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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11. 격변하는 정세(2)
노란색 터번을 두른 사막의 왕 알자크 폰 샌드윈드(Aljakeu Pon SandWind)는 호기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정보대신에게 물었다.
“말만 들어도 신기하구나. 얼음으로 만든 과일이라니. 짐은 상상도 하기 힘든 음식이도다. 그 음식을 이곳에서 맛볼 방법은 없겠느냐?”
“안 그래도 저희 쪽 상단이 접근하여 이야기를 해 본 결과 그들은 사막에서도 얼음 과일을 맛보게 할 수 있는 신기술이 있다고 합니다.”
“열사의 땅인 이곳에서? 대단하구나. 마법제국 밸트류에서나 얼음을 이곳까지 옮길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조그마한 왕국에서 어찌 그런 대단한 기술이 나왔는지.”
“그들이 만든 포션이나 아이스크림은 정말이지 신의 선물이나 다름없습니다.”
“납치를 하더라도 그들을 내 손 안에 넣고야 말겠다.”
“영민하신 왕이시여. 검의 왕국의 귀족들은 우둔하여 약간의 이간질과 뇌물을 준다면 알아서 그들을 내칠 것입니다.”
“좋다. 당장 계획을 실행하도록.”
* * *
어두운 골목길. 이름 없는 주점에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도둑, 살인자, 방화범, 수많은 범죄자들로 이루어진 이들의 정체는 밤손님 또는 도둑 길드의 핵심 간부들이라 불리는 이들이었다.
“밸트류의 동향은?”
“삼 개월 전부터 마법사와 용병들을 대다수 끌어모으고 있습니다.”
“아르곤의 상황은?”
“일급 경계령에서 특수 경계령을 추가 발령한 상태이며 성기사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그렇군. 데스타드는?”
“이미 상당한 금액을 아반크로스에 투자하여 귀족들과 상인들을 포섭한 상태입니다. 제가 예상하기에는…….”
“그만, 거기까지. 생각은 내가 한다. 좋아, 모두 해산하고 추가로 새로운 정보를 입수하는 대로 나에게 가져오도록.”
어둠이 가득한 주점의 한편, 모든 밤손님이 빠져나가자 어둠의 한편이 일렁이며 조소를 짓는다.
―운명의 저울추는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 * *
후작은 조촐한 파티를 열어 기쁨을 표현했다. 이 세계는 정말이지 귀족들의 낭비가 심한 것 같았다. 포션을 500개를 더 납품하는 것이 파티를 열 만한 이유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정말 그런 거야?
다행히 크고 성대한 파티는 아니어서 후작의 권속 아래 묶인 몇 명의 가문들과 귀족들이 모였고 생각보다 이른 초저녁에 끝이 났다. 후작은 계속해서 자신의 저택에 며칠을 머물다가 가라며 친한 척을 해 왔다.
하지만 후작의 머릿속에는 온통 포션을 조금 더 얻을 생각뿐일 것이다. 나는 정중히 후작의 제안을 거절하고 마차에 올랐다.
“어디로 모실까요?”
녹티스 상단의 전용 마부가 갈 길을 물었다. 나는 당장에라도 엠마를 보고 싶은 마음에 마부에게 말하였다.
“도리안가로 가 주게.”
마부는 씽긋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며 마차를 몰았고 나는 주변을 바라보았다. 마침 그날따라 검은 뭉게구름이 둥실둥실 낀 하늘은 당장에라도 비가 내릴 것 같았다.
“비라도 내릴 날씨로군.”
나는 눈을 감고 불어오는 바람을 느꼈다. 자유롭고 평온한 바람이 나의 몸을 감싸 왔다. 좀 더 이 자유를 만끽하고 싶지만 거센 운명은 나에게 평온을 선사하지 않았다. 마차는 그렇게 운명의 저편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하였다.
12. 배신의 계절(1)
새하얀 손……
“그 손을 잡고 싶었다.”
차가운 눈동자……
“나를 그런 눈으로 바라보지 마.”
