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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12. 배신의 계절(2)


거센 화마가 건물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이미 건물의 절반 이상이 무너져 내린 상태였고 지부를 위해 일하던 동료들은 피 흘리며 죽은 시체가 된 지 오래였다.
그들은 억울함에 눈조차 감을 수 없었는지 죽는 순간까지 눈을 뜨고 원한 가득한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크윽, 미안하다. 다…… 모두 나의 잘못이다.”
그때, 멀리서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작은 소리여서 금세 주변의 불길이 타들어 가는 소리에 묻혔지만 나는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나는 소리의 근원을 찾기 위해 화마 속으로 뛰어들었다. 누구든 살릴 수만 있다면 불길이 나의 살을 태우는 것조차 기쁘게 맞이할 수 있다. 그 누구라도 좋다. 살아만 있어다오.

“재, 재정관, 서기관!”
검에 가슴을 찔려 피를 흘리며 죽어 가는 재정관 휴(Hugh)와 심장이 찔려 죽은 서기관 피터. 휴는 이미 상당수의 피를 흘려서인지 입술은 파랗게 질려 있었고 흐릿한 의식에 기대어 죽어 가는 그의 손을 잡아 주었다.
휴는 흉악하게 일그러진 화상 입은 얼굴을 보고도 나라는 것을 아는지 미소를 지으며 힘겹게 입을 뗐다.
“다…… 행…… 복수…… 세요.”
“그래, 내가 복수해 주리라. 천 번, 아니, 만 번, 수억 번의 죽음을 겪어서라도 복수해 주리라.”
“……하…… 츠…… 법사…… 세, 세르…… 크윽!”
휴는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도 상단을 위해 살아 주었다. 나와 마법사 하인츠가 있다면 상단을 다시 살릴 수 있다고 생각했나? 그는 죽는 순간까지 하인츠가 세르핀 마을로 향했다는 소식을 전하고 그렇게 삶을 마감하였다.
이미 메말라 버린 눈물이 흘렀다. 화마는 더욱 거세지며 사방의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그들에게 작은 무덤 하나 지어 줄 수 없는 무력한 나에게 회의를 느낀다. 내가 조금 더 강했더라면…….

아르곤 성왕력 2748년 바람의 콘라드(Cone lard)의 스물한 번째 날.

바람이 서늘하다. 한동안 내리던 비가 잦아들고 거센 바람이 불기 시작하였다. 바람에서 짙은 혈향이 느껴진다.
“이번 일의 흉수를 찾는다.”
카산이 이끄는 수십만의 코볼트 대군이 모습을 드러냈다. 철기류의 병기 등으로 무장한 코볼트 군대의 위엄은 대단하였고 인근에서 나를 찾는 용병들을 집어삼키며 그 위력을 발휘하였다.
“카산. 이곳에 죽은 상단원들의 시신들을 잘 묻어 줘라. 그리고 인근에 살아남은 상단원을 찾아라.”
“크륵, 적들은 어떻게 처리하냐?”
“모두 죽여라.”
“크륵, 전부?”
“그래, 단 하나도 빠짐없이 처참하게 모조리 죽여라.”
나의 분노를 일부 느낀 것인지 카산은 고개를 끄덕이며 코볼트 군대를 이끌고 죽은 상단 사람들의 시신들을 묻어 주기 시작하였다.
밤사이 상처가 제법 많이 호전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얼굴에 큰 화상이 사라진 것도 아니고 피묻은 용병의 옷을 입고 있어서인지 영락없이 큰 부상을 입은 용병의 모습이다.
산을 내려오며 가는 길목마다 보이는 적들의 모습을 볼 때마다 모조리 때려죽이고 싶다는 마음이 울컥 치솟았지만, 지금은 참아야만 했다.

