼭 복수를…….”
푹!
시퍼런 날이 선 단검이 나의 심장을 꿰뚫는다. 피가 분수처럼 튀기며 그녀의 얼굴을 적신다. 왜?
“미안해요. 하지만 어쩔 수 없어요. 그는 나의 연인이니까요.”
“쿨럭… 여, 연인?”
“그래요. 당신을 만나기 전부터 사귀었던 아주 오래된 연인이죠.”
엠마는 싱긋 미소를 지으며 다시 한 번 나의 심장에 비수를 꽂는다.
“엠마? 그의 심장을 정확히 찔렀어?”
“그래요. 앙리. 내가 그래서 언제나 조심하라고 말했잖아요.”
“고마워. 당신이 아니었으면 죽을 뻔했어.”
“그나저나 마족도 아닌 자가 어떻게 저런 힘을 발휘했을까요?”
“신비한 것이 많은 남자야.”
“훗, 그래도 죽음에서 살아 돌아올 수는 없을 거예요.”
“리치(Lich)가 되어서 돌아오면 어떡하지?”
“그건 고위 마법사나 가능한 거고 그리고 지금 독이 든 단검이 저자의 심장에 박혔으니 죽는 것은 시간문제예요.”
“안타깝군. 그 힘의 정체나 그가 가진 물품 등의 제조법을 알아낼 수 있다면…….”
“욕심이에요. 이미 늦어 버린 일이에요.”
크크크큭, 하인츠.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게 사실이야? 저 더럽고 추악한 여자가 엠마가 맞느냐는 말이야? 나는 저런 여자를 사랑한 거였어? 그, 그런 거야? 이봐, 말을 좀 해 봐. 하인츠. 제발…… 말해 줘…… 아니라고…….
바닥에 누운 하인츠에게 말을 걸고 싶지만, 입 밖으로 나오는 소리는 없었다. 처음부터 나의 죽음은 이미 예정되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차가운 대지에 바로 누운 나는 하늘을 바라본다.
죽기 직전 내가 바라본 하늘은 검은 달그림자로 가려진 삭월의 밤이었다. 나는 그 아름다움에 취해 눈을 감는다.
<좬불사의 인장좭 2권에서 계속>
작가의 말
안녕하세요. 글쓴이입니다. 혹시, 우연이라는 말을 믿으시나요? 저는 우연을 믿습니다. 소설에는 우연이라는 것은 없다고 단정적으로 서술하였지만 이렇게 제가 글을 쓰는 것이나 여러분을 만난 것 모두가 우연이라고 생각되는군요.
그저 원인과 결과의 연관성을 찾기 힘든 필연? 모두가 우연이 아닐까요? 물론 우연은 가만히 있으면 찾아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주변에서 또는 일상에서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처음 글을 쓰며 미흡한 점이나 부족한 점이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찾아온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 욕심을 부린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예전에 보았던 3분력이라는 책에서는 좋은 글을 쓰는 방법은 깎고 또 깎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글을 잘 쓴다는 보장은 드릴 수 없지만 열심히 하겠다는 약속은 드릴 수 있으며 이렇게 출판을 하게 도와주신 뿔미디어와 저를 낳아 주시고 잘 키워 주신 부모님, 그리고 언제나 좋은 조언을 주었던 친구들과 동생들, 제글을 봐 주시는 모든 독자분들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