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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도행 1권
작가서문
요즘 들어 문득 느껴집니다.
흐르는 시간은 결코 나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는 것을.
첫 작품인 ‘심도’를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낼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시간은 무심히도 흘러 네 번째 작품을 출간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힘든 일도 많았지만, 나름대로 즐겁게 글을 썼다 생각합니다. 물론 이번 천마도행 역시 즐거운 마음으로 시작했습니다.
이랑(李狼)이란 인물.
전작인 ‘선무지로’의 주인공 목해운과는 반대로 강인한 성정을 가진 이랑을 통해 새로운 모험을 즐겁게 시작했으며, 지금 천마도행을 읽고 계신 여러분들 역시 저와 같은 마음으로 끝까지 주인공 이랑의 행보를 지켜봐 주시길 바랍니다.
푸른 가을 하늘 아래서
이창호 배상
序章
―천마(天魔).
단 두 글자가 강호에 주는 의미는 없었다.
이미 세인들의 기억 속에서 잊힌 이름.
천마란 명호는 천 년이란 긴 시간 속에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져 있었다.
―마제(魔帝).
단 두 글자가 강호에 주는 의미는 전율이었다.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살아 있는 전설.
그것은 또한 칠백 년이란 긴 세월 동안 강호를 속박한 족쇄(足鎖)였다.
천마와 마제.
잊힌 전설과 살아 있는 전설.
그 두 개의 명호 속에 숨겨진 진실은 세월의 흐름에 묻힌 채, 강호는 오직 자신의 발목을 부여잡은 족쇄만을 기억할 뿐이다.
천마도행 1권(1화)
第一章 과거(過去)(1)
칠 년 전, 신강(新疆) 천산(天山).
검신(劍身)에 머문 차가운 기운이 여인의 눈마저 얼어붙게 만든다.
꼭 다문 입매가 유독 매력적인 백의 미녀는 얼음처럼 투명한 눈을 들어 차가운 검신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내 검을 검집에 꽂아 넣은 백의 미녀는 그것을 가볍게 손에 쥔 채, 눈앞에 자리한 천산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순간.
“소청아, 찾을 수 있겠지? 그놈의 손에서 삼백 년 전 빼앗겼던 본궁의 신물을 찾을 수 있겠지?”
“…….”
눈 덮인 산을 향해 출발하던 여인의 발목을 또 한 여인이 부여잡는다. 매섭게 몰아치는 바람 소리를 뚫고 뒤에서 흘러든 여인의 떨리는 음성에 백의 미녀는 자신의 손에 들린 검을 바라보았다.
“모르겠어요. 그를 이길 수 있을지, 없을지……. 하지만 지든 이기든 최선을 다하겠어요. 본궁의 신물, 빙혼(氷魂)을 되찾기 위해.”
***
위이이이잉!
동장군의 입김이 하늘마저 얼어붙게 만들며 일순 눈보라를 일으킨다.
어지러이 휘날리는 눈꽃 바람을 뚫고 백의 미녀는 천산 중턱에 생성된 빙하(氷河)로 발을 디뎠다. 그곳엔 이미 한 사내가 어둠만이 존재하는 절곡을 뒤로한 채 우뚝 서서 다가오는 여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
일순, 사내의 시선을 받은 여인의 투명한 눈으로 이채가 떠올랐다.
붉은 눈.
강호에 살아 있는 전설인 한 사내의 눈은 붉은 요기(妖氣)를 띠고 있었다.
아니, 그가 얼굴에 뒤집어쓴 백색 가면에 박힌 눈이 붉게 빛나고 있다는 표현이 옳으리라. 섬뜩한 빛을 발하는 붉은 유리가 박힌 가면과 백의, 백색 검집을 허리에 찬 사내는 노인인 듯 머리카락이 온통 백색이었다. 그러나 여인을 발견한 괴사내의 입에선 예상과는 달리 젊은 음성이 흘러나와 여인의 걸음을 멈추게 했다.
“그대는?”
“…….”
짧지만 강한 인상을 안겨 주는 사내의 음성이다.
일말의 감정도 드러내지 않은 억제된 사내의 짧은 물음에 여인 역시 꼭 닫혀 있던 말문을 열어 보였다.
“빙궁의 칠대 궁주 자소청이라 합니다. 당신이 당금의 마제(魔帝)인가요?”
“그렇다.”
광오했다.
사백 년 전, 여제(女帝)라고까지 칭해지던 검화(劍花) 지연화가 세운 빙궁의 후손을 마주함에도 사내는 마치 그녀를 아랫사람 대하듯 답한다.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
마제란 이름을 가진 자, 오직 군림(君臨)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에…….
자소청 역시 사내의 광오함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검집에 꽂혀 있던 검을 빼어 들었다.
“삼백 년 전 잃어버렸던 본궁의 신물인 빙혼을 되찾고자 합니다.”
“…….”
잠시 정적이 흘렀다.
여인의 맑은 음성을 음미하듯 침묵을 지키던 사내가 이내 허리춤에 맨 검을 뽑아 들며 말했다.
“나를 이길 수 있다면 빙혼을 돌려주겠다.”