검은 머리카락……
“나와 같은 검은 머리카락.”
그녀의 목소리가 듣고 싶다. 그녀의 웃음을 보고 싶다. 하지만 이제는 헛된 희망이다.
마차 안에서 깜빡 잠이 든 모양이다. 꿈을 꾼 것 같은데 도통 기억이 나질 않는다. 어느새 하늘에는 부슬부슬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마차에 달린 작은 문을 열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두꺼운 먹구름과 잿빛으로 어둡게 물든 하늘 아래 간간이 내리치는 번개와 세차게 부는 바람, 왠지 기분 나쁜 예감이 들었다.
“아무래도 예감이 좋지 않아. 마차를 돌려라. 상단 지부로 돌아간다.”
“네? 네. 알겠습니다.”
마부는 능숙한 실력으로 마차를 돌렸고 저 멀리서 불빛들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안 좋은 예감이 어김없이 맞아떨어지는 분위기였다.
“크, 크라델 산맥으로 서둘러라! 적이 몰려온다!”
쉼 없이 떨어지는 빗방울을 가르며 마차가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하였다. 매복한 것인지 종종 보이는 적들이 화살을 쏘고 독침을 내뿜었지만 에어 쉴드 마법으로 피해를 최소화하였다.
그동안 수련한 것들이 헛된 일은 아닌 모양이다. 현재 나의 실력은 3서클 익스퍼트. 알고 있는 마법의 수는 27가지. 적지 않은 수지만 이 상황을 벗어날 마법은 없었다.
“마, 망루가 보입니다.”
“좋아. 조금만 더 속력을 올리도록…….”
나는 3서클의 월 오브 포그(Wall of Fog:마법사의 주변에 안개를 생성하는 마법)으로 마차를 가리고 내가 알고 있는 마법 중에 가장 파괴력이 강력한 라이트닝 볼트(Lightning bolt)의 주문을 외웠다.
잠시 후 내 손안에는 강력한 뇌전의 기운이 몰려들었고 푸른빛의 뇌전은 사정없이 적들을 유린하였다.
쾅! 쾅! 쾅!
엄청난 폭음 소리와 함께 푸른 화염이 적을 불태웠다. 이 정도 소란이면 망루를 지키는 병사들이 지부에 연락을 취해서 지원병들이 내려올 법도 한데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망루에서 우리를 보지 못한 것인가? 지원은?”
“그게… 망루 위에 병사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런, 한 발 늦은 것인가?”
상황이 좋지 않았다. 적군으로 보이는 병사들의 숫자가 물경 천 단위를 넘어가며 개중에는 마법사도 있어 나의 마법을 간단히 무력화시키며 접근을 시도하고 있었다.
마부는 벌써 두, 세 발의 화살을 맞아 피를 흘리며 행동이 자유롭지 못해 마차가 제 갈 길을 찾지 못하고 있고, 말 역시 오랜 시간을 질주한 탓인지 속도가 현저하게 줄어들고 있었다.
“스, 스트렝스(Strength)!”
일단 말에게 힘을 불어넣어 줬다. 이제 남은 마나도 바닥났다. 잘해야 한 번, 두 번 정도 마법을 쓰고 나면 더 이상 마법에 기댈 수도 없는 상황이다.
여기서 죽을 수는 없다. 이곳만 빠져나간다면 지부의 용병들과 병사들로 충분히 막을 수 있다. 아니, 카산이 이끄는 코볼트 부대들로 저들을 잔인하게 쓸어버리리라.
마부가 출혈 끝에 결국 숨을 거두고 말았다. 나는 마부의 눈을 감겨 주고 상의를 벗어 마부에게 대충 씌우고 피를 닦았다.
“바인딩(Binding).”
마차를 끄는 말의 등에 마부를 옮겨 태우고 마법을 걸었다. 작은 단검을 꺼내서 마차를 잇는 끈을 잘랐다. 오크 가죽으로 만든 끈이라지만 보통 질긴 것이 아니었다.