세르핀 마을에 도착하자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하며 공개 집행이라도 있었는지 수백 명의 사람의 목이 마을 입구에 걸려 있었다. 그리고 그들 중에 제일 높은 곳에 걸려 있는 낯익은 얼굴…
“아, 아…… 이작…….”
두근.
심장이 바늘로 찌르는 듯이 아프다. 아이작 영감의 죽음. 더는 그 자리에 있을 수가 없었다. 눈이 고장이라도 난 것일까?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러나왔다. 아직 나에게 이렇게 많은 눈물이 남아 있었던가? 어디로 가야 하지? 혼란스럽다.
아이작 잡화점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겁기만 하다. 또 누구의 죽음을 봐야 하는가?
상단에서 일하던 사람들의 대부분이 죽임을 당하고 창에 찔려 마을 외곽이나 광장의 중앙에 내걸려졌다. 당장 그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폐가를 방불케 하는 스산함, 사람의 인적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인위적인 고요함 속을 거닐었다. 나는 부서진 계단을 밟으며 집무실로 향하였다. 집무실은 난장판이었다. 돈이 될 만한 것은 모조리 가져갔고 무엇인가를 찾은 흔적이 뚜렷하다.
“하인츠, 하인츠.”
목이 메도록 하인츠의 이름을 부르며 부서진 건물을 돌아다녔다. 하인츠가 기거했던 실험실은 사방이 전투의 흔적들로 가득하다. 하인츠는 물품을 제작하는 과정이나 연구 자료를 넘겨줄 수 없어서 끝까지 반항한 것인지 흔적이 끝나 가는 곳은 정말이지 보기 어려울 만큼 처참했다.
검게 그을린 벽면이나 찢겨지고 부서진 가구들, 사방으로 튀긴 핏자국과 피 흘리는 무엇인가를 끌고 간 흔적.
대량의 혈흔이 발견하였다.
두근. 두근.
죽음? 그럴 리 없다. 하인츠마저 이렇게 보낼 수는 없다. 나는 정신이 나간 듯이 흔적을 따라갔다. 마차에 옮겨 탄 것인지 흔적이 도중에 끊기고 짐마차의 수레 자국이 남았다. 놓칠 순 없다. 흔적이 지워지기 전에 추적해야 한다. 나는 필사적으로 흔적을 되짚어 가며 마차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다리야 달려라! 빌어먹을 심장아 뛰어라!’
숨이 거칠어진다. 몸이 무겁다. 입가에서는 침이 쉴 새 없이 흘러나왔고 눈이 충혈되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았다.

숲이다. 개인 사유지라는 경고가 붙은 푯말이 눈에 띄었다. 적힌 이름은 처음 보는 이름이다. 아마도 누군가가 이름을 속였던지 사주를 받고 나를 노린 듯싶다.
저 멀리서 마차의 모습과 거대한 별장의 모습이 보인다. 마차 뒤에 짐을 싣는 짐칸이 온통 피로 흥건하게 젖어 있다. 주변에 시체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아직 죽지 않은 모양이다.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느덧 뉘엿뉘엿 해가 지기 시작하며 어둠이 몰려왔다. 근처를 지키는 경비병들을 피해 건물 안으로 잠입하였다. 건물 안은 미로처럼 복잡하였다. 나는 그림자 속에 몸을 숨기고 근처에 누군가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시녀로 보이는 여자 하나가 내 앞을 지나쳤다.
“조용해, 죽고 싶지 않으면 입 닥치고 묻는 말에만 대답해라. 이곳에 납치된 자가 어디 있는지 아는가?”
여자의 눈동자가 심하게 떨린다. 두려움일 테지. 무엇인가를 알고 있는 것인지 고개를 계속해서 끄덕인다.
“좋아. 그는 어디 있나?”
“주, 주인님께서…… 지, 집무실로…… 우읍!”
“쉿! 너에게 살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 살고 싶다면 집무실로 나를 안내해라. 어때? 할 수 있겠지?”
시녀는 다시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입을 막던 손을 치우고 시리도록 차가운 단검을 그녀의 목 주변에 올려놓는다. 그녀는 두려움에 온몸을 벌벌 떨며 집무실까지 나를 안내하였다.
“수고했다. 살고 싶으면 지금 당장 이곳을 떠나라. 그리고 멀리 아주 멀리 떠나야 할 것이야. 어둠이 찾지 못하는 저 멀리 떠나거라.”
집무실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법사 하인츠 님. 그렇게 고집을 피우셔도 소용없습니다.”
“쿨럭쿨럭, 어서…… 나를 죽여라.”
“협조를 한다면 부귀영화를 다 누릴 수 있는데 왜 사서 고생인지 몰라.”
끼이익!
문이 녹슨 것인지 아니면 유독 내 귀에 열리는 소리가 크게 들린 것인지 알 수 없다. 다만, 문이 열리고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들은 내가 익히 알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이, 이게…… 꿈이지? 그렇지? 말해 줘. 하인츠.”