얼마나 흘렀을까?
빙궁의 칠대 궁주 자소청과 마제란 명호를 물려받은 괴사내와의 대결이 펼쳐진 지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 시간의 흐름을 보여 주듯 어렴풋이 떠 있던 햇살은 서산 너머로 사라지고 저녁달이 떠올라 두 남녀의 대결이 막바지에 이르렀음을 알려 준다.
경천동지(驚天動地)할 대결.
검은빛과 푸른빛의 검기(劍氣)가 난무하는 두 남녀의 대결을 만약 그 누가 보았다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리라. 강호에 살아 있는 전설인 마제는 둘째치고라도 이제 겨우 이십 대 중반으로 보이는 자소청의 무공은 절정의 경지를 넘어서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는 사람들의 뇌리에서 그 이름조차 사라진 빙궁(氷宮).
그러나 한때는 신비일궁(神秘一宮)이라 불릴 만큼 강대한 세력을 자랑했던 빙궁의 궁주란 이름에 손색이 없을 정도로 자소청의 검공은 뛰어났다. 하나 그 뛰어난 검공도 마제란 이름을 가진 사내의 공격에 점차 수세로 몰리니, 그녀의 이마 위론 식은땀이 흐를 수밖에 없었다.
‘강해.’
강하다.
휘몰아치는 사내의 검기는 자신의 예상보다 매서워 사내의 강함이 어느 정도인지를 엿볼 수 있게 해 주었다. 그 강함에 자연 여인의 마음은 약해지니, 일순 마제의 검신에서 일던 검은 마기는 한층 더 강해져 여인 자소청을 향했다.
“……?”
콰과과광!
산이 울고, 하늘이 놀란다.
마제의 검신에서 폭발하듯 인 검은 마기가 천지를 뒤덮는 순간, 단단한 빙하가 산산이 부서져 나가며 거칠게 여인 자소청을 덮친다. 그러나 여인은 얼음 파편과 더불어 거세게 덮쳐드는 마제의 검은 폭풍 속에서도 침착하게 우수의 검을 하늘 높이 들어 천지합벽(天地合壁)의 자세를 취해 보였다.
순간.
우우웅!
차디찬 검신이 울며 일순 정면으로 향한다.
검 끝에 맺힌 푸른 기운을 검과 함께 덮쳐드는 사내에게 보여 주기라도 하듯, 검신을 일직선으로 쭉 뻗은 자소청은 이내 빈 좌수(左手)의 손등으로 검병 끝부분을 튕겨 내듯 쳐 보였다.
파아앗!
마치 검 끝에 맺힌 푸른 기운을 밀어내듯 자소청이 검병의 끝부분을 튕겨 내는 순간, 푸른색의 눈부신 광채가 천산 전체로 퍼져 흐르며 마제의 검에서 흐르던 검은 마기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쾅!
“큭!”
그 어떤 때보다 강렬한 진동이 천산을 떨쳐 울렸다.
너무도 강하게 울려 퍼지는 굉음(轟音)에 자소청은 견디지 못한다는 듯, 신음성을 내뱉으며 정신없이 뒤로 물러나야만 했다. 그런 여인의 입에선 검붉은 선혈이 쉴 새 없이 뿜어져 나와 결코 그녀의 내상이 가볍지 않음을 알려 줬다.
‘진 건가?’
마음속 깊은 곳에서 패배를 자인하는 순간.
우르릉!
여인의 패배를 부정하듯, 천둥소리가 그녀의 뒤에서 터져 나온다. 그 뜻하지 않은 기음에 자소청은 본능적으로 뒤를 돌아봤으며, 이내 그녀의 눈 속으론 두 남녀의 대결에 노한 천산의 분노가 비쳐 들었다.
눈사태.
산 중턱을 지나 정상까지 겹겹이 쌓여 있던 눈이 자소청과 마제의 격돌을 이기지 못하고 속절없이 허물어져 내린 것이다. 인간의 힘으론 어찌할 수 없는 자연의 분노를 정면으로 받게 된 자소청은 저항할 기력조차 내지 못한 채 허무한 눈으로 덮쳐드는 눈을 바라보았다.
‘사부님과 사저의 염을, 지난 삼백 년간 쌓여 있던 선조들의 염원을 난 이루지 못했구나.’
마지막 생각이다.
그 생각을 끝으로 자소청의 육신이 무너졌다.
압도적인 자연의 위력이 연약한 여인의 몸에 강한 충격을 안겨 주며 그녀의 육신을 마제 뒤의 절곡으로 떨어뜨렸다.
“…….”
한편, 눈사태가 이는 순간 본능적으로 까마득한 허공 위로 신형을 띄운 마제는 덮쳐드는 눈사태를 정면으로 맞고 눈과 함께 속절없이 어둠 속으로 떨어지는 자소청을 발견할 수 있었다.
순간 고민이 일었다.
이대로 날아오른 신형의 방향을 바꿔 눈사태의 영향에서 몸을 빼기는 쉬웠다. 그러나 자신과는 달리 중상을 입고 목숨이 경각에 달린 자소청을 발견한 마제는 차마 몸을 빼지 못하고 고민에 빠져 든 것이다.