“이랴! 달려라!”
말의 엉덩이를 힘껏 채찍질하자 마부를 태운 말이 미친 듯이 달려가기 시작하였다. 마차를 이끌다가 자유의 몸이 되어서인지 가벼운 발걸음으로 날아가듯 달려갔고 나 역시 다른 말을 타고 달렸다.
포위가 양쪽으로 갈라진 것은 불행 중 다행이었다. 게다가 옷을 갈아입힌 것도 생각보다 도움이 된 듯싶었다. 얼마 가지 않아 방어를 위해 만들어 놓은 전략기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파괴의 흔적, 혈흔, 갈라지고 부서진 건물들. 오래된 나무 아래, 시체들을 한곳에 모아 놓고 태우기라도 한 것인지 사방에서 고기 굽는 냄새가 진동한다.
반항하는 사람들을 가차 없이 벤 모양인지 피가 튀어 작은 웅덩이를 이루고 살이 찢겨져 사방에 난자하게 떨어져 있었다.
“크윽, 신이여. 당신의 장난인가? 망할 하늘아? 나의 불행을 바라는 것이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냉정함을 되찾아야 했다. 나는 품에서 돈이 담긴 주머니와 중요한 문서들을 꺼냈다.
디그(Dig) 마법으로 시체들의 옆에 땅을 파고 물건들을 파묻었다. 땅을 파고 묻은 티가 나지만 시체들이 난자한 이곳을 파서 무엇이 들어 있는지 확인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을 것이다.
‘이번 일의 원흉은 누구일 것인가?’
10대 상단인가? 왕? 델몬트 후작? 올리버 후작?
떠오르는 적들이 너무도 많았다. 일단 왕이나 델몬트 후작은 마나의 제약 때문에 힘이 들 것이고…….
수많은 생각들이 나의 머릿속에서 교차하여 지나갔다. 하지만 일단은 어떻게든 이곳을 빠져나가야 했다.
머리카락을 자르고 타오르는 불길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불길은 순식간에 머리카락을 불태우고 얼굴에 큰 화상을 입혔다.
“크으악!”
지독한 고통이 밀려와 한순간 정신을 잃을 뻔했다. 하지만 이대로 쓰러질 수는 없었다. 이 정도 고통은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고통보다 더 큰 분노가 나의 몸을 지배했다.
적들 중 따로 행동하는 용병 하나를 죽이고 옷과 소지품을 빼앗았다. 고문을 통해 이름이나 기본적인 출신 등을 알아냈지만 정작 중요한 정보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수천 명의 용병들이 거금에 고용되었다는 사실이나 고서클의 마법사들도 상당수 있다는 사실이 그나마 괜찮은 정보일 것이다.
얼굴이 화상으로 일그러져서인지 다들 동정 어린 눈빛을 보내왔다. 나는 포위망을 빠져나와 크라델 산맥의 코볼트 부락을 찾아다녔다.
“크륵, 인간이다.”
“카…… 산을 불…… 러라.”
“크륵, 대왕님이 아는 인간 아닌가?”
“크륵, 대왕님을 부르자.”
코볼트들은 다행히 카산과 자주 어울리던 나를 본 적이 있는 것인지 적의를 거두고 카산을 불러 주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나에게 덤비기라도 했다면 나는 코볼트의 한 끼 식사감이 되었을 것이다. 잠시 후 거구의 카산이 나타나 나를 보고 말하였다.
“크륵, 주인. 얼굴 왜 그러냐?”
“지부가…… 당, 했다. 크윽! 병사들…… 모아서…… 하인츠를…… 구한다.”
“크륵, 알았다.”
산맥의 코볼트들의 왕답게 카산이 나팔을 불자 수만의 코볼트들이 몰려들었다.
이대로 쉬고 싶지만 아직은 누워 있을 수 없다. 나는 길을 잘 아는 코볼트에게 지부로 향하는 가장 빠른 길을 알려 달라고 하여 먼저 지부로 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