* * *

두근.
믿을 수 없다.
두근. 두근.
잊어서는 안 된다.
두근. 두근. 두근.
힘겹게 감정의 일부분을 지탱하던 무엇인가가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 * *

죽기 직전 내가 바라본 하늘은 검은 달그림자로 가려진 삭월의 밤이었다. 그 아름다움에 취해 나는 눈을 감는다.



13. 삭월의 밤(1)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여섯 개의 광산을 보유한 거부의 아들인 앙리 로 가즈온, 루팡 남작가의 장남이자 큰 도움을 주었던 로세 드 루팡, 그의 호위인 허드센, 수십이 넘는 낯익은 기사들과 마지막으로 보이는…….
“하, 하인츠…….”
그의 모습은 처참하였다. 오른쪽 팔과 양다리를 잘리고 한쪽 눈마저 잃은 그는 지금도 죽어 가고 있었다. 그가 흘린 피가 옷과 바닥을 적셔 온통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하, 하인츠, 무슨 일이?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도, 도망…… 치세요…….”
“자, 자네를 이곳에 놔두고 나 혼자 도망치라고? 나는 자네를 살릴 거야. 그러니 이대로 죽는 것은 용서할 수 없어. 일단은 회복부터 해야겠어.”
아직 늦지 않았다. 하인츠는 4서클의 마법사답게 높은 정신력으로 아직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었고 대신관이라면 충분히 하인츠를 살릴 수 있을 것이다.
“설마, 로스트? 자네인가? 하하하! 그 흉측한 꼴이 뭔가? 우리는 자네를 한참 동안이나 찾았다네. 하하하하!”
우드득!
“지금은 그냥 가겠다. 하지만 조만간 나의 분노가 너희를 찾아갈 것이다.”
“하하하! 자네가 지금 큰소리를 칠 상황이라고 보는가? 살려 달라고 애원이라도 해 보지그래?”
“한 가지만 묻지 왜, 왜지? 이런 짓을 벌인 이유가 뭐지?”
“흥! 그것을 아직도 모르겠나? 하하하! 자네의 탐욕이 이렇게 큰 화를 불러온 거지.”
“그게 답인가? 탐욕이라… 무슨 소리인지는 잘 모르겠군. 하지만 조만간 그 답을 들으러 오겠다.”
“뭐?”
“월 오브 포그(Wall of Fog), 라이트닝 볼트(Lightning bolt), 가속(Haste).”
나는 반지의 힘을 빌려 순식간의 세 가지의 마법을 캐스팅하였다. 대마법사도 아닌 내가 동시에 3가지 마법을 캐스팅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반지가 빛을 내뿜으며 안개와 번개가 순식간에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나는 하인츠를 부축한 채 집무실 유리창으로 몸을 날렸다.
쨍그랑.
순간의 기지로 위기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6층 높이에서 뛰어내린 내 몸도 정상은 아니었다. 다행히 매직 아머(Magic Armor), 페더 폴(Feather Fall) 마법으로 몸에 방어력과 낙하 시 충격을 줄였지만, 하인츠를 안고 있었고 보통 착지 시 머리부터 떨어지기 때문에 몸을 최대한 말아 몸통부터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