그 고민도 잠시, 이내 마음의 결정을 내린 마제는 몸을 돌려 오히려 자소청이 떨어진 절곡의 어둠을 향해 빠르게 신형을 날려 보였다.
허공을 차듯 한순간 발을 튕겨 몸을 뒤집은 마제의 신형이 빛살처럼 빠르게 어둠을 가로지르며 떨어져 내린다. 끝없이 펼쳐진 절곡의 어둠 속으로 떨어져 내리던 마제는 정신을 잃고 눈과 함께 떨어지는 자소청을 발견하곤 두 손 가득 자신의 내기를 끌어 모았다.
“차핫!”
주체하지 못할 힘이 손을 뚫고 형체를 드러내는 순간, 마제의 입에서 대갈일성이 터져 나오며 손 위로 형성되었던 검은색 마기가 자소청을 향했다.
아니, 정확히는 자소청의 몸을 붙잡고 있는 눈으로 향했단 표현이 옳으리라.
파아앗!
풍차처럼 회전하는 사내의 손끝을 쫓아가듯, 일순 소용돌이를 만들어 낸 검은 마기가 자소청의 육신을 붙잡고 있던 눈을 걷어 냈다. 눈과 함께 어우러진 검은 마기의 소용돌이 속에서 드러난 자소청의 육신을, 마제는 장력을 거둠과 동시에 빠르게 허공섭물을 펼쳐 끌어당겼다.
순간, 자소청의 몸은 마제의 진기에 이끌려 그의 품에 안겼으며, 여인을 빼앗긴 눈이 다시금 거친 분노를 토하려 하자, 마제는 일장 장력을 허공에 쳐 보이며 그 충격을 타고 눈사태의 영향에서 뒤로 몸을 뺐다.
그러나…….
‘너무 깊이 떨어졌다.’
하늘이 보이지 않았다.
검은 어둠만이 붉은 유리알을 지나 마제의 두 눈에 비쳐 들었다.
이미 신법을 펼쳐 다시 절곡 위로 올라가기엔 늦었음을 안 마제는 가면 속으로 쓴 미소를 그려 보였다.
‘왜?’
왜 자신은 품 안의 여인을 구하려 했을까?
모르겠다.
어째서 그런 어리석은 선택을 했는지.
하지만 후회는 없다.
후회란 단어를 떠올리기보다는 지금의 위기에서 벗어날 길을 찾는 게 우선이었다. 그 길을 찾아 머리를 빠르게 회전시키던 마제의 눈으로 한 줄기 이채가 떠올랐다.
분지(盆地).
절곡 밑에는 예상외로 넓은 분지가 펼쳐져 절곡 위에서 떨어지는 마제를 환영한 것이다. 불과 칠팔 장 거리를 남겨 둔 시점에서 분지를 발견한 마제는 지체할 시간도 없이 그대로 자소청을 다시 허공 위로 던짐과 동시에 검을 빼 들었다.
혼절한 자소청이 다시 한 번 하늘 위로 날아오르는 짧은 틈을 이용해 검을 손에 쥔 마제는 그 검을 점차 가까워지는 분지를 향해 힘껏 날려 보냈다.
팟!
한 줄기 기음과 더불어 마제의 손에서 벗어난 검은 그가 원하는 대로 검신 위에 검은빛의 검강(劍|)을 형성하며 딱딱하게 얼어붙은 대지를 공격했다.
쾅!
“……!”
얼어붙은 대지와 마제의 검이 충돌하며 폭음을 불러일으켰다.
그 한 줄기 굉음과 더불어 인 충격의 여파를 검을 통해 고스란히 전해 받은 마제의 몸이 아래가 아닌 위로 날아오른 것은 순간이었다. 검이 지면과 충돌하며 생긴 반동을 이용해 암천으로 날아오른 마제는 자신보다 먼저 허공 위로 쏘아졌다 떨어져 내리는 자소청의 육신을 별 무리 없이 받아 안은 채 천천히 대지에 꽂혀 든 검병 위로 육신을 내려 앉혔다.
쏴아아…….
바람이 불었다.
흰 눈의 바람이.
긴 백발을 휘날리며 검병 위로 내려앉는 마제의 뒤로 어느새 절벽을 타고 흘러내린 눈이 파도처럼 그를 향해 덮쳐든 것이다. 그러나 얼어붙은 대지를 타고 미끄러지듯 덮쳐드는 눈의 힘은 많이 줄어 있었으며, 그 줄어든 자연의 힘을 마제는 돌아볼 가치도 없다는 듯 검병 위에서 호신강기(護身|氣)를 펼쳐 보였다.
츠으으…….
기분 나쁠 정도로 기괴한 음향과 더불어 마제의 육신에선 검은 안개가 이니 그 안개 속에 갇힌 마제를 덮쳐든 눈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멈출 수밖에 없었다. 힘없이 멈춰 선 눈을 뒤로한 채 검병 위에 선 마제는 여전히 깨어나지 못하는 여인 자소청만을 말없이 바라보았다.